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3화
303화
머리 위에 깃털처럼 내려앉은 손의 감촉.
마음속 깊은 곳에 굳어 있던 뭔가가 뭉그러지는 느낌이 들었다.
어쩌면, 나를 알아본 것일지도 모른다.
숙였던 고개를 들자, 신유승의 한없이 맑은 눈동자가 보였다.
“······아저씨?”
*
잠시 후, 나는 [키메라 드래곤]을 타고 허공을 날고 있었다.
정확히는 나뿐만 아니라 다른 귀환자들도 비슷한 모양새였다. 다리에 넷, 날개에 둘, 꼬리에 셋······ 거기다 나까지. 총 열 명의 귀환자들은, 서울행 드래곤을 타고 날아가는 중이었다.
나는 멀미 증상을 일으키는 귀환자들을 독려하듯 말했다.
“조금만 더 가면 서울입니다. 다들 힘내세요.”
“끙, 난 뛰어가는 게 더 빠른데······.”
비천호리가 투덜거리며 말했다.
“공중으로 가는 게 더 안전합니다. 혹시 모를 위험이 있을 수 있으니까요.”
“뭐······ 형씨가 그렇다니까 그런 거겠지. 근데 저 애, 형씨의 아이인거요?”
아무래도 신유승을 보며 묻는 것 같아서, 나는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네, 뭐······ 비슷합니다.”
어쨌든 내 화신이고, 내 아이만큼이나 각별한 건 사실이니까.
“······허, 젊은 나이에 고생이 많았겠구먼. 와이프는?”
와이프라니, 나는 애초에 결혼한 적도 없다.
그런데 내 침묵을 어떻게 알아들었는지 비천호리가 동정 섞인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고개를 돌리자 다른 귀환자들도 비슷한 표정들이었다.
“쯧쯧 거참 안됐구만······.”
“자, 모두 조금만 힙냅시다. 어차피 이 시나리오가 끝나야 우리도 가족을 만날 수 있으니까.”
“형씨! 힘내게!”
역시 귀환자들에게 제일 잘 먹히는 정서는 가족애인 모양.
오해야 어쨌거나 일은 생각보다 잘 풀리고 있었다. 생각보다는 말이다.
“뭘 그렇게 수군거려? 조용히들 안 해?”
이지혜의 말에, 귀환자들이 일제히 입을 다물었다. 아직도 믿을 수 없다는 듯, 내 쪽을 흘끔거리던 이지혜가 신유승에게 말했다.
“이거 잘못되면 다 너 때문이야. 알지?”
신유승이 고개를 끄덕였다.
참고로 십여 분 전, 신유승은 이지혜와 이길영에게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이 오징어, 독자 아저씨인 것 같아요.”
내 머리카락을 열심히 잘라내던 이지혜는 입을 딱 벌렸고, 내 다리를 잘라보려고 기를 쓰던 이길영은 뻣뻣이 굳었다. 그리고 말할 필요도 없이, 두 사람의 반응은 똑같았다.
“······이게 독자 아저씨라고?”
“우리 형이 오징어일 리가 없잖아, 멍청아!”
신유승이 빽 소리를 질렀다.
“정말이야! 독자 아저씨 맞다니까요!”
그런 말다툼을 벌이며 날아온 지도 벌써 십 여분 째.
“쟤 또 병 도졌네······ 길영아, 이번이 몇 번째지?”
“다섯 번짼가 여섯 번짼가.”
휑한 바람이 얼굴을 때리며 지나갔다.
내 곁에 몸을 쪼그리고 앉은 신유승이 속상한 듯 한숨을 쉬었다.
“아저씨······.”
[마왕, ‘구원의 마왕’이 자신의 존재를 증명합니다.]
[시나리오 패널티로 ‘간접 메시지’가 왜곡됩니다.]
[‘못 생긴 오징어’가 자신의 빨판을 벌름거립니다.]
고개를 끄덕인 신유승이 의기양양하게 외쳤다.
“봐요! 아저씨 맞잖아!”
고마운 일이었다.
정말 고마운 일인데, 왜 이렇게 심경이 복잡한 건지 모르겠다.
이지혜가 한숨을 푹푹 쉬며 말했다.
“너 저거 독자 아저씨 아니면 어쩔 건데?”
“그건······.”
“저 재앙들 줄줄이 다 서울까지 데리고 갔다가, 큰일 나면 어쩔거냐고 꼬맹아.”
“······만약 아저씨가 아니라도.”
신유승이 입술을 질끈 깨물며 말을 이었다.
“상아 언니가 말했잖아요. 적의를 가지지 않은, 소통 가능한 재앙들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지금까지 그런 케이스가 없었잖아.”
“이번이 처음일 수도 있잖아요.”
다행히 유상아는 내가 남긴 말을 일행들에게 잘 전달한 모양이었다.
45번 시나리오에서 재앙으로 변한 귀환자들이 찾아올 것이고, 그들 중에는 적의를 가지지 않은 존재들도 분명 있을 것이라고.
“상아 언니 통역 스킬 레벨 높잖아요. 이번엔 소통할 수 있을지도 몰라요. 만약 일이 잘못되면 제가 테이밍이라도 해보죠 뭐.”
조금씩 희망이 생기는 것 같았다.
어쨌든 모로 가도 서울로만 가면 되는 것이다.
일행들 사이에 잠시 정적이 내려앉았고, 한동안 창공을 가르는 바람 소리만이 들려왔다. 나는 신유승에게 말을 걸었다.
‘유승아.’
[시나리오 패널티로 당신의 언어가 왜곡됩니다.]
[‘못 생긴 오징어’가 주의를 끕니다.]
신유승이 나를 바라보았다.
“네, 아저씨.”
‘내가 김독자란 거, 애써 일행들한테 설득시키지 않아도 돼.’
[시나리오 패널티로 당신의 언어가 왜곡됩니다.]
[‘못 생긴 오징어’가 열 개의 다리를 배배 꼽니다.]
“네? 어째서······.”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제대로 대답할 자신이 없었다.
[‘못 생긴 오징어’가 우울한 표정을 짓습니다.]
나는 말없이 이지혜를 바라보았다.
「거짓말, 그럴 리가 없어.」
머릿속으로 고스란히 들려오는 이지혜의 상념들. 나는 일행들을 만난 순간부터 줄곧 ‘전지적 독자 시점’을 발동한 채였다.
「독자 아저씨는······.」
어떤 감정은 언어로 전달되지 않는다. 파편화된 문장들과 발기발기 찢어진 단어들. 어떤 시간들은, 그렇게 문장으로 남지 못한다. 아직 제대로 바라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내 존재는, 이들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인 것이다.
눈앞에서 동료가 죽어가는 무력감.
누군가가 희생하는 것을 보면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는 절망감.
이지혜의 장검집에 달린 작은 키링이 흔들렸다.
나는 그 키링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이지혜는 이미 오래전부터 ‘상처받은 검귀’였다.
그런 감정을 숨기려는 듯, 이지혜가 애써 웃으며 말했다.
“야, 다시 잘 봐봐. 이번엔 진짜 독자 아저씨 맞아?”
“······.”
신유승은 대답하지 못했다. 어쩌면, 내 감정을 함께 느끼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것이 성좌와 화신의 관계다. 말하지 않아도, 말한 것보다 많은 것들을 이해하는 것.
이지혜가 짓궂게 웃었다.
“야, 왜 말이 없어? 역시 자신 없는 거지?”
“그게 아니라······.”
“신유승 또 저럴 줄 알았다니까!”
이길영이 히죽거리며 끼어들었다.
“누나, 얘 전에도 그랬잖아요! 무슨 개구리보고 저건 독자 아저씨가 돌아온 게 틀림없다면서―”
“죽여 버린다······.”
“기억 안 나냐? 그때 너 때문에 우리 다 독 걸려서 죽을 뻔했잖아.”
이지혜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확실히 그런 일도 있었지.”
“쟤네 집에 컬렉션도 있잖아요. <개구리 김독자>, <촉수 재앙 김독자>, <거의 김독자일 뻔했던 코끼리 괴수종>······.”
“죽는다고 했다······.”
“근데 <개구리 김독자>는 나 주면 안 돼?”
“이게 진짜······!”
쿠구구구구!
키메라 드래곤이 격렬한 날갯짓을 하며 갑자기 허공에 정지했다.
이지혜가 비명을 질렀다.
“와악! 뭐야 갑자기?”
일련의 비행정들이 앞길을 막고 있었다. 한두 대가 아니었다. 40번대 이후의 시나리오에서만 구입할 수 있는 코인 비행정들. 비행정들의 갑판에는 큼지막하게 ‘GG’라고 쓰여 있었다.
······저거 왠지 뭔지 알 것 같은데.
―부산 연합, 여기까진 뭐하러 온 거지?
비행정에서 일말의 호의도 느껴지지 않는 고압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원작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이길영이 투덜거리며 말했다.
“······내가 왜 안 나오나 했지.”
원작의 전개대로라면, 25번 시나리오 이후 한반도는 몇 개의 지역별 연합으로 갈라진다. ‘부산 연합’, ‘대구 연합’, ‘서울 연합’······.
대부분의 연합들은 강력한 배후성을 둔 화신을 중심으로 뭉치게 되는데, 내 기억이 맞다면 경기 지역에도 그런 녀석이 하나 있었다.
―재앙종은 경기 지역으로 들일 수 없다. 지금 당장 재앙종을 두고 떠나라.
경기(Gyeonggi) 연합.
말이 경기 연합이지, 사실 저 연합의 구성원들은 대부분 경기도 출신이 아니었다. 오직 집단의 이익만을 위해 움직이는 약탈자들. 몇 번의 회차에서 저 ‘경기 연합’은 유중혁의 골칫거리 중 하나였다.
왜냐하면 저 연합을 이끄는 수장이 바로 ‘십악’ 중의 하나였기 때문이다.
―오 초 안에 떠나지 않으면 발포하겠다. 오.
곤란하다는 듯, 이지혜가 장도를 쥐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저렇게 나오면 또 안 싸울 수가 없는데 말이지.”
본래의 전개대로였다면, 지금의 일행들은 단일 무력으로 경기 연합을 상대할 수 없을 것이었다. 하지만 3회차는 원작과는 많이 달라졌다.
이지혜는, 단순히 운이 좋아서 살아남은 것이 아니다.
“난 부산 연합의 리더, 이지혜다.”
이지혜가 빼든 장검에서 새파란 불길이 치솟았다. 그 섬연한 마력의 파장을 보며, 나는 진심으로 감탄했다.
지혜야, 정말 노력했구나.
그것은 에테르 블레이드였다. 무림에서도 손에 꼽는 고수들만이 쓸 수 있는 기술을, 이지혜는 자신의 힘으로 구현할 수 있는 경지에 오른 것이다.
―해상제독! 이곳은 바다가 아니다! 적어도 하늘에서 우리 ‘경기 연합’은······!
“그건 해 봐야 알겠지.”
씩 웃은 이지혜가 칼날을 뒤로 젖히며 도약 자세를 취하는 순간.
콰아아앙!
반대편 비행정들에서 폭음이 터져 나왔다. 파공음과 함께 연달아 반쪽으로 잘려나가는 비행정들. 이지혜가 어이없다는 듯 이길영을 돌아보았다.
“저거 혹시 티타노냐? 왜 끼어들고 그래?”
“······제 티타노 죽은 지가 언젠데요.”
키메라 드래곤은 아직 움직이지 않았으니, 신유승이 한 짓도 아니었다.
그로부터 1분도 채 지나지 않아, 경기 연합의 비행정들이 모두 폭파당했다. 새카맣게 피어오르는 폭연 속에서, 누군가가 훌쩍 뛰어올라 이쪽을 향해 날아오고 있었다.
이지혜가 경계하며 칼날을 세웠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경계심은 옅어졌다. 아는 얼굴이었기 때문이다.
사색이 된 신유승이 이지혜를 향해 소리쳤다.
“지혜 언니! 희원 언니한테 벌써 말했어요?”
“그게······ 아까 전에 문자 벌써 돌렸거든. 근데 이렇게 빨리 올 줄은 몰랐네······.”
이지혜가 생글생글 웃으며 사과했다.
“오랜만에 다 모이고 좋지 뭐! 저거 독자 아저씨 아니면 오징어 파티나 하면 되니까. 희원 언니이―!”
다가오는 그 반가운 얼굴을 보며, 나는 심장 한 편이 아릿해졌다.
―어차피 이럴 거였으면 며칠 동안 준비했던 건 다 뭐예요! 나한테 준 스킬들은 대체 뭐냐고요!”
―그건 28번 시나리오의 ‘사스콰치’들을 상대하라고 알려드린 겁니다.
정희원을 보는 순간, 나는 알 수 있었다.
그녀는 내가 말한 모든 것들을 지켰다.
그리고 내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강해졌다.
―씨발! 개소리하지마! 못 보내! 또 혼자 가지마! 제발!
자욱한 연기와 함께, 특공복을 입은 정희원이 키메라 드래곤의 등에 착지했다. 거무튀튀한 빛을 내는 [심판자의 검]이 사납게 울고 있었다. 서슬 퍼런 눈으로 오징어들을 돌아본 정희원이 물었다.
“누가 김독자라고?”
움찔 놀란 귀환자들이 일제히 숨을 죽였다. 뭔가 심상치 않다는 걸 눈치챈 신유승이 재빨리 앞으로 나서서 말했다.
“아, 아직 누가 아저씨인지는 몰라요. 아까 언뜻 아저씨 같은 느낌을 받은 것뿐······.”
정희원이 희미하게 웃었다.
“그렇구나. 그래서 상아 씨한테 가는 거야?”
“네, 상아 언니한테 가서 의견을 좀 구하면······.”
“그럴 필요 없어. 내가 김독자인지 아닌지 알 수 있으니까.”
“네?”
[등장인물 ‘정희원’이 ‘심판의 시간’의 발동을 준비합니다.]
“회를 떠보면 알겠지. 저 오징어가 진짜 독자 씨라면 살아날 것이고.”
거의 광기에 가까운 마력이 정희원의 칼날에 맺히고 있었다.
“아니면 내 손에 뒈질 거니까.”
무섭게 피어오르는 귀화(鬼火).
그제야 뭔가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은 신유승이 외쳤다.
“아저씨! 도망가요!”
키메라 드래곤이 울부짖는 순간, 나는 귀환자들과 함께 드래곤의 등에서 뛰어내렸다. 창공에서 마력이 충돌하는 굉음이 터졌고, 나는 [바람의 길]을 발동해 떨어지는 귀환자들을 하나씩 끌어당겼다.
어차피 서울은 코앞이었다.
어떻게든 여의도만 도착하면, 나는 싸우지 않고도 내가 나임을 증명할 수 있다.
나를 비롯한 열 명의 귀환자들은 손을 마주 잡은 채 허공에서 하나의 진형을 만들었다. 모두 사전에 약속되어 있던 것이었다.
“비천호리!”
“맡겨 두게!”
무림에서 가장 빠른 발을 가진 비천호리가, 허공에서 답보를 거듭하며 쾌속의 길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그의 진신절기 중 하나인 [답설무흔(踏雪無痕)]이 발동하며 내가 만든 [바람의 길]에 탄력을 불어 넣었다.
우리는 바람개비처럼 회전하며 가속에 가속을 거듭했다. 순식간에 경기권의 창공을 뚫고 서울에 진입하자, 시스템 메시지가 들려왔다.
[‘목표 거점’에 거의 근접했습니다.]
멀리서 보이는 여의도의 정경.
그곳에 우리가 표식을 남겨야 할 거대한 비석이 있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나는 시공간이 삐거덕거리는 느낌을 받았다.
지금 저곳으로 가면 안 된다는 강렬한 예감이 머릿속에 경종을 울리고 있었다.
황급히 방향을 틀어 일행들의 진로를 바꾼 것은, 거의 본능에 의존한 선택이었다.
콰콰콰콰콰!
그리고 간발의 차이로, 무지막지한 파괴력을 가진 검강이 창공을 휩쓸고 지나갔다. 검강은 하늘의 천장을 부술 것처럼 솟아올라, 이내 천공에 균열을 내고 사라졌다. 맞았다면 뼈도 추리지 못할 무시무시한 일격이었다.
그리고 내가 알기로, 지금 이 기술을 쓸 수 있는 화신은 한반도에 하나뿐이었다.
고개를 숙이자, 나를 올려다보는 서늘한 시선과 마주쳤다.
멈췄던 초침이 흘러가듯, 아주 천천히 시간이 흐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바닥에 꽂아 넣은 거대한 [흑천마도]. 내가 아는 그 어떤 존재보다 강력하고, 내가 아는 그 누구보다도 굳건한 의지를 가진 화신이 그곳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유중혁.”
그곳에, 이 세계의 패왕(霸王)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