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6화
316화
Episode 60. 파멸의 맛
「꼬 장꼬 장한 녀 석」
아무래도 [제4의 벽]은 저 벽을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멸살법’에도 잠깐이지만 언급이 되기는 했다. 장하영의 ‘정체불명의 벽’과 마찬가지로 강력한 힘을 지녔으나, 그 유래가 밝혀지지 않은 벽 중 하나.
[‘선악을 가르는 벽’이 당신의 선악을 가늠합니다.]
[‘제4의 벽’이 콧김을 뿜습니다.]
[‘선악을 가르는 벽’이 당신의 존재를 가늠하는 데 혼란을 느낍니다.]
[선악을 가르는 벽]은 이 세계의 선악을 나누는 기준이다. 메타트론의 합리적 의심에 반응하여 <스타 스트림>의 선과 악을 분별하는 힘. 저 스킬이 누군가를 ‘악’이라 명명하면, [절대선]에 속하는 성좌들은 그 결정에 대해 표결권을 가지게 되고, 그 결과는 즉각적으로 반영된다. 정희원의 [심판의 시간] 또한 저 ‘벽’의 개연성을 공유하는 힘이었다.
[당황하는군요. ‘벽의 주인’을 처음 보는 것도 아닐 텐데.]
“갑자기 그걸 꺼내실 줄은 몰랐으니까요. 그래서, 저를 ‘악인’으로 규정하실 겁니까? 그 결정은 예전에 철회됐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그럴 생각은 없습니다. 그대의 말대로 그대는 쓸모가 있으니까.]
메타트론의 정확한 생각은 모른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그가 나를 이용해서 앞으로 있을 <에덴>의 대멸망을 대비하고자 한다는 것.
[이 모든 세계의 ■■이 적혀 있는 벽. 당신은 그곳에서 <에덴>의 멸망을 읽었겠죠. 그렇지 않습니까?]
나는 조금 놀랐다. 아무래도 이번 회차의 메타트론은 내가 알던 메타트론과는 조금 다른 것 같았다.
그는 어렴풋하게나마 ‘멸살법’의 존재를 알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최후의 벽’이라는 이름으로 부르고 있다.
내가 뭐라고 답하려는 순간, [제4의 벽]이 말했다.
「김 독 자 쓸데 없 는 소리하 지마」
나는 도로 입을 다물었다.
메타트론이 말했다.
[‘벽’이 입단속이라도 시킨 모양이군요. 과연, 최후의 벽에서도 가장 큰 파편답달까······.]
“‘최후의 벽’이라는 게 뭔지 알고 계십니까?”
내 질문에 메타트론의 표정이 묘연해졌다.
[그건 정말 궁금해서 묻는 것입니까, 아니면 뭔가 다른 목적이 있어서 묻는 것입니까?]
나는 대답하지 않고 메타트론의 눈을 가만히 응시했다.
메타트론이 쓴웃음을 지었다.
[······좋습니다. 대신, 채널은 이제 꺼주시죠. 다들 <에덴> 관광은 충분히 하셨을 테니까.]
그 말에 허공에서 간접 메시지들이 폭발했다.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머리를 벅벅 긁습니다.]
[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손톱을 뜯으며 발광합니다.]
[성좌, ‘대머리 의병장’이 천국의 정경에 감동합니다.]
[일부 성좌들이 에덴 관광에 만족합니다!]
[50000코인을 후원받았습니다.]
<명계> 때도 그랬듯, <에덴>을 궁금해하는 성좌들이 제법 많았던 모양이다. 바앗, 하는 소리와 함께 비유가 채널을 닫는 소리가 들렸다.
두툼하게 쌓인 책의 장정을 매만지며, 메타트론은 이야기를 시작했다.
[‘최후의 벽’은 이 세계의 본질을 구성하는 벽입니다. 아주 오래전부터 존재했고, 조금씩 부서져 왔으며, 끝내는 무너져 내린 벽이죠.]
메타트론의 손이 닿은 장정은 무척이나 낡아서, 그저 스치는 것만으로도 부스러기가 떨어져 나올 지경이었다.
[제가 가진 ‘선악을 가르는 벽’ 또한 그 벽의 파편 중 하나입니다.]
“몇 명이나 이런 ‘벽’을 가지고 있죠?”
[저도 확실히는 모릅니다. 아직 ‘그분’으로부터 계시는 없었으니까요. 다만······.]
나는 순간 메타트론이 말하는 ‘그분’이 누구일까 고민했다. 사실 미련한 고민이었다. 애초에 <에덴>에서 ‘그분’이라 칭해질 존재는 하나뿐이니까.
메타트론이 말을 이었다.
[모든 ‘벽’에는 그 의미가 있습니다. 어떤 ‘벽’은 선악을 가르고, 어떤 ‘벽’은 소통을 통제합니다. 그리고 어떤 ‘벽’은, 정해진 세계의 미래를 바꿀 수도 있습니다.]
메타트론은 나를 보며 말꼬리를 흐리더니, 진지한 목소리로 말을 맺었다.
[나는 그대가 ‘정해진 멸망’을 바꿀 열쇠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메타트론이 내게 기대하는 바가 너무 명확해서, 조금 부담스러울 지경이었다.
나는 일부러 자신 없는 투로 답했다.
“서기관께서도 ‘단 하나의 설화’를 만들고 계시겠지요.”
[······그렇습니다.]
“저는 이제 고작 ‘승’을 노리는 애송이입니다. 제가 그런 일을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십니까?”
[어떤 설화가 마지막에 선택받을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메타트론이 집무실의 창가로 고개를 돌렸다. <에덴>으로 들어오는 볕이 메타트론의 수려한 얼굴을 비췄다. 덕분에 어떤 부분은 짙은 그늘에 가리워졌고, 어떤 부분은 비정상적으로 밝아졌다. 공평하지 않은 빛에, 일순간 메타트론의 얼굴은 기이하게 일그러진 것처럼 보였다.
[우리는 그저 이해할 수 있는 범주 안에서 경배의 방식을 정성껏 고르면 됩니다.]
아마도 그것이 메타트론이 생각하는 ‘이야기’일 것이다.
나는 메타트론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슬슬 이쪽도 본론으로 들어가야 할 때였다.
“저를 어떤 용도로 이용하시든 상관없습니다. 다만, 저도 조건이 하나 있습니다.”
[그대는 화신 유상아를 살리기 위해 이곳에 온 거겠죠.]
역시, 이야기가 빨라서 좋다.
말투로 보아 메타트론은 성류방송을 통해 유상아의 상세를 이미 파악하고 있는 듯했다.
[「의식의 흐름」은 무척 위험한 질병이어서, 개연성을 함부로 투자했다간 투자한 쪽도 큰 손실을 입습니다. 빠져나가는 설화의 급류에 함께 휩쓸리게 되니까요.]
“해결책은 없습니까?”
[있습니다. 다른 대천사들처럼 이 동산에서 위대한 말씀을 믿고 실천하면······.]
“그건 <에덴>에 가입해야 하잖습니까. 그거 말고요.”
[······지금으로서는 화신체 자체를 극한까지 강화해 병증을 완화하는 것이 최선이겠군요. 기연이 될 만한 아이템을 구하는 것이 좋을 겁니다. 무림의 인간들이 만든 ‘대환단’ 정도로는 어림도 없고, ‘거대 설화’의 기적을 담은 성유과(星遺果)나 성유액(星遺液) 정도는 되어야 합니다.]
성유과와 성유액······.
내 표정을 읽었는지, 메타트론이 미소를 지었다.
[에덴에도 남은 성유과가 있긴 합니다만, 그대가 원하는 용도로 사용하기엔 무립니다. <에덴>의 성유과는 좀 특별하거든요.]
알고 있다. 아마 지구인들 중 <에덴>의 성유과가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럼 방법이 없군요.”
나는 조금 낙담했다.
혹시나 <에덴>이라면 가능하지 않을까 했는데, 아무래도 무리였던 모양이다. 그런데 메타트론이 말을 덧붙였다.
[내 말은, <에덴>에는 방법이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삐걱거리며 집무실의 문이 열렸다. 높이 쌓인 책들을 무너뜨리며 집무실 안쪽으로 걸어들어오는 한 사내. 눈부신 광휘에 덮인 화신체를 보며, 나는 나도 모르게 전신의 격을 발동했다.
[오랜만이군, 구원의 마왕.]
*
정희원은 반쯤 소풍을 온 기분으로 <에덴>을 구경했다. 천사들은 대부분 친절했고, 몇몇은 그녀에게 뭔가를 묻기도 했다. 대부분은 김독자나 유중혁에 관한 질문들이었지만, 당연한 일일 거라 생각했다. 그 둘은 현재 한반도에서 가장 많은 주목을 받는 존재니까.
오히려 신경이 쓰이는 게 있다면, 아까부터 혼이 빠졌다 돌아왔다를 반복하는 그녀의 배후성이었다.
“우리엘.”
[응, 희원아.]
“있잖아요.”
[응, 희원아.]
“제 얘기 안 듣고 있죠?”
[응, 희원······아?]
화들짝 놀란 우리엘이 정희원과 궁의 석판에 새겨진 계급 표를 번갈아 보며 말을 더듬었다.
[무, 뭐······. 아, 맞아. 천사들의 계급도를 설명하던 중이었지. 그러니까 우리 계급도는······.]
“그렇게 신경쓰이면 직접 가서 보지 그래요?”
정희원이 궁의 ‘집무실’ 쪽을 턱짓하며 말하자, 우리엘의 표정이 창백해졌다.
[그, 그게. 아니. 공과 사는 구분해야······.]
“<에덴> 설명은 나중에 해줘도 괜찮아요. 직접 마중나와 준 것만도 고마웠는데요 뭘.”
그 무서운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이렇게나 허둥대는 걸 보며, 정희원은 피식 웃었다. 아무래도 미워할래야 미워할 수가 없는 배후성이다.
십자 귀고리를 만지작거리며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던 우리엘이 고개를 들었다.
[······김독자 보러 가도 돼?]
“그럼요.”
정희원의 허락에 우리엘의 안색이 환하게 변했다. 그러나 다음 순간, 무슨 생각을 했는지 우리엘의 눈빛은 시무룩해졌다.
[······아냐 역시 안 되겠어.]
“왜요?”
[그게······.]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던 우리엘이 손가락을 꼼지락댔다. 그런 우리엘이 귀여웠던 정희원이 피식 웃었다. 말이 배후성이지, 다 큰 여동생이 하나 생긴 느낌이었다.
우리엘의 침울한 얼굴을 보며 정희원이 물었다.
“독자 씨가 그렇게 좋으면 얼른 가서 봐야죠. 뭘 망설여요?”
그 물음에 얼굴이 발갛게 달아오른 우리엘이 횡설수설 손짓을 하더니, 이내 한숨을 푹 내쉬며 고개를 숙였다.
[그게, 뭔가 부끄러워서.]
“뭐가 부끄러워요? 맨날 간접 메시지 보내 놓고.”
[팬레터 보내는 거랑 직접 만나는 건 다르잖아.]
“지난번에도 만났다면서요? 별똥별의 연회인가 뭔가에서.”
[그땐 그냥 화신체만 보낸 거고, 지금은 다르다고. 온라인 게임 아바타로 만나는 거랑 직접 만나는 거랑은 다르잖아.]
지극히 성좌다운 비유였다.
[그, 그렇다고 해서 너랑 함께했던 모든 시간을 게임처럼 생각했다는 건 아냐! 그러니까 이건, 어디까지나 비유적인 의미로······.]
허덕대는 우리엘을 보며, 정희원이 쓴웃음을 지었다. 아마도, 이것이 그녀의 배후성과 다른 성좌들의 차이일 것이다. 그리고 김독자가 유독 우리엘만큼은 챙겨주는 이유도, 이런 부분에 있을지도 모른다.
뭐라고 답하려던 정희원의 입술이 굳은 것은 그때였다.
등줄기를 스치는 나쁜 예감이 있었다.
멀찍이서, 궁의 회랑을 돌아 누군가가 서기관의 집무실로 향하고 있었다. 정확히 김독자가 있는 방향. 무척이나 갈무리 된 ‘격’이었음에도, 스치는 인형(人形)을 보는 순간 정희원은 소름이 돋았다.
“우리엘! 저 성좌······!”
정희원은 저 존재를 알고 있었다.
모를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저 존재는 지난 ‘마왕 선발전’을 악몽으로 만든 장본인이었으니까.
고개를 돌리자 우리엘도 굳어진 표정으로 그쪽을 응시하고 있었다.
“가 보는 게 좋겠어요.”
우리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
거대한 열차가 궤도를 이탈하는 것 같은 소리가 귓가를 가득 메웠다.
고오오오오!
그저 마주친 것만으로도 여러 기억들이 되살아 나는 기분이었다.
이곳은 <에덴>이고, 저 성좌가 나를 공격할 일은 없다. 그럼에도 내 ‘격’이 이토록 격렬히 반응하는 것은, 기억에 의거한 본능일 것이다.
태양빛을 연상시키는 숭고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생각보다 예의가 없군. 지난 이야기를 아직도 반추하는가.]
“곱씹지 않으면 뒤통수를 맞는 게 <스타 스트림>이니까.”
[성좌가 되었음에도 아직 필멸자의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했군. 성좌들은 그런 사소한 역사에 연연하지 않는다.]
사내의 몸통에 붙어 있는 네 개의 팔.
이마에 박힌 세 번째 눈이 오연한 시선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마왕 선발전’ 당시의 처절했던 전투가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수르야. 악마 사냥은 잘 다녀오셨습니까?]
메타트론의 말에, 수르야가 관심 없다는 듯 나를 스쳐갔다. 지나치는 수르야의 허리춤에 악마 대공의 머리통이 매달려 있었다. 수르야는 그 머리통들을 끄집어 메타트론의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머리의 상태를 살피던 메타트론이 말했다.
[지원 보상은 성운을 통해 발송해드리겠습니다.]
아마 수르야는 <에덴>을 통해 하청 시나리오를 수주받은 모양이었다. 미카엘이나 우리엘처럼, 저 ‘지고한 빛의 신’ 또한 악마종들에겐 악몽이나 다름없으니까.
[아니, 그냥 지금 주면 좋겠군. 요즘 내 ‘성운’이랑 별로 사이가 안 좋아서 말이지.]
그 말을 하며 수르야가 내 쪽을 흘끗 노려보았다.
메타트론이 답했다.
[이참에 <에덴>으로 오시는 것도······.]
[농담은 그쯤 하지. 용건은 끝났으니 이만 가보겠다.]
수르야는 그 말을 남기고, 보수를 받아 집무실의 출구로 향했다. 메타트론이 멀어지는 수르야의 뒷모습을 희미한 미소로 응시하고 있었다.
어쩐지 허탈한 느낌이었다. 괜히 긴장하고 있었는데, 녀석이 여기에 온 건 나와는 상관없는 용무였던 것이다. 그런데 거칠 것 없이 나아가던 수르야의 발걸음이, 문 앞에 다다른 순간 우뚝 멈췄다.
[구원의 마왕, 네 동료 하나가 특수한 질병에 걸렸다고 들었다.]
수르야가 돌아보지 않은 채로 말을 이었다.
[원한다면, 내가 도와줄 수 있는데.]
순간, ‘멸살법’의 정보들이 머릿속을 빠르게 스쳐갔다.
「수르야는 <베다>의 여덟 로카팔라 중 하나.」
「그는, <베다>의 성유액이자 또 다른 로카팔라인 소마(Soma)의 기원 중 하나다.」
<베다>의 성유액 소마.
확실히 그것이라면, 유상아의 상태를 호전시켜줄 가능성이 있었다.
나는 메타트론을 돌아보았다. 그는 의뭉스런 표정으로 나를 향해 미소짓고 있었다.
이 서기관은, 처음부터 수르야가 이곳에 올 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책략가가 <에덴>에 있는데도 멸망을 막을 수 없었다니······ 새삼 <스타 스트림>의 운명이 얼마나 혹독한 것인지를 실감하게 된다.
나는 수르야 쪽을 돌아보지 않은 채로 물었다.
“뭘 원합니까?”
소마는 <베다>에서도 특권을 받은 신들만이 마실 수 있는 음료. 그런 귀품을 내주는데, 아무런 조건이 없을 턱이 없었다.
지고한 빛의 신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악귀 같은 웃음이 수르야의 입가에 걸려 있었다.
[나는 <올림포스>의 파멸을 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