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5화
315화
화르륵, 하고 불길이 치솟는 소리가 들린다 싶더니, 정신을 차렸을 때는 미카엘과 나 사이에 뜨거운 불의 벽이 만들어져 있었다.
인상을 찌푸린 미카엘이 자신의 손목을 털며 물러났다.
[······무슨 짓이지?]
[꺼져.]
잠시 우리엘을 바라보던 미카엘이 피식 웃었다.
[우리엘······, ‘악마 사냥’을 그만두더니 정신이 나간 모양이구나.]
미카엘의 전신에서 보랏빛 격류가 사납게 흘러넘치기 시작했다.
[성좌, ‘타락의 구원자’가 설화 ‘마왕 살해자’의 이야기를 준비합니다.]
마왕 살해자.
그것은 1863회차의 유중혁이 가지고 있던 것과 같은 설화였다.
에덴의 녹빛 초원이 보라색 파장으로 물들고 있었다. 말라 죽은 풀들이 파스슷 소리를 내며 몸을 뉘였고, 오싹한 감각이 발을 타고 올라왔다.
’마왕 살해자’는 마왕을 상대로는 무적에 가까운 힘을 발휘하는 설화. 미카엘에게 저 설화가 있는 이상, 나는 녀석에게 절대로 이길 수 없다.
미카엘의 격이 나를 겨냥하는 순간, 누군가가 내 앞을 막았다.
“천사들은 기본적으로 다 포악한가 보지?”
정희원이 [심판자의 검]을 앞세운 채 나를 지키고 있었다.
희미하게 떨리는 어깨와 위축된 기세. 그럼에도 정희원은 용기를 내고 있었다. 죽음조차 불사하겠다는 인간의 의지가, 저 고고한 대천사의 격류를 감당하고 있었다.
그런 정희원의 뒤에, 우리엘이 섰다.
츠츠츠츠츳······!
배후에서 환하게 타오르는 광채. [지옥염화]가 불길을 일으키자, <에덴>의 들판은 튀어 오르는 스파크로 가득해졌다.
일촉즉발의 상황에 나는 침을 삼켰다.
우리엘은 대천사들 중에서도 다섯 손가락에 꼽을 만큼 강하다. 그리고 절대악 계통의 성좌들을 상대로는 <에덴> 최고의 상성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상대는 그 ‘미카엘’이었다.
모든 종류의 전투 능력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대천사.
이 <에덴>에서, 순수한 전투 능력만으로 저 미카엘을 넘어설 대천사는 존재하지 않는다.
[성좌, ‘정의와 화목의 친구’가 ‘타락의 구원자’를 만류합니다.]
[성좌, ‘젊은이와 여행의 수호자’가 ‘타락의 구원자’를 노려봅니다.]
[절대선 계통의 성좌들이 ‘타락의 구원자’를 질타합니다!]
허공에서 쏟아지는 메시지에도 미카엘은 물러서지 않았다.
오히려 재미있다는 듯 웃고 있었다.
[그래, 슬슬 <에덴> 최강이 누구인지 가릴 때도 됐지.]
미카엘의 양손에 보랏빛과 흰빛의 아우라가 동시에 맺혔다. 마주 잡은 양손에서 소용돌이치는 힘. 이윽고 아우라는 양손 검의 형상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식은땀이 흘렀다. 저 자식이, 여기서 성유물을······?
[성좌, ‘하늘의 서기관’이 ‘타락의 구원자’에게 경고합니다!]
츠츠츠츠츠츳!
거대한 폭풍이 몰아치며 주변의 스파크가 한꺼번에 꺼졌다.
<에덴>의 최고위 성좌, 메타트론의 힘. 적어도 이 <에덴> 안에서는 거스를 수 없는 거대한 압력이었다. 주변을 내리누르는 폭력적인 침묵에, 미카엘도 뒤늦게 기세를 흩트렸다.
잠시간 하늘을 올려다보던 미카엘이 원망스럽다는 투로 중얼거렸다.
[······당신마저? 이제 <에덴>도 갈 데까지 간 모양이군.]
미카엘은 그 말과 함께 돌아서더니, 등을 돌려 멀어지기 시작했다.
녀석의 허리춤에는 악마들의 머리가 열매처럼 매달려 있었다.
[악마 대공 ‘세미다’의 머리]
[악마 대공 ‘그라페이오’의 머리]
······오소소 소름이 돋는다.
마계의 대공들 중에는 하위급 마왕에 준하는 녀석들도 있다. 그런데 녀석은, 그런 대공들의 머리를 장난감처럼 매달고 있었다.
미카엘의 신형이 언덕 너머로 완전히 사라진 후에야 정희원이 한숨을 내쉬며 검을 집어넣었다.
고개를 돌리자 우리엘이 이쪽을 보고 있었다.
대천사 우리엘.
그녀는 ‘별자리의 연회’ 때 보았던 모습과는 달랐다. <에덴>의 제복을 갖춰 입고, 십자 문양의 귀고리를 낀 우아한 모습. 평소의 장난스러운 모습은 찾을 수 없을 정도로 고결한 격이 그녀의 전신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김독자······.]
그녀는 복잡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더니, 갑자기 정신을 차린 듯 화들짝 놀란 얼굴을 했다. 그러더니 시선을 피하듯 고개를 돌려 정희원을 바라보았다.
[반가워. 이렇게 만나는 건 처음이지?]
살짝 입술을 벌린 정희원도 우리엘을 마주 보고 있었다.
아마도, 감격한 듯한 모습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정희원은 우리엘을 보는 게 처음일 것이다. 심지어 지금 눈앞에 있는 우리엘은 화신체와 진체가 하나가 된 형상.
눈앞의 이 대천사가 바로, 그 긍지 높은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의 본신인 것이다.
[따라와, 서기관이 기다리고 있어.]
*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는 거지.”
나와 정희원은 곧바로 <에덴>의 궁으로 안내되었다. <에덴>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단출한 모습이었다. ‘멸살법’의 묘사로 익히 보아 알고는 있었지만, 확실히 다른 대성운들과는 달랐다.
별다른 허위가 느껴지지 않는 소소한 장식들. 단조로운 백색으로 꾸며진 천장과 벽감의 조각상들에서는 기묘한 겸양이 느껴질 지경이었다.
문제는, 그런 겸양이 내 기다림을 더욱 지루한 것으로 만들고 있다는 것이었다.
―여기서 기다려. 곧 안내원이 올 거야.
우리엘은 정희원에게 궁을 안내해준다며 나를 이곳에 남겨둔 채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에덴>을 구경하고 싶은 건 나도 마찬가지였는데······. 조금 섭섭한 기분이었다.
······아무래도 1863회차에서 있었던 일 때문이겠지.
나는 우리엘의 동료인 요피엘을 그곳에 두고 왔으니까.
원망을 받더라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김독자, 왔으심?]
멍한 눈으로 고개를 들자, 구름 위에 앉은 천사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십 대 초반의 외양에 곱슬곱슬한 머리카락. 반쯤 졸린 듯한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는 천사를 보며 나는 퍼뜩 자리에서 일어났다.
“······설마 라파엘이십니까?”
라파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젊은이와 여행의 수호자, 라파엘.
이번 <에덴> 행은 제법 운이 좋은 모양이었다. 우리엘에 이어 라파엘의 진체까지 보게 되다니. 그나저나······ 이 대천사가 정말로 그 무시무시한 ‘아스모데우스’를 격퇴한 장본인이란 말인가.
[‘비밀 포탈’은 어떻게 알아낸 거임?]
“요피엘에게 들었습니다.”
[<에덴>에 온 기분이 어떠심?]
“좋습니다.”
[······잠 오는 표정인데?]
나는 황급히 표정을 바르게 하며 웃었다. 라파엘은 따라오라는 듯 응접실에 이어진 통로로 나를 안내했다.
외곽의 회랑을 걷는 동안, 뚫린 창 너머로 동산의 정경이 보였다. 드문드문 풀을 뜯던 양들이 나를 올려다보며 작게 울었다. 양들을 보며 내가 물었다.
“<에덴>에는 진짜로 ‘어린 양’이 있군요.”
[끄덕. 잠 안 올 때 세기 좋음.]
“······우리 보고 세라고 저러고 있는 겁니까?”
[너도 본 적 있을 거임. 자기 전에 눈 감고 양을 떠올리면 나타나는 게 바로 쟤들임.]
이건 ‘멸살법’에도 나오지 않는 이야기였기 때문에, 나는 깜짝 놀랐다.
사람들이 자기 전에 세는 양이 진짜 쟤들이라고?
[거짓말임.]
“······.”
나는 어이가 없어져서 라파엘을 쳐다보았다. 라파엘은 히죽거리며 웃더니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거 아셈? <에덴>에는 원래 양이 없었음.]
“······또 거짓말하시는 겁니까?”
[이건 진짜임. 양들은 우리엘이 데려온 거임.]
······우리엘이? 왜?
[언젠가 서기관이 우리엘에게 서브 시나리오를 준 적이 있음.]
<에덴>의 대천사들은 ‘하늘의 서기관’을 통해 임무를 받는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스타 스트림>에서의 모든 임무는 ‘시나리오’로 환원된다. 이것도 ‘멸살법’에는 없는 얘기였기 때문에, 나는 호기심이 동했다.
“무슨 시나리오였습니까?”
[‘어린 양 열 마리를 데려오라’.]
<스타 스트림>의 다수 시나리오들은 ‘비유’의 형태를 가진다. 그리고 <에덴>에서 ‘어린 양’은 너무나 명백한 메타포였다. 쉽게 말해, 메타트론은 우리엘에게 신도 열 명을 데려올 것을 원한 것이었다.
“······설마 우리엘은 ‘진짜 양’을 데려온 겁니까?”
[끄덕. 처음엔 열 마리였는데, 지금은 번식해서 저렇게 많아진 거임.]
······뭔가 우리엘 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중간중간 양들을 관리하는 천사들의 모습도 보였다. 양들의 털을 깎아주거나, 먹이를 주는 천사들. ‘멸살법’의 묘사대로 다들 아름다웠다.
그들 중 몇몇이 이쪽을 바라보더니 서로 수군거렸다. 하나, 둘, 셋······ 숫자는 점점 더 많아져 갔다. 누군가는 깎은 양털로 즉석에서 플래카드를 만들어 이쪽을 향해 흔들기 시작했다.
······뭐라고 써 있는 거지?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엄한 표정을 짓습니다.]
사색이 된 천사들이 황급히 흩어졌다. 멀리서 이쪽을 향해 손을 흔드는 우리엘과 정희원의 모습이 보였다. 라파엘이 혀를 차며 첨언했다.
[하여간 천사들이란······ 타락한 인간을 좋아한다니까.]
“멀쩡하게 말할 수 있으시네요?”
[들어가셈. 서기관이 기다리고 있으심.]
어느새, 서기관의 집무실이 눈앞에 있었다.
나는 가볍게 심호흡을 한 후 문을 열고 들어갔다.
시야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사람의 키 높이 만큼 쌓인 책의 향연.
평생을 읽어 치워도 부족할듯한 책 더미에, 무심코 방의 주인에게 호감이 생길 정도였다. 자고로 책을 좋아하는 사람 중에 나쁜 사람은 없는 법이다.
나는 책들을 무너뜨리지 않게 조심하며 집무실 안쪽으로 발을 내딛었다. 책들의 산 너머로, 집무실의 테이블이 보였다. 그리고 그 앞엔 피곤한 얼굴로 앉아 있는 잿빛 머리카락의 대천사가 있었다.
[오셨습니까.]
지금껏 보아온 그 어떤 성좌와도 비견할 수 없을, 경건한 목소리였다. 안경테를 밀어 올린 메타트론이 나를 향해 미소를 지어 보였다.
[반갑군요 ‘구원의 마왕’. 제가 바로 ‘하늘의 서기관’입니다.]
*
내가 <에덴>을 찾아온 용무는 크게 둘이었다.
하나는 표면적인 용무고, 다른 하나는 진짜 용무였다.
[먼저 다른 세계선에서 있었던 일들을 듣고 싶습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은밀한 모략가’와 계약을 맺어 1863회차의 세계선으로 간 것부터, 그곳의 사람들을 만나고 요피엘을 남겨둔 채 이곳으로 돌아온 이야기까지.
어떤 것은 솔직하게, 어떤 것은 간명하게, 그리고 어떤 것은 말하지 않은 채로 나는 이야기를 끝냈다. 메타트론은 내 이야기를 경청했다. 어떤 이야기는 진지하게, 어떤 이야기는 침착하게 들었다. 그리고 어떤 이야기는 흥미롭게 듣는 것 같았다.
[‘은밀한 모략가’라······.]
“······그를 알고 있습니까?”
메타트론이 옅게 미소했다.
[이 세계에서 그자를 모르는 성좌는 아마 없을 겁니다. 하지만 그가 누구인지를 아는 성좌도 아마 없겠지요.]
나는 금방 입을 다물었다. 내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었다.
[이야기를 들려줘서 고맙습니다, 구원의 마왕.]
“아닙니다.”
[역시 미래의 <에덴>은 멸망하게 되는군요.]
멸망을 말하는 것치고는 아주 태연한 목소리였다. 조금의 동요도 느껴지지 않는 얼굴. 나는 그런 메타트론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물었다.
“왜 저를 부르신 겁니까? 단순히 이야기를 듣기 위해서는 아닐 텐데요.”
하늘의 서기관.
<에덴>의 모든 것을 기록하는 자이자, <에덴>의 2인자.
메타트론의 미소가 짙어졌다.
[왜 불렀다고 생각하십니까?]
이것이 메타트론의 대화 방식이다.
자신의 욕망을 상대방의 입으로 듣는 것.
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답했다.
아마도, 이것은 나에게 기회였다.
“저를 ‘멸망’을 막기 위한 도구로 쓰려는 생각이시겠죠.”
[그대를? 그대에게 무슨 쓸모가 있습니까?]
메타트론의 투명한 두 눈에 내 모습이 비치고 있었다.
한쪽 눈의 김독자는 흰 날개를 달고 있었고, 다른 쪽 눈의 김독자는 마왕의 검은 날개를 펼치고 있었다.
“저는 동맹을 선택하지 않은 ‘마왕’이니까요.”
나는 지난 ‘마왕 선발전’을 통해 마계의 ‘73번째 마왕’이 되었다.
무려 수천 년이나 공석이었던 자리.
그런 자리를, 갓 태어난 성좌인 내가 차지해 버렸던 것이다.
나는 지난 메시지 로그를 열어보았다.
[마왕, ‘검은 갈기의 사자’가 당신을 자신의 마계로 초대했습니다.]
[마왕, ‘헤아릴 수 없는 엄격’이 당신을 자신의 마계로 초대했습니다.]
······.
그것은 내가 마왕 위에 오른 직후부터 지금까지 쌓여 있는 마계의 메시지들이었다
“<에덴>의 멸망은 <마계>와의 전쟁에서 촉발됩니다. 당신은 그 중재자로 저를 사용하려는 것이겠죠.”
마왕 위에 올랐으니, 다른 마계의 관심을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다면 <에덴>은 어떨까.
<에덴> 또한 마왕이 되기 전부터 내게 비정상적인 관심을 보여왔다.
우리엘을 필두로 다른 대천사들이 보여준 호의에 이르기까지.
지금까지 <에덴>이 악 성향을 띤 성좌들에게 취해온 태도를 보면, 나에 대한 대우는 거의 파격이라 불려 마땅할 정도로 이례적인 것이었다.
“당신에겐 제가 필요합니다. <스타 스트림>의 역사상, 마계와 에덴의 관심을 동시에 받고 있는 존재는 아마도 제가 처음일 테니까요.”
나는 일부러 목소리를 키웠다.
앞으로 있을 협상을 생각하면, 여기서 메타트론의 기세에 눌려서 좋을 것은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메타트론은 대답하지 않고, 잠시 내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다음 순간, 나는 뭔가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강렬한 위압감과 함께, 메타트론의 뒤쪽에서 휘황한 빛이 떠오르고 있었던 것이다.
어디선가 느껴지는 광적인 시선. 내 존재를 집요하게 파고드는 위험한 힘이 느껴졌다.
[전용 스킬, ‘제4의 벽’이 강하게 발동합니다!]
츠츠츠츠츳!
눈앞을 가리는 스파크와 함께, 나는 신음을 흘리며 몇 걸음 물러났다.
조금씩 잦아드는 스파크 사이로, 메타트론이 감탄한 목소리를 냈다.
[······역시 그대였군요. ‘최후의 벽의 파편’이 선택한 존재가.]
“무슨······.”
[‘선악을 가르는 벽’이 깜짝 놀라 당신을 바라봅니다.]
나는 흠칫 놀라 눈앞을 바라보았다.
메타트론의 뒤쪽에서 일렁이는 은빛의 ‘벽’.
틀림없었다.
[‘제4의 벽’이 ‘선악을 가르는 벽’을 향해 이를 드러냅니다.]
선악을 가르는 벽.
대천사 메타트론 또한, 나와 같은 ‘벽’의 소유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