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6화

326화 쿠구구구구! 새카만 <타르타로스>의 천장이 열리고 있었다. [<타르타로스>의 일부 지대에 균열이 발생합니다!] [누군가가 비정상적인 탈옥을 시도합니다!] 츠츠츠츳! 허공에서 튀어 오르는 경고 메시지와 함께, <명계> 전체가 흔들리고 있었다. [<명계>의 심판관들이 ‘구원의 마왕’의 행동을 눈치챘습니다!] 페르세포네가 뾰로통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번 한 번뿐이니 명심하세요, 구원의 마왕.] 일대가 지진파에 휩싸였고, 활짝 열린 <타르타로스>의 천장 위로 희미한 포탈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페르세포네가 지상으로 가는 출구를 열어준 것이다. 그 광경을 보며 거신 브리아레오스가 물었다. [······대체 무슨 말을 했기에 명계의 여왕이 너를 도와주는 거냐?] “그냥, 협박을 좀 했습니다.” 삼십 분 전, 나는 페르세포네에게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보냈다. ―협조를 거부하시면, <타르타로스>에서 촬영한 모든 영상을 <스타 스트림> 전역에 뿌릴 겁니다. <타르타로스>는 명계가 감춘 비밀들을 여럿 품고 있다. 그들이 몰래 양성 중인 거신병이라든가, 암암리에 감추어져 있던 <타르타로스>의 기관 시설들. 그들의 적대 세력이나 <올림포스>가 알아서 하등 좋을 것이 없는 비밀의 보고가, 바로 이 <타르타로스>인 것이다. 하지만 브리아레오스는 고개를 갸웃했다. [······여왕이 겨우 그 정도 협박에 굴했다고?] “그녀는 우리 편입니다. 저를 풀어줄 구실이 필요했을 뿐이에요. 혹시나 나중에 일이 잘못되었을 때 핑계 댈 거리는 있어야 하니까.” 만약 이번 <기간토마키아>가 실패하여 <올림포스>가 <명계>에게 일의 경위를 따지고 든다면, <명계>는 필시 곤란한 상황에 처할 것이다. 아마 지금의 내 협박은, 그때의 <명계>를 약간이나마 변호할 수단이 되겠지. 물론 그것은 어디까지나 이번 <기간토마키아>가 실패했을 때의 이야기고, 나는 일을 그렇게 만들 생각은 없다. 브리아레오스가 말했다. [그대는 명왕과 여왕을 잘 모르는 모양이군.] “예?” 브리아레오스는 대답 대신 알 듯 말 듯한 미소를 지었다. [당신은 ‘거신의 맹세’를 받았습니다.] [새로운 준신화 급 설화를 획득하였습니다!] [설화, ‘거신의 해방자’를 획득하였습니다!] [해당 설화가 ‘단 하나의 설화’의 일부로 귀속됩니다!] 거신의 해방자. 이것이야말로 이번 <올림포스> 대전에서 내가 얻어야 할 첫 번째 설화였다. [‘거신의 해방자’여. 곧 이곳의 거신들은 <기간토마키아>에 참전할 것이다. 우리에게 특별히 바라는 것이 있는가?] “그런 건 없습니다. 그저 당신들이 원하는 것을 행하십시오.” [······점점 궁금해지는구나. 이렇게까지 해서 그대가 도달하고자 하는 ■■이 무엇인지. 지금껏 그 어떤 성좌도 그대처럼 기승전결을 쌓아 나간 이는 없었다. 설마 그대는 ‘완벽한 설화’를 꿈꾸는 것인가?] 완벽한 설화. 누군가는 ‘단 하나의 설화’를 그런 이름으로 부른다. 이제껏 존재하지 않았던 설화들을 쌓아 만든, 지금껏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이야기. “저는 그냥 동료들과 함께 끝을 보고 싶을 뿐입니다. 누구도 잃지 않고, 모두와 함께 말입니다.” [그것은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이야기일 것이다. 지금껏 그런 이야기는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사실이다. 희생이 없는 신화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스타 스트림의 개연성은 항상 희생을 강요하는 방식으로 움직이지. ‘운명’이 너를 쉽게 놓아주지 않을 것이다.] “해보지 않고는 모릅니다. 그리고 [운명]이라면, 이미 극복한 적도 있습니다.” 나는 빌어먹을 <올림포스> 녀석들이 부여했던 [운명]을 떠올렸다. 지금도 그때만 떠올리면 이가 갈린다. 그런데 브리아레오스의 표정이 묘했다. [운명을 극복했다고?] 문득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멸살법’에 따르면, 모든 티탄들은 예언의 힘을 타고난다. [해방자여, ‘운명’이라는 것은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넓고 방대한 개념이다. <올림포스>가 부여한 운명은 이 세계의 티끌을 건드린 정도일 뿐이야. 진짜 ‘운명’은 피할 수도 없고, 그것을 피해간다면 개연성은 반드시 왜곡된다. 그리고 뒤틀린 개연성은, 반드시 누군가가 대신 해소해야만 하지. ‘완벽한 설화’가 존재할 수 없는 것은 그 때문이다.] “초치지 마시죠. 전 한다면 합니다. 그리고 제 동료들도 운명에 굴할 만큼 약하지 않고요.” 츠츠츠츠츳! 나는 포탈 속으로 뛰어들며 말했다. “그럼, <기간토마키아>에서 만납시다.” 브리아레오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너에게 이야기의 가호가 있기를 바란다.] * “키리오스 어르신.” “그래.” “아무래도 ‘이야기의 가호’가 필요할 것 같은데요.” 소떼처럼 밀려오는 귀환자들을 보며, 장하영이 중얼거렸다. “충실한 수련이 있었다면, 가호 따윈 필요 없다.” 키리오스의 등에서 은백색의 빛을 흩뿌리는 한 자루의 검이 뽑혀 나왔다. [순백의 역설]. 키리오스의 고향인 [피스랜드]의 명장들이 십여 년을 합심하여 만든 검. 수많은 전장을 누비며, 바야흐로 성유물에 준하는 성능을 가지게 된 키리오스의 독문병기였다. 좀처럼 무기를 꺼내지 않는 키리오스가 그 병기를 꺼내 들었다는 것은 이번 상대가 만만치 않다는 방증이었다. 귀환자들의 선두에서 두 인물이 날아오고 있었다. 적색의 화려한 무복을 입은 사내와, 교단의 상징이 수놓인 흑색 무복의 중년인. “이상하군. 이곳에 파천검성이 있다고 들었는데.” “또 잘못 짚은 건가?” “모두 파천검성을 찾아라!” 중후한 내공이 담긴 목소리들. 키리오스의 신형이 허공으로 쏘아졌다. 쿠구구구구! 존재하는 것만으로 하늘 일대를 장악하는 ‘격’에, 놀란 무림인들이 일거에 멈춰 섰다. 키리오스가 입을 열었다. “너희들이 천마와 혈마로군.” “귀하는 뉘시오?” 키리오스는 대답 대신 자신의 기세를 일으켰다. 밀려온 먹구름 사이로 뇌전이 쳤고, 그 뇌전의 일부는 키리오스에게 깃들었다. 김독자의 주력 기술인 [전인화]가, 이제 그 창시자의 전신에서 숭고한 아우라를 뿜어내고 있었다. “너희는 내 이름을 알 수 없다.” 놀란 귀환자들이 뒷걸음질을 쳤다. “이제 곧 죽을 테니까.” 하늘을 울리는 백청의 전격. <무림> 출신이라면 그 이름을 모를 수 없었다. “설마 ‘역설의 백청’인가?” 키리오스의 검이 하늘을 가리켰다. 츠츠츠츠츠츠츳! 폭주하는 개연성의 잔흔을 남기며, 키리오스의 격이 귀환자들과 충돌했다. 어마어마한 풍압 속에 장하영과 파천신군이 신형이 뒤로 밀려났다. 하늘의 중심에서 천마와 혈마, 그리고 키리오스가 합을 나누고 있었다. 쾅! 쾅! 꽈르릉! 한 수 한 수가 오갈 때마다 우레가 쏟아지듯 공간이 비명을 내질렀다. 인간과 인간의 대결이라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을 전인미답의 혈투. 장하영은 넋을 잃고 그 전투를 지켜보았다. ‘언젠가, 나도 저 정도로 강해질 수 있을까.’ ―장하영! 파천신군과 함께 [공단]을 보호해라! 키리오스의 [전음]에 퍼뜩 정신을 차린 장하영이 파천신군과 함께 움직였다. 천마와 혈마를 제외하고도, 남은 귀환자들을 물경 천여 명에 이르렀다. 개중에서도 성가신 것은 각 무림의 십대 고수들이었다. 크게 기합을 내지른 장하영의 주먹에서 작은 폭풍이 휘몰아쳤다. “끄아아아악!” 풍압에 휘말린 몇몇 귀환자들이 나가떨어지자, 그 귀환자들의 몸을 밟고 수십 명의 귀환자들이 도약해왔다. 숫자가 너무 많았다. “다들 [공단] 쪽으로 대피하세요!” 이쪽 전력은 장하영과 파천신군, 그리고 비천호리를 비롯한 십여 명의 귀환자들이 고작. 애초에 키리오스를 제외하면 초월좌급 귀환자와 맞설 수 있는 이는 얼마 되지 않는다. 두두두두두두! [공단]의 북쪽 지역에서 거대한 성채 같은 것이 덜덜거리는 소리를 내며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장하영의 얼굴이 화색으로 물들었다. “공필두!” 두다다다다다! 성채에서 쏟아지는 마력 포탄들이 귀환자들을 가격하자, 순식간에 희생자들이 속출했다. 그러나 귀환자들은 곧 대열을 정비하며 포탄을 방어하기 시작했다. “저 성부터 부숴라!” 공필두의 [무장 성채]는 수비에 적합한 성흔이지, 공격용은 아니었다. 이백여 명의 귀환자들이 따로 대열을 모아 공필두의 [무장 성채]로 진격했다. 남은 귀환자들의 숫자는 사백. 성채의 흉벽을 타넘은 귀환자들은 [공단]의 내부로 진입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공단]의 수비를 전담하던 방랑자들이 움직였다. 조선제일술사의 힘을 사용하는 조영란. 대물 저격총을 겨눈 이복순. 전우치의 도술이 허공을 물들였고, 날아든 총탄이 귀환자들을 꿰뚫었다. “크아악!” “도술사다! 도술사를 죽여!” 애꿎은 시민들이 파도 속에 휘말린 물고기들처럼 떼죽음을 당했다. 범람하는 귀환자들이 쏟아내는 검기의 세례에 조영란과 이복순도 상처를 입기 시작했다. 방랑자들의 전열이 밀려나자, 귀환자들 중 누군가가 외쳤다. “서울 지역의 리더는 들어라! 목숨을 내놓는다면, 더이상 무의미한 희생은 발생하지 않을 것이다!” 귀환전쟁의 핵심은 각 세력의 리더를 쓰러뜨리는 것. 이번에 서울을 침공한 귀환자들 또한, 서울의 리더를 해치우는 것이 ‘시나리오’의 핵심 목표였다. 그리고 잠시 후, [공단]의 내부에서 휘황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수세를 이어가던 조영란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안 돼! 수경아!” 이복순의 외침과 동시에, [공단]의 창밖으로 한 여인이 두둥실 떠오르는 것이 보였다. 방랑자들의 왕이 말했다. “내가 서울의 리더다.” 한 손에는 부서진 [팔주령]을, 그리고 다른 한 손에는 비파형동검(琵琶形銅劍)을 쥔 이수경이, 고고한 눈으로 귀환자들을 내려다보았다. 그녀가 쥔 [천부인]에서 흘러나오는 기이한 아우라에 몇몇 귀환자들이 뒷걸음질을 쳤다. “무서워할 것 없다. 어차피 배후성의 힘도 쓸 수 없는 자다!” 함성을 터뜨린 귀환자들이 달려들자, 이수경이 쓴웃음을 지었다. 지난 암흑성의 전투로, [시조의 어머니]가 발하던 ‘격’은 대부분 소실되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녀에게 싸울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의(意)로서 중심을 세우자, 그것은 바람이 되었다.」 이수경이 쥔 비파형동검이 환한 빛을 내뿜었다. [성좌, ‘흥무대왕’이 화신 ‘이수경’의 행동에 깜짝 놀랍니다.] [성좌, ‘외눈 미륵’이 그런 짓을 하면 위험하다 경고합니다!] [성좌, ‘서애일필’이······.] 한반도의 성좌들이 동시에 그녀를 향해 경고성을 발했다. 안다. 이런 짓을 하면, 자신이 어떻게 될지는 이미 잘 알고 있다. 이수경은 흘끗 고개를 돌려, [공단]의 별실을 일별했다. 잠든 유상아의 모습이, 창을 흐릿하게 비쳤다. 그녀는 유상아를 위해 <올림포스>에 참전한 아이들을 생각했다. 듬직한 군인 이현성, 불의를 참지 않는 정희원, 맹랑하지만 용감한 이길영, 침착하고 영특한 신유승을 떠올렸다. 또 온정이 많고 일행들을 잘 챙기는 이설화를, 곧잘 투덜거리지만 예리한 감각을 가진 한수영을 떠올렸다. 그리고 자신의 아이를 떠올렸다. 그 아이가 살아갈 시간을. 오랫동안 꿈꾸었을 이야기를. 자신이 지켜주지 못했던 시간을 기억했다. 비파형동검의 빛이 태양처럼 작렬했다. 그리고 아주 조용히, 이수경이 중얼거렸다. “‘천제(天帝)의 풍신(風神)’이여.” 한반도의 성유물인 천부인에는, 제각기 관련된 성좌가 있다. 지금 이수경이 쥔 비파형동검 또한, 그런 천부인 중의 하나였다. [성좌, ‘천제의 풍신’이 화신 ‘이수경’을 내려다봅니다.] 천제의 풍신. <홍익>의 최고신을 받드는 세 명의 설화급 성좌 중 하나. 지금 이수경은, 자신의 수명을 담보로 마지막 도박을 걸고 있었다. “오시오, 풍백(風伯)이여!” 하늘이 열리는 순간, 비파형동검의 주변에 새파란 아우라가 일렁였다. 그 기이한 빛에 귀환자들이 순간적으로 눈을 깜빡였다. 이수경이 하늘을 보자, 하늘도 이수경을 내려다보았다. ‘단 한순간이라도 좋으니. 내게 저들을 벨 힘을 주시오.’ 그러자 하늘이 경고했다. 검고 푸른 번개가 내리쳤고, 이수경은 그 경고에 대답했다. ‘상관없습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이수경의 전신이 개연성의 스파크로 물들었다. 뼈마디가 으스러지고 피부가 새까맣게 타버리는 고통. 그 고통 속에서, 검을 쥔 오른손이 무거워졌다. 한 인간이 감당할 수 없는 바람의 거력이 그녀의 오른손에 깃들고 있었다. 이것이 한반도 최강의 성좌 중 하나, 풍백의 힘.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이수경은 검을 휘둘렀다. 그리고 공간이 분절되었다. 마치 처음부터 세상은 둘이었다는 듯이, 그녀가 휘두른 검의 궤적을 중심으로 일대의 모든 것이 절대의 풍압 속에 찢겨 나가고 있었다. “무, 슨······.” 퍼버버버벅! 십, 이십, 삼십······ 터져 나가는 귀환자들의 숫자는 순식간에 백을 넘어갔다. 흉벽을 넘어 달려들던 모든 귀환자들이, 허공에서 허리가 절단된 채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죽는 그 순간까지 자신의 죽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얼굴들이었다. 이수경은 떨리는 오른손을 붙잡은 채 숨을 몰아쉬었다. 일격으로, 대부분의 귀환자들은 사멸했다. 그러나 모두가 죽은 것은 아니었다. 아주 짧은 순간, 위험을 눈치채고 타격 범위에서 벗어난 귀환자들이 있었다. <제 3무림>과 <제 4무림> 출신의 십 대 고수들이었다. “끝났군. 죽여라.” 달려드는 십 대 고수들을 보며, 이수경이 미소를 지었다. 할 수 있는 모든 것은 다했다. 허공으로 떨어져 내리는 그녀의 신형을 향해 수십 개의 도검들이 쇄도했다. 퍼버버버벅! 들려오는 끔찍한 피육음 속에서, 이수경은 죽음을 느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관통상에 의한 고통은 느껴지지 않았다. 눈을 뜨자 보이는 것은 누군가의 등. 자신을 업은, 아주 넓은 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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