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화
38화
샛노란 눈빛이 우리를 바라본 순간, 귀청을 찢는 포효가 울려 퍼졌다.
그오오오오오!
[7급 지룡종, ‘티라노사우르스 렉스’가 당신을 인식하였습니다.]
[‘티라노사우르스 렉스’가 스킬 ‘포식 공포’를 발동하였습니다!]
[전용 스킬, ‘제 4의 벽’이 ‘포식 공포’의 효과를 차단합니다.]
[제 4의 벽] 덕분에 마음은 평온했지만, 솜털이 오싹오싹 일어서는 것만큼은 막을 수 없었다. 이게 피식종의 공포라는 거겠지.
“다들 피해요!”
일순 굳어 있던 정희원과 이지혜가 정신을 차렸다. 나는 바로 곁에 있는 이길영을 안고 뒤쪽으로 달렸다.
콰콰콰콰!
큼지막한 꼬리가 전방의 수림을 모조리 부수며 날아들었다.
“쿠어어억!”
달려오던 사내들이 등을 맞고 피를 토하며 나가떨어졌다. 다행히 정희원과 이지혜는 아슬아슬하게 위험지대에서 벗어난 모양이었다.
나는 이길영을 내려놓으며 외쳤다.
“길영이는 뒤로 빠지고, 희원씨랑 지혜는 좌우로 흩어져요!”
곁에서 메시지가 떠오른 것은 그때였다.
[인물 ‘이길영’이 스킬 ‘공룡 도감’을 발동합니다!]
···응?
“티라노 사우르스는 몸집에 비해 민첩한 편이지만, 시야가 좁아서 사각의 공격에 취약해요.”
“···뭐?”
“어릴 때 도감에서 봤어요.”
“어릴 때?”
“···지금보다 더 어릴 때요.”
나는 멍하니 이길영을 바라보다가 입을 다물었다.
하긴 쓸데없는 태클을 걸 때가 아니지.
그오오오오!
[전용 스킬, ‘백청강기’를 발동합니다!]
나는 휘황한 칼날을 이리저리 흔들며, 티렉스의 시선을 끌기 시작했다. 이지혜도 정희원도 탱커형은 아니다. 이길영은 말할 것도 없고. 그러니 여기서 위험을 감수할 사람은 나밖에 없다.
“내가 시선을 끌 동안, 녀석의 후방으로―”
말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이미 이지혜와 정희원은 티렉스의 후방으로 내달리는 중이었다. 눈치가 빨라서 좋다.
크오오오오!
달려드는 녀석의 이빨을 간신히 피하자 놈의 뒷발이 날아들었다. [부러지지 않는 신념]을 휘두르기도 전에, 연이어 놈의 꼬리가 머리카락 위쪽을 스쳤다. 오싹한 전율이 전신을 훑었다. 체력 레벨이 20을 돌파했으니 저기에 맞는다고 죽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아찔한 건 아찔한 거다.
어쩌면 지금까지 운이 좋았던 건 나인지도 모른다.
툭 스치면 죽는 ‘개복치’는 유중혁이 아니라 사실 나일지도.
스각! 스파앗!
그 사이에도 정희원과 이지혜는 놈의 후방에서 착실하게 데미지를 입히고 있었다. [검술 연마]와 [검도]의 콤보. 휘황한 검격이 티렉스의 굵직한 다리에 상처들을 늘려 가고 있었다.
이대로 [귀살]까지 발동한다면, 시간은 조금 걸리겠지만 티렉스는 무리 없이 잡을 수 있을 것이다.
“형! 제가 시선을 끌게요!”
이 자식이, 뒤쪽에 빠져 있으라니까 말을 안 듣고.
“아냐, 길영이 넌―”
“제가 할 수 있어요!”
갑자기 이길영이 앞으로 나오며, 알 수 없는 수신호를 하기 시작했다. 저건 또 뭔가 싶었는데, 어디선가 날아온 거대 사마귀가 티렉스의 눈을 찌르고 달아났다. 아까 그 티타노뭐시기 하는 곤충이었다.
그오오오!
시야를 교란시키는 사마귀의 움직임에 티렉스의 눈동자가 혼란스럽게 움직였다. 현란한 손동작으로 보아, 아마 저 사마귀는 이길영이 조종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나는 새삼스럽게 이길영을 내려다보았다.
아까 도감도 그렇고, 이 녀석 사실 엄청난 사기 캐릭터 아냐?
유중혁이 탐을 낼만도 하다.
크우, 그워어어어!
이길영의 맹활약 덕에 전황은 순식간에 유리해졌다. 티렉스의 움직임은 많이 둔해졌고, 어느새 정희원과 이지혜도 눈빛에는 붉은 살기가 감돌고 있었다.
[귀살].
정신 공격에 취약하다는 단점이 있긴 하지만, 흥분도가 높아질수록 전투력이 강해지는 좋은 스킬이다. 눈동자를 불태우는 두 여자가 쾌속하게 우림을 누비는 광경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이렇게 보니 이지혜를 유중혁한테 뺏긴 게 꽤 속이 쓰리다.
그래도 잠재적 성장 가치로는 정희원 쪽이 압도적이다. ‘멸악의 심판자’는 그만큼 좋은 특성이고, 정희원은 아직 <배후 계약>도 하지 않았으니까.
슬슬 티렉스의 체력도 꽤나 깎인 것 같고, 막타를 넣어 볼까.
[‘신념의 칼날’을 발동합니다!]
나는 남은 마력을 칼날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나는 배후성도 없고, 정희원이나 이지혜만큼 날렵하지도 않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전투력이 약한 것은 아니다. 내겐 그 모든 것을 극복하는 사기템이 있다.
고오오오오!
에테르 블레이드.
[‘부러지지 않는 신념’의 특수 옵션이 발동합니다.]
[에테르 속성이 ‘불꽃’으로 변환됩니다.]
엄청난 마력이 한꺼번에 빨려 나가며, 육체의 피로도가 극심해졌다. 하지만 나중에 보충할 방법이 있으니 신경 쓰지 않는다.
순식간에 1미터 이상 늘어난 칼날에 불꽃이 휘감겼다.
나는 티라노의 후방으로 달렸다.
“다들 비켜요!”
움직임이 둔화된 티라노가 멈칫하는 순간, 나는 녀석의 꼬리를 타고 올라갔다. [균형 감각] 스킬이 없어서 몇 번이나 넘어질 뻔했지만, 놈의 표피에 칼날을 마구 박아 대는 것으로 어떻게든 떨어지는 것은 면했다.
크오오오오!
전신에서 피를 쏟는 티렉스가 바닥에 몸을 뒹굴었다. 나는 닥치는 대로 칼날을 박아 넣었다. 칼을 뽑은 상처에서 불길이 일었다.
고통스럽게 숨을 헐떡이던 티렉스의 노란 눈동자가 마지막으로 나를 노려보더니 그대로 뒤집혔다.
[최초로 7급 지룡종 ‘티라노사우르스 렉스’를 사냥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보상으로 1000코인을 획득하였습니다.]
“아······ 진짜 잡았네.”
“내가 할 수 있다고 했잖아요.”
숨을 몰아쉬던 정희원이 내 말에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티렉스 정도면 7급 괴수종 중에서도 상위권이니, 충분히 자랑스러워해도 된다. 뒤늦게 달려온 이지혜가 나를 향해 구시렁거렸다.
“내가 다 잡아 놓은 건데!”
“무슨. 한참 더 때려야 죽는 거였는데.”
나는 괜히 생색을 내며 검을 닦았다. 정희원이 물었다.
“근데 이 영화에 티라노 잡는 게 나왔어요?”
“그건 아니지만, 이게 더 재미있지 않습니까?”
“···네?”
“장르가 판타지 액션 모험이면 이 정도는 해 줘야죠.”
그 순간, 머릿속에 시스템 메시지가 떠올랐다.
[극장 주인이 바뀐 영화의 엔딩에 만족합니다.]
정희원이 황당하다는 듯 소리를 질렀다.
“엑?”
그렇다. ‘극장 던전’의 공략법은 ‘진짜 엔딩’을 보는 것이 아니다.
그랬더라면 유중혁도 이 던전을 못 깼겠지. 이 던전의 핵심은 ‘극장 주인’이 원하는 엔딩을 만드는 것이고, 참고로 이 극장 주인은 극도의 사이다패스다.
“이제 알겠죠? 그냥 다 부수면 돼요.”
즉, 엔딩에 걸림돌이 되는 것들을 다 치워버리면, 영화는 자연스레 결말을 맺게 되는 것이다.
[이제 다음 층으로 이동할 수 있습니다.]
[연구소 상층의 헬기장으로 이동하십시오.]
“조금만 있다가 이동하죠. 보상도 좀 챙겨야 되고.”
나는 그렇게 말하고 티렉스 주변을 살피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보다 먼저 들어왔던 사내들 중 하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나머지는 티렉스에게 먹히거나 찢겨 죽은 모양이었다.
“이봐요, 정신 차려요.”
“으, 으어어······.”
사내의 등에서는 계속해서 피가 쏟아지고 있었다. 티렉스의 발톱에 당한 상처. 뼈가 통째로 드러난 것으로 보아, 이미 회생은 불가능한 상태였다.
“천천히 숨을 내쉬세요.”
“쿠, 쿨럭! ······살려······.”
나는 가져온 식수를 사내에게 먹였다. 사내는 벌컥벌컥 물을 마시더니 다시금 피를 토했다. 어쩔 수 없이 급한 질문부터 하기로 했다.
“어떻게 이곳을 안 겁니까?”
“선, 선지······.”
“<선지자들>이 대체 누구죠?”
사내의 숨이 더욱 거칠어지고 있었다.
“계, 계시를······ 받은, 자들······.”
······계시?
“살고······ 싶어······.”
푸화학, 하는 소리와 함께 사내의 입에서 핏줄기가 터져 나왔다. 숨이 끊어진 사내는 그대로 축 늘어졌다. 정희원을 비롯한 일행이 뒤쪽에서 다가왔다.
“그 사람은······?”
나는 고개를 저으며 쓰러진 사내를 내려다보았다.
‘계시’라. 재미있는 헛소리다.
왜냐하면, 내가 아는 ‘멸살법’에 그와 비슷한 능력은 ‘미래시’뿐이고, 그 능력을 가진 이는 예언자 ‘안나 크로프트’ 뿐이니까.
그렇다면 답은 하나뿐이다.
······나 말고도 있었군.
하지만 나만큼 잘 아는 놈들은 아니야.
직접 오지 않고 이곳의 정보를 흘려 시험해봤다는 것이 바로 그 증거다.
“독자 씨?”
“잠시 쉬었다 가죠.”
우리는 사내의 시체를 커다란 나뭇잎으로 덮어 주고, 죽은 티렉스의 근처에 모였다. 유중혁을 쫓아가려면 서둘러야 했지만, 충분한 휴식을 취하지 못한 채 쫓아가면 놈을 만나기도 전에 일행이 전멸하는 수가 있었다.
나는 티렉스의 사체를 뒤졌다.
머리와 심장 안쪽을 찾아봤지만 아쉽게도 괴수종의 핵은 찾을 수 없었다. 그렇다고 소득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불꽃으로 인해 푹 익어버린 티렉스를 보던 정희원이 침을 삼켰다.
“···혹시 이것도 먹을 수 있을까요?”
“마력 불꽃으로 익힌 거니까 먹어도 됩니다. 안 익은 부분은 마력 화로를 써서 익히면 되고요.”
우리는 티렉스의 다리를 둘러싸고 나란히 앉았다. 자작하게 익은 티렉스 살점을 조금씩 도려내자, 모락모락 김이 올라왔다. 이길영이 탄성을 질렀다.
“새로운 고기!”
성질 급한 이지혜가 먼저 달려들어 한점을 뜯었고, 나를 비롯한 나머지 일행도 큼지막한 살점 하나씩을 집었다. 이만한 크기의 고기라니. 회사원이던 시절에는 꿈도 못 꿀 사치다. 눈을 감은 채 맛을 음미하던 이지혜가 황홀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 세상에서 제일 맛있어······.”
맛있긴 정말 맛있다.
탱탱한 근육 사이로 지방이 적당히 휘감겨 있어서, 땅강아쥐와는 육질의 격이 다르다. 한 입 베어 물 때마다 혀끝에 감겨드는 쫀득함이란······ 유상아가 있었더라면 분명 울면서 먹었을 텐데.
그렇게 한참이나 말없이 고기를 뜯고 나니, 포만감과 함께 체력이 회복되는 것이 느껴졌다. 상급 괴수종의 고기는 이처럼 특별한 효능들이 있다. 간혹 못 먹는 것도 있으니 주의해야 하지만. 정희원이 아쉽다는 듯 말했다.
“후우······ 잘 먹었다. 진짜 맛있는데 더 못 먹어서 눈물 날 것 같아요.”
적당히 휴식을 취한 후, 우리는 섬 중앙에 있는 <연구소>로 곧장 향했다.
가는 길에 랩터 몇 마리와 마주쳤지만, 티렉스도 잡은 마당에 랩터를 못 잡을 리가 없다.
실험실 곳곳에는 플라스크들과 앰플들이 즐비하게 놓여 있었다. 작은 인큐베이터에는 배아 중인 공룡들이 들어있었고, 혈액 샘플 채취를 위한 호박석들도 있었다. 없는 것은 오직 사람뿐이었다.
내부동으로 들어가자 눈길을 끄는 아이템들이 몇 개 있었다.
[체력 강화 앰플]
[마력 강화 앰플]
[민첩 강화 앰플]
[근력 강화 앰플]
역시 있구만. 나는 일행들이 정신이 팔린 틈을 타서 앰플들을 챙기기 시작했다. [어룡의 핵]과 마찬가지로, 이것들 역시 초반 시나리오에서만 얻을 수 있는 몇 안 되는 종합 능력치 성장 아이템이었다.
심지어 앰플은 한두 병이 아니었다. 족히 스무 병에 가까운 양. 이거라면 폭발적으로 능력치 레벨업이 가능할 것이다. 종합 능력치에 투자할 코인을 계속 아꼈던 것은, 바로 이 히든 시나리오를 예상했기 때문이었다.
이 앰플들은 해당하는 능력치의 레벨이 30 미만일 때만 쓸 수 있었다.
“아저씨, 지금 뭐 챙겨?”
······하여간 귀신 같은 계집애가.
“뭐야, 체력 강화 앰플?”
앰플 하나를 가로챈 이지혜의 눈이 크게 떠졌다.
“혼자 다 먹으려는 건 아니지?”
“다 먹긴. 당연히 나눠 주려고 했지.”
“언니, 이것 좀 봐요! 이 아저씨가······!”
소란에 다른 일행들도 가까이 다가왔다. 아이템 정보를 확인한 정희원도 깜짝 놀라 말했다.
“맙소사······ 이런 아이템도 있어요?”
“···히든 시나리오니까요.”
나는 조금 못마땅한 투로 말했다.
젠장, 이건 좀 곤란한데. 티렉스를 나 혼자 잡은 건 아니니까 혼자 먹는 것도 양심에 좀 찔리지만, 나눠주기도 아까운데······.
[독식을 좋아하는 몇몇 성좌들이 상황을 못마땅하게 생각합니다.]
근력 강화 앰플을 뚫어지게 보던 이지혜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근력 강화 앰플은 나 주면 안 돼? 나 근력 엄청 모자라단 말야.”
[전용 스킬, ‘등장인물 일람’을 사용합니다!]
종합 능력치만 포함한 요약 버전으로.
<등장인물 요약 일람>
인물 : 이지혜
전용 특성 : 상처 받은 검귀 (희귀)
전용 스킬 : [검술 연마 Lv.4], [귀살 Lv.1], [절대감각 Lv.2], [귀신 걸음걸이 Lv.2]
성흔 : [해상전투 Lv.1], [대군지휘 Lv.1]
종합 능력치 : [체력Lv.13], [근력Lv.17], [민첩Lv.13], [마력Lv.10]
이 요망한 계집애가 구라를······.
“응? 희원 언니, 저거 제가 가지면 안 돼요?”
“음, 독자 씨가 발견했으니까, 독자 씨가 결정하는 게······.”
솔직히 다른 일행들한테 가는 건 상관없지만, 이지혜한테 주는 건 조금 아깝다. 얜 어차피 유중혁 라인인데.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당신의 공평함을 기대합니다.]
공평함이라······ 그래, 내가 아는 가장 공평한 게임이 하나 있지.
나는 씩 웃으며 말했다.
“가위바위보 어때?”
“가위바위보?”
“마지막에 이기는 사람이 하나씩 갖는 걸로.”
순간 이지혜의 얼굴에 탐욕이 스쳤다.
“좋아!”
“뭐······ 독자 씨가 원한다면 그렇게 해요. 근데 괜찮겠어요? 잘못하면 몰아주기가 될 수도 있는데.”
“그럼 그 사람 운이 좋은 거죠, 뭐.”
이지혜가 방방 뛰었다.
자기도 한 몫 챙길 수 있다고 생각하니 들떴나 본데, 그렇게는 안 될 거다.
“일단 ‘근력 강화 앰플’부터 시작하죠.”
나는 근력 강화 앰플을 내놓고, 이지혜를 향해 말했다.
“넌 나랑 하자.”
“나 가위바위보 잘하는데 괜찮겠어?”
“아하, 그러셔?”
나는 그런 이지혜를 바라보며 싱긋 웃었다.
[전용 스킬, ‘전지적 독자 시점’ 1단계가 발동합니다!]
[등장인물, ‘이지혜’가 ‘가위’를 준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