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7화
327화
“이수경.”
유중혁이 그곳에 있었다.
이어서 보이는 것은 허공에서 목이 꿰뚫린 십 대 고수들의 모습. 꺽꺽거리는 단말마와 함께, 생명력을 잃은 육신들이 바닥으로 추락했다.
“······네 도움을 받을 줄은 몰랐구나.”
유중혁은 무표정한 얼굴로 이수경을 업은 채 달렸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이수경은 그가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아마도, 이 [공단]의 유일한 의원을 찾고 있을 것이다.
“고맙다.”
순순히 흘러나오는 그 말에, 유중혁이 무심히 대답했다.
“마음에도 없는 소리는 그만두지. 나를 싫어한다는 건 알고 있다.”
“물론 싫지. 엄청 싫어. 내 역할을 빼앗아간 놈이니까.”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군.”
이수경의 머릿속으로, 느릿하게 시간이 흘러갔다.
주마등은 빠르게 스쳐간다던데······ 왜일까.
생이, 너무나 고되고 힘들었기 때문일까.
“······나는 아주 오래전부터 너를 알고 있었어. 그 아이가 네 이야기를 많이 했지. 감옥에 있는 엄마 면회 와서 그런 이야기를 하는 건 그 아이뿐일 거야.”
─그래서, 이번에 그 자식이 <올림포스>의 12신좌에 도전했거든요.
즐겁게 이야기하는 어린 김독자의 얼굴. 그런 아이의 표정을 마주하며 떠올렸던 수많은 생각들.
이수경의 심박이 느려지는 것을 느꼈는지, 유중혁이 계속해서 말을 걸었다.
“이수경. 정신을 놓지 마라.”
이수경은 흐려지는 정신을 간신히 다잡았다.
흔들리는 유중혁의 등이, 계속해서 졸음을 불러왔다.
“아무튼 한 번쯤은······ 너에게 고맙다고 말하고 싶었다.”
“······아까부터 알아들을 수 없는 말만 하는군.”
지금 자신을 업은 이 등은, 실제로 그녀의 아들을 업었던 등이었다.
중학생이었던, 고등학생이었던 어린 김독자를. 실제로 업어 키운 등이었다. 그녀가 업어주지 못했던 그 작은 아이를 키워낸 등.
그 아이를 살게 만든 등이었다.
─나도 그 녀석처럼 되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이 등의 주인이 되고 싶었던 것은, 사실 누구보다도 그녀였다.
─그래서······ 그다음에 유중혁이 어떻게 했는지 아세요? 엄마도 궁금하죠?
10분밖에 안 되는 면회 시간 내내 이어지던 아들의 말.
─그래, 궁금하구나.
벽을 사이에 두고, 두 모자는 말하고 들었다.
모험이 있고, 삶이 있는 이야기.
그녀와도, 아들과도 관련없지만 열심히 살아가는 누군가의 이야기를.
벽을 통해 이야기하듯.
그 시절의 두 사람은 ‘멸살법’을 통해 이야기했다.
어디에도 없을 허구의 이야기만이, 그들이 가진 모든 재산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현실이 된 그 이야기는, 지금 그녀를 업고 있었다.
이수경이 현실감 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드디어 내 인생 좀 살아보나 했는데······.”
“말하지 마라.”
유중혁의 등이 축축한 피로 젖어가고 있었다.
이수경의 안색은 점차 파리해졌다. 여전히 튀어오르는 개연성의 스파크가 그녀를 태우고 있었다. 떨어지는 살점 사이로, 그녀가 쌓아온 설화들이 증발하고 있었다. 그것을 감추기 위해, 이수경은 일부러 알고 있는 것들을 물었다.
“넌 부모님이 계시니?”
“내가 어렸을 적 사고로 죽었다고 들었다.”
“슬퍼하는 목소리는 아니구나.”
“기억나지 않는 것을 슬퍼할 수는 없지.”
이수경은 안다.
그것은 기억이 없는 것이 아니라, 원래부터 없었던 것임을.
유중혁의 모든 것은 그저 등장인물의 설정값일 뿐이니까.
처음부터, 유중혁의 부모는 존재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망설이던 이수경이 입을 열었다.
“인간은 누구나 그래. 나라고 어린 시절이 전부 기억나는 줄 아니?”
“······기억상실증인가?”
“인간은 누구나 기억상실증이야. 조금씩 기억을 잃어버리다가 언젠가는 죄다 잊어버리게 되어 있어.”
이수경은 자신의 말들이 유중혁에게 닿지 못할 것을 알고 있었다.
3회차의 삶을 살아온 회귀자. 그리고 앞으로 또 얼마나 많은 시간을 살아갈지 모르는 저 불멸자에게, 그녀의 말은 먼지의 무게보다도 가벼울 테니까.
유중혁이 말했다.
“가끔씩 기억나는 것들도 있다. 누군가가 나를 지켜보는 것 같은 기억들이지.”
처음 듣는 그 이야기에 이수경이 물었다.
“······누군가 널 지켜본다고?”
“누군지는 나도 모른다. 다만 아주 오랫동안 나를 지켜보는 시선이 있다. 지금도 종종 그 시선이 느껴질 때가 있다.”
유중혁의 말이 끝난 후에도 이수경은 한참이나 말이 없었다. 오랫동안 침묵하던 이수경이, 피에 젖은 유중혁의 머리 위에 손을 얹으며 온화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쩌면 그 사람이 네 부모일지도 모르겠구나.”
이수경은 그 말과 함께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무수한 별자리들이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스러지는 육체. 쏟아지는 설화를 느끼며, 점차 몸에 힘이 빠져나간다. 흐릿한 시야를 애써 돋우며, 이수경은 계속해서 하늘을 헤아렸다.
마치 그 어딘가에 있을 별을 찾기라도 하는 것처럼.
“······이수경?”
이수경의 대답은 더이상 들려오지 않았다.
*
콰콰콰콰콰!
파천검성이 나타난 <테마파크>에는 피바람이 불고 있었다.
시범을 보인다며 달려든 ‘아킬레우스’의 머리가 터져버린 이후로, 몇몇 성좌들이 호승심을 부리며 연달아 달려들었지만 죄다 같은 꼴을 당하고 말았다.
서슴없이 휘두른 파천검성의 두 주먹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고작 이 정도로 <기간토마키아>를 재현하려 했느냐?]
쩌렁쩌렁 울려 퍼지는 파천검성의 목소리에, 겁을 먹은 참가자들이 주춤거렸다.
슬금슬금 눈치를 보던 한수영과 일행들은 어느새 파천검성의 뒤쪽으로 숨었다. 이지혜가 말했다.
“······우리가 도울 필요 없겠는데요.”
“그냥 여기 숨어 있으면 안 돼요?”
이길영도 한 마디를 보탰다.
한수영은 물고 있던 사탕을 씹으며 중얼거렸다.
“······이거 말이 안 되는데. <기간토마키아>에서 거신족이 이렇게 강하다고?”
거신족이 강한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이 시나리오는 <기간토마키아>, 거신족이 패배한 시나리오였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해당 시나리오에서 거신족은 「무대화」의 영향으로 제대로 힘을 쓰지 못하게 되어있다.
더군다나 아킬레우스 같은 영웅을 상대로라면······.
[······혼혈 ‘거신’이라고 얕보았는데, 제법이구나.]
돌아본 곳에서, 분명 머리가 터져 죽었던 아킬레우스가 깨어나고 있었다.
[성좌, ‘트로이의 슬픔’이 성흔 ‘불멸의 영웅’을 발동합니다!]
으깨졌던 머리가 회복되고, 쏟아졌던 피가 문장이 되어 몸을 복구하고 있었다.
「아킬레우스는 ‘아킬레스 건’을 베기 전에는 죽지 않는다.」
심지어 재생된 아킬레우스의 몸은 조금 전보다 더 커져 있었다.
순식간에 삼미터의 체고가 넘어가자, 주변에 있던 화신들이 두려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거신?”
마치 거신처럼 커다랗게 변한 아킬레우스의 몸.
파천검성이 물었다.
[네놈도 ‘거신’의 혼혈이었나?]
[······.]
[우습군. 거신의 피를 물려받은 자가 <올림포스>의 하수인이 되었단 말인가?]
[나는 거신이 아니다. <올림포스>의 영웅, 아킬레우스다!]
두 거신의 충돌을 보며, 한수영은 왜 아직 「무대화」가 발동하지 않았는지 이해했다. 아킬레우스는 <올림포스>의 영웅이지만 과거 <기간토마키아>의 참전자가 아니었다. 게다가 그 또한, 파천검성과 마찬가지로 ‘거신’의 직계 혼혈이었던 것이다.
콰아아아앙!
거신들의 충돌이 만들어 낸 충격파가 테마파크 일대를 뒤흔들었다.
저릿한 손바닥을 매만진 아킬레우스가 믿을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고작 혼혈이 어째서 이런 힘을 가지고 있는 거지? 나는 너 같은 이름은 들어본 적이 없다. 대체 어떤 설화를 가지고 있기에······!]
거신 파천검성은 말없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내 머나먼 혈육은 하늘을 거세하고 태어났다고 하지.]
그녀는 초월좌. 다른 성좌들과 달리, 극소수의 설화만을 갈고 닦으며 극강의 강함을 추구해온 존재.
그리고 지금껏 그녀가 걸어온 길은 오직 단 한 갈래뿐이었다.
[설화, ‘파천의 길’이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그녀에게 파천검성의 이름을 붙여준, 오직 저 하늘을 부수기 위한 힘.
줄기차게 흘러나오는 파천검성의 설화에, 어디선가 간접 메시지가 들려왔다.
[하늘을 깨부순 태고 거신의 힘이 ‘파천검성’을 가호합니다.]
[파천의 힘이 더욱 강화됩니다!]
그 메시지에 아킬레우스가 경악했다.
[······하늘을 깨부순 거신? 설마······!]
파천검성이 말했다.
[너희도 같은 운명이 될 것이다.]
파천검성의 전신에서 무시무시한 기류가 발생했다.
주춤거리는 화신들이 뒷걸음질을 치던 그 순간.
어디선가 커다란 뿔피리 소리가 들렸다.
[성운, <올림포스>가 준동합니다!]
멀리서, 한 척의 배가 바다를 가르고 달려오고 있었다.
아르고(Argo)호.
[거대 설화, ‘원정대의 영웅들’이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물살을 가르고 달려오는 거대한 배를 발견한 화신들이 소리를 질렀다. 그 배에 타고 있는 이들이 누구인지 한눈에 알아본 까닭이었다.
“영웅들이다! 진짜 영웅들이 오고 있다!”
“<기간토마키아>의 성좌들이여!”
아킬레우스와 달리, 정말로 <기간토마키아>에 참전한 적이 있는 영웅들이 오고 있었다. 그보다 멀리서 하늘을 가로질러 날아오는 성좌들도 있었다.
<올림포스>의 설화급 성좌.
아킬레우스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힘을 지닌 존재들이었다.
츠츠츠츠츠츳!
[<스타 스트림>이 새로운 무대의 개막을 알립니다.]
마침내, 「무대화」가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강맹한 파천검성의 기세가 급격하게 사그라들기 시작했다. 그에 용기를 얻은 아킬레우스가 웃으며 파천검성을 향해 말했다.
[하하하! 어린 거신이여. 너는 네가 어떤 재앙을 불러온 것인지 알지 못한다! 너는······!]
콰드드드득!
그러나 그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허공에서 열린 또 다른 포탈에서 튀어나온 누군가가, 그의 머리를 터뜨려버렸기 때문이다.
연달아 두 번이나 머리가 터진 아킬레우스의 거체가 바닥에 쓰러졌다.
거체를 쓰러트린 사내는 망설이지 않고 아킬레우스의 아킬레스 건을 베어버렸다.
[성좌, ‘트로이의 슬픔’이 고통 속에 사멸합니다.]
파스스슷, 흩어지는 아킬레우스의 거체.
흩날리는 백색의 코트를 보며, 한수영이 피식 웃었다.
“제기랄, 빨리도 오네.”
<명계>에서 돌아온 김독자가 그곳에 있었다.
가볍게 숨을 몰아쉰 김독자가 일행들을 돌아보며 물었다.
“<김독자 컴퍼니>. 다들 준비되셨습니까?”
쿵! 쿵! 쿵! 쿵!
어디선가 들려오는 무거운 발걸음 소리.
지축을 흔드는 굉음과 함께, 허공에서 무수한 산들이 돋아나고 있었다.
테마파크 전체를 파괴하며 돋아나는 거대한 동산들.
그 산의 끄트머리에서, 김독자가 말했다.
“이제 진짜 <기간토마키아>를 시작해 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