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8화
308화
잠시 후, 일행들은 각자 장비들을 관리하며 김독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칼날을 갈던 이지혜가 정희원에게 물었다.
“독자 아저씨 진심일까요? 진짜 올림포스 부수려고······.”
“농담이겠지, 독자 씨가 그렇게 바보는 아냐.”
“하지만 3년 동안 어디 다녀왔는지도 모르잖아요. 여기 3년이나 지난 건 알까요?”
“······알겠지. 바보는 아니라니까.”
“하지만 우리가 모르는 3년 동안 아저씨가 돌아버렸을 수도 있잖아요. 우리 사부만 봐도······.”
말을 잇던 이지혜는 멀리서 느껴지는 유중혁의 시선에 잽싸게 입을 다물었다. 정희원은 그런 이지혜를 보다가 한숨을 푹푹 내쉬며 김독자가 들어간 접견실 쪽을 일별했다.
*
마치 구치소의 접견실을 연상시키는 새하얀 별실에, 두 사람이 앉아 있었다.
“3년 만이구나.”
“······제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걸렸어요.”
이수경을 보며, 김독자는 몇 번이나 입술을 달싹였다. 해야 할 말들은 많았지만 어떤 말들은 켜켜이 쌓인 시나리오의 지층에 묻혀버렸고, 또 어떤 말들은 해야 할 시기를 놓쳐버렸다.
“저.”
그렇게, 지나간 이야기의 무덤 속에서 간신히 말 한마디가 발굴되었다.
“죄송합니다.”
이수경이 옅게 웃었다.
“다음 시나리오로 떠날 생각이겠지?”
“예.”
“언제?”
“오늘 저녁에요.”
김독자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물었다.
“같이 가실 겁니까?”
“아직 여기서 해야 할 일이 많아.”
이수경은 접견실의 창문 너머로 [공단]을 바라보고 있었다. 김독자도 이수경의 시선을 따라 창밖을 내다보았다. 그곳에 한때 이 사회의 수감자였던 여자들이 있었다.
전우치를 배후성으로 둔 조영란. [피스 랜드]에서 함께 싸웠던 이복순.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은, 그들의 의사보다 더 커다란 힘에 끌려 잘못된 선택을 해.”
범법자였던 사람들은, 이제 감옥에서 나와 사람들을 위해 싸우고 있었다.
“중요한 것은 바뀔 수 있다는 거겠지. 그리고 아마도, 이제 저들은 기회를 얻은 거야.”
이수경의 말투는 반 정도는 자조적이었다. 이수경은 고개를 돌려 아들의 눈을 바라보았다.
“······알고 있지? ‘커다란 이야기’는 개인을 말살시키는 법이다.”
“알고 있어요.”
김독자의 동공이 희미하게 흔들렸다. 그 두 눈에서 작은 스파크 같은 것이 튀었다. 어쩌면 꺼내지 말았어야 할 화제였다. ‘커다란 이야기’에 의해 말살되는 인간. 아마도 그녀의 아들은 이 세상 누구보다도 그런 인간에 대해 잘 알고 있었으니까. 한참을 망설이던 이수경이 입을 열었다.
“······그땐 말하고 싶은 게 있었어.”
“알아요. 저도 읽어봤으니까.”
이수경이 썼던 책, 『지하살인자의 수기』.
이수경의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며 사회는 가정 폭력에 대해 본격적으로 이야기하기 시작했고, 관련 처벌법에 대한 강화 법안도 등장했다. 그러니 결국 거시적으로 보자면, 그것은 올바른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이야기 속에서.
인간 ‘이수경’과 ‘김독자’는 완전히 해부당했다.
김독자는 이 사회의 가정 폭력이 낳은 비극의 아들이 되었고, 이수경은 남편을 죽이고 그것을 이야깃거리로 만든 범죄자가 되었다. 사람들은 두 사람을 저마다 다른 이름으로 불렀다. 살인자의 아들, 혹은 잔혹한 어머니······. 세계를 아주 조금 바꾼 대가였다.
“그 책이 나오기 전에도 우린 줄곧 말살당해왔어요. 그리고 어쩌면 앞으로도······.”
김독자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하고 도중에 끊어졌다.
두 사람은 서로를 보는 대신, 창밖을 보고 있었다.
세계가 그곳에 있었다.
상처받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시나리오에 지친 화신들의 머리 위로, 더 끔찍한 이야기들을 원하는 성좌들이 빛을 발하고 있었다.
김독자가 말했다.
“커다란 이야기가 개인을 말살시킨다. 저는 그걸 바꾸러 가는 거예요.”
“나도 그걸 바꾸기 위해 여기 있는 거다.”
“그럼······ 이번에도 여기서 헤어지겠군요.”
김독자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건강하세요.”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김독자의 모습이 사라졌다. 이수경은 말없이 김독자가 사라진 문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접견실의 커튼 너머에서 그림자 하나가 일렁이더니 한수영이 튀어나왔다. 한수영은 김독자가 열고 나간 문을 보며 말했다.
“······정없는 녀석이네 진짜.”
“내가 그렇게 키웠지.”
이수경의 말에, 한수영이 눈을 가늘게 떴다.
“아줌마. 왜 말 안 했어?”
“뭘 말이냐?”
“책 말이야.”
이수경은 모르겠다는 듯 뻔뻔한 눈빛이었다. 그런 이수경을 보며, 한수영은 묘하게 격앙된 어투로 말했다.
“아줌마 동기들한테 다 들었다고. 그 책으로 번 인세, 친척들한테 보내줬다며? 저 녀석 생활비 보태라고.”
“실제로 저 아이에게 간 건 없으니 안 보낸 거나 마찬가지지.”
“······그 친척 새끼들 지금 어딨어?”
“지금쯤 다 죽었겠지.”
반쯤 벌어졌던 한수영의 입이 닫혔다. 이제 멸망 이전의 원한은 대개가 무의미해져 버렸다. 죗값을 치러야 할 사람들은 속 편하게 모두 죽어버렸고, 남은 사람들은 이제 더 끔찍한 세상을 맞이하기 위해 생을 연명해야 한다.
한숨을 내쉰 한수영이 물었다.
“근데 진짜 같이 안 갈 거야?”
“자식을 너무 오래 키우는 것 같아서. 이쯤 하고 내 인생 살아야지.”
옅게 웃는 이수경의 얼굴에 주름이 늘어 있었다.
이 [공단]이 안전하게 굴러갈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이수경이었다. 마계와 지구. 서로 다른 두 생태가 무사히 화합할 수 있었던 것은, 이수경과 유상아의 차별 없는 통치 덕분에 가능했다.
이 [공단]에 이수경은 반드시 필요한 사람이었다.
그것을 잘 알았기에, 한수영은 말없이 몸을 돌렸다.
그리고 뚜벅뚜벅 걸어서 김독자가 열고 나간 문을 열었다.
이수경이 말했다.
“수영아.”
한수영은 돌아보지 않고 손을 들었다.
“걱정 마. 아들은 나한테 맡기고, 아줌마는 그냥―”
“몸조심해라.”
그 말에, 한수영은 멍한 얼굴로 뒤를 돌아보았다. 이수경이 미소짓고 있었다. 김독자와 똑같은 색의 눈동자. 입술을 달싹이던 한수영이 한숨처럼 말했다.
“하여간······ 끝까지 재수 없다니까.”
*
사탕을 쪽쪽 빨던 한 소녀가, 갑자기 나를 가리키며 선언했다.
“오징어.”
갑작스런 정신 공격에 나는 잠깐 넋을 잃었다.
[일부 성좌들이 소녀의 정체를 궁금해합니다.]
이 소녀로 말할 것 같으면······ 그러니까······ 나는 한숨을 쉬며 소녀의 이름을 말했다.
“미아야, 잘 지냈니?”
“아저씬 누구예요?”
오래 안 봤다고 그새 또 까먹은 모양이다.
내가 뭔가 설명하려는데, 유미아가 손뼉을 치며 말했다.
“아, 우리 오라버니 친구.”
“친구는 아니고······ 너 못 본 새 말투가 바뀌었구나.”
“아저씨도 못 본 새 더 못생겨졌네요.”
“야, 유중혁. 설마 니 동생도 데리고 갈 건 아니지?”
내 말에, 유미아의 머리에 손을 척 얹고 있던 유중혁이 나를 노려보았다.
나는 그런 녀석을 잠시 바라보다가 머쓱하게 물었다.
“······잘 지냈냐? 너무 바빠서 물어보는 것도 잊었네.”
“한가하게 그딴 걸 물을 시간 따윈 없다.”
그 딱딱한 목소리를 듣고 있자니, 이상하게도 기분이 나쁘기보다는 친숙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 이래야 내가 아는 유중혁이지.
내가 아는 유중혁이 계속해서 말했다.
“46번 시나리오는 위험하다. 당연히 동생은 두고 간다.”
“누구누구 남길 거야? 유상아 씨야 당연히 남을 수밖에 없고, 거기에 우리 엄마랑 ‘방랑자’ 세력이랑······.”
“비천호리를 남긴다.”
“비천호리랑 벌써 이야기했어?”
“귀환자 집단과 계약했다.”
재앙에서 풀려난 귀환자들은, 당분간 고향 세계에 적응할 시간이 필요하다. 유중혁은 벌써 그들과 접촉해 [공단]의 보호와 관련된 계약을 맺고 돌아온 것이다. 역시 주인공 아니랄까봐 행동력 하난 끝내주는군.
하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들만으로는 이곳을 지킬 수 없어.”
“스승도 곧 이곳에 돌아올 거다.”
“그런 문제가 아냐. 게다가 초월좌들이 이곳에 있으면 더 위험해. 알지?”
내가 말하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유중혁은 잘 알고 있을 것이었다.
왜냐하면 녀석은 이미 지난 회차에 파천검성을 잃은 적이 있으니까.
유중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다. ‘그 일’이 있기 전에 다시 돌아오면 된다. 너는 46번 시나리오에 대해서나 생각해라.”
“생각하고 있어.”
“쉽지 않을 거다. 실패할지도 모른다.”
녀석이 그렇게 말하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46번 시나리오는 혼자서 깰 수 없어. 알고 있을 텐데?
유중혁을 처음 만났던 날, 녀석을 설득하기 위해 나는 그런 말을 했었다.
그리고 드디어, 그 말을 실현할 날이 찾아온 것이다.
유중혁이 말했다.
“46번 시나리오를 클리어하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아니, 한 가지뿐이야.”
“네 생각처럼 되진 않을 것이다.”
“너, 내가 없는 동안 일행들이랑 얘기는 많이 했냐?”
“나는 사람을 믿지 않는다.”
유중혁이 냉정한 말투로 대답하자, 곁에서 이야기를 듣던 유미아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46번 이후에 뭐가 있는지 알잖아? 앞으로는 다른 사람들과 협력하지 않으면―”
“진짜 재앙은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아.”
유중혁의 말에 나는 입을 다물었다.
45번 시나리오인 ‘금의환향’은 ‘재앙’과 싸우는 시나리오였다.
겉모습은 괴물이지만, 속은 인간인 대상과의 전투.
나는 시스템 로그에 저장된 메시지를 읽었다.
[당신은 45번 시나리오를 클리어하였습니다.]
[당신의 그룹원은 시나리오 내내 아무도 사망하지 않았습니다.]
[당신의 그룹원은 시나리오 내내 어떤 화신도 살해하지 않았습니다.]
[당신의 그룹은 화신과 귀환자들 사이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었습니다!]
[당신과 그룹원의 ‘재앙’ 상태가 해제됩니다.]
새로운 가능성. 그것은 겉모습이 다른 종족과도 신뢰와 믿음이 가능하다는 증거였다. 그런 내 생각을 읽었다는 듯, 유중혁이 말했다.
“시나리오가 시작된 후, 많은 사람들이 시나리오에 의해 희생되었지. 하지만 그보다 더 많은 사람들은 같은 인간에 의해 죽었다.”
서늘한 눈동자를 빛내는 유중혁이 갑자기 멀어 보였다.
“너는 이번 시나리오에서 일행들을 잃게 될 것이다.”
“너 무슨 남 얘기하듯······.”
“나는 이미 많은 사람들을 잃어봤다. 하지만 넌 다르겠지.”
“······.”
“마음의 준비를 하는 게 좋을 거다.”
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46번 시나리오가 무엇인지는 나도 알고 있다. 그렇기에, 유중혁의 말을 쉽사리 납득할 수가 없었다. 내가 아는 일행들이라면 결코 그럴 리가 없다. 비록 3년 만에 만난 나를 감금하고 수면제도 먹이는 인간들이지만, 절대로 서로 싸우거나 다툴 일은······.
“그런데 당신도 같이 가는 건가요?”
“어, 왜?”
“······뭐, 그냥 물어봤어요.”
······허공에서 강렬한 스파크가 튀는 것이 보였다.
멀리서 일행들이 이쪽으로 다가오는 모습이 보였다. 길영과 신유승이 선두에, 뒤쪽으로는 이지혜와 이현성, 이설화가 차례로 걸어오고 있었다. 문제는 그 사이에 낀 정희원과 한수영이었다.
······그러고 보니 저 둘이 문제가 있었지. 젠장.
[메인 시나리오 #46 ― ‘별의 증명’이 도착했습니다!]
46번 메인 시나리오, 별의 증명.
<올림포스>를 비롯한 성좌 녀석들을 만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 시나리오를 돌파해야 한다.
츠츠츠츳······!
얼마 지나지 않아, 허공에서 시나리오를 진행하는 도깨비들이 나타났다.
[메인 시나리오를 시작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