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1화

451화 ‘은밀한 모략가’의 말은 모든 의미를 상실한 존재의 그것처럼 공허했다. 그 공허감에 반발하듯, 나는 말했다. “······네 삶은 누군가를 살렸어.” 너무 많은 것을 잃어버린 녀석에게, 이름도 모르는 소년을 살렸다는 것은 아무런 위안도 주지 못할 것이다. 그 소년은 그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소년은 그의 동료도 아니고, 가족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몇 번이나 입술을 달싹였지만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내가 살아온 생은, 녀석을 구하는 데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았다. 그런 나를 보던 ‘은밀한 모략가’가 말했다. 【처음 네놈을 보았을 때, 나는 너를 거둬야 한다고 생각했다.】 거둔다. 문득 녀석을 처음 만났던 순간이 떠올랐다. + <배후(背後) 선택> ―당신의 배후를 선택하세요. ―선택한 배후는 당신의 든든한 후원자가 되어줄 것입니다. 1. 심연의 흑염룡 2.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 3. 은밀한 모략가 4. 긴고아의 죄수 + ······생각난다. 분명 그랬었다. ‘은밀한 모략가’는, 내 첫 배후 선택의 세 번째 선택지에 있었다. 그때 녀석은 나의 배후성이 되려고 했었다. 【그 후로도 쭉, 이 세계선을 지켜보았다. 놀랄 때도 있었다. 그 놀라움이 놀라웠지. 나는 오랫동안 놀란 적이 없었으니까.】 나도 알고 있었다. 이 세계선의 이야기가 진행되는 동안, ‘은밀한 모략가’는 다양한 간접 메시지를 보내며 우리를 지켜보았다. 지금도 메시지 로그를 뒤지면 그가 보낸 간접 메시지를 읽을 수 있었다. [성좌, ‘은밀한 모략가’가 당신의 선택에 흥미로워 합니다.] [성좌, ‘은밀한 모략가’가 당신의 호구력에 감탄합니다.] [성좌, ‘은밀한 모략가’가 당신의 경솔한 발언에 실망합니다.] [성좌, ‘은밀한 모략가’가 당신의 계획에 눈을 반짝입니다.] [성좌, ‘은밀한 모략가’가 당신의 계책을 궁금해합니다.] ······. 이것 때문에 처음 녀석과 마주했을 때는 몹시 낯설었다. 지금이야 [666]을 비롯한 다른 유중혁들이 대신 쓴 간접 메시지라는 걸 알지만······. 【결정해야 했다. 이 뒤틀린 세계를 지켜봐야 할지, 아니면 부숴야 할지.】 “······그래서 날 1863회차에 보냈던 거냐?” ‘은밀한 모략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선택은, 다시 이 ‘세계선’의 시작이 되었다. ‘은밀한 모략가’는 계속해서 이야기했다. 【이 회차의 유중혁에게 1863회차의 정보를 준 것도 비슷한 이유 때문이었다. 시험할 필요가 있었다. 네놈과 이 회차의 유중혁 중, 어느 쪽이 결말을 보기에 적합한 쪽인지.】 “그래서 판단은?” ‘은밀한 모략가’의 대답 없이 나를 내려다보았다. 【이 세계의 끝에는 아주 거대한 벽이 있다. 모든 열쇠를 모아야만, 열 수 있는 ‘최후의 벽’이.】 ―당신은 모든 질문의 해답을 얻었습니다. ―‘신성한 삼문답’이 종료됩니다. 순간 깨달았다. 방금 녀석의 대답은, 내 ‘삼문’에 대한 대답이었다. ‘은밀한 모략가’의 곁을 맴도는 스파크가 거세어졌다. 어떤 정보는 그것을 말하는 것만으로도 큰 개연성을 소모한다. 그것이 이 세계의 끝과 관련된 정보라면, 개연성의 값도 큰 것이 당연할 것이다. ‘최후의 벽’. 그것이 바로, ‘은밀한 모략가’가 자신의 에필로그에서 마주한 결말이었던 것이다. 【네가 가진 ‘파편’이 내가 찾던 마지막 열쇠다.】 나는 긴장하며 물러섰다. [무림 만두] 상태였기 때문에 뒷걸음치는 것이 어려웠지만, 어떻게든 거리를 확보해야 했다. 만약 내가 가진 [제4의 벽]이 ‘은밀한 모략가’의 목적이라면, 녀석은······. 천천히 쥐었다 폈다를 반복하는 ‘은밀한 모략가’의 손이 묘하게 공포스러웠다. 다른 꼬마 유중혁들도, 긴장한 눈으로 ‘은밀한 모략가’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이 세계선은 너무 많은 것을 뒤틀어 만들어졌다. 너를 내버려 두는 것이 올바른 일일지 아닐지, 나는 판단할 수가 없다. 】 뒤틀린 세계선. 망가진 개연성. 이미 수도 없이 들은 말이었다. “그래서, 뭘 어떻게 하겠다는 거냐?” 나는 아무 말이나 던졌다. 중요한 건 시간을 끄는 것이다. 어떻게든 시간을 끌어서, 본래의 몸으로 돌아가는 것이 중요했다. “네 말이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어. 결과가 원인을 잡아먹었느니 어쩌니 하는 어려운 이야기는 잘 모르겠다고. 하지만 어떻게 되든 나와 동료들은 죽을 힘을 다해 여기까지 왔어. 이제 결말이 코앞이라고.” 이제 볼 수 있다. 적혀 있지 않았던 이야기의 결말을. 【결말을 보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올바른 결말을 만드는 것이니까.】 “올바른 결말? 그걸 결정하는 건······.” 【개연성이 뒤틀린 이야기는 결국 재앙을 만든다.】 마치 도깨비들이나 할 법한 그 말에, 나는 잠시 멍해졌다. “너 답지 않은 말이네. 아직 본 적도 없는 걸 두고―” 지진이 발생한 것은 그때였다. 쿵, 하고 뭔가가 쓰러지는 소리. 원형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와인잔이 쏟아졌다. 숲 전체가 흔들리고 있었다. “······무슨?” 결코 자연적인 지진이 아니었다. ‘은밀한 모략가’는 천천히 옥좌에서 일어나 나를 지나쳤다. 그의 텅 빈 눈동자가 숲의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거친 화마에 휩싸인 ‘은가이의 숲’. 그의 숲이 불타고 있었다. 【아아아아아아아아】 【살려줘살려줘살려줘살려줘살려줘】 하늘을 찌를 듯 솟아 있던 나무들이 재를 날리며 타올랐다. 숲속에 숨어 있던 ‘이계의 신격’들이 비명을 질러댔다. 어마어마한 화력에 전당의 온도가 급격하게 올라가고 있었다. 단순한 방화가 아니었다. 이건 나라도 느낄 수 있었다. 누군가, 어마어마한 격을 지닌 존재가 이곳을 공격하고 있다. 하지만 대체 누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곳은 다른 누구도 아닌 ‘은밀한 모략가’의 성역이다. 대체 누가 감히 이곳을 침공한단 말인가. 혹시 거대 성운의 짓인가? <베다>? <올림포스>? 아니면······ <아스가르드>? 나는 ‘불’과 관련된 성좌들을 머릿속으로 떠올려 보았다. 하지만 쉬이 떠오르는 수식언은 없었다. 광활한 숲 전체를 불태우는 열기. ······원작에, 이만한 힘을 가진 존재가 또 있었다고? 【왕이시여왕이시여왕이시여】 【피해피해피해피해피해피해피해】 조그마한 ‘이계의 신격’들이 ‘은밀한 모략가’의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많은 ‘이계의 신격’이 그를 떠났지만, 여전히 남은 존재들도 많았다. 왕국의 몰락을 예감하는 백성들처럼 자신의 왕을 지키는 이들. 자신의 백성들을 내려다보던 ‘은밀한 모략가’가 나를 향해 말했다. 【구원의 마왕. 나 역시, 너와 같은 실수를 한 적이 있다.】 숲이 불타는 급박한 상황에도, 그의 목소리는 태연했다. 마치 이 모든 것을 예상했다는 것처럼. 【어리석게도, 정해진 과거를 바꾸려 했었지.】 “······갑자기 무슨 소리지? 41회차의 이야기냐?” 만약 그렇다면, 나도 알고 있는 이야기였다. 41회차의 유중혁은 ‘지평선의 악마’와 계약하여 신유승을 3회차로 보냈다. 그 대가로 신유승은 3회차의 재앙이 되었다. 만약 ‘은밀한 모략가’가 걱정하는 ‘재앙’이 그런 것이라면, 걱정하지 말라고 말하고 싶었다. 그런데 곁의 [41]이 고개를 젓고 있었다. “내 회차의 이야기가 아니다.” “뭐? 그럼······.” [41]은 대답하지 않고 ‘은밀한 모략가’를 바라볼 뿐이었다.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내가 알기로 ‘멸살법’에서 정해진 과거에 간섭했던 회차는 41회차뿐이다. ······그런데, 그런 회차가 또 있었다고? 대체 언제지? 원작 밖의 이야기인가? 뻥 뚫린 전당의 하늘에, 불꽃에 휩싸인 태양이 떠오르고 있었다. 하지만 그 태양은 수르야의 것도, 아폴론의 것도 아니었다. 작렬하는 태양의 중심부에 불길한 모양의 흑점들이 커지고 있었다. 내가 아는 그 어떤 성좌도, 저런 끔찍한 태양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 저것은, 내가 모르는 존재의 힘이었다. [999회차의 ‘유중혁’이 태양을 향해 탄식합니다.] ······999회차? 순간, 떠오르는 말이 있었다. 「999회차의 유중혁이여. 나는 너의 삶을 존중한다. 나를 제외하고 유일하게 ‘결’의 근처까지 갔던 존재니까.」 하나는 ‘은밀한 모략가’의 말이었고. 「“내가 회귀해도, 이 세계는 사라지지 않는다. 내가 죽는다고 해서 세계가 리셋되거나 하는 일은 없다는 소리다.”」 다른 하나는 유중혁의 말이었다. 유중혁이 죽어도, 세계는 사라지지 않는다. 그가 회귀한 후에도, 여전히 세계는 남아 있다. 「만약, ‘결’을 본 것이 ‘은밀한 모략가’ 하나가 아니라면 어떨까.」 「원작에는 등장하지 않았던 이야기가 또 있다면.」 「유중혁이 죽은 후에도, 여전히 그 세계에 남아 시나리오를 계속한 존재가 있다면. 그렇게 싸우고 또 싸워서.」 검게 타오르는 태양이 알 껍질처럼 갈라지며 눈부신 섬광이 뻗어 나왔다. 「이 세계의 끝에 도달해 자신의 ‘결’을 본 존재가 또 있다면?」 섬광의 중심에, 숲을 불태운 방화범이 있었다. 그저 방화범이라 칭하기엔 민망할 정도로 아름다운 실루엣이 흔들렸다. ‘은밀한 모략가’에 준하는 힘을 가진 존재. 그 존재가 내 눈앞에서 새하얀 날개를 펼치고 있었다. ‘은밀한 모략가’가 그 존재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살아있는 불꽃’.】 살아있는 불꽃. ‘공포의 기록자’의 기록에, 분명 그런 이름이 있었다. 「동쪽에서 떠오르는 ‘살아있는 불꽃’.」 ‘은밀한 모략가’와 함께 ‘이계의 신격’을 다스리는 왕들 중 하나. 하지만 그 왕들이 누구인지, 어디에서 온 존재인지 나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멍청했다. 모든 ‘이계의 신격’은 ‘멸살법’의 버려진 회차에서 온 존재들. 그렇다면 다른 왕들 또한, 당연히 ‘멸살법’에서 온 존재들이라는 것을 알았어야 했다. 쿠구구구구. 손끝이 미친 듯이 떨렸다. 인과를 상상하고 싶지 않았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이처럼, 끔찍한 세계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납득하고 싶지 않았다. 특유의 무심한 목소리로, ‘은밀한 모략가’가 말했다. 【이제 알았겠지. 이것이 세계선을 뒤튼 대가다.】 ‘은밀한 모략가’의 목소리와 함께, 불타는 광휘에 휩싸인 검이 이쪽을 겨누었다. 그것은 내가 아주 잘 알고 있는 대천사의 검이었다. 왜 알지 못했을까. 실은 알고 싶지 않았던 것은 아닐까. 이 불길이 이토록 뜨겁고 잔인할 수 있다는 것을. 악마를 태운 불길은, 다른 것도 태울 수 있다는 것을. [지옥염화]에 둘러싸인 [업화의 불꽃]이 새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검의 주인이 웃고 있었다. 내가 지금껏,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공포스러운 표정으로 입을 열고 있었다. 【너를 찾는데 아주 오랜 세월이 걸렸다. 1863회차의 유중혁.】 모든 것을 심판해 온 대천사의 눈이 새카맣게 타올랐다. 【나의 세계를 망친 외신(外神)이여.】 우리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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