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4화
344화
[제4의 벽]에게 유상아의 영혼을 먹이는 것.
이 방법은, 과거 어머니가 ‘꿈을 먹는 자’와의 혈투에서 [제4의 벽]에게 먹혔던 사건에서 착안한 것이었다.
그때 어머니는 영혼체가 손상된 상태에서 벽에게 먹혔고, 다시 뱉어졌을 때는 오히려 영혼의 일부가 수복되어 있었다.
거기다 [제4의 벽]의 내부에 ‘도서관’이라는 공간이 있다는 것을 감안하면, 이것은 시도해 볼 만한 모험이었다.
「싫 어」
그러나 내 의도를 읽은 [제4의 벽]은 내 말을 듣지 않았다.
흩어지는 유상아를 보며, [제4의 벽]이 격하게 반응했다.
「저 건 안 먹 어」
“먹어.”
츠츠츠츠츠츳!
온몸이 저릿저릿해지는 충격. 하지만 나는 물러서지 않았다.
“안 먹으면 스킬 끈다.”
이것이 내 마지막 협박이었다. 어쨌든 [제4의 벽]은 스킬이고, 나는 언제든 마음만 독하게 먹으면 녀석을 꺼버릴 수 있었다. 그리고 몇몇 사건으로 미루어 봤을 때, [제4의 벽]은 그걸 정말로 싫어했다. 그러니 이번에도······.
「할 수있 으 면 해 보든 가」
마치, 내가 그렇게 할 수 없을 거라는 걸 확신하는 말투.
「날 꺼버 리 면 어차 피 저 여자 는 살 수 없 어」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 리고 나를 끄 면 성좌 들이 네 정보 를 보게 될 거 야」
[다수의 성좌들이 당신에게 주목하고 있습니다!]
[일부 성좌들이 당신이 가진 ‘벽’의 존재에 의구심을 품습니다.]
[제4의 벽]은 내가 정보의 노출을 꺼린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실제로 나는 [제4의 벽]을 제외하고는 쓸만한 정신 방벽이 전무한 상태.
격이 높은 성좌가 벽이 사라진 찰나를 노려 나를 들여다본다면, 나는 벌거벗은 아기처럼 무력한 상태가 될지도 모른다.
나는 벽을 잠시 노려보다가 말했다.
“그럼 부순다.”
「뭐?」
“벽의 일부를 부숴서, 강제로 먹게 하겠어.”
본래 [제4의 벽]은 실체가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이라면 나는 ‘벽’을 두들길 수 있었다.
불끈 주먹을 쥔 채, 나는 눈앞의 벽을 향해 격을 발산했다.
쿠드드드드!
둔중한 충격과 함께 병실 전체가 흔들렸다. 바깥에서 짧은 비명과 함께 일행들이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다시 주먹을 휘둘렀다.
콰아아아앙!
벽에는 여전히 흠집도 가지 않았다.
「소용 없 어 김독 자」
“······.”
「유 상아 를 살 리 는 건 지나친 개 연성 위반 이 야」
나는 생각했다. 앞서 말했듯, [제4의 벽]은 실체가 아니다. 내가 구현한 ‘스킬’일 뿐. 그렇다면······.
츠츠츠츠츳!
나는 ‘벽’의 한곳을 향해 시선을 집중했다. 병실 전체에 스파크가 범람하며, 병실 문을 열고 들어온 이지혜가 튕겨져 나가는 것이 보였다.
「안 돼!」
[제4의 벽]의 귀퉁이에 작은 금이 가고 있었다.
역시 내 생각이 맞았다.
나는 지금까지 스킬을 켜거나 끄는 것만을 생각해왔다.
하지만, 어쩌면 ‘스킬’이라는 것에도 적정한 중간 상태가 있을지 모른다.
말하자면.
츠츠츠츠츠!
스킬의 ‘일부’만을 끌 수 있다면 어떨까.
쩌저저저적!
급속도로 갈라지는 벽과 함께, 일순간 아주 작은 틈새가 발생했다.
무엇이든 삼켜버릴 수 있을듯한 심연.
곧이어 틈새는 블랙홀처럼 주변의 설화들을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유상아의 설화들이, 작은 소용돌이를 이루며 순식간에 벽의 너머로 빨려 들어갔다.
「멈 춰······!」
엄청난 스파크가 전신에 직격했고, 나는 끔찍한 신음을 토했다.
병실 전체에 개연성의 후폭풍이 불고 있었다.
나를 향해 달려오는 일행들의 목소리가 들렸고, 곧 시야가 하얗게 물들었다.
*
어둠 속에서, 유상아는 정신을 차렸다. 눈을 뜨자 보이는 것은 새카만 어둠뿐. 한점의 빛조차 허락하지 않는 그 무기질적인 정경 속에서, 유상아는 불현듯 뭔가를 깨달았다.
난······ 죽은 건가?
마지막으로 보였던 풍경이 머릿속을 언뜻 스쳐갔다. 자신을 살리려는 김독자의 외침과, 개연성의 후폭풍. 그리고 어딘가로 빨려 들어간 기억······.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유상아는 자신의 감각을 점검했다. 눈, 입술, 혀, 귀, 손, 발, 무릎······ 감각이 느껴지는 곳이 단 한 군데도 없었다. 마치 전신에 마비가 온 것처럼, 움직임의 감각은 그녀의 안에서 완전히 소멸한 상태였다.
······혹시 영혼만 남아버린 건가?
유상아는 침착하게 이 상황을 받아들이려 애썼다.
하루키 소설에서는 사람이 관념이 되어버리는 경우도 흔하니까, 이건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죽은 사람이 영혼이 되는 것쯤이야······.
······무섭네.
하지만 역시, 어둠 속에 혼자 있는 건 무섭다. 거기에 감각이라는 게 전혀 느껴지지 않는 상태라니. 이래서야 자신이 존재하는지 아닌지조차 알 수 없는 상태가 아닌가.
유상아는 사고의 함정에 빠지지 않으려 애쓰며, 철학의 오래된 명제를 떠올렸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그것은 르네 데카르트의 격언이었다. 이젠 너무 유명해서 그 말을 인용하는 것이 어쩐지 부끄러워진 격언. 하지만 지금 유상아에겐 그 말만이 구원의 동아줄이었다. 적어도 생각을 이어 나가는 동안 ‘나는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생각은 유상아를 무섭게 만들었다.
그럼,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 것인가.
이 어둠 속에서 생각마저 멈춰버리면.
그래서 유상아는 필사적으로 생각했다. 사라지지 않기 위해, 지워지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지나간 일들을 떠올렸다.
「“상아야.”」
그러자 목소리가 떠올랐고, 이어서 얼굴들이 떠올랐다. 익숙한 얼굴들이었다.
세계에 ‘시나리오’가 도래하기 전부터 있었던 그녀의 가족들.
판사인 아버지와, 의사인 오빠들. 부유한 가문에서 태어난 어머니.
「“남들 눈에 띄는 행동은 하지 마라.”」
「“사람들은 네가 아니라, 네가 가진 것들을 볼 거야.”」
「“웬 4개 국어? 넌 귀여운 막내딸 노릇만 하면 되잖아.”」
흘러가는 말들을 보며, 유상아는 쓴웃음을 지었다. 정확히는, 지었다고 생각했다.
「“······게임 회사에 들어가겠다고? 게임 회사 사장이랑 결혼하는 게 아니고?”」
어쩌면 ‘시나리오’가 시작되기 전부터, 그녀는 ‘시나리오’를 살고 있었다. 그걸 시나리오라 부르는 사람은 없었지만, 그녀에겐 그것이 시나리오였다.
만약 도깨비가 그 시나리오의 이름을 붙였다면, 아마 <독립 선언> 정도가 되지 않았을까.
「“신입사원 유상아입니다.”」
게임 회사에 들어가고 집에서 독립하면서, 그녀의 삶은 조금 변했다.
흥미로운 사람도 하나 만났다.
「“유상아 씨. 혹시 휴대폰 충전기 있으십니까?”」
허여멀건 얼굴로, 그녀의 충전기를 빌려가던 사람.
「“7시에 중요한 약속이 있는데, 배터리가 다 되어 가서요.”」
그녀와 함께 신입 면접을 봤던, 회사의 모든 것에 비협조적이던 인간.
「“회식은 참석하겠지만, 7시엔 들어가야 합니다.”」
할 말은 할 말대로 하면서도, 회사가 끝나면 제일 먼저 퇴근하던 사람.
「“야유회 참여 안 합니다. 등산을 제일 싫어해서.”」
남들의 시선 따윈 존재하지도 않는다는 듯, 유령처럼 쏘다니며 자신의 스마트폰만 들여다보고 있던 사내.
「“······유중혁 이 자식 또 죽겠네 이거.”」
그래서 그녀도 이상한 짓을 하나둘 해봤던 것인지도 모른다.
부하의 프로젝트를 빼앗아가는 상사를 골탕 먹이거나, 커피 심부름을 시키는 부장들의 원두에 후추를 섞거나.
「“우웩! 뭐야! 커피 맛이 왜 이래!”」
훗날 ‘탕비실 사건’이라 이름 붙여진 미노 소프트의 역사적인 사건 또한 그렇게 탄생했다.
곱게 갈아둔 원두에 몇 번이고 후추를 쏟아부으며, 유상아는 알 수 없는 해방감을 느꼈다.
발칵 뒤집힌 회사. 심지어 감시 직원이 있었는데도 잡히지 않는 범인.
「유상아는 지금도 기억한다.」
모두가 퇴근한 회사.
탕비실의 캐비닛 사이로 은은히 흘러나오던 스마트폰 불빛.
「그곳에, 분명 김독자가 있었다.」
자신이 후추를 타든 소금을 타든, 그 불빛은 그저 그곳에 존재하며 그녀의 행동을 묵인했다.
마치 그 캐비닛 바깥의 일은, 자신의 소관이 아니라는 것처럼.
「어쩌면, 그때 말을 걸어 보아야 했던 것은 아닐까.」
당신은 왜 그 캐비닛 안에서 침묵해주었는지.
왜 내가 저지르는 일을 보고서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라고 말했는지.
어째서 탕비실로 가는 CCTV의 방향을 돌려주었는지.
왜 당신은······ 항상 스마트폰을 보고 있을 때만 다양한 표정을 짓는지.
츠츠츠츠츳!
사위가 밝아지며, 그녀의 감각이 차츰 돌아오기 시작했다.
[강력한 존재의 ‘격’이 당신의 ‘설화’가 흐트러지는 것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정돈된 것을 좋아하는 누군가가 당신의 설화를 못 마땅해합니다.]
어디선가 목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봐라, 역시 이건 ‘썸’이란 것이다.)」
「(아닙니다. 지구에 존재하는 거의 모든 영화를 섭렵한 제가 생각하기로는······.)」
「(결국은 모두 하나가 되기 위한 욕망 아닌가?)」
천천히 눈을 떴을 때, 유상아는 자신을 둘러싼 세 존재를 발견했다.
안경을 쓴 오징어 같은 생명체.
회백색 머리에 등이 굽은 노인.
그리고 성별을 알 수 없는 묘한 분위기를 풍기는 미인(美人).
마지막 존재를 본 순간, 유상아는 화들짝 놀라며 깨어났다.
「(당신은······?)」
「(정신 차렸군, 신입 사서.)」
중성의 미인, 니르바나가 빙긋 웃었다.
유상아는 뭐가 뭔지 알 수 없었다.
왜 이 사람이 이곳에 있는 거지?
흠, 하고 그녀를 들여다보던 니르바나가 말했다.
「(설명하자면 길어. 곧 알게 될 거다. 너는 아주 운이 좋은 편이야. 겨우 너 정도의 세월을 살고 이 ‘도서관’에 들어온 존재는 네가 처음이니까.)」
세 존재의 뒤쪽 허공에서 활자 조합물이 넘실거리고 있었다.
[신입 사서 유상아를 환영합니다.]
유상아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어슴푸레한 칸델라의 불빛이 곳곳의 어둠을 밝히고 있었다.
도서관······.
엄청나게 많은 책들과, 끝이 보이지 않은 서가. 이만한 크기의 도서관에 들어와 본 것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김독자의 말이 떠올랐다. 다시 살아나면, 그녀가 읽던 작가들의 책 말고 다른 책도 읽을 의향이 있느냐고.
······그것이 이런 의미였을까?
이곳이 어떤 곳인지는 모른다.
김독자가 어떤 원리로 그녀를 이곳에 보냈는지, 그녀에게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알지 못한다.
하지만 어떤 예감이 들었다.
지금 저 책들을 읽으면, 그동안 궁금했던 수많은 의문들을 해결할 수 있으리라는 예감.
「(읽을 건가?)」
「(네?)」
「(읽으면, 후회하게 될 수도 있는데 말이지. 네가 감당하지 못할 진실일 수도 있으니까.)」
장정을 향해 다가가던 유상아의 손끝이 멈칫했다. 니르바나의 말 때문이 아니었다. 그녀가 잘 알고 있는 사람이,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사서가 되지 않을 거야.”
김독자가 그곳에 있었다.
*
「(······독자 씨?)」
멍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는 유상아를 보는 순간, 깊은 안도가 밀려왔다.
성공했다.
어떻게든, 유상아의 영혼을 보존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아직 영혼체의 곳곳이 손상되어 있긴 했지만, 희미하게 흐르는 도서관의 힘이 그녀의 영혼을 수복시키고 있었다.
나는 유상아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누추한 곳으로 모셔서 죄송합니다. 조금만 견뎌주세요. 제가 금방 꺼내드릴 게요.”
「(누추한 곳이라니? 어리석은 인간이 진리의 영성을 알지 못하는군.)」
“오랜만이다, 니르바나.”
「(어떻게 이곳에 들어온 거지? ‘벽’이 허락지 않았을 텐데.)」
“꼼수를 찾았거든.”
니르바나는 탐탁찮은 표정이었다.
「(무슨 생각인지는 모르겠지만, 그건 정말 좋지 않은 판단이었어. ‘벽’이 안 된다고 할 때는 이유가 있는 법이다.)」
“그렇겠지.”
츠츠츠츠츳!
지금은 내게 말을 걸고 있지 않지만, [제4의 벽]은 종전의 일로 인해 내게 단단히 화가 났을 것이다.
피부에 와 닿는 이 뾰족한 기류만으로도, 녀석의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걸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저 녀석이 마음만 먹으면, 사서 한둘쯤은 이야기의 먼지로 만들어 버릴 수도 있어.)」
“말했잖아. 사서로 만들지 않을 거라고.”
「(무슨 헛소리지? 여기에 들여보냈다면 당연히······.)」
“다시 밖으로 꺼낼 거야.”
니르바나가 말도 안 되는 헛소릴 들었다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
「(그걸 ‘벽’이 허락해줄 것 같나? 그리고 설령 그게 가능하더라도, 저 여자의 육신은 이미 죽었어. 육신이 죽은 이상 돌아갈 곳은 없다.)」
나는 말없이 니르바나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니르바나의 표정이 이상하게 변했다.
「(설마, 너······.)」
녀석도 이제 [제4의 벽]의 일부가 되었으니, 내 생각을 읽은 것인지도 모른다. 부들부들 입술을 떨던 니르바나가 소리쳤다.
「(안 돼! 설령 ‘벽’이 허락하더라도, 그건 안 된다.)」
“니르바나.”
니르바나는 알고 있을 것이다.
세상에는 수많은 종류의 ‘특성’들이 있지만, ‘완벽한 불사의 특성’은 단 둘뿐이라는 것을.
하나는 회귀자 유중혁, 그리고 다른 하나는······.
“너의 배후성, ‘만다라의 수호자’는 지금 어디 있지?”
최초의 환생자.
이제, 이 이야기의 세 번째 주인공을 만나러 갈 때가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