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8화
388화
나는 일행들과 간단한 작별 인사를 마친 뒤 곧장 <명계>를 향해 메시지를 보냈다. 답장은 금방 돌아왔다.
[성좌, ‘부유한 밤의 아버지’가 당신의 출입을 허락합니다.]
[성좌, ‘가장 어두운 봄의 여왕’이 당신의 출입을 허락합니다.]
[성운 <명계>가 당신을 소환하는 포탈을 개방합니다.]
츠츠츠츠츳!
본래 이런 대규모 시나리오가 진행되는 와중에는 시나리오 외부로 이탈하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명계>는 나를 위해 기꺼이 막대한 개연성을 지불 해준 것이다.
고마운 일이었다.
말이 후계지, 사실 그때 도움받은 이후로 변변찮은 인사도 못했는데······.
생각해보니 조금 찝찝했다. 혹시 흔쾌히 승낙한 게 이제껏 <명계>를 방문하지 않았던 나를 조지기 위해서라면?
―김독자.
급작스레 들려온 메시지에 놀라 허공을 바라보았다. [한낮의 밀회]는 아니었다. 그럼 메시지를 보낼 만한 녀석은 하나뿐.
―뭐야, 지부장 되고 바쁜 줄 알았는데 아직 여기 신경써 줄 여력이 있냐?
―없어. 짬 내서 만드는 거지.
비형이 허공에서 잎담배를 물고 투덜거렸다. 자식이, 요즘 지부장 되더니 꽤 일이 피로해진 모양이다. 비형은 복잡한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더니 한숨을 푹 쉬었다. 그리고 일시적으로 주변 채널의 송수신이 차단되는 것이 느껴졌다.
―너 지금 위험한 짓 벌이는 거다.
―언제는 안 그랬냐?
―전이랑은 달라. 이번엔 <스타 스트림> 전체가 네가 벌이는 일을 주목하고 있다고.
―그것도 골백번도 더 들은 소리 같은데.
―이대로면 조만간 네가 쌓은 개연성의 업보가 폭발할 거야. 무슨 뜻인지 알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뒤틀린 개연성이 폭발하면 어떤 끔찍한 일이 벌어지는지는 지난 ‘마왕 선발전’ 때 똑똑히 보아서 알고 있다.
실제로 요즘 나는 블록이 많이 빠진 젠가 위에 올라타 있는 기분이 들 때가 많았다.
―조심해. 언제까지 운이 좋을 수는 없어. 아무리 네가 대도깨비나 외신들의 가호를 받고 있다 해도······.
―누구의 가호?
―······됐다. 쓸데없는 말을 했네.
비형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더니 허공에 가볍게 연기를 뿌렸다. 그러자 연기를 중심으로 동결된 채널이 해제되기 시작했다.
―잘 다녀와라. 죽지 말고.
―그게 저승 가는 사람한테 할 말이냐?
말은 안 하지만, 아마 비형은 관리국 쪽의 방해 공작을 막아주고 있을 것이다. 처음 만날 때만 해도 하급 도깨비였던 녀석인데, 벌써 이렇게나 큰 도움을 받게 되다니. 오래 살고 볼 일이다.
[시공간 전송이 시작됩니다.]
눈앞에서 지각 정보가 분해되더니,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새카맣게 말라붙은 저승의 땅이 나를 맞이했다. <명계>였다. 본래라면 뱃사공 카론을 통해 강을 건너야 했지만, 이번에는 그런 절차가 생략되었다.
메마른 강가의 자갈밭을 지나 하데스의 궁을 향해 얼마나 걸음을 옮겼을까.
외성에 발을 내딛는 순간,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수만 명의 시선이 내게 꽂혔다.
저승의 삼대 심판관을 위시한 어마어마한 숫자의 영혼. 사나운 공기의 움직임으로 봐서, 결코 호의적인 시선 같지는 않았다.
[저승의 심판관들이 당신의 존재를 눈치챘습니다!]
역시, 날 이곳에 부른 것은 다른 목적이 있어서였나?
스스슷.
모든 산 것들을 미라로 만들어버릴 듯한 격을 풍기며, 저승의 삼대 심판관이 나를 향해 미끄러지듯 다가오고 있었다.
삼대 심판관은 모두 설화급에 해당하는 성좌.
나는 재빨리 허리춤에 찬 [부러지지 않는 신념]을 움켜쥐었다.
내가 아무리 강해졌다 해도 <명계>에서라면 그들을 상대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제일 앞에 있던 심판관의 눈높이가 낮아진 것은 그때였다.
그것을 시작으로 두 번째 심판관, 세 번째 심판관의 눈높이가 낮아졌다. 심판관들은 내 앞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어?
그 뒤로 심판관을 따르던 <명계>의 군대가 마치 낮게 휘몰아치는 파도처럼 주저앉기 시작했다. 자세히 보니 사납게 들끓던 열기는 내가 짐작한 것과는 조금 다른 것이었다. 저승의 심판관들이 나를 보며 자신의 눈을 찍어 닦고 있었다. 마치 뭔가에 감동이라도 한 것처럼.
쿠구구구구!
<명계> 전체가, 나에게 무릎을 꿇으며 길을 내고 있었다.
궁의 내전으로 통하는 길.
이제껏 오직 단 두 명의 성좌만이 걸어갈 수 있었던 길이었다.
[밤의 왕국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명계>의 후계시여!]
심판관의 말과 함께, 눈앞에 시스템 메시지가 떠올랐다.
[현재 당신은 <명계>의 왕자입니다.]
*
나는 궁 내부로 이동하는 내내 떨떠름한 기분이었다.
‘명계의 후계자’가 된 순간 이런 일이 벌어질지도 모른다고 생각은 했지만, 그래도 이렇게나 수직적인 신분 상승을 겪고 나니 정신이 말랑해지는 기분이었다.
살면서 한 번도 받아보지 못한 융숭한 대접이었다.
게다가 음산하고 치렁치렁한 이 의복은 뭐란 말인가.
[등장인물 ‘리카르도 폰 카이제닉스’가 설마 당신도 왕자였냐고 묻습니다.]
나와 시야를 공유하는 카이제닉스의 4왕자도 한 마디를 보탰다. 뭐라 대답해야 할지 몰라서 망설이는데, 그런 내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던 심판관이 말을 걸었다.
[저, 왕자님.]
“예.”
[지난번에는 죄송했습니다.]
그러고 보니 이 아저씨, 신유승의 영혼을 되찾으러 명계에 왔을 때 나를 맞이했던 심판관이었다. ‘야마타노 오로치의 뱀술’을 처먹고 내 부탁을 몰래 들어 줬던······ 수식언이 뭐였더라?
“아닙니다. 잘 해결되었으니 그걸로 된 거죠. 그때는 제가 감사했습니다.”
심판관은 송구스럽다는 듯 고개를 푹 숙이더니, 이내 알현실로 가는 문을 활짝 열었다.
[명왕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나는 긴장하며 심판관들과 함께 문 안으로 발을 내딛었다.
곁을 지키는 심판관의 든든한 격에 기분이 싱숭생숭했다.
<명계>의 주인이 되면 이런 성좌들을 모두 부릴 수 있다는 거겠지.
[······후후, 그래. 그랬구나.]
상념을 깬 것은 어둠 속에서 들려온 페르세포네의 목소리였다. 페르세포네는 옥좌 위에서 자신의 손끝에 앉은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바앗, 바앗. 아바아앗!]
[흐음, 그때도 그랬다고?]
[바앗, 바앗!]
방방거리며 뛰어오르는 찹쌀떡. 누구의 목소리인지는 명백했다. 내가 소리치기도 전에, 나를 발견한 비유가 화색을 하며 소리쳤다.
[아바앗! 아바앗!]
[우리 작은 후계자가 왔구나.]
왜 비유가 여기에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쁜 상황은 아니었다. 비유의 재롱잔치 덕에 페르세포네는 무척 즐거워 보였으니까.
하데스의 무기질적인 시선과 페르세포네의 온화한 시선이 동시에 내게 꽂혔다. 찌릿찌릿한 느낌과 함께 전신이 마비되는 것 같았다. 역시 신화급 성좌에겐 시선만으로도 모든 존재를 압도하는 힘이 있다.
나는 포세이돈과 대격전을 벌이던 하데스를 떠올리며, 간단히 반배(半拜)를 올렸다.
“간만에 뵙겠습니다. ‘부유한 밤의 아버지’, 그리고 ‘가장 어두운 봄의 여왕’이시여.”
[오랜만이구나 아들아. 그간 별고는 없었니?]
“어······ 예. 그렇습니다. 여왕께서는?”
[후후, 우리도 무탈했단다. 하나뿐인 자식이 너무 늦게 찾아와서 조금 섭섭하긴 했지만 말이야.]
오가는 대화가 무슨 명절 분위기 같았다. 애초에 이런 경험이 없는 나로서는, 무슨 말로 어떻게 대화를 이어가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았다.
너른 옥좌에 앉은 하데스는 여전히 표정을 읽을 수 없는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고, 페르세포네는 싱글싱글 웃는 얼굴로 나를 향해 말을 걸었다.
[네가 없는 동안 작은 손녀딸이 적적함을 달래 주었단다. 말년에 도깨비 손녀라니······ 정말 오래 살고 볼 일이지.]
바앗바앗 거리는 비유가 마음에 들었는지, 페르세포네는 자신의 손등에 앉은 비유를 보드랍게 쓸어 주며 말했다.
[아이는 얻었는데, 짝은 없구나. 배필은 언제 데려올 셈이니?]
“아, 그건 생각을 좀······.”
명절에 제일 듣기 싫은 질문 중 하나를 곧바로 들었다.
그때, 잠자코 있던 심판관들이 앞으로 나섰다.
[저희가 조사한 결과, 몇 명의 후보가 있사옵니다.]
[호오, 그래요?]
[여기, 올림포스 인연 매칭 시스템 『큐피드 쏠까연』과 『도와듀오 비너스』를 통해 조사한 결과입니다.]
[심판관들이 간만에 제대로 된 일을 했군요.]
······아니 잠깐만, 심판관이란 작자들이 왜 내 사생활을 조사하고 다녀?
그러나 내가 만류할 틈도 없이 허공에 홀로그램이 떠올랐다.
[일단, 후보 1번입니다.]
떠오른 것은 영상 자료였다.
―독자에겐 독자의 삶이 있으니까요.
―독자의 삶······ 독자 씨는 정말 좋은 말씀을 하시네요.
아니 왜 자료 화면을 가져와도 하필 저런 흑역사를 가지고 오는 건데.
심판관은 침착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후보 1번은 사려가 깊은 여인입니다. 왕자께서 가지고 계신 특수한 감수성을 하해와 같은 아량으로 품어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온화한 성정과 타고난 결단력을 동시에 갖추어 지와 미모를 동시에 겸비한, 사실상 왕자님께는 과분하다 할 수 있는 수준의······.]
들을수록 머리가 멍해지는 느낌이었다.
[다음으로, 후보 2번입니다.]
이어서 새침한 눈매에 인상적인 눈물점을 가진, 레몬 사탕을 문 여인이 등장했다.
―멍청이.
―이렇게 좋은 날 왜 울어. 모처럼 눈도 내리는데······. 내가 나중에 더 좋은 수식언 지어줄게.
영상을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은 심판관이 이야기를 계속했다.
[후보 2번은 성격이 날카롭고 독설을 자주 하긴 하지만, 왕자님과 특별한 인연을 가지고 있는 여인입니다. 그녀는 왕자님의 음침한 취미를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이며, 심지어 그 취미에 관해 함께 이야기를 나눌 수도 있는, 정말 세상에 둘도 없는 특별한······.]
<올림포스>의 매칭 시스템도 단단히 맛이 갔구나.
3번 후보의 얼굴이 나오기 직전, 나는 안간힘을 다해 소리쳤다.
“아니, 잠깐만요! 저는 아직 결혼 생각 같은 건 없습니다!”
심판관이 송구스럽다는 듯 고개를 숙이며 물러났다.
[왕자께서 아직 준비가 안 되신 듯하니 그럼 다음 후보는 나중에 따로······.]
[흠······ 저 고집불통 왕자님을 누가 데려갈는지.]
페르세포네는 진짜 우리 어머니 같은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뭐, 여차하면 이 아이를 낳은 도깨비를 배필로 데려와도 좋단다. 나와 하데스는 인간들의 사사로운 고정관념 따위엔 얽매이지 않으니······.]
비형과 결혼하라니, 차라리 뒈지는 게 낫지.
[나와 하데스는 네가 ‘자신의 무지를 아는 자’나 ‘이데아의 철인’ 같은 성적 취향을 가지고 있어도 전혀 개의치 않을―]
[명계의 심판관들이 당신의 선택에 귀추를 주목합니다.]
[소수의 성좌들이 당신의 취향에 관심을 갖습니다.]
[성별 바꾸기를 좋아하는 한 성좌가 귀를 기울입니다.]
나는 가볍게 숨을 들이켠 뒤, 곧바로 입을 열었다.
“어머니.”
내 말에, 페르세포네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지금 뭐라고······.]
“제가 이곳에 온 이유를 알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
“부탁드릴 것이 있습니다.”
아무리 <명계>의 시간이 느리게 흐른다고 해도, 이곳에서 오래 지체할 수는 없었다. 애초에, 내가 이곳에 방문한 목적은 하나뿐이니까.
“제게 <명계>의 군대를 빌려주십시오.”
그 말에, 지금껏 침묵을 지키던 하데스가 입을 열었다.
[그게 무슨 뜻인지 너는 알고 있느냐?]
마치 세상이 어둠 속으로 내려앉는 듯한 목소리가 궁의 전부를 짓눌렀다.
명계에서 군대를 이끌 수 있는 존재.
그것은, 이 명계의 주인인 명왕(冥王)뿐이다.
“알고 있습니다.”
[정식으로 후계의 자리를 받아들이겠다는 것인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명왕이 된다면 이 모든 시나리오가 끝난 뒤 너는 이곳을 통치해야 한다. 그게 무슨 뜻인지는 알고 있느냐?]
“특별한 개연이 없다면 이승으로 나갈 수 없다는 것을 뜻합니다.”
[<명계>를 순순히 계승해 여생을 지하에 갇히겠다는 말이냐?]
“예.”
내 순순한 대답에, 하데스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나를 오시했다.
지금의 내가 아무리 강해졌다고 해도 하데스에게 대적하는 것은 무리다. 긴장 때문에 심장이 터질 것 같았지만, 그래도 기왕 하는 거 끝까지 해야 했다.
성마대전에 승리하기 위해서, <명계>의 힘은 반드시 필요하다.
“저는 명계의 정식 후계자가 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