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5화

425화 내 말에 뒤쪽에 줄을 서 있던 몇몇 성좌들이 웅성거렸다. 혹시나 내 수식언이 벌써 곳곳에 알려진 건가 싶었지만, 다행히 그런 건 아닌 듯했다. [분명 관리국 작명소에서 개명한 거겠지? 그거 요즘도 해주나?] [저런 수식언은 ‘심연의 흑염룡’을 능가할 게 없다고 생각했는데······.] [쯧, 요즘 젊은것들 수식언은 왜 다 저 모양인지.] ······대충 뭔 얘기들을 하시는지 알 것 같구만. 증장천왕은 간단한 수색 절차를 밟은 뒤 내 어깨를 내려다보았다. [그 만두는 뭐지?] [제 점심입니다.] [······특이하군. 어젠 솜사탕을 든 녀석이 지나가더니.] 솜사탕? [다음.] 다행히 증장천왕은 무사히 나를 통과시켜 주었다. [시나리오 지역을 총괄하는 채널에 입장했습니다.] 게이트에 진입하자, 화려한 무지개빛 오로라가 몰아치더니 안내 메시지와 영상이 흘러나왔다. [성운 <황제>의 세계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역시 진입 영상부터 다르구만. 눈을 깜빡였을 때 나는 흰 구름 위에 올라서 있었다. 구름은 나를 태운 채 빠르게 날았다. 곁을 돌아보자 나와 함께 허공을 날아가는 잘생긴 금빛 원숭이 한 마리가 있었다. 「“가자고, 친구.”」 원숭이는 나를 향해 찡긋 윙크를 하더니 허공에서 공중제비를 돌며 거대한 여의봉을 휘둘렀다. 그러자 창공의 화면이 뒤바뀌며 수많은 요괴들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나는 이것이 가짜 영상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압도되지 않을 수 없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서사시.] 왜냐하면 이것은 성운 <황제>가 가진 가장 유명한 거대 설화였기 때문이다. 수많은 요괴들과 맞서 싸우는 제천대성 손오공의 모습. 그리고 그 뒤를 따르는 천군들이 보였다. [당신을 그 장대한 모험의 세계로 초대합니다.] 영상이 끝나자, 나는 어느새 광장의 바닥에 서 있었다. 내 어깨 위의 만두가 말했다. ―요란한 상술이로군. “말하지 마. 넌 만두잖아.” 나는 조금 두근거렸던 것이 민망해서 괜히 투덜거렸다.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자, <천궁>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우아한 고궁들로 가득 찬 광장. 찬란한 황금빛으로 번쩍이는 문명의 자취. 별과 별이 모이고, 그들이 서로의 설화를 쌓아 만들어진 세계가 눈 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다른 성운들의 주둔지도 가보았지만, 이처럼 엄청난 인파가 몰려든 세계관은 또 처음이었다. 나는 일단 주변을 좀 더 탐사해보기로 했다. 그때, 광장의 전광판을 흘러가는 홀로그램 영상이 보였다. ―성운, <김독자 컴퍼니> 전원 종적 묘연! ―새로운 거대 설화 시나리오에 참여한 것으로 알려져······. [‘제4의 벽’이 강하게 발동합니다!] ―<김독자 컴퍼니>의 다음 목적지는 어디인가? 눈부신 게이트를 넘어가는 유중혁과 동료들의 모습이 그곳에 있었다. 나는 잠시 멈춰서서 환한 빛을 넘어가는 그들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제4의 벽’이 더욱 강하게 발동합니다!] ······새로운 ‘거대 설화’. 대충 어떤 상황인지 짐작이 갔다. 지금쯤 일행들은 새로운 거대 설화를 얻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을 것이다. 내가 <김독자 컴퍼니>에서 이탈하는 바람에 ‘마지막 시나리오’로 갈 설화 지분이 부족할 테니까. 고개를 돌리자 유중혁 [999]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섣부른 행동은 하지 않길 바란다. “······알고 있어. 걱정하지 마.” 당장이라도 일행들에게 돌아가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았지만, 지금 나는 그들 중 누구에게도 연락을 취할 수 없는 상태였다. ―네가 아니라 네 동료들을 위해서다. “알아.” 설령 계약 때문이 아니더라도, 당분간 내가 걸어갈 길은 누구의 목숨도 장담할 수 없는 가시밭길이었다. 섣불리 잘못 연락을 취했다가는, 일행 전체가 위험에 빠질 수도 있었다. [거대 설화 시나리오 구역으로 이동하시겠습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시나리오 진행 구역을 자동 안내를 시작합니다.] 역시 편의성의 끝판왕을 추구하는 성운답게, 내 다리가 자동으로 달리기를 시작했다. 내 곁에도 나와 같은 자세로 자동 달리기 중인 몇몇 화신들이 보였다. 우리는 머쓱하게 서로의 시선을 피했다. [자동 안내가 종료됩니다.] 내가 도착한 곳은 광장의 서쪽에 설치된 거대한 홀로그램 패널 앞이었다. 이미 패널 앞에는 많은 성좌들과 화신들이 모여 있었는데, 밀려든 인파 곁으로 불쑥 솟아 있는 황금빛 동상들이 보였다. 그 중심을 차지한 동상은 내가 잘 알고 있는 성좌였다. 황금빛 머리털에, 거대한 여의금고봉(如意金箍棒)을 쥔 긴고아의 죄수. 제천대성 손오공을 위시한 서유기(西遊記) 주인공들의 동상. 역시나, <황제>도 자기네 세계관에서 제일 유명한 이야기가 무엇인지 잘 아는 모양이었다. [새로운 메인 시나리오가 도착했습니다!] 그리고 이번 시나리오는, 바로 그 ‘유명한 이야기’와 관계되어 있는 것이기도 했다. 나는 시나리오 창을 열어보았다. + <메인 시나리오 # 94 ―서유기 리메이크> 분류 : 메인 난이도 : ??? 클리어 조건 : 다른 성좌 또는 화신들과 함께 ‘설화방’을 만들어 서유기를 리메이크하십시오. 리메이크된 서유기는 실시간으로 심사위원들과 관객들을 통해 평가되며, ‘인기도’, ‘원작 반영도’, ‘참신함’ 등의 평가항목을 통해 총점이 매겨집니다. 최종적으로 가장 많은 득표수를 획득한 설화가 시나리오의 우승자가 됩니다. 제한시간 : ― 보상 : ‘서유기’와 관련된 거대 설화, 성운 <황제>의 호의, 3,000,000코인, ??? 실패시 : ― * 재구성된 설화들의 저작권은 성운 <황제>와 참가자가 공동 소유합니다. * 심사위원 득표수에 따라 ‘전설급’ 또는 ‘역사급’의 설화를 획득할 수 있습니다. * 참가자 1인당 하나의 역할만을 맡을 수 있습니다(엑스트라 제외). * 순위 별로 추가 코인이 지급됩니다. + 과연 <황제>는 스케일이 다르다. 자신들의 거대 설화를 각색하는 것을 시나리오로 내놓다니······. 저 설명이 맞다면, 설령 시나리오 클리어에 실패하더라도 참가자들은 전설급 또는 역사급의 설화를 획득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런데 꼬마 만두 유중혁은 뭔가 혼란스러운 듯했다. ―서유기를 리메이크 하라고? “······아, 네 회차에서는 여기 안 왔겠구나. 그래도 앞선 회차에서 온 적이 있을 텐데.” ―나는 모든 회차의 기억을 다 가지고 있진 않다. “뭐, 설명 그대로야. 좀 더 쉽게 말하면, 이 시나리오 참가자들은 ‘서유기’의 배역 중 하나를 골라서 서유기를 플레이할 수 있어.” ―그런 짓을 하면 서로 비중 있는 배역을 하려고 하지 않나? “맞아. 그래서 있는 게 저 ‘설화방’들이지.” ―설화방? 나는 설명하는 대신 곳곳에서 광고판을 띄운 성좌들을 가리켰다. [같이 설화방 여실 분 구합니다!] [손오공, 삼장법사, 사오정, 저팔계 역 빼고 다 가능합니다! 시나리오 라이터도 준비되어 있습니다! 같이 엄청 재밌는 설화 만들어 봐요!] 설화방. 이곳의 모든 참가자는 저 ‘설화방’을 구성해서 시나리오에 참가하게 되어있었다. ―그렇군. 저런 식으로 팀을 나눠서 경쟁하는 건가. “맞아. 저렇게 해야 설화의 다양성이 보장되니까.” ―다양성? “결국 이 이벤트의 주요 목적은 ‘서유기’의 파급력을 높이는 거야. 재미있는 버전의 서유기가 늘어날수록 원작의 힘도 세지고, <황제>의 입지도 공고해지는 거니까.” ―의외로 박식하군, 멍청인 줄 알았는데. 나는 머쓱하게 웃었다. 사실 방금 내가 한 말은 ‘멸살법’ 1287회차의 유중혁이 한 말을 인용한 것이었다. 늙수그레한 성좌들의 불평이 들려온 것은 그때였다. [요즘 <황제>는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구만. 장강의 뒷물이 앞 물을 밀어내는가, 허······.] [아무리 시대의 흐름이라고 해도 그렇지······ 이건 원작 모독이 아닌가?] 하긴, 오래된 성좌들 입장에서는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시대의 흐름이 계속 바뀌어 가는 것을 어쩌겠는가. 실제로 대부분의 성좌들은 이미 바뀐 흐름에 적응한 상태였다. [현재 5412개의 ‘방’이 서유기를 리메이크 중입니다.] ······벌써 방이 5412개나 되다니. 이 ‘거대 설화’에 얼마나 많은 성좌와 화신들이 몰려든 것인지 새삼 실감이 났다. 하긴, 마지막 시나리오가 열린 마당이니 다른 성좌들도 조급해졌을 것이다. ‘서유기’의 거대 설화는 그들에게 있어서도 절호의 기회일 테니까. “문제는 나 혼자서는 시나리오에 참가할 수 없다는 건데······.” 결국 나도 다른 성좌들처럼 ‘설화방’을 만들어서 시나리오에 참가해야 했다. 주변을 둘러보자, 이제 막 방을 팠거나 새로운 충원 멤버를 구하는 이들이 왕왕 보였다. [‘홍해아’ 역할 맡을 성좌 구함. 설화급 성좌의 화신이면 OK.] [‘금각대왕’ 역할 구함. 위인급 이상만.] 저런 경우 이미 주연 배역은 캐스팅이 끝났다는 거겠지. 역시 주연 배역보다는 악당 배역을 구하는 방들이 많았다. ‘거대 설화’를 획득했을 때의 지분 나눔 때문일 것이다. 아무래도 빌런 보다는 주연이 많은 지분을 갖게 되니까. [‘황포노괴’ 배역 구함. 코인 분배 7:3, 설화 지분 X. 격 안봄.] 그런데 기분 탓일지는 모르겠지만······. [엑스트라 멀티맨 구함. 격 안봄. 설화 지분 X. 출연 1회당 1000코인.] [어이, 거기 형씨! 이쪽으로 와! 잘해줄게!] 전후좌우 어딜 둘러 보아도 왠지 사기꾼들만 있는 것 같다. 혹시나 싶었지만 아는 성좌들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이미 쟁쟁한 성좌들은 설화방에 참가했을 테니, 당연한 일일지도······. 나는 일단 패널 쪽으로 다가가 ‘설화방’의 목록을 띄워 보았다. 목록은 자동으로 ‘랭킹순’으로 정렬되었다. 놀랍게도 최상단에 있는 방은 내가 알고 있는 녀석의 것이었다. + [진(眞) 서유기] ―현재 득표수 : 8651 ―소개말 : 우리가 알지 못했던 진정한 서유기의 비밀이 공개된다. ―현재 남는 배역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사이다], [회귀], [시스템]······. ―현재 랭킹 : 1위 + 내 기억이 맞다면, 이 설화방은 성운 <황제>의 ‘페이후’의 것이다. 그리고 굉장히 많은 회차에서, 페이후의 설화는 이 ‘거대 설화’의 우승 설화가 되었다. 오죽했으면 공모 경쟁이 끝나기도 전에 “어차피 우승은 페이후”라는 말이 돌기도 했으니······. ―빨리빨리 결정해라. “기다려 봐.” 이래 봬도 장르 소설 독자 경력 10년을 훌쩍 넘어서는 몸이다. 제목만 봐도······ 아니, 소개 글만 봐도 어떤 설화가 뜰지는 쉽게 알 수 있다 이 말씀이야. 나는 목록 정렬을 ‘최신순’으로 바꾼 후 설화방을 찾기 시작했다. “요즘은 주인공을 바꾸는 게 대세야.” ―주인공을 바꾼다고? “예를 들면, 대부분 서유기의 주인공을 손오공이라고 생각하잖아? 그런데 알고 보니······ 오, 이거 뜨겠는데.” + [서유기의 막내 제자로 환생했다?!] ―현재 득표수 : 3313 ―소개말 : 언제까지 손오공이 주인공이냐. 이젠 사오정의 시대가 온다. ―엑스트라 상시 모집중. ―[환생], [빙의], [치유]······. ―현재 랭킹 : 8위 + ―이미 뜬 거로군. “젠장.” 나는 다시 스크롤을 굴렸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훌륭한 방제들을 발견했다. + [내가 먹여 살린 제자들] ―현재 득표수 : 3310 ―소개말 : 최강의 제자들을 키운 삼장법사가 온다! ―[빙의], [양육], [힐링]······. ―현재 랭킹 : 9위 [서유기의 엑스트라] ―현재 득표수 : 3221 ―소개말 : 서유기 속에 들어왔다. 그런데······ 삼장법사의 말(馬)이 되었다. ―[엑스트라], [시스템], [동물]······. ―현재 랭킹 : 11위 + ······젠장, 인기 있을 만한 설화방은 이미 전부 풀방이었다. ―꾸물대더니 이미 망한 것 같군. 인정하기 싫었지만 그런 거 같았다. 어지간한 상위 랭킹의 방들은 전부 주연 배역 선정이 끝나 있는 데다 설화가 진행 중이라 끼어들기도 뭐했다. 이렇게 된 거 엑스트라 역할이라도 맡아야 되나 싶었지만, 그렇게 작은 비중으로는 내가 원하는 걸 얻을 수가 없었다. [곧 4차 설화방 목록이 마감됩니다!] [마감 이후에는 엑스트라 배역을 제외한 추가 배역의 등록이 불가합니다!] 설상가상으로 방들의 마감 시간도 끝나가고 있었다. 어서 결정을 내려야만 했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무심코 내린 방의 홍보글들 중, 심상치 않은 것이 있었다. ―(급구)버스 타실 손오공 배역 구함. 다른 배역 다 준비되어 있음. 몸만 오면 됨. ······손오공을 구한다고? 아니, 다른 배역도 아니고 ‘손오공’을? [은퇴한 SSSSS급 손오공이 되었다] 뭔가 어디서 많이 본 개수의 S인데. 나는 속는 줄 알면서도 무심코 그 방제를 눌러 보았다. 그리고, 그 소개말을 보고야 말았다. ―소개말 : 오직 나만이, 서유기의 결말을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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