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5화
355화
내 발언에 일행들의 표정이 변했다.
정희원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고, 이지혜는 저게 무슨 말인가 하는 표정이었다. 이현성은 커다란 눈을 끔뻑이고 있었다. 그리고 신유승은······.
「김 독자 잘못 된 생각 이 야」
머릿속으로 [제4의 벽]의 말이 들려 왔다.
「늦 지 않았 어 지금 이라 도」
그것이 [제4의 벽]의 의지인지, 아니면 내 마음의 약한 부분인지는 모르겠다. [제4의 벽]은 내 감정을 어느 정도 반영하니, 둘 다 진실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느 쪽이든, 이번만큼은 나도 결단을 내렸다.
“제 말을 잘 이해하기 힘드시다는 거, 알고 있습니다.”
나는 이 이야기를 일행들에게 해야만 한다.
“천천히, 처음부터 이야기해드리겠습니다.”
그렇게 오랫동안 이야기를 해본 것은 간만이었다.
어느 날 내가 읽던 소설이 현실이 되었고.
그곳에서, 내가 당신들을 만나게 되었던 이야기.
시간상 모든 이야기를 하지는 않았지만, 거짓말을 하지도 않았다.
일행들을 만나기 전부터 일행들에 대해 알고 있었던 것.
내가 미래를 알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제대로 말하지 않았던 것.
혼자만 정보를 독점한 채, 일행들을 기만했던 것.
나는 그 모든 이야기들을 토해냈다.
마치 묵은 어둠을 꺼내듯이.
일행들과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 한수영이 이마를 짚은 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심정은 이해한다.
1863번째 회차의 한수영도 그랬으니까.
하지만 나는 한수영처럼 살아갈 수는 없었다.
이 이야기는 제대로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제대로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어떤 이야기는 반드시 전해져야만 한다.
언젠가······ 유중혁이 그랬던 것처럼.
「“나는 회귀자다.”」
어쩌면 유중혁 또한 나와 같은 심정이었을지도 모른다.
자신이 미래를 알고 있고, 몇 번이고 같은 이야기를 겪었으며, 이미 무수한 회차에서 일행들을 만났다는 것.
그들을······ 떠나보냈다는 것.
어떤 요령도 없이 묵묵히 그 이야기를 털어놓던 유중혁의 심정을, 나는 이제 이해할 수 있었다.
“······그래서, 여기까지 오게 된 겁니다.”
그리고 내 이야기는 끝났다.
하지만 이야기가 끝난 후에도 먼저 입을 여는 사람은 없었다. 내 이야기를 못 알아들어서는 아닐 것이다. 충분히 긴 이야기였고, 어린아이라도 알아들을 수 있는 내용이었으니까. 그럼에도 일행들은 입을 열지 않았다.
나는 고개를 숙인 채 말을 이었다.
“여러분 모두에게, 진심으로 사과하고 싶습니다. 이제야 이런 이야기를 하게 되어, 정말 죄송합니다.”
알고 싶었다. 일행들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는지.
하지만 [전지적 독자 시점]을 사용하지는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까지 스킬을 사용해 그들의 내면을 읽는다면, 그것이야 말로 진짜 기만이니까.
이번만큼은 스킬을 쓰지 않고 내 스스로의 힘으로 부딪치고 싶었다.
그들이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고 어떤 것을 느끼든, 그들이 직접 선택하고 결정한 행동이 진짜 그들의 것이라 믿고 싶었다.
서서히 고개를 들었을 때, 나는 이지혜와 눈이 마주쳤다.
눈시울이 붉어진 이지혜. 그 일렁이는 눈동자를 보는 순간, 나는 불현듯 깨닫고 말았다.
나는 이미 저 눈동자를 알고 있다.
「“그럼 사부가 미래에 대해 알고 있었던 건, 전부······.”」
왜냐하면, 그 눈은 유중혁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의 이지혜와 정확히 같은 것이었으니까.
천천히, 이지혜의 입이 열렸다.
“그럼 지금까지 아저씨가 미래에 대해 알고 있었던 게, 전부······.”
마치 원작의 등장인물이 주어진 각본을 읽듯, 이지혜가 말했다.
나 역시 각본처럼 그에 대답했다.
「“그렇다.”」
“그래.”
으드득 이를 간 이지혜가 나를 향해 말했다.
“그래서 지금······ 우리한테 그 이야길 하는 이유가 뭐야?”
상처받은 검귀가 분노하고 있었다.
이미 원작을 읽었기에, 나는 그녀의 이어질 말을 예상할 수 있었다.
「“당신한테 우린 대체 뭐였는데?”」
고개를 숙인 이지혜의 어깨가 가늘게 떨렸다.
이어질 상황이 물 흐르듯 떠올랐다.
이지혜는 칼을 뽑을 것이고, 분을 이기지 못해 나를 공격할지도 모른다.
원작에서도 그런 일은 몇 번이나 있었으니까.
그러나 이지혜가 선택한 것은, 내가 전혀 알지 못하는 방법이었다.
“아저씨가 미래를 알고 있었다고 쳐.”
“······.”
“그 모든 게 계획되어 있었고, 아저씨 목적을 위해서 우릴 이용했던 거라고 쳐. 우리가, 그 빌어먹을 ‘멸살법’이란 소설의 등장인물들이고, 모든 것이 다 정해져 있었다고 치자고!”
이지혜는 울면서, 파랗게 질린 입술을 깨문 채 나를 보고 있었다.
“그럼······ 아저씨는 왜 우릴 위해서 몇 번이나 목숨을 던졌던 거야?”
볼을 타고 떨어지는 눈물을 보며, 나는 몇 번이고 입을 열기 위해 애썼다.
생각지 못했던 질문이었다.
예상에 없었기에, 답할 수 없는 질문이었고······.
“대답해! 우리가 정말 소설 속 ‘등장인물’이라면, 아저씨는 지금까지 왜 우릴 위해서 몇 번이고 죽었던 거냐고!”
내가 읽어온 ‘멸살법’에는, 해답이 없는 질문이었다.
[‘제4의 벽’이 강하게 흔들립니다.]
분하다는 듯 두 눈을 닦은 이지혜가 내 어깨를 치고 지나갔다.
황급히 뒤따라 일어선 정희원이 그녀를 쫓아가며 말했다.
“······독자 씨, 우리 조금 있다가 이야기해요.”
어쩔 줄 모르는 얼굴의 신유승이 나를 향해 머뭇거리며 손을 뻗다가 정희원을 쫓아 나갔고, 나사가 빠진 사람처럼 멍한 눈을 하고 있던 이현성도 고개를 숙이며 방을 나갔다.
남은 사람은 이제 한수영과 이설화, 그리고 이길영뿐이었다.
이길영은 복잡한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고, 이설화는 충격을 받았는지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런 이설화의 등을 토닥여주던 한수영이 내게 쏘아붙였다.
“김독자, 잠시 나갔다 와.”
*
고적한 병실. 나는 잠든 어머니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일행들이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았기에, 막간을 이용해 방문한 병실이었다.
얼마 전 있었던 대수술이 끝난 이후, 어머니는 온종일 지금처럼 잠을 잤다. 수척한 뺨에 그늘진 눈가. 파리한 어머니의 얼굴을 들여다보고 있자니, 언젠가 구치소로 면회를 갔던 기억이 떠올랐다.
자신을 방문해 온종일 소설 이야기를 떠드는 아들을 보며, 어머니는 과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얼굴이 어두워 보이는구나.”
“······깨셨어요?”
“네가 들어올 때부터.”
아직 기력이 온전치 않은 목소리였다.
나는 헝클어진 담요를 끌어와 어머니의 목을 덮어 주었다.
어머니가 희미하게 웃었다.
“멸망이 좋구나. 아들한테 보살핌을 다 받고.”
“빨리 낫기나 하세요.”
“말해보렴. 뭐라도 좋으니.”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멸살법’ 154회차에서 유중혁이 일행들에게 회귀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을 때······.”
“일행들에게 ‘멸살법’에 대해 이야기한 모양이구나.”
“······어떻게 아셨어요?”
나를 바라보던 어머니가, 앙상한 손을 뻗어 내 손을 잡았다.
“저를 욕할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들을 기만하고, 정보를 숨긴 이유를 캐물을 거라 생각했어요.”
“그런데 아니었던 모양이구나.”
“······어떻게 용서를 구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나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대답해! 우리가 정말 소설 속 ‘등장인물’이라면······ 아저씨는 왜 지금까지 우릴 위해서 몇 번이고 죽었던 거냐고!
귓가에 맴도는 이지혜의 목소리.
어머니가 말했다.
“그것이 ‘용서’의 문제인지 아닌지는 네가 결정할 게 아니란다.”
“그러면······.”
“아마 네 뒤에 있는 사람이 알려줄 수 있을 것 같구나.”
무슨 말인가 싶어 고개를 돌리자, 병실 문 앞에 정희원이 서 있었다.
나는 어머니에게 양해를 구하고 병실을 나갔다.
정희원이 볼을 긁으며 물었다.
“잠시 걸을까요?”
우리는 병동의 복도를 걸었다. 어떤 장식도 찾을 수 없는 심플한 복도. 보아하니 유중혁의 취향 같은데······ 이 녀석, 지난 3년 동안 [공장]을 제멋대로 뜯어고쳐 놓은 모양이었다. 실제로 이 병동 복도의 끝에는 유중혁이 입원한 병실이 있었다.
잠시 창밖을 보던 정희원이 먼저 입을 열었다.
“말해줘서······ 고마워요.”
정희원이 그 이야기를 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민을 했을지 나는 알 수 없었다. 표정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더 그랬다.
창밖으로 일행들의 모습이 보였다. 이길영과 투닥대는 신유승, 이지혜를 위로하는 이현성과 이설화의 모습도 있었다.
“다들 괜찮을 거예요. 지혜는 좀 더 시간이 걸릴 것 같지만······.”
“희원 씨는······.”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정희원이 고개를 돌려 나를 보았다. 평소처럼 빙긋 웃는 얼굴. 내가 입을 다물자 정희원이 물었다.
“너무 멀쩡해서 놀랐어요?”
“아닙니다.”
“아니긴요.”
정희원은 내가 ‘미래 정보’를 알고 있다는 사실을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아마도, ‘등장인물’들 중에서는 나에 관해 제일 많이 알고 있는 인물일지도 모른다.
정희원이 기지개를 켜며 말했다.
“별일도 아닌데요 뭐. 몬스터도 나오고 도깨비도 존재하는 세상인데······, 소설이 현실이 된 게 뭐 특별한 일이라고.”
“······.”
“그나저나 이제 이해가 가네요. 독자 씨가 ‘본래의 미래’에는 내가 없다고 했던 말. 그거, 독자 씨가 말한 소설에는 내가 나오지 않는다는 뜻이었죠?”
“······그렇습니다.”
구름처럼 동동 뜬 비유가 신유승의 머리 위에서 찰떡처럼 몸을 퉁기고 있었다.
정희원이 말했다.
“그럼 난 독자 씨 덕분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거네요.”
“저기, 희원 씨―”
“고마워요, 날 발견해줘서. 비꼬는 거 아니고, 진심으로 말하는 거예요.”
알고 있다. 정희원이 나를 놀릴 때 쓰는 말투는 이미 익숙하니까.
하지만 그렇기에,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괜히 혼자 또 침울해져서 기운 잃지 말고, 앞으로도 잘 부탁해요. 기왕이면 승진도 좀 빨리빨리 시켜주고. 자, 이건 힘내자는 뜻에서 하는 악수.”
내 손을 끌어당긴 정희원이 강한 힘으로 내 손을 움켜잡았다.
갑작스레 파고든 그 온기에, 속에서 울컥 뭔가가 올라왔다.
나는 입술을 굳게 깨물었다.
「정희원이라고, 그저 괜찮을 턱이 없는데.」
굳게 쥔 정희원의 손에서 심장이 뛰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도 슬플 것이다. 그녀도 괴로울 것이고, 그녀도 힘들 것이다. 그런데도······.
잠시 내 손을 꽉 잡고 있던 정희원이 머쓱한 듯 웃으며 손을 놓았다. 그리고 물었다.
“독자 씨, 근데······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
“예, 물어보세요.”
“이 세계가 ‘소설’이라면, 어딘가엔 주인공도 있다는 뜻이잖아요.”
······역시, 정희원은 날카로웠다.
나는 ‘멸살법’에 관한 이야기를 일행들에게 했지만, 그 이야기의 주인공이 누구인지는 밝히지 않았다.
하지만 정희원은 이미 그 ‘주인공’이 누구인지 눈치챈 모양이었다.
정희원의 시선이 병동의 끝을 어림했다.
“그래서 싸웠던 건가요?”
“아직 정확히 얘길 나눠본 건 아니지만······, 그런 것 같습니다.”
“이왕 시작한 일이니까, 제대로 끝은 봐야 해요. 알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사람은 쉽지 않을 거예요.”
알고 있다.
하지만 피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
그 후 이틀 동안, 나는 종일 유중혁의 병실에 있었다.
다른 일행들과는 거의 마주치지 못했다. 걱정은 되었지만, 그래도 마음을 차분히 갖기로 했다.
일행들에게도 생각할 시간이 필요할 것이라 믿었다. 일행들이 준비가 되면, 그때 다시 이야기해도 늦지 않으니까.
유중혁은 여전히 깨어나지 않았다.
“육체의 상처는 거의 회복되었는데, 아무래도 정신의 문제인 것 같아요.”
“정신의 문제요?”
“본인이 깨어나길 거부하는 것 같달까······ 어쩌면 심한 충격을 받을 만한 일이 있었는지도 모르겠네요.”
아일렌은 그렇게만 이야기했다.
그녀가 설화 팩을 교환한 후 자리를 비우자, 병실에는 나와 유중혁만 남았다.
둥둥 떠다니는 먼지가 녀석의 코에 앉았다. 나는 그런 유중혁을 보다가 무심코 입을 열었다.
“네가 먼저 내 멱살 잡고 다리 아래로 던졌잖아.”
녀석이 듣지 못한다는 걸 알면서도, 뭔가 이야기하고 싶었다.
「“그만 이 손 놓고 꺼져, 빌어먹을 새끼야.”
“믿겠다. 확실히 너는 예언자가 맞군.”」
다리에서 처음 녀석과 조우했던 그날의 일. 갑자기 피식 웃음이 나왔다.
“솔직히 넌 나보고 뭐라고 말할 처진 아니잖아. 너도 회귀자면서······ 너 때문에 내가 얼마나 많이 죽을 뻔 했는지 아냐?”
한 번 말문이 열리자, 기억은 폭포처럼 쏟아졌다. 마치 판도라의 상자를 건드리기라도 한 것처럼 쏟아지는 기억들. 새삼 정말 많은 시간이 흘렀다는 게 느껴졌다.
나는 어느새, 이 녀석과 정말 많은 시간을 헤쳐온 것이다.
“누구보다 널 잘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요즘은 잘 모르겠다. ‘범람의 재앙’ 때는 왜 그런 거냐?”
「“······그 녀석은 나의 동료다.”」
“너 왜 나보고 ‘동료’라고 했던 거냐? 평소엔 절대 그런 말 안 하는 놈이······. 그래놓고 암흑성에선 나 찔러 죽이고. ······그땐 내가 죽이라고 하긴 했지만.”
「“김독자! 안 된다! 김독자!”」
하나하나 기억을 돌이킬 때마다 무수한 감정들이 나타났다가 사그라졌다.
그때는 정말 심각했었던 시나리오들이, 지나고 나니 이야기가 되었다.
우리가 쌓은, 설화로 남았다.
“그래도, ‘혁명가 게임’ 땐 고마웠다. 그땐 덕분에 살았어. 근데 그때도 이상해. 너 왜 내 이름 팔아서 엉뚱한 공단 친 거냐? 뭐······ 보나마나 나 엿 먹이려고 그랬던 거겠지만······.”
이런저런 일들을 생각하다 보니 서서히 졸음이 쏟아졌다.
나도 그동안 잠을 제대로 못잤으니······.
불투명한 의식 속에서도 하소연은 계속되었다.
녀석과 함께 싸웠던 시간들이, 마치 ‘멸살법’을 읽듯 스쳐 지나갔다.
질문의 재앙.
최강의 희생양.
피스 랜드.
시나리오의 무덤.
마왕 선발전과 기간토마키아······.
녀석과 함께 싸우지 않은 전장을 찾기가 더 어려울 정도였다.
그 시간들을 돌이키며, 나는 생각했다.
‘어쩌면, 괜찮지 않을까.’
내가 아는 유중혁이라면.
어떻게든 설득할 수 있지 않을까.
한 번도 우리는 제대로 이야기해본 적이 없었으니까.
시간을 들여서, 차근차근 설명을 한다면 어떨까.
다른 사람도 아닌 녀석이라면······.
멀리서 어렴풋이 뒤돌아선 유중혁의 모습이 보였다.
나는 이것이 꿈인 것도 잊고, 녀석을 향해 다가갔다.
‘유중혁.’
그 순간, 찌릿하는 통증과 함께 머릿속을 스치는 말이 있었다.
그것은 ‘멸살법’의 한 장면이었다. 안나 크로프트에게 배신당해, 오래도록 비참하게 살았던 유중혁.
그런 유중혁이 마지막으로 남겼던 말.
「“나는 너를 절대로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뒤돌아선 유중혁이, 나를 향해 말하고 있었다.
녀석의 손에 쥐어진 [흑천마도]에서 뿜어져 나오는 살기.
「“김독자.”」
목덜미가 서늘해지는 느낌이 드는 순간, 나는 소스라치며 잠에서 깨어났다.
땀에 젖은 채로 한참을 헐떡인 후에야, 나는 그것이 꿈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창밖으로 어슴푸레한 달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휑한 병실.
나는 천천히 눈을 비볐다.
그리고 뭔가가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유중혁?”
텅 빈 침대. 병실 어디에도 유중혁이 보이지 않았다. 뽑힌 링거가 덩그러니 허공을 맴돌고 있었다. 다급한 마음에 자리에서 일어나 주변을 둘러 보았지만, 어디에서도 유중혁의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침대 위엔, 익숙한 디자인의 회중시계가 남아 있었다.
‘성마대전’까지 남은 시간은 26일.
그날, 유중혁은 <김독자 컴퍼니>를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