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7화
387화
먼저 따진 것은 한수영이었다.
“아니,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지? 회귀자가 되면 머리가 점점 나빠지나?”
“내가 할 소리군. 작가가 그런 불쾌한 상상력을 발휘할 줄이야.”
한수영과 유중혁은 으르렁거리며 서로를 노려보았다.
먼저 양보한 쪽은 한수영이었다.
“후······ 세 번쯤 회귀하다 보면 정신이 나가서 이상한 생각을 할 수도 있겠지. 그래······ 은밀한 모략가가 ‘미래의 김독자’라고?”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그래 뭐, 아주 불가능한 이야기는 아니네. <스타 스트림>이야 별일이 다 일어나는 곳이고, 또······.”
한수영은 “소설이 현실이 되어버리는 게 이 세상이니까”라고 말하려다 뒷말을 삼켰다. 그게 사실이라도 유중혁 앞에서 할 소리는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대신 한수영은 다른 말을 했다.
“은밀한 모략가한테 확인해보는 게 제일 빠를 텐데. 확인은 해 봤어?”
유중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녀석과 계약을 했었다. 내가 녀석의 부탁을 들어주면, 녀석도 내가 원하는 질문에 대답을 해주기로.”
“무슨 질문인데?”
“은밀한 모략가의 정체가 미래에서 온 김독자인지 물었다.”
“그래서?”
“아니라고 하더군.”
“근데 왜 넌―”
“정확히 말하지. ‘한때는 무언가였을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했다.”
한때는 무언가였으나 지금은 아무것도 아니다.
한수영은 그 말의 허점을 깨달았다.
은밀한 모략가의 대답은, 그가 ‘미래의 김독자’라는 것을 부정하는 대답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 대답은 ‘김독자였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라는 뜻에 더 가까웠다.
그렇게 생각하면 유중혁이 자신의 추리를 굽히지 않는 것도 이해가 갔다.
한수영이 재차 물었다.
“들은 건 그게 다야?”
“놈은 내가 살아온 모든 회차를 알고 있다고 했다.”
한때는 무언가였으나 지금은 그저 ‘은밀한 모략가’일 뿐인 자.
그리고 유중혁이 살아온 모든 회차를 알고 있는 존재.
“그거 말곤?”
“없다.”
“장난쳐? 죽을둥살둥 싸우고 고작 그거 물어본 거야?”
한수영이 씩씩대며 소리쳤다.
“전 회차에는 없었던 놈이잖아? 정확한 정체를 알 수 없으면 다른 정보라도 많이 알아 왔어야지!”
“······그놈 목적도 듣긴 했다.”
“뭐라디?”
“바꾸고 싶은 게 있다고 하더군. 그리고, 죽이고 싶은 존재도 있다고 했다.”
들을수록 수렁에 빠지는 느낌이었다. ‘죽이고 싶은 존재’라는 말은 바꾸어 말하면 ‘아직 죽일 수 없는 존재’라는 뜻이었다.
‘은밀한 모략가’ 정도 되는 신격에게 그런 존재가 있단 말인가.
“내가 들은 것은 그게 전부다. 내게 허용된 질문권도 그게 전부였고.”
“조금 더 정보를 캐낼 수는 없어?”
“그러면 다시 녀석과 계약해야 한다. 그런 짓을 하면 지난번보다 더 큰 대가를 치르게 되겠지.”
유중혁은 그렇게만 말하고 허공을 올려다보았다.
한수영도 함께 하늘을 보았다. 그리고 [한낮의 밀회]가 발동했다.
―놈이 보고 있어?
―시선은 느껴지지 않는다.
약간은 실망스러운 결과였다.
대놓고 들으라고 떠들어 본 건데, 아무래도 당사자는 이 광경을 지켜보지 않는 듯했다. ‘은밀한 모략가’ 답지 않은 일이랄까. 한수영이 말했다.
―곤란하네. 만약 그 정도 신격이 중요한 순간에 개입하면 우리가 아무리 치밀한 계획을 세워도 아무런 소용이 없다고.
이번 ‘성마대전’처럼 중요한 무대라면 더욱 그렇다. 작은 변수 하나가 판 전체를 뒤집어 놓을 수 있는 상황이라면, 신경이 쓰이지 않을 수가 없다.
하지만 유중혁의 생각은 달랐다.
“놈은 직접 나서지 않을 거다.”
“왜 그렇게 생각해?”
“김독자나 나를 종용해 일을 꾸미는 것 자체가 증거다. 직접 움직일 수 있었다면 처음부터 그랬겠지. 그 녀석쯤 되는 존재라면 스스로 움직이는 것 자체로 엄청난 개연성을 소모할 것이다.”
“······그것도 그러네. 빌어먹을 개연성에 감사하는 순간이 올 줄이야.”
“나도 묻고 싶은 것이 있군.”
“응?”
“네놈의 불쾌한 상상력의 근거를 아직 듣지 않았다. 네놈은 왜 ‘은밀한 모략가’가 ‘그 녀석’이라고······.”
유중혁의 질문에 한수영이 피식 웃었다.
“뭐야, 관심 없는 줄 알았더니, 신경 쓰이냐?”
“단 한 번도 토를 달지 않는 순간이 없군.”
유중혁이 차가운 칼자루를 쥐려는 순간, 능글맞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둘이 사이가 좋네?”
두 사람의 살벌한 시선이 동시에 김독자에게 꽂혔다.
쓴웃음을 지은 김독자가 손사래를 치며 물러나는 차, 허공에 시나리오 메시지가 떠올랐다.
[113번째 국지전의 새로운 좌표가 설정되었습니다.]
일행들의 시선이 김독자에게 꽂혔다.
드디어, 다시 움직일 시간이 된 것이다.
“슬슬 또 한바탕 해보자고.”
기다렸다는 듯, <김독자 컴퍼니>의 설화들이 아우성을 치기 시작했다.
[마왕 ‘구원의 마왕’에게 새로운 설화가 발아합니다!]
[‘구원의 마왕’의 두 번째 수식언 후보 목록이 생성되었습니다.]
*
마계의 2인자는 다양한 수식언으로 불린다.
지옥 동부의 지배자. 마계의 대수(代手). 존엄의 파괴자.
그토록 다양한 이름이 있음에도, 그의 진명은 하나다.
제 2마계의 주인, 아가레스.
제 1마계의 주인이 홀연히 사라진 뒤, 아가레스는 수천 년의 세월 동안 마계를 지켜왔다. 영역을 넘보는 대천사들의 목을 베고, 악이 악으로서 존립하기 위한 설화들을 수호해왔다.
악의 자격을 시험하고, 규제하고, 통치하며 그는 오직 단 하나의 의문에 몰두했다.
악이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하나의 생명을 찢을 때마다 그는 언제나 그 의문에 몰두했다. 그것이 정말 해결 가능한 의문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단지 그 의문이 그를 살게 만들었다.
[113번째 국지전이 강제 종료되었습니다.]
[114번째 국지전이 강제 종료되었습니다.]
하지만 그토록 아득한 세월을 살면서도, 이런 광경을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다들 조금만 더 힘내요!
―거의 다 제압했습니다!
아비규환의 전장 속에서 환생자들을 구하는 자들이 있었다.
위대한 선악의 승패와는 관계없이 그저 그곳에서 희생되던 소모품들이, 누군가에 의해 구원받고 있었다.
평소였다면 그것은 [선]에 해당하는 행동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그 일을 행하는 존재가 [마왕]이라는 것이었다.
[혼돈 수치가 4만큼 상승했습니다.]
[현재 혼돈 수치는 60입니다.]
[경고합니다! 혼돈 수치가 60을 넘었습니다!]
혼돈.
그것은 선도 악도 아닌 것.
세계의 개연성과 질서의 바깥에 있는 무엇.
[혼돈 수치를 늘려서 ‘성마대전’을 막겠다?]
깊게 눌러 쓴 아가레스의 페도라 사이로 붉은 뿔이 자라났다. 그것은 아가레스가 뭔가에 흥미를 보일 때마다 나타나는 특징이었다.
[더 큰 멸망을 구실로 작은 멸망을 막는다. 구원의 마왕이나 할 법한 발상이지요.]
그 말을 한 것은 ‘격노와 정욕의 마신’ 아스모데우스였다.
아가레스가 옥좌를 짚은 손가락을 까딱거리며 물었다.
[왜 그는 ‘악’의 편을 들지 않는 것이지? 이쪽에 붙는다 한들 전혀 손해 볼 일이 없을 텐데.]
[이번 성마대전이 종료되면 그의 ‘전(轉)’이 완성됩니다. 그가 추구하는 ■■가 악의 길은 아니라는 뜻이겠죠.]
[그렇다고 선의 ■■을 추구하려는 것 같지도 않군.]
오히려 선이나 악, 둘 중 한쪽 편에 붙은 것보다 더 난처한 상황이었다.
아가레스가 재차 물었다.
[그대의 생각은?]
[우리가 나서기 전에 메타트론이 먼저 움직일 겁니다. 누구보다 오래 이 전쟁을 열망해 온 늙은 천사가, 자신의 판이 망쳐지는 걸 두고 볼 리 없죠.]
그 말이 흘러나오기 무섭게, 마왕 측 통신으로 한 줄의 메시지가 도착했다.
―아가레스. 전할 말이 있어서 연락했습니다.
아가레스가 찢어진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메타트론. 우리가 한가하게 대담을 나눌 사이는 아닐 텐데?
현 마계와 에덴의 최강자가 화면을 통해 대면했다. 오가는 시선의 교환만으로 강렬한 개연성의 스파크가 튀고 있었다.
―장단을 맞춰 주고 싶지만, 이번에는 잠깐 힘을 빌려야 할 것 같군요.
―선과 악이 손을 잡은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나?
―목적을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는 악의 이야기는 흔한 편이지요.
비아냥대는 아가레스의 목소리에도 메타트론은 침착했다.
―치기 어린 성운이 하나 있습니다. 자신들이 이 세계의 중심이라 믿는 어린 후배들이죠.
그게 누구의 이야기인지는 명백했다. 아가레스가 웃었다.
―겨우 작은 성운 하나 짓밟자고 핫라인까지 열다니, 우습군.
―자칫하면 작은 성운으로 말미암아 ‘성마대전’이 무너질 수도 있습니다.
―<스타 스트림>의 선배된 입장에서 군기라도 잡고 싶은 모양이지? 꼰대 기질은 여전하군.
―세상의 참된 이치를 알려주고픈 마음이라 해두죠.
―거절하겠다. 네놈 따위와 손잡지 않아도 그런 성운 하나 뭉개는 건 일도 아니니까.
―손을 잡자는 게 아닙니다.
―그러면?
메타트론은 곧장 대답하지 않고 자신의 손 위에 작은 십자가 하나를 띄웠다. 허공에 뜬 십자가는 제자리에서 뱅뱅 돌고 있었다.
―<김독자 컴퍼니>가 전장을 망칠 수 있는 것은, 그들이 비등한 힘의 균형을 이용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지만, 처음부터 힘의 균형이 무너진 전장이라면 어떨까요.
메타트론은 십자가에 바람을 불었다. 그러자, 십자가의 회전축이 슬그머니 무너지며 흔들리기 시작했다. 아가레스가 불쾌하다는 듯 물었다.
―처음부터 한쪽이 불리한 전장을 열자는 얘긴가?
―그렇습니다.
양측의 전력이 비등한 경우라면 모를까, 어느 한쪽으로 균형이 무너진 상황이라면 <김독자 컴퍼니>도 그만큼 무게의 균형을 맞춰야 한다. 무게가 악으로 기울어져 있다면 선 쪽으로, 선으로 기울어져 있다면 악 쪽으로.
이것을 역으로 이용한다면, <김독자 컴퍼니>를 몰살시킬 국지전을 설계하는 것도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어느 측에 불리한 전장을 열자는 것이지?
―이런 일은 공평하게 해야겠죠. 악 측에 불리한 국지전장이 하나 열린다면, 선 측에 불리한 국지전장도 하나 열도록 하겠습니다.
―재미있군. 천사들을 희생해서라도 놈들을 잡고 싶은 모양이지?
―혼돈 수치가 쌓이는 걸 내버려 둘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국지전을 여러 개 열어야, <김독자 컴퍼니>를 분산시킬 수 있습니다.
―그들이 도발에 응하지 않는다면?
―그럼 그것으로도 충분한 것 아니겠습니까?
화면 너머로 비치는 메타트론의 눈이 하얗게 빛났다.
―그들이 응하지 않는다면, 어차피 이 전쟁의 승자는 선악(善惡)이 될 테니까.
*
[115번 국지전으로 가는 게이트가 열렸습니다!]
[116번 국지전으로 가는 게이트가 열렸습니다!]
[117번 국지전으로 가는 게이트가······!]
실시간으로 허공을 뒤덮는 게이트들을 바라보며 나는 헛웃음을 지었다.
역시, 메타트론이나 아가레스가 이번 일을 그냥 넘어갈 턱이 없지.
실시간으로 생겼다 사라지는 포탈들을 보며 정희원이 물었다.
“독자 씨, 저게 어떻게 된 거죠?”
“놈들이 국지전을 한꺼번에 열었습니다.”
“이런 경우도 있어요?”
“본래는 있을 수 없습니다. 국지전이라고 해도 저렇게 빨리 생겨났다 사라지진 않거든요.”
[115번 국지전이 종료되었습니다!]
[116번 국지전이 종료되었습니다!]
실시간으로 종료되는 전장과 함께, 시나리오 메시지도 떠올랐다.
+
[성마대전 진행 현황]
절대선 수치 : 57
절대악 수치 : 57
혼돈 수치 : 60
+
우리가 쌓은 혼돈 수치에 대항하듯, 선악 수치가 빠르게 상승하고 있었다. 결국 벌떡 일어난 것은 이현성이었다.
“이대로 있을 수는 없습니다.”
이현성이 주먹을 불끈 쥐며 말을 이었다.
“저 전장에도 희생되는 환생자들이 있을 겁니다.”
“물론 그렇겠지. 근데 저기 들어가면 우리도 죽어.”
한수영이 손톱을 잘근 깨물며 말했다.
“······예?”
“모르겠어? 함정이라고 저거. 쟤들 지금 우리 족치겠다고 작당한 거야.”
멍하니 나를 보는 이현성의 시선에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한수영의 말이 맞습니다. 아마 들어가자마자 우리는 공격부터 받을 겁니다.”
“들어가지 않아도 끝장인 것은 마찬가지다.”
유중혁의 말에 일행들의 표정은 더욱 어두워졌다.
<김독자 컴퍼니>는 선과 악으로 소속이 찢어진 상황.
만약 이대로 성마대전의 승자가 결정된다면, 패한 쪽은 끔찍한 꼴을 당하게 될 것이다. 화신체의 소멸은 당연한 얘기고, 운 좋게 영혼이 되더라도 지옥의 염열에 속에 시달리며 자아를 파괴당할 것이다.
결국, 우리는 저 전장에 참가할 수밖에 없다.
“······어쩔 수 없군요.”
때론 함정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걸어 들어가야 할 때도 있는 법이다.
나는 재빨리 일행들을 분류했다.
“정희원 씨와 이현성 씨는 117번 국지전에 참가하세요. 그리고 한수영이랑 유중혁은 119번 게이트로―”
“아니 잠깐만, 그럼 넌?”
“난 혼자 121번 게이트로 갈 거야.”
나를 노려보던 유중혁이 말없이 칼자루를 쥐길래, 나는 재빨리 항변했다.
“아니, 그렇다고 진짜 혼자서 가겠다는 얘기는 아니고.”
“누구랑 가겠다는 거지?”
“우리 편이 되어 줄 사람.”
그러자 한수영이 태클을 걸었다.
“누구? 지금 상황에서 누가 우리 편이 되어 주는데?”
보통은 아무도 이쪽 편을 들지 않겠지.
하지만 내 생각이 맞다면, 적어도 딱 하나. 아니 둘은.
[성운, <명계>가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나는 씩 웃으며 말했다.
“우리 부모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