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4화
424화
새카만 어둠 속에서 순백의 신형이 떠올랐다.
유중혁은 그를 향해 몇 번이나 검을 휘둘렀다. 파천검뢰부터 유성참에 이르기까지. 하지만 그 검격들 중 어느 하나도 적의 그림자조차 스치지 못했다.
이어진 설화의 충돌. 유중혁은 소스라치는 신음과 함께 눈을 떴다.
해가 진 수련실 안. 긴 그림자가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파천검성이었다.
“놈이 강했느냐?”
허리를 숙인 채 쭈그려 앉은 스승의 눈은 제자에 대한 걱정으로 가득했다. 유중혁이 입술을 깨물며 대답했다.
“······강했습니다.”
“얼마나?”
“초월형 5단계를 개방해도 이길 수 없었습니다.”
초월형 5단계는 지금의 유중혁이 도달한 한계였다.
파천검성은 고요한 눈으로 유중혁을 내려다보다가 말했다.
“초월형 6단계를 넘어서면, 너의 [파천검도]는 성별에 구애받지 않게 될 것이다.”
본래 [파천검도]는 여성을 위한 무공. 하지만 모든 무공이 그러하듯, 일정한 경지를 넘어서면 탈경계(脫境界)에 이르게 된다.
그 무수한 경계를 끊임없이 탈주하는 것이, 바로 초월좌들의 수련 과정이었다.
“6단계에 오른다고 해서 놈을 이길 수 있을 거란 보장이 없습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지?”
“그놈은 저입니다.”
그토록 강인하던 유중혁의 목소리에 처음으로 희미한 두려움이 어리고 있었다.
“그놈은, 1863번이나 회귀한 후의 저란 말입니다. 그런 녀석을 제가 어떻게 이길 수 있습니까.”
완연한 절망감.
‘은밀한 모략가’와 맞서는 순간 유중혁은 무엇을 해도 넘을 수 없을 거대한 벽을 보았다. 고작 3회차의 회귀로는 도저히 가늠할 수 없는 세월. 그의 적은 그 세월을 넘어 이 세계선에 도달해 있었다. 파천검성이 말했다.
“그놈은 네가 아니다.”
“······그놈도 유중혁입니다.”
“그놈과 너는 같은 길을 걷지 않았다. 그리고 앞으로도 걷지 않을 것이다.”
제자의 눈동자에 어린 절망을 닦아내듯, 파천검성의 커다란 손이 유중혁의 뺨을 덮었다. 파천검성은 계속해서 말했다.
“초월형 몇 단계에 올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떤 설화를 쌓았는지가 더 중요하다. 너는 겨우 세 번 회귀한 애송이일 뿐이지만, 그놈이 모르는 설화들을 알고 있지 않느냐.”
그 말을 들으며, 유중혁은 자신의 주먹을 내려다보았다. ‘은밀한 모략가’에겐 닿지 못했던 주먹이었다. 천천히 펼친 주먹에서 설화가 흘러나왔다.
그가 쌓아온 설화. ‘은밀한 모략가’는 모르는 설화. 그리고.
“초월의 길은 모두 다르다. 그놈을 따라잡으려 하지 말고, 너만이 갈 수 있는 길을 찾아라.”
유중혁은 말없이 자신의 주먹을 그러쥐었다.
마치, 그 설화들 중 하나라도 빠져나가는 것을 허락지 않겠다는 것처럼.
“······새로 들어온 소식은 없습니까?”
파천검성이 고개를 저었다.
김독자가 행방불명된 것도 벌써 일주일이 지났다.
하지만 그의 행방도, ‘은밀한 모략가’의 위치도 특정되지 않았다.
“그 녀석은 다른 세계선에서 온 너라고 했지.”
“그렇습니다.”
“그놈의 목적이 뭔지는 모르지만, 굳이 이 시점에 이 세계선으로 넘어왔다면, ‘마지막 시나리오’와 관계되어 있을 가능성도 있다.”
유중혁도 파천검성의 말에 동의했다.
즉, 마지막 시나리오 지역으로 가면 ‘은밀한 모략가’를 만날 확률이 높다.
“그러나, <김독자 컴퍼니>는 현재 ‘마지막 시나리오’로 갈 수 없지.”
유중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지막 시나리오’를 허락하기엔 당신들이 쌓은 설화가 부족합니다.
마지막 시나리오에 진입하지 못했던 그 날. <관리국> 측에서는 그렇게 일방적인 통보를 해왔다.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신생 성운에 불과하고, 쌓은 설화의 숫자도 적으니까.
하지만 그들이 쌓은 설화들의 등급을 생각하면 마냥 그렇게 이야기할 수도 없었다.
특히 마지막에 얻은 거대 설화인 「빛과 어둠의 계절」은 <스타 스트림>의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운 것이었다.
―당신네 성운 대표는 어디 있습니까?
결국, 모든 것은 김독자의 부재 때문이었다.
성운에서 가장 많은 설화 지분을 가지고 있던 김독자가 일행에서 이탈하면서, 성운 전체의 설화 총량이 부족해진 것이었다.
유중혁은 혼자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잠시 침묵을 지켰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천천히 몸을 일으킨 유중혁은 [흑천마도]를 칼집에 꽂아 넣은 뒤 비척비척 몸을 일으켰다.
“어딜 가는 게냐?”
“새로운 거대 설화를 얻으러 가겠습니다.”
김독자의 지분이 없어도 마지막 시나리오로 넘어갈 자격을 갖추어야 한다. <김독자 컴퍼니>는 김독자의 사병도 아니고, 수하도 아니다. 그들은 김독자가 없어도 스스로를 지킬 수 있어야 하고, 설령 김독자를 잃더라도······
마지막 시나리오를 클리어할 수 있어야 한다.
[바앗······.]
허공에서 비유가 구슬픈 소리를 냈다. 유중혁은 그런 비유를 잠시 올려다보다가, [현자의 눈]을 발동해 자신이 아는 정보들을 되짚었다.
현시점에서 손쉽게 ‘거대 설화’를 획득할 수 있는 지역은 이제 거의 남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은 반대로 말하면, 아직까지 남은 ‘거대 설화’들이 그만큼 강력한 이야기라는 뜻이기도 했다.
이미 「빛과 어둠의 계절」이라는 강력한 거대 설화를 얻은 상황.
여기다 만약 ‘그 설화’까지 얻을 수 있다면, 저 ‘은밀한 모략가’와 한 판 붙는 것도 불가능한 일만은 아닐 것이다.
멀어지는 유중혁을 향해, 파천검성이 물었다.
“혼자서 갈 것이냐?”
“저는 항상 혼자였습니다.”
“그 길은 이미 다른 네가 걸어간 길이다.”
스승의 말에 유중혁의 신형이 멈칫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수련장 밖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야, 유중혁 어디 있어! 이제 출발해야 돼!”
눈부신 빛과 함께, <김독자 컴퍼니> 일행들이 수련장의 문을 열고 들이닥쳤다.
신유승, 이길영, 이지혜, 한수영······.
대체 언제부터 준비하고 있었던 건지, <김독자 컴퍼니>의 모두가 그곳에 모여있었다. 파천검성이 말했다.
“저들이 바로 너의 설화다, 중혁아.”
‘은밀한 모략가’에게는 없는 것.
멍하니 돌아보는 유중혁을 향해, 파천검성이 말했다.
“이번 회차의 너는 혼자 싸울 필요가 없다.”
*
새로운 ‘거대 설화’ 지역까지는 나흘 거리였다. 도깨비들의 힘을 빌린다면 훨씬 빨리 도착할 수 있겠지만, 이번만큼은 그게 허락되지 않는 상황이었다.
―그대는 친분이 있는 도깨비들의 힘을 빌릴 수 없다.
―그대가 ‘김독자’라는 사실을, 결코 알려서는 안 된다.
빌어먹을 ‘혹부리 왕’과의 계약 때문이었다.
저 계약 때문에 나는 비유의 채널에 가입할 수도, <김독자 컴퍼니>에게 내 안부를 전할 수도 없었다.
결국 나는 ‘양산형 제작자’에게 구입한 [X급 페라르기니]를 직접 운전해 목적지까지 나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내 어깨 위에서 [진천패도]를 닦던 유중혁 [999]가 중얼거렸다.
“운전이 서툴군.”
“그럼 네가 하든가. 설마 너 계속 그런 모습으로 있을 거냐?”
앞으로 시나리오 지역에 돌입하면 우리를 알아보는 성좌들이 분명 나타날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꼬마 유중혁의 존재는 너무 눈에 띈다.
이미 유중혁 본인이 그렇게 유명하니······.
“하긴, 이 상태로는 너무 눈에 띄겠지.”
뭔가를 고민하던 꼬마 유중혁 [999]는 몸을 움찔거리더니 잠시 후 펑 하는 소리와 함께 작은 무림 만두의 형태로 변했다.
깜짝 놀란 나를 향해 [999]가 무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렇게 하면 되겠군.
“······어깨에 만두를 얹고 다니면 눈에 더 띄잖아.”
―네놈도 한심한 외형을 바꿔라.
꼬마 유중혁이 유중혁의 모습을 유지해서는 안 되듯, 나 역시 내가 ‘김독자’라는 것을 들켜서는 안 된다.
무림 만두로 변한 유중혁은 마치 분칠이라도 하듯 내 얼굴에다가 만두피를 거칠게 문지르기 시작했다. 삐걱대며 내 얼굴의 설화가 변하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눈을 떴을 때, 나는 그야말로 경악하고 말았다.
거울을 보며 눈만 끔뻑이는 나를 항해 유중혁 [999]가 말했다.
―됐군.
맙소사, 이 정도면 유중혁 뺨을 한 대 갈길 정도는 아니더라도······ 갈길까 말까 고민할 정도는 되겠는데.
나는 조각 같은 내 얼굴을 문지르며 중얼거렸다.
“······이거 영원히 지속시킬 수는 없냐?”
―그런 짓을 하면 개연성 후폭풍을 맞게 된다.
마치 불결한 것에 닿기라도 했다는 듯, [999]는 만두가 된 자신의 몸을 열심히 털어댔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거울을 열심히 들여다보았다.
언젠가 ‘복상사한 카사노바’의 설화 파편을 흡수했을 때도 잘생겨지긴 했었지만, 이건 그때와는 비교도 안 되는 수준이었다.
나는 감탄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999회차가 대단하긴 하네. 3회차는 이런 기술 없는데.”
―······3회차?
“아, 몰랐던 거냐? 여기 유중혁은 3회차야. 여긴 3회차 세계선이고.”
꼬마 유중혁 [999]는 그 말에 잠시 나를 들여다보다가 물었다.
―왜 그렇게 생각하지?
“왜긴······.”
“그야 ‘멸살법’의 시작이 3회차니까”라고 말하려다가 멈칫했다.
나는 조금 표현을 순화하기로 했다.
“······그야 시작이 3회차니까.”
―왜 3회차가 시작이지? 숫자를 모르는 건가? 시작은 0회차다.
녀석의 말이 맞다.
‘멸살법’의 1화는 유중혁의 3회차에서 시작하지만, 엄밀히 따지면 모든 이야기의 시작은 유중혁의 0회차였다.
그렇게 생각하자 조금 이상한 기분이 되었다.
······왜 나는 유중혁의 ‘3회차’로 온 것일까?
어차피 3회차의 이야기를 그대로 따라가지도 않는 상황에, 소설의 도입부가 3회차라고 해서 꼭 3회차에서 시작할 필요는 없었을 텐데.
······모르겠다. 어차피 지금 내가 알아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이 세계선의 유중혁이 자기가 ‘3회차’라고 했어. 그러니까 여긴 3회차야.”
그리고 내가 [등장인물 일람]으로 본 정보도 정확히 그것이었고.
그러자 [999]가 말했다.
―그런 정보를 곧이곧대로 믿다니, 순진하군.
“뭐?”
―됐고, 도착한 모양이다.
눈부신 빛과 함께 긴 차원 터널이 끝났다.
뒤이어 나타난 것은 새로운 시나리오 지역으로 가는 거대한 게이트였다.
게이트의 입구에는 입장을 기다리는 인파가 있었다. 나는 [X급 페라르기니]를 회수한 뒤 대기열에 합류했다.
시나리오 지역의 입구를 지키고 있는 것은 도깨비가 아니라 한 성좌였다.그도 그럴 것이, 이번 ‘거대 설화’ 시나리오 또한 주최가 성운이기 때문이었다.
초거대 성운 중 하나이지만, 지금까지는 나와 거의 동선이 겹치지 않았던 성운.
[다음.]
한 손에는 거대한 삼지창을 쥔 채, 붉은 관과 오래된 갑옷을 쓴 성좌.
전신에서 느껴지는 패도적인 격이 그가 범상치 않은 격을 지닌 설화급 성좌라는 것을 드러내고 있었다.
불법(佛法)의 수호자, 증장천왕(增長天王).
그는 성운 <황제>의 본거지인 <천궁>의 입구를 지키는 사천왕(四天王) 중 하나였다.
[다음.]
얼마 지나지 않아 내 차례가 돌아왔다.
증장천왕은 내 얼굴에서 뭔가 수상한 점이라도 찾으려는 듯 유심히 나를 노려보더니, 이내 첫 질문을 던졌다.
[방문 목적은?]
[거대 설화에 참가하기 위해 왔습니다.]
[수식언.]
여기서 ‘구원의 마왕’이라 말할 수는 없었다.
다행히도 내겐 이번에 새로 얻은 수식언이 있었다.
[‘빛과 어둠의 감시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