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2화
302화
이지혜의 손에는 충무공의 검이 쥐어져 있었다. 1863회차의 이지혜가 가지고 있었던 쌍룡검은 아니었지만, 꽤 성능이 준수한 무기였다.
아마 어디 박물관에 있던 걸 가져온 것 같은데······.
“어디 오징어포를 떠보실까.”
나는 당황하는 귀환자들을 뒤쪽으로 물렸다.
“지혜야. 멈춰! 나야!”
나는 필사적으로 외쳤지만, 말이 통할 턱이 없었다.
이지혜 쪽에서는 괴성을 지르며 촉수를 덩실거리는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윽, 징그러운 오징어 새끼가. 죽어!”
스산한 칼날을 번뜩이며 달려오는 이지혜.
······이거 왠지 1863회차랑 비슷해지는데.
스거걱!
이지혜의 칼날이 머리 위를 아슬아슬하게 스쳤다. 잘려나간 머리카락들이 비산하자, 이길영이 추임새를 넣었다.
“잘 좀 해봐요 누나! 작은 촉수 말고 큰 촉수를 베라고요!”
“시끄러워!”
아무래도 내 머리카락이 저쪽에서는 촉수로 보이는 모양이다.
나인 줄 모르고 저러는 건 알지만, 그래도 서러운 건 어쩔 수 없었다.
나는 긴장하며 물러나는 귀환자들에게 재차 경고했다.
“다들 공격하지 마세요! 제가 알아서 할 테니까!”
다행히 귀환자들이 내 말을 들어준다는 것이 위안이라면 위안이었다.
비천호리가 착잡한 목소리로 말을 보탰다.
“언제든 도와줄 테니 말만 하시오, 형씨.”
비천호리는 <제2 무림>에서 꽤 뛰어난 고수로 활동했던 귀환자. 정 어쩔 수 없는 상황이 닥친다면 그의 도움을 빌릴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어떻게 해야 이지혜에게 내 존재를 알릴 수 있을지 고민했다.
“오징어 베기!”
이 시나리오에서, 내 ‘음성 언어’는 이지혜에게 전달되지 않는다.
하지만 본래 인간의 의사소통은 음성 언어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뭐야, 이상하게 움직이지마 인마!”
나는 [바람의 길]을 발동해, 현란한 스텝으로 바닥에 글씨를 쓰기 시작했다. 이지혜의 검로를 피해 나가며 바닥에 죽죽 그어지는 선들. 뒤쪽의 귀환자들도 내 의도를 눈치챘는지 탄성을 터트렸다.
사실 이게 먹힐지 안 먹힐 지는 잘 모르겠다. 원작에서는 이런 종류의 소통 가능성에 대해 자세히 다루지 않았으니까.
문제는 이지혜가 내 의도를 언제쯤 눈치채 주는가 하는 것인데.
“뭐야, 쟤 바닥에 글씨 쓰는데요?”
다행히 눈치 빠른 이길영이 먼저 내 의도를 파악했다. 그러자 난도질을 반복하던 이지혜가 멈칫하며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그곳에는 내 현란한 발자국으로 쓰인 글씨가 남겨져 있었다. 악필이긴 하지만, 알아볼 수 없을 정도는 아니었다.
나 김독자야.
내가 쓴 문장은 그런 것이었다. 그런데.
[시나리오 페널티로 당신이 쓴 문자가 왜곡됩니다.]
······이것까지 페널티가 걸린다고?
이지혜를 대신해 왜곡된 문장을 읽어준 것은 [제4의 벽]이었다.
「나 는 멋 쟁이 오징 어 다」
[등장인물 ‘이지혜’가 ‘귀살 Lv.10’을 발동합니다!]
이지혜의 눈동자에 붉은 귀화가 일렁이며, 나를 향해 가속을 시작했다.
스걱, 스가각!
아까보다 훨씬 빨라진 검격에, 조금씩 피하는 것이 버거워졌다.
항복 표시로 코트를 벗어 흔들기도 해보았지만, 내 모든 노력은 시나리오 페널티에 의해 허사가 될 뿐이었다.
[‘못 생긴 오징어’가 화신 ‘이지혜’를 도발합니다.]
“죽어!”
슬슬 머리가 아파왔다.
이런 식의 환시(幻視)가 계속되는 상황이라면 내가 무슨 짓을 해도 내 의사는 저쪽에 전달되지 못할 것이다.
······역시, 그냥 제압하는 것이 최선이겠지.
하지만 왜인지, 그렇게 하고 싶지가 않았다.
어쩌면 1863회차를 다녀오면서 내 안에서도 뭔가가 변한 걸까.
「그때, 멋쟁이 오징어의 머릿속에 뭔가가 떠올랐다.」
아, 잠깐만. 혹시 그거라면······?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일단 저질러 보기로 했다.
아무리 시나리오가 내 언어를 왜곡한다 해도, 그것만큼은 왜곡할 수 없을 것이다.
[마왕, ‘구원의 마왕’이 화신 ‘이지혜’에게 91코인을 후원합니다.]
무엇으로도 왜곡되지 않는 것.
[시나리오 페널티로 당신의 ‘간접 메시지’가 왜곡됩니다.]
[‘못 생긴 오징어’가 화신 ‘이지혜’에게 91코인을 바칩니다.]
그것은 바로 내가 후원하는 코인의 ‘숫자’다.
갑작스런 오징어의 후원에 이지혜가 미간을 찌푸렸다.
“······뭐야?”
알아 들어라 지혜야, 제발.
[‘못 생긴 오징어’가 화신 ‘이지혜’에게 91코인을 바칩니다.]
“이런 거 준다고 공격 안 할 줄 알아?”
[‘못 생긴 오징어’가 화신 ‘이지혜’에게 91코인을 바칩니다.]
“아 짜증나게 하지 마! 나 코인 100단위로 안 떨어지는 거 제일 싫은데!”
······그래? 그럼 이건 어떠냐.
[‘못 생긴 오징어’가 화신 ‘이지혜’에게 9158코인을 바칩니다.]
그리고 처음으로 이지혜의 공격이 멈췄다.
뭔가를 알아들어서 그런 것 같지는 않았고, 후원 코인의 양이 갑자기 많아졌기 때문인 듯했다.
이길영이 물었다.
“갑자기 왜 멈춰요 누나?”
“아니, 저게 자꾸 나한테 코인을 주잖아.”
“코인을요?”
깜짝 놀란 이길영이 나를 보며 말했다.
“혹시 성좌인가?”
“‘못 생긴 오징어’ 같은 수식언을 가진 성좌가 어딨냐?”
있다.
아니, 있었다.
오징어는 아니지만 하여간 비슷한 수식언을 가진 녀석은 있었다.
지금은 수식언이 바뀌었지만······ 젠장, 내가 왜 이런 설명을.
훌쩍 물러난 이지혜가 나를 미심쩍은 눈으로 노려보며 물었다.
“왜 자꾸 91코인을 주지?”
“91코인?”
“그래. 그러더니 마지막엔 9158코인을 줬어.”
“9158코인이면 꽤 많은데, 숨겨진 히든 시나리오인가? 아니면 뭔가 의미가 있는 걸지도······.”
기회는 지금 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못 생긴 오징어’가 화신 ‘이길영’에게 7942코인을 바칩니다.]
내 코인 세례에 이길영이 화들짝 나를 바라보았다.
“7942? 이거 설마······.”
아이들의 눈빛이 흔들리고 있었다.
그 맑은 눈망울들을 보며, 나도 마음이 벅차올랐다.
그래, 그거다 얘들아.
나야. 김독자라고.
[성좌, ‘해상전신’이 당신의 정체에 의구심을 품습니다.]
[한반도의 성좌들이 당신의 정체를 궁금해합니다.]
뜻밖의 성좌가 채널에 입장한 것은 그때였다.
[성좌, ‘술과 황홀경의 신’이 채널에 입장했습니다.]
[성좌, ‘술과 황홀경의 신’이 당신의 정체를 눈치챘습니다!]
술과 황홀경의 신 디오니소스.
그러고 보면, 이 ‘7942’를 내게 알려준 것은 저 디오니소스였다.
생각보다 일이 잘 풀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 성좌라면, 내가 보낸 메시지를 아이들을 대신해 해독해 줄지도 모른다.
[성좌, ‘술과 황홀경의 신’이 ‘91’이란 일종의 숫자 유희라고 주장합니다!]
심장이 크게 뛰었다.
디오니소스의 추측은 맞았다.
그냥 읽으면 ‘구십일’일 뿐인 저 숫자는, 내 딴에는 아이들에게 의사를 전달하기 위한 암호였다.
9(구) 1(One).
구원.
천만다행으로, 디오니소스는 내가 전하고자 하는 내용을 이해한 듯했다. 이제 저 디오니소스가 내가 ‘구원의 마왕’이라는 걸 알려주기만 한다면······.
[성좌, ‘술과 황홀경의 신’이 저 오징어는 지능이 뛰어난 오징어가 틀림없다고 말합니다.]
나는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길영이 기뻐하며 외쳤다.
“뭐야, 역시 히든 피스였네. 촉수를 자를 때마다 코인을 주는 건가?”
[성좌, ‘술과 황홀경의 신’이 고개를 끄덕입니다.]
이번 시나리오가 끝나면 나는 <올림포스>를 쳐부술 것이다.
신이 난 이지혜가 덩달아 외쳤다.
“땡잡았네. 야 길영아, 네가 반 맡아!”
이지혜가 달려든 촉수는 내 팔이었다.
“되게 날쌔네. 누나가 먼저 저기 큰 촉수부터 잘라줘요!”
그건 내 다리였다.
“아 되게 거슬리네. 그냥 중간부터 끊을까.”
그것은······ 그것만은 절대 안 된다.
결국 참다못한 내가 ‘격’을 해방하려는 순간, 창공에서 용의 포효성이 들려왔다.
그오오오오오!
귀환자들조차 순간적으로 움찔할 정도의 박력. 새카만 용의 비늘이 허공을 덮는 것을 보며, 나는 창공을 올려다보았다.
그곳에, 그리운 얼굴이 있었다.
이지혜가 그랬고, 이길영이 그랬듯······ 아이는 많이 자라 있었다.
“맨날 늦어 신유승! 지 발로 다니지도 않는 게!”
도톰한 볼의 젖살만이, 소녀가 내가 기억하는 그 아이라는 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키메라 드래곤을 타고 나타난 신유승이 바닥으로 착지했다. 신유승은 이쪽을 흘끗 보더니 이지혜에게 물었다.
“아직 처리 못 했어요? 금방이라더니.”
“하려던 참이었어. 그런데 재앙 중에 이상한 게 끼어 있어서.”
“이상한 거?”
“저기 저 오징어.”
신유승이 나를 보았다.
“쟤가 자꾸 나한테 코인을 주잖아. 기분 나쁘게······.”
신유승은 계속해서 나를 보고 있었다.
[마왕, ‘구원의 마왕’이 자신의 화신을 바라봅니다.]
나는 천천히 다가갔다.
“뭐야 시발! 갑자기 다가오지 마!”
이지혜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나는 앞으로 나아갔다.
나아가지 않을 수가 없었다.
“비스트 마스터가 왔다!”
“됐어, 이제 해치울 수 있다고!”
신유승의 등장과 함께, 해안가의 주변부로 달아났던 화신들이 백사장을 가로질러 달려왔다. 곳곳에서 부딪치는 병장기 소리. 용기를 얻은 화신들이 나와 귀환자들을 향해 칼날을 들이밀고 있었다.
사실 이 45번째 메인 시나리오에는, 진짜 히든 피스가 숨겨져 있다.
만약, 우리 그룹이 단 한 명의 희생자도 낳지 않고 시나리오를 클리어할 수만 있다면······.
귀환자들과 함께 밀려난 비천호리가 외쳤다.
“형씨! 우리도 오래 버틸 순 없소! 뭘 하려는 건진 모르겠지만 빨리 하시오!”
인간은 같은 인간조차 신뢰하지 않는 종족이다.
그런데 그들이 어떻게 ‘재앙’과 친구가 될 수 있을까.
“죽어 촉수 괴물 새끼들아!”
자신과 유사한 것은 지배하려 하고, 자신과 다른 것은 배제하려 드는 종족. 사람들의 망막에 내 모습이 비친다. 그들의 눈에 나는 그저 촉수 괴물일 뿐이다. 혹은, 촉수 괴물이어야만 하는 것이다.
「‘어쩌면 다른 길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원작의 유중혁도 몇 번인가 이런 ‘귀환자 루트’를 밟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유중혁은 단 한 번도 이 ‘히든 피스’를 제대로 완수한 적이 없었다. 정확히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조금 힘들고 지난했어도, 다른 길을 걸었더라면.’」
‘귀환자 루트’를 탔던 모든 유중혁은 후회의 길을 걸었다.
그렇기에 나는 녀석의 실패를 안다.
내가 실패할 수 있는 모든 길은 이미 녀석이 걸었던 길.
그리고 유중혁은, 이제 원작에 존재하지 않는 길을 향해 떠났다.
다시 무수한 실패의 가능성이 열린 세계로.
[‘제4의 벽’이 희미하게 흔들립니다.]
그러니 나도 질 수 없다.
[성좌, ‘해상전신’이 당신을 유심히 바라봅니다.]
[성좌, ‘대머리 의병장’이 당신을 유심히 바라봅니다.]
[성좌, ‘술과 황홀경의 신’이 당신을 유심히 바라봅니다.]
“뭐야, 갑자기 다들 왜 지랄이야?”
“지혜 누나, 조심해요!”
다가가는 나를 향해, 이지혜의 칼날이 날아들었다.
이번에는 피하지 않았다.
푸슈슛!
코트가 보호하지 못한 살갗에 피가 튀었다.
내가 피하지 않을 줄은 몰랐는지, 깜짝 놀란 이지혜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 틈을 비집고 다른 화신들도 내게 달려들었다. 순식간에 내 주변은 찔러오는 화신들의 병장기로 가득해졌다. 코트의 외피에 희미한 상흔이 늘기 시작했다.
나는 어떤 공격은 받아내고, 어떤 공격은 막아내며, 계속해서 앞으로 걸어갔다.
그 길의 끝에 한 소녀가 있었다.
내가 첫 화신으로 삼았던 아이.
나처럼 ‘재앙’이 될 예정이었던 신유승이 있었다.
아이가 나를 보고 있었다.
나는 길을 헤치며 아이에게 다가갔다.
한 걸음, 두 걸음.
아이가 두려워하거나 겁먹지 않을 정도의 속도로 계속해서 걸어갔다.
피가 튀고, 살점이 찢어져도 개의치 않았다. 경각심을 주지 않기 위해 격을 방출하지 않았고, 위협을 가하지 않기 위해 무기를 꺼내지 않았다.
코앞에 아이의 얼굴이 보였다.
‘멸망’이 찾아오지 않았다면 중학교에 입학해도 될 나이.
아이가 이렇게 자라날 동안, 나는 아이의 곁을 너무 오래 비웠다.
가슴 깊은 곳을 찌르는 뾰족한 감각에, 나는 고개를 떨어트렸다.
[‘못 생긴 오징어’가 화신 ‘신유승’을 바라봅니다.]
문득 우스운 기분이 들었다.
어쩌면, 나는 계속 ‘못 생긴 오징어’로 있는 편이 더 좋을지도 모른다.
‘은밀한 모략가’의 말들이 머릿속을 스쳐갔다.
【저들이 원했던 결말이 저곳에서 너와 함께 죽는 것이었다면? 그래도 기어코 저들을 구하겠다는 것인가?】
【그것은 구원이 아니다. 저주다.】
오만했다. 내 그리움은 내 그리움일 뿐.
내 감정을 일행들 또한 공유하고 있을 거란 보장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들이 기억하는 ‘김독자’는, 그저 이기적인 성좌일 것이다.
멋대로 목표를 강요하고, 삶을 강요하고, 상처를 강요하는.
가장 필요할 때는 곁에 없었던, 그런 동료일 것이다.
「그런데 왜, 이 아이는 울고 있는 것일까.」
이지혜와 이길영이 병장기를 내렸고, 화신들이 공격을 멈췄다.
모두가 우리를 바라보고 있는 가운데, 나는 나의 화신을 향해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혼자서 기특하게 자라난 나의 아이에게 예를 표하듯, 혹은 내가 함께 해주지 못했던 그 모든 시간에 용서를 구하듯.
“다녀왔다, 유승아.”
내 말은 전달되지 않을 것이다.
[당신의 화신이 당신을 바라봅니다.]
천천히 손을 뻗은 나의 화신이, 내 머리 위로 자신의 작은 손을 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