453화

453화 [묵시룡의 봉인구]를 이용한 봉인. 그것은 1863회차에서 한수영이 계획한 것과 같은 방법이었다. 「“이곳의 시간은 멈추고, 지구는 묵시룡과 함께 봉인되겠지. 영원히 95번 시나리오에 고정된 채 말이야.”」 「“그리고 그것이, 네가 유중혁을 죽이는 방법이다.”」 유중혁을 영원의 시간 속에 봉인하여 회귀를 멈추는 것. 나는 반사적으로 ‘은밀한 모략가’를 바라보았다. 지금이라도 괜찮으니 도망치라고 말하고 싶었다. 저기에 봉인되면 아무리 ‘은밀한 모략가’라도 탈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런데 너는, 어째서 웃고 있는 것인가. [성좌, ‘은밀한 모략가’가 자신의 ■■를 바라봅니다.] 그는 1863번의 생애를 모두 살아낼 만큼이나 강했다. 하지만 그렇기에 언제든 무너질 수 있을 만큼이나 지쳐 있었다. 영원한 잠. 어떤 의미에서 이것은 그가 평생에 걸쳐 바라던 일이었다. ―잠깐! 우리엘! 멈춰! 내 말에, 처음으로 우리엘이 내 쪽을 돌아보았다. 하찮은 것이 자신의 진명을 불렀다는 사실에 놀란 듯, 우리엘이 입을 열었다. 【이 영혼체는 뭐지? 이 세계선의 존재?】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러자 ‘은밀한 모략가’가 선수를 쳤다. 【그놈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냥 보내라.】 순간 ‘은밀한 모략가’의 눈이 나를 바라보았다. 그답지 않게 명료한 감정이 새겨진 눈이었다. 녀석은, 정말로 내가 탈출하기를 바라고 있었다. 하지만 상황이 나빴다. 포탈은 우리엘의 힘으로 강제로 닫히고 있었다. 나와 ‘은밀한 모략가’를 번갈아 보며 기묘한 시선을 보내던 우리엘이 말했다. 【너의 회차를 그르치고 다른 이의 세계선조차 망쳐버린 후에도, 지키고 싶은 것이 남아 있는가?】 순식간에 뻗어 나온 우리엘의 힘이 나를 포박했다. 최악의 상황이었다. 【좋다. 이 녀석을 네놈과 함께 봉인해주마. 영원의 꿈 속에서, 네 동료와 함께 잠들어라.】 ―아니 잠깐만! 내 얘기도 들어봐야 하는 거 아냐? 무슨 당치않은 소리냐는 듯 우리엘이 나를 노려보았다. 나는 지지 않고 외쳤다. ―당신 마음은 알겠어. 당신의 세계선이 뒤틀려서 억울하다는 것도 알겠고, 화가 났다는 것도 알겠어. 하지만 이건 아니잖아. 여긴 당신 세계선이 아니라고. 지금 당신이 하는 짓은 당신이 증오하는 ‘은밀한 모략가’와 똑같은 행동이야. 말을 내뱉으며, 이마에 따끔거리는 통증이 느껴졌다. 아무것도 채워져 있지 않은 머리가 아파왔다. 긴고아의 감각이 강해지고 있었다. ―우리 이러지 말자고. 다 같이 힘을 모아서 <스타 스트림>을 부숴도 모자랄 판에, 대체 왜 서로 싸워야 하는 건데. 진짜 적이 누군지 몰라서 그래? 이 비극을 초래한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 몰라서 그러는······. 【<스타 스트림>을 부숴? 왜 그런 짓을 하지?】 뜻밖의 물음이었다. ―그야 당연히, <스타 스트림>의 세계는······. 【<스타 스트림>이 사라지면, 우주는 혼돈으로 변한다.】 순간 가슴 한쪽이 서늘해졌다. 나는 은연중 모든 일행들이 보고 싶은 결말이 같다고 생각해왔다. 하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면? 유중혁이 죽고 난 뒤, 999회차의 일행들은 마지막 시나리오에 도착했고, 그것을 클리어했을 것이다. 그 후, 그들이 도달한 세계의 끝은 무엇이었을까. 【그런 세계선을 만들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악(惡)이다.】 우리엘의 선언과 함께 그녀의 격이 나를 옥죄기 시작했다. ―······그럼 별수 없네. 싸우는 수밖에. 【싸워? 화신체도 없는 존재가―】 ―싸우는 건 내가 아니고. 허공을 올려다 보던 내가 씩 웃으며 말했다. ―내 동료들이야. 눈앞에서 강렬한 스파크가 튀어 올랐다. 깨질 것처럼 머리가 죄어들더니 시야가 뭉그러졌다. 뭔가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마하반야······독자······ 헛짓거리······ 가만히있심경······.」 ······왔다. [바아아앗!] 비유의 울음소리와 함께, 창공에서 포탈이 열렸다. 새카만 흑염룡의 브레스가 쏟아졌다. 그 가공할 격류에 나를 내던진 우리엘이 뒤로 훌쩍 빠졌다. 거의 동시에, 누군가가 내 영혼체를 낚아채며 날아올랐다. “도대체 가는 곳마다 이게 뭔······ 넌 또 왜 이 꼴이냐?” 한수영. “긴고아 하나로는 부족한 모양이네요.” 그리고 유상아. 그녀의 등에는 족쇄처럼 긴고아가 채워진 내 화신체가 있었다. 유상아는 내 상태를 이미 짐작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현재 ‘존재 맹세’의 구속력이 약해진 상태입니다.] 나는 망설이지 않고 내 화신체 속으로 뛰어들었다. 그러자 시야가 한바탕 뭉그러지며, 신체의 감각이 돌아왔다. 화신체는 정상이 아니었지만, 그래도 없는 것보다는 나았다. 어렴풋한 시야 속에서 [지옥염화]를 발동하는 우리엘의 모습이 보였다. 곁에서 한수영이 눈을 휘둥그레 뜨고 있었다. “야, 저거 무슨―” “설명할 시간 없어. 빨리 탈출해야 해.” 한수영, 그리고 ‘석존의 후계’가 된 유상아는 강하다. 하지만 적 또한 너무 강하다. 이들만으로는······. 콰아아아아아! 기다렸다는 듯, [지옥염화]의 불길이 일행들을 덮쳐왔다. “미친!” 어디로도 피할 길 없는 강력한 염열의 파도. 한수영의 [흑염]만으로는 막아내기 버거운 격이었다. 그때, 한수영이 타고 온 포탈 너머에서 강력한 홍염의 격이 흘러들어왔다. 저쪽의 파도와 정확히 같은 색깔의 염화. 불과 불이 부딪치며, 격렬한 불꽃의 폭풍이 발생했다. [■발, 뭐야? 어떤 새■야?] 매캐한 불꽃 속에서, 콜록콜록 기침을 하며 나타난 존재가 있었다. 한손으로 밀려드는 연기를 걷어내는 대천사. 검은색 드레스에 금빛 발찌. 내가 너무나 잘 아는 대천사가, 뺨에 검댕을 묻힌 채 그곳에 있었다. [응? 감히 어떤 새■가 내 김독자를······.] [지옥염화]의 반대쪽을 바라본 우리엘의 눈빛이 멍하게 변했다. 입이 딱 벌어진 우리엘이 중얼거리고 있었다. [나······ ■끼?] ······설마 지원군으로 우리엘이 올 줄은 몰랐다. 이러면 상황이 복잡해진다. 하필 지금 여기서 두 우리엘이 만날 줄이야. 【······너는?】 놀란 것은 저쪽 우리엘도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그렇군, 네가 바로 이 세계선의―】 두 우리엘이 서로를 응시하는 순간, 허공에서 거친 스파크가 튀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이쪽이 압도적으로 불리했다. 이쪽 우리엘도 강하긴 하지만, 저쪽 우리엘은 무려 한 세계선의 끝을 본 존재였다. 기회를 봐서 재빨리 도망치지 않으면― 츠츠츠츠츠츳! 그리고 뜻밖의 사태가 벌어졌다. [<스타 스트림>이 두 존재의 조우에 흥미로워합니다.] [‘끊어진 필름 이론’이 발동합니다!] 허공에서 만난 두 개의 설화가 얽혀들며, 거대한 기억의 환류(還流)가 발생했다. 「[일어나라, 유중혁. 어서!]」 999회차의 기억이 넘어오고 있었다. 갑작스런 기억의 침범에 우리엘이 눈을 커다랗게 떴다. [뭐야, 뭔데 이거?] 낯선 기억의 파도가 범람하고 있었다. 유중혁과 등을 맞대고 싸우는 999회차의 우리엘이 그곳에 있었다. 그야말로 진짜 전우애였다. 흘러드는 기억 속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우리엘이 비틀거렸다. 저 빌어먹을 이론이 또······ 라고 생각했는데, 예상외로 상황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 왜냐하면, 저 이론을 통한 설화 교환은 쌍방향으로 이루어지는 까닭이었다. 그 증거로, 비틀거리다 못해 바닥에 주저앉은 999회차의 우리엘이 보였다. 「[김독자! 여기야! 내 옆에 앉아!]」 확실히. 「9158FOREVER」 「[아이디가 너무 튀면 안 되니까······ 그렇지. 적당히 uri9158로······ 좋아, 전혀 티가 나지 않아.」 「[······트, 특전으로 ‘오징어 김독자 다리’를 준다고?]」 충격을 받을 만도 한 설화들이었다. 【이게 대체, 대체, 무슨······.】 999회차의 우리엘이 고통스러운 듯 얼굴을 찌푸리고 있었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우리엘을 부축한 한수영이 말했다. “뭔진 모르겠지만 잘 됐다. 빨리 튀자. 저거 척 봐도 엄청 세 보이는데.” 확실히 그 판단이 옳다. 그런데, 하나 빠뜨린 것이 있었다. “잠깐만. 쟤도 데려가자.” 나는 바닥에 늘어져 있는 ‘은밀한 모략가’를 가리켰다. 이 세계선의 기억이 어지간히 충격적이었던 모양인지, 우리엘이 형성하던 봉인구가 상당 부분 망가져 있었다. 한수영이 뭔 헛소리냐는 듯 말했다. “돌았어? 쟬 왜 데려가?” “저 녀석도 데려가야 해. 그래야 올바른 ‘결말’에 도달할 수 있어.” “그건 또 뭔 개똥 같은―” 실제로 개똥 같은 소리였다. 이건 내 아집이었고, 말도 안 되는 행동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계속해서 말했다. “저 녀석은 여기서 죽어선 안 돼. 저 녀석은 결말을 볼 자격이 있어.” 「이 모든 세계가 오직 ‘유중혁’만을 탓하고 있었다.」 999회차의 우리엘도, 이 세계선의 모두도. 평생에 걸쳐 자신의 ‘결’에 도달한 유중혁은 그 대가로 모든 세계선의 적이 되었다. 「1863번의 회귀 중, 한 번이라도 녀석에게 행복한 회차가 있었던가.」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달리고 있었다. 조금씩 의식을 회복하는 999회차 우리엘이 [지옥염화]를 재차 끌어올리는 것이 보였다. 한수영이 외쳤다. “미친놈아! 그럴 시간 없다고!” 나는 전력을 다해 [바람의 길]을 발동했다. [지옥염화]의 불길이 다시금 밀려들기 시작했다. 허공에 튀는 불꽃들이, 내겐 오래된 활자처럼 보였다. ―······작가님. 한 번 정도는 괜찮잖아요. 그게 언제의 기억이었는지, 생각나지 않았다. ―그렇게 많은 회차가 있는데, 한 번 정도는······. ······내가 그런 말도 했었던가. 기억은 명료하지 않았다. 다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키보드를 두들기고 스페이스 바를 누르듯, 바닥을 박차고 달리는 것이었다. ―행복해도 괜찮잖아요. 어쩌면 그것은, 이런 세계를 만든 신에 대한 투정이었을까. ―제가 쓴 게 마음에 들지 않으신 모양이군요. 그러자, 신이 대답했다. ―그럼 독자님은 어떤 결말을 보고 싶으신가요? 어떤 결말이, 주인공에게 행복한 결말인가요? 그때 내가 뭐라고 대답했더라. 아무리 생각해도 기억이 나질 않았다. 그리고 지금도, 내게 그 대답은 확실하지 않다. 내겐 타인의 행복에 대해 말할 자격이 없으니까. 하지만 자격이 없는 나라도, 한 가지는 알 수 있었다. 「저건 행복한 결말이 아니다.」 밀려드는 [지옥염화]의 열기에 ‘은밀한 모략가’의 몸이 끌려 들어가고 있었다. 나는 간발의 차이로 녀석의 손목을 붙잡았다. 그리고 반대 방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안색이 창백해진 한수영이 [X급 페라르기니]를 소환하고 있었다. 유상아가 외쳤다. “독자 씨! 더 빨리!” 【안 돼】 나는 밀려드는 염열을 피해내며 바닥의 ‘은밀한 모략가’를 업었다. 발이 미친듯이 뜨거웠다. 그 열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온 힘을 다해 달렸다. “아, 시발······ 모르겠다. 빨리 타!” 한수영이 내게 손을 뻗었고, 나는 간신히 차에 올라탔다. 뒷좌석에서 몸을 부르르 떠는 우리엘이 보였다. 홍염의 해일이 우리를 덮쳐들고 있었다. 【멈춰!】 속으로 ‘양산형 제작자’를 향해 기도했다. 제발 이 차의 성능은, 양산형이 아니기를. [성좌, ‘양산형 제작자’가 빙긋 웃습니다.] 폭발적인 가속으로 [X급 페라르기니]가 발진했다. 거의 동시에 비유가 포탈을 열었고, 우리는 곧장 차원 통로로 뛰어들었다. 뒤쪽에서 999회차 우리엘이 내지른 끔찍한 포효가 들려왔다. 혹시나 우릴 쫓아오면 어쩌나 싶었다. 이대로 지구로 무사히 도망친다고 해도, 저 우리엘이 쫓아와 깽판을 친다면······. 츠츠츠츠츠츳! 몰아치는 스파크 속에서, 쫓아오던 999회차 우리엘의 움직임이 멈췄다. 무시무시한 눈으로 나를 노려보면서. [<스타 스트림>이 ‘살아있는 불꽃’을 주시합니다.] 아무래도 그녀는 이 포탈을 사용할 수 없는 모양이었다. 강력한 개연성의 후폭풍이 그녀를 구속하고 있었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저렇게 강력한 힘을 지닌 존재는 <스타 스트림>에서 오히려 자유롭지 않으니까. 그렇다면, 걸리는 것은 한 가지다. 그토록 자유롭지 않은 그녀가 어떻게 이 타이밍에 ‘은가이의 숲’에 나타날 수 있었는가. 마치 누군가 사주하기라도 한 것처럼. ······사주? [대도깨비 ‘허주’가 당신의 행적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순간, 아주 어렴풋한 가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만약 저 ‘우리엘’이 나타난 것이 우연이 아니라면? [대도깨비 ‘허체’가 당신의 행적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대도깨비 ‘바람’이 당신의 행적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이 <스타 스트림>의 누군가가 그걸 원했고. 그래서, 그들을 이 세계선으로 불러낸 것이라면? 이 세계에서, 그만한 개연성을 움직일 수 있는 집단은 거의 없다. [<관리국>이 당신의 행적을 주목하고 있습니다.] 창문 너머로 불타는 ‘은가이의 숲’이 비치고 있었다. 멸망한 세계선에서 온 ‘이계의 신격’들이 소멸하고 있었다. 작은 왕국의 백성들이, 그들의 왕을 작별하고 있었다. 【살아살아살아살아살아살아······.】 ‘이계의 신격’의 왕은 하나가 아니다. 999회차의 우리엘이 이 세계선에 나타났듯, 다른 왕들도 나타나겠지. 내가 원하는 결말을 방해하려는 존재들이, 그들을 부를 것이다. [<스타 스트림>이 당신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고개를 들자 내가 맞서 싸워야 할 세계가 나를 보고 있었다. 아주 힘들고, 험난한 싸움일 것이다. 인사이드 미러로 나를 본 한수영이 뭐라고 투덜거렸다. 조수석에 앉은 유상아가 나를 돌아보고 있었다. 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혼절한 ‘은밀한 모략가’와 망연한 우리엘을 바라보았다. 어쩌면 이 우주의 누구도, 우리의 편을 들어주지 않을 것이다. 멀리서 포탈의 끝이 보였다. [당신의 선택이 ■■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당신의 ■■이 「영원」으로 기울어집니다.] 마침내, 이 세계의 최종장을 준비해야 할 때가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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