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9화

369화 Episode 70. 전할 수 없는 이야기 표정이 굳어진 안나 크로프트가 슬그머니 등 뒤로 단검을 뽑아 들었다. “······패왕.” 그러거나 말거나, 유중혁은 성큼성큼 걸어 나왔다. “끼리끼리 잘 다니는군. 미래를 알고 있다는 사실에 동질감이라도 느끼는 모양이지?” “······미래의 정보를 아는 건 당신도 마찬가지잖아요?” “내가 겪은 건 미래가 아니야.” 쿠구구구구! “그건 모두 ‘있었던 일들’이다. 과거지.” 있었던 일들. 내가 본 그 이야기를, 유중혁은 자신의 몸으로 직접 살았다. 수천 번의 죽음을 맞이하면서. 유중혁의 손에 쥐어진 [흑천마도]가 그 세월에 감응하듯 거칠게 울었다. 안나 크로프트가 내 쪽을 흘끗 돌아보았다. 내가 말했다. “가세요. 저 녀석은 날 만나러 온 거니까.” “다음번엔 당신의 입으로 직접 목적을 들을 수 있길 바라죠.” 안나 크로프트는 그 말을 남기고 포탈 속으로 훌쩍 사라져버렸다. 확실히, 그녀가 지금 이곳에 남을 이유는 없다. 지금껏 나를 도와준 것만으로도 그녀는 자신의 빚을 충분히 갚았으니까. 유중혁은 떠나는 안나를 잡지 않았다. 평소였다면 집요하게 뒤를 쫓아 안나 크로프트의 목을 베었을 텐데도, 그러지 않았다. “유중혁.” 나는 유중혁을 불렀다. 유중혁은 나를 바라보지 않았다. 그저, 텅 빈 포탈의 입구를 가만히 들여다볼 뿐. 나는 다시 한번 녀석을 불렀다. “들어줘. 그래도 한때는 날 동료라 불렀잖아.” 유중혁이 나를 돌아보며 천천히 칼을 빼들었다. “한때는.” 그 차가운 목소리에 깃든 분노를 나는 헤아릴 수 없었다. [전용 스킬, ‘전지적 독자 시점’을 발동합니다!] 그렇게, 나는 다시 한번 전지(全知)의 저주로 발을 내딛는다. [해당 인물에 대한 당신의 이해도가 부족합니다!] 하지만 유중혁의 내면은 나를 허락하지 않았다. 눈앞의 인물은 지금껏 내가 알아 왔던 인물이 아니라는 듯이. “무슨 이야기를 할 것인지는 알고 있다. 그 책에 관한 이야기겠지.” “······.” “너는 그 이야기를 통해 내 삶을 들여다보았고, 내 삶을 유희 거리로 삼았다. 내가 더 알아야 할 것이 있나?” 나는 변명하지 못했다. 그것은 사실이었으니까. 내가 한 짓은, 성좌들이 한 짓과 다를 바가 없었으니까. “나는······.” 안다. 알고 있다. 하지만······. 하지만, 그게 저 녀석이 느낀 배신감의 전부일까. [해당 인물에 대한 이해도가 조금씩 상승합니다!] 유중혁은 나를 기다려주었다. 마치, 자신이 끝내 찾아내지 못한 어떤 누명의 실마리를 찾으려는 재판관처럼. 하지만,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나는 알 수 없었다. ‘전지적 독자 시점’을 통해 흘러들어온 유중혁의 감정이, 내 머릿속을 까마득하게 채워가고 있었다. 내가 알아 왔던 문장들이, 내가 모르는 문장들로 덮여가고 있었다. 내가 해야 했던 말들도, 하고 싶었던 말들도 그 칠흑 같은 감정의 파도에 묻혀 사라지고 있었다. 그리고 유중혁의 검이 움직였다. 그 순간까지도 실감이 나지 않았다. 녀석이 정말 나를 죽일 것이라는 게. 지금까지 쌓아왔던 그 수많은 시간들을 뒤로하고, 녀석이 나를 죽일 것이라는 게. [‘선악과’가 당신의 감정에 영향을 미칩니다!] [‘제4의 벽’이 격렬하게 흔들립니다!] 코앞까지 날아오는 검극을 본 순간, 죄책감과 함께 억울함이 치솟았다. [‘선악과’가 당신의 어두운 감정들을 이끌어 냅니다!] 나는 제법 열심히 했다. 시나리오가 시작된 후, 정말 열심히 살았다. 내가 읽어온 것들을, 내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실천했다. 유중혁이나 일행들을 상처 입힐 생각은 없었다. 내가 생각한 것은 그저 시나리오뿐이었다. 어떻게 하면 피해를 줄일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온전한 결말에 안정적으로 도달할 수 있을까. 오직 그것뿐이었다. 그것뿐이었는데. 대체 무엇 때문에 일이 이렇게 된 걸까? 까아아앙! 파찰음과 함께 새파란 불꽃이 튀었다. “뭘 눈만 멀뚱멀뚱 뜨고 있어 멍청아!” 한수영이 그곳에 있었다. * 한수영이 3번 중섬에 온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소섬 시나리오를 진행하던 중, 그녀는 꿈을 꾸었다. 백색의 코트를 걸친 사내가, 검은 코트의 사내에게 죽는 꿈. 아주 오래된 개꿈이었기 때문에, 한수영은 그 꿈을 꾸면서 ‘또 그 꿈이구만’하고 중얼거렸다. 결국 꿈은 꿈일 뿐이고, 꿈은 실제로 벌어지지 않는다. 마치 소설이 현실이 될 수 없는 것처럼. ―3회차의 나는 좀 덜떨어졌네. 몇 번이고 같은 장면을 보여줘도 못 알아듣는 걸 보면······. ‘뭐야?’ 한수영은 소스라치며 목소리가 들려온 쪽을 돌아보았다. 그곳에, 검은 코트를 입은 여자가 있었다. 자신과 비슷한 체구. 마치 누군가가 고의로 지우기라도 한 것처럼 보이지 않는 얼굴. 그 얼굴이, 계속해서 말하고 있었다. ―아무리 봐도, 이대로 가면 그쪽 회차 망할 것 같은데······. 한수영은 본능적인 공포를 느끼며 두어 걸음을 물러섰다. 하지만 이곳은 그녀의 꿈. 어떤 인간도 자신의 꿈속에서 도망갈 수는 없다. ―난 말이야. 다른 녀석의 모략을 부수는 게 참 좋아. 꿈속의 인물이 손을 뻗는 순간, 알 수 없는 정보들이 한수영의 머릿속으로 흘러들었다. [‘예상 표절’의 힘이 당신의 안에서 깨어납니다!] 그리고 한수영은 잠에서 깨어났다. 머릿속에 알 수 없는 정보들이 떠돌았고, 제멋대로 움직인 의식이 그 정보들을 연역적으로 잇기 시작했다. 그리고 잠시 후, 한수영의 머릿속에는 다음과 같은 문장이 나타났다. ―유중혁은 3번 중섬으로 향할 것이다. 왜 그런 문장이 떠올랐는지 모르겠다. 다만 한수영은 그 문장을 한 번 따라가 보기로 했다. 이 정체불명의 꿈이 무엇인지, 그 안에 등장했던 인물이 누구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래야만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한수영은 이곳에 도달했다. “비켜라. 네겐 볼 일 없다.” 무시무시한 눈길로 자신을 노려보는 유중혁. 얼빠진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김독자. 한수영은 천천히 숨을 들이켰다. 꿈이 자신에게 무엇을 보여주고자 한 것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한수영은 자신의 역할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평소대로 껄렁한 웃음을 지으며, 한수영이 말했다. “내가 너 언젠가 사고 칠 줄 알았어. 그 ‘유중혁’이 그리 쉽게 변할 턱이 없지.” “비키지 않으면······.” “왜, 죽이기라도 하게? 그런 짓을 해서, 네가 얻는 건 뭐지? 지금까지 네가 속은 시간들을 보상받을 수 있기라도 한 거냐?” 유중혁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그의 검극이 사라졌다. 허공을 격하고 쏘아지는 유중혁의 검을, 한수영이 피식 웃으며 받아냈다. “······하여간 사람 말 안 듣는 건 너나 김독자나 똑같아.” [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포효합니다!] 전신에 깃든 [흑염]의 힘이 유중혁의 검극과 부딪쳤다. 2세대의 힘을 업은 유중혁의 검격은 무거웠다.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문 채, 한수영은 자신의 힘을 개방했다. 유중혁은 강하다. 하지만 그녀라고 놀고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설화, ‘전설적인 소드마스터의 제자’가 빛을 발합니다!] 이곳에 오기 전, 온갖 용을 써서 간신히 얻어낸 설화. 소드마스터의 힘이 그녀의 전신에 감돌며 용솟음쳤다. 츠츠츠츠츠츳! 다른 곳에선 몰라도 이곳에서라면. “사람이 말을 하면······.” 짙푸른 스파크 사이로 강기화 된 [흑염]이 유중혁을 향해 쇄도했다. “말을! 좀! 들어!” 끊어지는 음절에 맞춰 쏟아지는 강기의 다발. 뜻밖의 거센 저항에 유중혁의 눈동자가 동요했다. 한수영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고함을 질렀다. “김독자는 그냥 소설 하나 읽었을 뿐이야! 지지리 재미없고 긴 소설!” 조금씩 밀리는 유중혁을 보며, 한수영은 자신이 해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것은 어려운 갈등이 아니다. 사람이 만든 말로 인해 빚어진 오해. 그러니, 말로 풀 수 있는 것이라고 믿었다. “대화를 해! 서로 터놓고 이야기를 하라고! 다른 사람들처럼!” 집요하게 움직이는 [흑염]의 불꽃이 유중혁의 검으로 옮겨붙고 있었다. 유중혁은 냉랭히 그 불꽃을 떨쳐 내며 말했다. “너는 모른다.” “나도 알아.” 냉정히 자신을 배제하는 그 말투에, 한수영이 으르렁거렸다. “뭐가 그렇게 분해? 김독자가 네 정보를 알고 접근한 거? 너도 똑같잖아. 저놈이랑 똑같이 정보를 선점하고 다른 사람을 기만해왔잖아.” 그 말이 불씨가 된 것일까, 유중혁의 눈동자에도 분노가 깃들었다. 허공에서 다시 한번 검이 부딪쳤다. “물론 네가 진심이었던 건 알아. 그 사람들 살리기 위해서, 더 나은 세계로 도달하기 위해서 그랬던 거 안다고. ······김독자는 어땠을 것 같아?” “······.” “대체 어떤 인간이 등장인물이 죽는다고 자기 목숨을 던지냐고!” 유중혁의 검이 멈칫하는 것을 보며, 한수영은 계속해서 말을 쏟아냈다. “지금까지 김독자가 어떻게 해왔는지 잊었어? 그 노잼 소설 좀 읽었다고, 3회차에서 쌓아온 모든 걸 부정해버릴 셈이야?” 유중혁의 격이 움츠러들고 있었다. 이제 거의 다 왔다. 한수영은 느낄 수 있었다. 한 마디만 더하면, 이 불필요한 싸움을 멈출 수 있다. “침착하게 잘 생각해.” 하지만 마지막 순간, 한수영은 한 발을 잘못 내딛고 말았다. “넌 그런 캐릭터 아니니까.” “······캐릭터?” 유중혁의 표정이 변하고 있었다. 그것은 질문이 아니었다. 뒤늦게 아차 싶었지만 이미 뱉은 말을 번복할 수는 없었다. “너도 똑같군.” 맞댄 검과 검의 사이에 막대한 마력파가 번지기 시작했다. 한수영의 검이 고통스럽게 울음을 토했다. [흑염]의 기파가 일방적으로 밀리고 있었다. [설화, ‘신화를 삼킨 성화’가 포효합니다!] 유중혁이 쌓은 [거대 설화]가 폭주하고 있었다. “1863회차의 네가 한 짓을 보았다.” “1863회차? 뭔 소릴―” 순간, 한수영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멸살법 1863회차의 세계선. ······아, 거기 너도 있더라. 어느 쪽이 본체인진 모르겠지만. 분명 김독자가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설마?’ 머릿속에서 합쳐지는 정보들. 1863회차에도 자신은 존재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자신은 또 다른 회차를 살고 있다. 그렇다면 꿈속에서 본 그 존재는······. 한수영이 자신의 해답에 도달하는 순간, 찰나의 빈틈이 생겼다. 유중혁의 검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 왜 움직일 수 없었을까. 어째서, 한수영과 같이 싸우지 않았을까. 나를 대신해 이야기하는 한수영을 보며, 왜 같이 목소리를 내지 못한 것일까. “넌······ 네 이야기 잘 못하잖아.” 나는 쓰러진 채 나를 올려다보는 한수영을 안아 들었다. 그녀의 허리에서 울컥거리며 피가 쏟아지고 있었다. 실감이 나지 않을 정도로 생생하고 붉은 피. 그 피를 흘리며, 한수영이 말하고 있었다. “김독자. 난 네가 바라는 결말을 알아.” 여느 때처럼 장난스러운 미소. 내 뺨에 묻은 피를 닦듯, 한수영의 손이 내 볼을 닦으며 중얼거렸다. “불쌍한 놈······.” 나는 한수영의 피를 지혈하며 허겁지겁 약재를 꺼냈다. 내상이 너무 심각했다. 무자비한 상처였다. 2세대의 검강에 의해, 그녀의 내부는 완전히 파괴되어 있었다. 살릴 수 있다. 조금만 더 시간이 있다면. 제대로 된 의원을 찾고, 치료를 한다면. ······하지만 그럴 수 있을까? 내 뺨에 닿아 있던 한수영의 손이 툭 떨어졌다. 나는 한수영의 이름을 불렀다. 몇 번이고, 다시 몇 번이고. 하지만 한수영은 일어나지 않았다. 대신 들려온 것은 유중혁의 목소리였다. “일어나라, 김독자.” 조금의 죄책감도, 동요도 느낄 수 없는 목소리. 그 순간 내 안에서도 뭔가가 툭 끊어졌다. 나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유중혁.] 머릿속에서 설화들이 들끓고 있었다. ―너무 커서 제대로 읽기 버거운 설화들이 있지. 중심을 잘 잡지 않으면, 언제든 설화에 휩쓸리게 될 거다. 유호성은 그렇게 말했다. 나도 잘 알고 있다. 설화가 커질수록, 내가 짊어질 부담도 늘어난다. 그렇기에 나는 동료를 만들었다. 함께 역사를 쌓았고, 설화를 만들었다. 원작의 유중혁과는 다른 결말에 도달하기 위해, 그렇게 여기까지 왔다. 그리고 그 결과가 이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내가 계속 읽어 나가야 할까. [거대 설화, ‘마계의 봄’이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모두가 함께 도달할 마지막을 상상해왔다. 그런 이야기가 분명 가능할 것이라 믿었다. [거대 설화, ‘신화를 삼킨 성화’가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하지만 그게 불가능하다면. 지금껏 내가 쌓은 시간들이, 완전히 무용한 것이었다면. [‘마왕화’를 발동합니다.] 내가 꿈꾸는 결말은, 더이상 아무런 의미가 없다. [너를 죽이겠다, 유중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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