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0화

320화 “구원의 마왕, 뭘 하고 계시죠? 어서 코인을 가져가시죠.” 안나 크로프트가 도발하듯 말을 이었다. “아니면 깔끔하게 패배를 인정하시는 것도 나쁘지 않겠군요.” 나는 객석에 자리 잡은 성좌들을 천천히 둘러본 뒤, 내 앞을 막아선 포보스를 다시 바라보았다. 오래된 ‘멸살법’의 정보들이 머릿속을 스쳐갔다. 「‘별자리의 맥락’에서 가장 커다란 힘을 행사하는 성운은 <올림포스>다. 개중에서도 특정 구역은 성운의 힘이 극대화되는 성소인데, 가장 대표적인 곳이 바로 ‘경매장’이다.」 이것이, 바로 안나 크로프트가 그토록 여유로울 수 있었던 이유였다. 47번 시나리오 지역인 ‘별자리의 맥락’을 통해 진출할 수 있는 가장 커다란 이벤트는 <기간토 마키아>. 그러니, 최고 주최자인 <올림포스>의 위세는 이곳에서 가장 강력할 수밖에 없었다. “뭔가 오해가 있는 것 같은데······ 난 당신과 싸울 생각이 없습니다.” [거듭 말하지만, 너는 여기서 스킬을 사용할 수 없다. 네 자리로 돌아가라. 그렇지 않으면 ‘법권 지대’의 권한으로 너를 구속할 것이다.] 말이 안 통하는 상대였다.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올림포스>의 완고함에 감탄합니다.] 만약 여기서 내가 스킬을 사용해 ‘코인’을 회수한다면, 저 성좌들은 반드시 내게 ‘법권지대’의 권한을 행사할 것이다. 즉, 안나 크로프트는 처음부터 내가 스킬을 사용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이 내기를 꾸민 것이었다. 나는 포보스를 향해 말했다. “먼저 스킬을 사용한 건 안나 크로프트입니다. 그쪽의 말대로라면, 저 여자부터 처벌해야 하지 않습니까?” [화신 안나 크로프트는 <올림포스>로부터 스킬 사용을 이미 승인받았다.] “그럼 저도 승인해주시죠.” [너는 안 된다.] “왜죠?” [자세한 것은 말할 수 없다. 경매는 끝났으니 일행들과 함께 이곳에서 떠나기 바란다.] 안나 크로프트가 특유의 모호한 미소로 나를 보고 있었다. 속으로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나왔다. ······그래, 여기까지 계산하고 있었다 이거지? 멀리서 이야기를 듣던 한수영이 욕설을 내뱉었다. “뭐 그딴 개소리가 다 있어! 시발, 지금 장난쳐?” 어느덧 유중혁도 [흑천마도]를 빼 들고 있었다. 곰 같은 이현성조차 글러브를 탕탕 부딪치며 위협적인 소리를 냈다. 나는 한수영을 향해 경고했다. ―일행들 말려. 절대 섣불리 움직이지 마. ―뭐? 야, 이건 말도 안 된다고. 지금 나서지 않으면······. ―여기서 싸우면 저 녀석들 생각대로 돼. ―지금 저 여자 계략에 놀아나 주겠다는 거야? ―그럴 리가 있냐? 나는 안심하라는 표시로 손을 흔들어준 뒤, 포보스를 돌아보았다. “그럼, 예정대로 코인은 가져가겠습니다.” [뭐?] 그와 동시에, 나는 스킬을 발동했다. [거대 설화, ‘마계의 봄’이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갑작스레 개방된 거대 설화에, 성좌들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고오오오오······! 설마 내가 격을 개방할 줄은 몰랐는지, 깜짝 놀란 포보스가 외쳤다. [구원의 마왕. 무슨 생각인지는 모르겠지만, 너는 실수하고 있다.] “실수? 뭔 실수?” [이곳은 우리 성운의 ‘법권 지대’다. 난동을 부리게 되면 개연성의 구속을 받는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가?] 쓰읍 숨을 들이쉰 나도, 곧바로 [진언]으로 대답했다. [그래서? 뭐 어쩌라고?] 나는 [책갈피]를 통해 [전인화]를 발동했다. [넌 모르겠지만, 내가 그동안 꽤 많이 참았거든? 너네가 내 ‘운명’ 가지고 지랄할 때부터 말이야.] 포보스는 아레스의 아들. 아마 이 녀석도, 내 지랄 같은 [운명]을 만드는 데 한손을 거들었을 것이다. [무슨······!] [막을 수 있으면 막아 봐. 너희들한테 그럴 능력이 있다면 말이지.] 쿠구구구구구! 마계의 설화가 [전인화]의 마력에 깃들었다. 백청의 마력에 검은 마력이 그라데이션처럼 번져 갔다. 아직도 사태를 파악하지 못한 포보스가 외쳤다. [네놈! 지금 감히 <올림포스>에게 적대하겠다는······!] [<올림포스>의 12신좌들에게 전해.] 나는 나를 향해 격을 키우는 포보스에게 있는 힘껏 주먹을 휘둘렀다. [<김독자 컴퍼니>는, 아주 공격적으로 회사의 몸집을 키울 생각이라고.] 꽈아아아앙! 경매장의 중심에서 일어난 폭발과 함께, 피떡이 된 포보스의 화신체가 허공을 날았다. 연속으로 쏟아진 [전인화]의 전격에 포보스의 화신체가 끔찍한 비명을 지르며 바닥 깊숙한 곳으로 처박혔다. [다수의 성좌들이 당신의 행동에 경악합니다!] [성운, <올림포스>가 당신의 행동을 눈치챘습니다!] 나는 신음을 흘리며 처박힌 포보스를 내려다보았다. ‘헤메는 공포’는 그래도 설화급 성좌. 정석대로 부딪쳤다면 쉬운 상대는 아니었다. 하지만 녀석은 내가 소성운의 성좌라고 방심하고 있었고, 이것이 그 방심의 대가였다. [또 법권 지대니 뭐니 떠들 놈 있어?] 황망해진 올림포스의 성좌들이 나를 보며 뒷걸음질을 쳤다. [당신은 <올림포스>의 법권 지대에서 범법 행위를 저질렀습니다!] 개연성의 구속은 곧바로 발동하지 않는다. 나는 곧장 [바람의 길]을 발동하여 허공으로 뛰어올라 코인을 낚아챘다. [서브 시나리오의 보상으로 1,000,000코인을 획득하였습니다!] 그와 동시에 쏟아지는 시스템 메시지. [서브 시나리오 ― ‘파멸의 한탕’이 종료되었습니다.]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환호합니다!] [일부 성좌들이 당신의 객기에 박수를 보냅니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당신의 안위를 우려합니다!] [내기에서 승리한 성좌들이 당신에게 100,000코인을 후원합니다!] 주먹질 한방에 110만 코인. 대단히 남는 장사가 아닐 수 없었다. [저놈 잡아! 당장 구속해!] 몇몇 성좌들이 외쳤지만, <올림포스>의 성좌들 중 누구도 선뜻 나서는 이는 없었다. 내가 보여준 ‘거대 설화’의 힘을 확인한 까닭이었다. 아래쪽에서 안나 크로프트가 나를 보고 있었다. “당신은 가진 힘에 비해 몸이 너무 가볍군요, 구원의 마왕.” 무려 100만 코인을 잃었음에도 그녀는 낙담하지 않았다. 아마도 이다음에 일어날 일을 알고 있기 때문일 테지. “이제 당신은 <올림포스>의 감옥에 갇히게 될 겁니다.” 법권 지대에서 난동을 부린 성좌는 <올림포스>의 구속을 받는다. “그렇다는 것은, 이제 <기간토 마키아>에 참가할 자격을 잃게 된다는 뜻이기도 하지요.” 나는 그런 안나 크로프트를 보며 웃었다. [그 정도는 나도 알고 있어.] 아마 안나 크로프트는 모를 것이다. 나는, 처음부터 그걸 노리고 있었다는 것을. 츠츠츠츠츠츳! [<올림포스>의 개연성이 당신을 구속합니다.] [당신의 화신체가 <올림포스>의 재판정으로 이송됩니다.] 허공에서 환한 빛이 쏟아지며, 뭔가가 나를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한수영이 외쳤다. “김독자! 또 어디 가! 이 미친놈아!” 마침내 법권지대의 개연성이 작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 경매장에서 일어나는 모든 트러블은, 해당 지역의 관할 <성운>의 의사에 따라 처리된다. 나는 한수영을 향해 싱긋 웃으며 말했다. ―나 갔다 올게! “너 설마 일부러······!” ―일주일 뒤에 보자. 내가 말한 것들 기억하지? 준비 잘해 놔. 한수영이 뭐라뭐라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대부분은 욕이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내 몸은 빛살 속에 사라져버렸다. 강제로 진행된 차원 이동에 짧은 현기증이 닥쳤다. 작은 신음과 함께 휘청이며 눈을 떴을 때, 나는 어슴푸레한 어둠 속에 던져져 있었다. 그런데······ 나만 온 게 아니었다. “······넌 또 왜 왔냐?” 고개를 돌리자, 유중혁이 내 어깨를 으스러져라 붙잡고 있었다. “네놈의 미친 계획을 또 구경만 할 수는 없다.” 역시, 이 녀석은 내가 뭘 할지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 미친 계획들이 지금까지 널 살린 거야, 인마.” “혼자 어디서 죽어 나가는 계획 말인가?” 대꾸하려는 내가 말을 멈춘 것은, 은은한 어둠 속에서 드러난 인기척 때문이었다. 고개를 돌리자, 우리의 눈앞에 작은 계단이 나타났다. 그리고 그 계단의 최상층에, 두 개의 옥좌가 있었다. 옥좌에서 두 개의 인형(人形)이 일렁거리고 있었다. 쿠구구구구. 그저 이쪽으로 시선을 준 것만으로도 피부가 오싹해지는 격. 담대한 유중혁조차 칼자루를 굳게 쥐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는 존재가, 그곳에 있었다. 특히 두 인형 중 한쪽은, 지금의 우리로서는 감히 측량할 수조차 없는 위대한 격을 지닌 존재였다. [구원의 마왕, 꼭 이렇게까지 해야 했나요?] 옥좌에 앉아 있던 한 여인이 한숨처럼 말을 뱉었다. 걷힌 어둠 속에서 일어난 여인이 사뿐사뿐 걸어 내려왔다. 나는 그녀를 향해 꾸벅 고개를 숙였다. 계단 아래로 내려온 여인은, 바로 ‘가장 어두운 봄의 여왕’인 페르세포네였다. “······간만입니다. 또 외양이 바뀌셨군요.” 내 말에 페르세포네가 희미하게 웃었다. [요즘 <에덴>에 관심이 많거든요. 그대도 이 성좌를 좋아하는 것 같던데, 아닌가요?] “그게, 좋아하긴 합니다만······.”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당신의 말을 좋아합니다.] [그나저나, 당신의 무례에 몹시 화가 난 분이 계세요. 알고 계시죠?] “압니다.” 「<올림포스>의 법권 지대에서 범법을 저지른 이는, <올림포스>에서 가장 끔찍한 심판대에 올라서게 된다.」 본래였다면 나를 맞이하는 것은 페르세포네가 아니라 명계의 심판관 중 하나였을 것이다. 아마 나는 적당한 판결을 받고 ‘타르타로스’에 잠깐 수감 되거나 했겠지. 그럼에도 나는 심판관 대신 페르세포네와 만나게 되었다. 아마도, 페르세포네가 손을 썼기 때문일 것이다. “죄송합니다만, 이것밖엔 방법이 없었습니다. <올림포스>에서 포탈이란 포탈은 다 막아놨더라고요.” [······후후, 정말 건방짐이 하늘을 찌르는군요.] 일대의 공기가 차갑게 얼어붙었다. 소리를 내며 굳어버린 어둠. 숨을 쉬는 것이 점차 버거워졌고, 손가락을 움직이는 것조차 힘겨웠다. 누군가의 의지가, 그 자체만으로 이만한 힘을 가질 수 있다는 게 놀라웠다.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흥미로운 표정을 짓습니다.] [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호승심을 갖습니다.] [성좌, ‘해상전신’이 격의 향연에 진심으로 감탄합니다.] [성좌, ‘대머리 의병장’이 놀란 입을 다물지 못합니다.] 채널 안에서 내 화면을 공유하고 있던 성좌들이 격렬한 반응을 보였다. 아마 <스타 스트림> 전체를 뒤지더라도, 지금 저 옥좌 위의 성좌보다 강력한 ‘격’을 지닌 이를 찾는 것은 어려울 것이다. [소개하죠, 구원의 마왕.] 고개를 들자 어둠의 꼭대기에 희미한 빛이 들어왔다. 풍부한 어둠의 중심에 누군가가 있었다. 그 존재를, 어떻게 말로 형용할 수 있을까. 마치 그 어둠 그 자체로 보이는 한 사내. 새하얀 피부의 중심에 박힌 흑요석 같은 눈동자가 내 존재를 꿰뚫는 것만 같았다. [거대 설화, ‘명계(冥界)’가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이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신화’ 중 하나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올림포스>의 신화에 늘 함께 언급되지만, 사실 <올림포스>에 속하지는 않는 존재. ‘멸살법’ 전체를 통틀어 가장 외롭고, 가장 고독한 성좌. 이번 <기간토 마키아>를 무사히 헤쳐 나가기 위해서, 그리고 ‘유상아’를 살리기 위해서······ 나는, 반드시 저 성좌의 손을 빌려야만 했다. 숨을 들이켠 후, 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명계의 왕, ‘부유한 밤의 아버지’시여.” 명계의 밤이 나를 내려다보았다. 오싹한 기류가 나를 압박해왔지만, 여기서 밀려서는 죽도 밥도 안 된다. 왜냐하면 나는 지금, <김독자 컴퍼니>의 대표로 이곳에 온 것이니까. “저와 함께 진짜 <기간토 마키아>를 일으켜 볼 생각은 없으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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