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4화

354화 그 시각, 관리국의 비형은 ‘선악의 이중주’의 시나리오 화면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제2차 성마대전’의 무대는 암흑 단층에 위치한 ‘환생자들의 섬’입니다.] 대도깨비의 선언이 흘러나오는 순간, 관리국의 모든 도깨비들은 대경했다. “아니, 갑자기 왜 ‘그 섬’을······?” “대도깨비께서는 무슨 생각이신 거지?” 그도 그럴 것이, 아무리 대도깨비라도 독단으로 80번 메인 시나리오의 무대를 정하는 경우는 없었다. 하다못해 <스타 스트림>의 의지라도 움직이지 않는 이상······. [<스타 스트림>의 의지가 80번 메인 시나리오를 개방합니다.] [새로운 ‘메인 시나리오’가 생성되었습니다.] 이어진 시스템 메시지에 비형은 깜짝 놀랐다. “정말로 <스타 스트림>이 움직였다고?” 잇따라 들려오는 충격적인 시나리오 격변에 비형은 어안이 벙벙해졌다. “비형 님! 방금 들어온 ‘계시’입니다!” “······계시?” 잠시 후, 새로운 패널에 어떤 화면이 준비되기 시작했다. 아직 화면은 떠오르지 않았지만, 비형은 그게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계시의 판’인가.” 오직 ‘계시’ 관련 능력을 입수한 성좌나 마왕들만이 볼 수 있다는 미지의 ‘석판’. 정확히 어떤 물질인지, 그리고 세계선의 시공간 좌표조차 명확히 알려지지 않은, 관리국에서도 그저 관측만이 가능할 뿐인 미지의 대상. 각 성운의 계시 능력좌들은 이 ‘판’을 모두 다른 이름으로 불렀다. 신의 계시, 단 하나의 말씀, 가장 늙은 악마의 속삭임······. 미래의 정보를 토해내는 정체불명의 물체인 만큼 관리국으로서는 귀추를 주목할 수밖에 없었다. <스타 스트림>의 성좌들이 미래를 읽어내는 방식은 간단했다. 가끔 저 ‘계시의 판’에 항문 같은 구멍이 생기고, 그 구멍을 통해서 일련의 설화 파편들이 떨어져 나온다. 마치 배설물처럼 쏟아진 설화 파편들은 ‘미래’의 정보를 가지고 있었는데, 이것을 알아챈 성좌들과 마왕들은 이 배설물 같은 단어들을 조합해 미래를 예언하거나 운수를 읽어낸다. 그렇게 만들어진 성흔이 바로 ‘계시’였다. 말이 계시지, 사실은 배설물의 재구성이나 다름없었다. 비형이 물었다. “계시의 판에 또 이변이 발생한 건가?” “그게, 몇 년 전에 흔들림이 발생한 직후부터 계속 말썽입니다.” 본래 ‘계시의 판’은 미래 정보를 토해내긴 하지만 관리국의 시나리오 개연성에 심대한 영향을 미치지는 않았다. 계시를 통해 재구성된 미래는 불확실하고 불분명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몇 년 전부터 이 ‘판’에 균열이 발생했고, 그 균열을 통해 온전한 미래 정보들이 넘어오는 경우가 있었다. “며칠 전에는 이상한 구멍까지 뚫리더니······.” 심지어 며칠 전에 뚫린 구멍은 <스타 스트림>으로서도 간과할 수 없는 몰개연성을 초래했다. 부서진 구멍 너머로, 넘어와서는 안 되는 정보가 손상 없이 넘어왔기 때문이다. 비형은 지금도 그 당시의 일을 생각하면 골치가 아팠다. 뚫린 구멍 너머로 한동안 보였던, 이상한 문자열. 「멸망한 세계에서 살아남는 세 가지 방법」. 마치 책의 표제처럼 생긴 그 이름에, <스타 스트림>의 성좌들은 대혼란에 빠졌다. ―‘멸망한 세계에서 살아남는 세 가지 방법’이란 무엇인가? ―‘멸망’이란 모든 시나리오의 ■■를 의미하는가? 그동안 시나리오를 등한시하고 여유를 부리던 성좌들조차 이 ‘계시’가 풀린 뒤부터는 발등에 불이 떨어진 것처럼 굴기 시작했다. 오래된 종말론이 퍼졌고, <스타 스트림>의 끝을 예고하는 낭설들이 오갔다. “화면 준비 끝났습니다!” 새카맣게 일렁이는 화면을 보며, 비형은 긴장했다. 구멍 너머로 몇 마디 문자열이 넘어온 것만으로도 <스타 스트림> 전체가 흔들렸다. 그런데 이번에는 또 무슨 ‘계시’가 넘어왔단 말인가? 잠시 후, 화면에 ‘계시의 판’이 나타났다. 그리고 판의 중심에 돋아난 아주 작은 구멍이 보였다. “아무 변화도······ 응?” 다음 순간, 구멍 안쪽에서 나타난 희끄무레한 물체에 도깨비들이 경악했다. 그것은 누군가의 입이었다. ―아, 아······ 그러니까, 음······ 마이크 테스트? 도깨비들이 외쳤다. “······저게 뭐야?” <관리국>이 대혼란에 빠진 사이, 입은 계속해서 떠들었다. ―들리세요? 지금부터 여러분께 계시를 드릴 거예요. 아주 잠깐만 보여드릴 테니까, 잘 보고 기억하세요! 또렷하고 경쾌한 목소리와 함께, 페이지를 넘기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잠시 후, 구멍 사이로 설화 파편들이 넘어왔다. 「멸망한 세계에서 살아남는 방법, 그 세 번째.」 너무나 선명하게 넘어온 계시. 그것은 정말로 ‘신의 계시’ 같았다. 「그 방법은, ‘환생자들의 섬’에 있다.」 일렁이는 설화 파편들이 허공에 흩어지자, 목소리가 말했다. ―다들 보셨죠? 자, 그럼 안녕! 이윽고 구멍이 닫히며, 목소리의 주인도 사라졌다. 비형이 중얼거렸다. “······맙소사.” 충격 속에, <관리국>의 도깨비들 중 누구도 입을 열지 못했다. 곳곳에서 울리는 벨. 성좌들의 쉴 새 없는 문의가 빗발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른 쪽 패널에서는, 여전히 ‘선악의 이중주’의 정경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다시 한번 알려 드립니다.] 대도깨비 바람의 목소리가 <스타 스트림> 전역에 울려 퍼지고 있었다. [‘제2차 성마대전’의 무대는 암흑 단층에 위치한 ‘환생자들의 섬’입니다.] * ‘선악의 이중주’가 끝난 뒤, 우리 일행은 곧장 지구로 귀환했다. [공단]으로 돌아가는 내내 일행들은 들뜬 모습이었다. 특히 정희원과 이지혜는 우리가 받은 상패를 이리저리 돌려 보며 그 성능을 확인하고 있었다. [‘선악의 이중주’ 대상패(大賞牌)] 본래 <스타 스트림>에서 ‘격’은 오직 설화의 축적으로만 상승한다. 하지만 극히 희귀한 성유물들 중에는 설화의 축적 없이도 격을 올려주는 것들이 있다. ‘선악의 이중주’에서 하사하는 상패들이 그러했다. “칼이 더 가벼워진 것 같기도 하고······ 이 정도면 현성 아저씨도 가볍게 휘두를 수 있겠는데요?” 이지혜의 중얼거림에 이현성이 흠칫 몸을 떨었다. 확실히, 대상패 정도면 준신화급 설화 둘을 얻은 것 이상의 효과가 있을 것이다. 내가 얻은 준신화급 설화들이 죄다 죽을 고생을 하고 얻은 것인 걸 감안하면,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상승 효과였다. [5,000,000 코인 교환권] 거기다 상금 500만 코인 교환권까지. “하, 독자 씨······ 우리 이제 부자예요······.” “한동안 코인 걱정은 없겠군요.” “얘들아, 너흰 얼마나 받았어?” 정희원이 묻기 바쁘게, ‘베스트 케미상’을 받은 아이들이 드잡이질을 벌이고 있었다. “신유승, 솔직히 내가 조금 더 활약했잖아. 10만 코인 더 내놔.” “뭔 헛소리야! 당연히 반띵이지. 설화 지분율도 똑같은 게.” 이현성이 그런 아이들을 말렸다. 일행들은 각자의 이유로 기분이 좋아 보였지만, 한편으로는 모두 내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사실은, 모두가 묻지 않은 질문이 있다.」 나와 유중혁은 왜 싸웠는가. 분명 일행들은 두 눈으로 그 정경을 보았음에도, 누구도 내게 먼저 그 일에 관해 묻지 않았다. 어쩌면 본능적으로 화제를 피해간 것일지도 모른다. 아마도 내가 먼저 말해주길 기다리는 일행들 나름의 배려일 것이다. 나는 여전히 의식이 없는 유중혁을 업은 채, 머릿속으로 유상아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그러니까, [제4의 벽]에 난 구멍을 통해 멸살법의 내용을 흘려보냈단 말씀이시죠?’ 「(네.)」 ‘성좌들은 그걸 [계시]로 받아들였고요?’ 「(맞아요.)」 얼핏 생각해서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제4의 벽] 밖으로 내보낸 정보가 성좌들에게 ‘계시’로 바뀌었다고? 애초에 원작에서 ‘계시’의 역할을 담당하던 것은······ 아니, 잠깐만. ‘설마?’ 머릿속에서 맞춰지는 아귀들이 있었다. 유상아가 물었다. 「(독자 씨, ‘제4의 벽’이 원래 존재하는 말이라는 건 아시죠?)」 ‘네. 정확한 의미로 아는 건 아니지만······.’ 「(본래 ‘제4의 벽’은 무대 용어에요. 극과 무대를 분리하는 벽. 극중 등장인물들은 절대로 ‘제4의 벽’을 인식할 수 없어요. 왜냐하면 그들에게 ‘무대 바깥’이란 존재하지 않는 장소니까.)」 무대의 바깥. 그곳은 내가 살았던 ‘현실’이었다. 팔뚝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정말로 [제4의 벽]이라는 이름이 유상아의 설명과 같은 의미에 연원을 두었다면, 이 벽 안쪽에 ‘멸살법’이 있는 것은 당연했다. 왜냐하면 ‘멸살법’의 내용은 현실에서 만들어진 것이었으니까. 즉, ‘계시’란 현실에서 소설 속으로 흘러들어온 ‘스포일러’인 셈이었다. 하나 그 연원을 찾을 수 없으니, 등장인물들 입장에서는 ‘신의 계시’일 수밖에. 유상아가 말을 이었다. 「(줄곧 이상하다고 생각했어요. 성좌들에게 필터링되어 있던 ‘멸살법’에 대한 정보가 갑자기 풀린 게······ 그런데 그 시기가 하필 제가 ‘제4의 벽’에 들어온 시기랑 겹치더라고요.)」 ‘······겹쳤다고요?’ 「(네, 게다가 제가 들어온 구멍을 막고 있었던 책이 바로 ‘멸살법’이었거든요. 그것도 제목이 아주 잘 보이는 형태로······.)」 그제야 모든 상황이 이해가 갔다. 갑자기 마왕들과 성좌들이 ‘멸살법’에 대한 정보를 알게 된 이유. 어쩐지, 원작에 없던 전개가 갑자기 펼쳐졌다 했다. 그들이 알게 된 정보는, 모두 [제4의 벽]에 뚫린 구멍 사이로 새나간 정보였던 것이다. ‘조금 일이 복잡해지긴 했지만, 오히려 잘 됐군요.’ 「(그렇죠?)」 유상아가 생긋 웃으며 대답했다. 아마 그녀도 나와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다. 「(근데 자주 쓸 순 없을 것 같아요. 눈치도 엄청 보이고······ 앗, 죄송해요. 선임들이 불러서, 잠깐 가볼게요.)」 그 말과 함께 유상아의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사라졌다. 아무래도 도서관 막내다 보니 눈치가 많이 보이는 모양이었다. 어쨌거나, 유상아의 활약으로 인해 우리는 새로운 카드를 쥐게 되었다. [제4의 벽]을 통해 성좌들이 받을 ‘계시’를 조작할 수 있다는 것. 그것이 ‘가짜 계시’인 것이 밝혀지기 전까지, 우리는 그 정보를 이용해 성좌들을 선동할 수도 있을지도 모른다. 내 곁을 걷던 한수영이 말을 걸었다. “······너 아까부터 말이 없다?” “잠깐 혼자 생각 좀 하느라.” “생각이 많으시기도 하겠지.” 입술을 비죽인 한수영이 [한낮의 밀회]를 걸어왔다. ―이제 어쩔 거야? ―어쩌긴. 다음 시나리오 준비해야지. ‘성마대전’은 80번 시나리오고, 한 달 뒤부터 시작한다고 했으니 지금부터 빠듯하게 준비하면······. ―그거 말고. 한수영의 눈빛이 복잡해졌다. 녀석은 내 등에 업힌 유중혁을 보고 있었다. ―이대로 유중혁 일어나면 어떻게 될지 알지? 유중혁은 ‘멸살법’의 정체를 알게 되었다. 녀석이 뭘 얼마나 알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녀석이 알게 된 이상 모든 정보를 계속해서 숨길 수만은 없었다. 많은 충격을 받을 것이고, 끔찍한 상처를 받을지도 모르지만······ 그럼에도······. ―참고로 나는 반대야. ―뭐가. ―너 말하려는 거. 이미 내 생각을 다 알고 있다는 듯, 한수영이 선수를 쳤다. 가볍게 한숨을 내쉰 그녀가 땅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네 성격에 지금까지 숨겨왔던 게 이상한 일이지. 아무래도 한수영은 나를 오해하고 있는 것 같았다. 좀 더 잘 숨길 수만 있었다면, 얼마든지 더 숨겼을 것이다. 가능하면, 이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라도. 한수영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최대한 숨기는 편이 좋아. 그냥 모른척 해. 지금까지 했던 것처럼 예언자인 척 하라고. ―그런다고 믿을 것 같아? 이젠 이야기해야 해. 유중혁뿐만이 아니라, 다른 일행들에게도. 내 말에 한수영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무슨 헛소리야? 그걸 저 사람들한테 왜 말해? ―저들도 알 자격이 있으니까. ―······예전에 나도 해봤어. 근데 ‘등장인물’들은 ‘멸살법’에 관한 걸 못 알아들어. 그냥 장난이라고 생각한다고. ―지금은 다를지도 몰라. ‘필터링’이 풀렸으니까. 작게 입을 벌렸던 한수영이 도로 입을 다물었다. 녀석은 나를 다그치는 대신, 아무것도 모르는 일행들의 얼굴을 살폈다. 선명한 한수영의 동공에 나를 향한 희미한 경멸이 엿보였다. ―그건 널 위한 거냐, 아니면 저 사람들을 위한 거냐? ―······. ―이미 너는 저 사람들을 기만했어. 그런데 이제 와서 용서받겠다는 거야? ―용서받겠다는 게 아냐. 한수영이 보았던 얼굴들을, 나 역시 하나하나 살폈다. 강인하지만 섬세한 정희원. 성실하고 순박한 이현성. 까탈스럽지만 정이 많은 이지혜. 어른스럽지만 순수한 신유승. 그 모든 이들의 얼굴을 보며, 나는 내가 알고 있던 ‘묘사’들을 떠올렸다. 그들 중 어떤 이들은 ‘묘사’에 없었고, 어떤 이는 ‘묘사’와 달라진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내가 알지만 모르는 얼굴들. 문득 뒤를 돌아본 신유승이 이쪽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나는 아이에게 마주 손을 흔들며 말했다. ―······진짜 동료가 되고 싶은 거야. 한수영은 오랫동안 말이 없더니, 그저 조용히 등을 돌려 [공장]을 향해 훌쩍 사라졌다. 멀리서, 녀석이 보낸 메시지가 메아리처럼 되돌아왔다. ―난 분명히 말했다? 반대라고. 우리는 얼마 지나지 않아 [공장]에 도착했고, 각자 여독을 풀었다. 그날 저녁, 나는 쓰러진 유중혁을 제외한 <김독자 컴퍼니>의 모든 일행들을 한곳에 불러 모았다. 비유를 불러 미리 채널을 차단했고, 다른 성좌들이 듣지 못하도록 두터운 방벽을 깔았다. 이윽고 준비를 끝마친 뒤, 나는 일행들을 돌아보았다. “여러분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나 막상 입을 떼자, 쉽사리 말이 이어지지 않았다. 내가 장난이라도 친다고 생각했는지, 이지혜가 너스레를 떨었다. “뭐야, 아저씨 갑자기 왜 그래? 사람 무섭게.” 나는 그런 이지혜를 보며 애써 웃었다. 오랫동안 고민했다. 언젠가 이런 순간이 올 것이라고 확신하면서. 이현성과 신유승도 걱정스럽다는 듯 나를 보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나를 먼저 걱정하는 일행들을 보며, 나는 입술을 짓씹듯 말했다. “여러분들 중의 일부는.” 흔들리는 일행들의 눈빛. 이를 질끈 깨문 한수영이 돌아서는 것이 보였다. 나는 방아쇠를 당기듯 말을 이었다. “어떤 ‘이야기’의 ‘등장인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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