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28화 Episode 7. 건물주 우리는 이지혜를 따라 곧장 충무로로 진입했다. 스크린도어가 박살난 플랫폼을 본 유상아가 말했다. “···뭔가 흉흉한 분위기인데요.” 3호선 철로를 따라 위쪽으로 올라서자, 두런두런 앉아 있는 사람들이 눈에 띄었다. [충무로에 진입 하였습니다.] [현재 세 번째 시나리오가 진행 중입니다.] [#GIR-8761 채널이 활성화 중입니다.] [#BIR-3642 채널이 활성화 중입니다.] 충무로부터는 시나리오의 규모가 커져서 도깨비들의 채널도 늘어난다. 이제부터 비형 녀석도 고생 좀 하겠군. 마침 우리를 발견한 몇몇 중년인들이 이쪽에 손을 흔들며 다가왔다. “오, 꼬마 사무라이. 신입들 데려 온 거야?” “어.” 사무라이라니. 이지혜의 배후성을 모르니 잘도 그런 소릴 지껄일 수 있는 거겠지. 조만간 천벌을 받을 거다 저놈들은. 이지혜가 중년인들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또 술 처먹었어?” “하하핫! 세상이 이 꼴이 됐는데 술 말고 할 게 뭐 있겠냐?” 복덕방 아저씨처럼 푸근한 몸집의 중년인들은 재난 사태를 겪고 있는 사람들답지 않게 여유로워보였다. 게다가 당연하다는 듯 하나씩 차고 있는 병장기들. 확실히 금호역과는 다르다. 이제부터가 진짜배기들이라는 거겠지. “근데 그쪽 친구들은 동대 터널 뚫고 온 거야? 대단한데··· 코인 좀 만졌겠어?” 중년인들 중 하나의 시선이 유상아를 향한 것은 그때였다. “거기 아가씬 이름이 뭐야? 싼 방 있는데 하나 빌려 줄까?” “···방이요?” “하하, 아가씬 아직 여기 시스템 잘 모르지? 여긴 말야―” 중년인의 말을 자른 것은 이지혜였다. “아저씨들. 신입한테 헛수작 부리지 말고 그만 위로 올라가.” “어허, 어차피 이 분들도 아셔야 돼. 다들 살려고 이러는 거······.” “뒈지기 싫으면.” 새파란 장도를 뽑은 이지혜의 말에, 중년인들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이······ 어린 것이 벌써부터 못된 것만 배워먹어서는.” “어이, 강 씨. 그만 하고 가세.” 중년인들은 아쉽다는 투로 이쪽을 돌아보며 멀어졌다. 그들이 4호선 환승길로 사라진 후에야, 이지혜는 칼을 집어넣었다. “데려다 줬으니까 이제부턴 알아서 해. 보모 노릇은 사절이야.” 어린애가 말하는 싸가지 하고는. 나는 잠시 주변을 둘러보았다. 충무로. 세 번째 시나리오의 무대가 되는 이곳은, 지금까지와는 완전히 다른 법칙이 통용되는 곳이다. “씨, 씨발! 가까이 오면 다 죽여 버릴 거야······.” 3호선 플랫폼의 중앙에 나이프를 든 사내가 위협적으로 주변을 쏘아보고 있었다. 그의 발밑에는 대략 1평이 조금 넘을 법한 크기의 타일이 펼쳐져 있었는데, 타일 위에는 초록색의 불빛이 감돌고 있었다. 유상아가 물었다. “···왜 저러는 거죠?” “저도 모르죠.” 사실 뭔지 짐작은 가지만, 지금 당장 말해서 겁을 줄 필요는 없겠지. 3호선 곳곳에는 나이프 사내와 비슷한 행색의 사람들이 주저앉아 있었다. 종전의 중년인들과는 달리, 하나 같이 절망에 젖은 얼굴들. 나는 그들을 일별하며 이지혜에게 물었다. “유중혁이 여기 있지?” ‘유중혁’이라는 이름에 돌아서려던 이지혜가 홱 고개를 돌렸다. 경계심이 깃든 눈빛이었다. “···너 뭐야?” 말하는 꼴을 보아하니 유중혁이 벌써 애를 망쳐놓았군. 이해는 간다. 해상전신 급의 성좌는 한국 전체를 뒤져도 찾기 어려우니까. 내가 유중혁 입장이었더라도 충무로에 오자마자 이 녀석부터 찾았을 것이다. “난 살아 돌아온 유중혁의 동료다.” “···동료? 그럴 리가 없는데?” 몹시 의심스럽다는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는 이지혜. 나는 뻔뻔하게 어깨를 으쓱했다. “녀석한테 그렇게 전하면 알아들을 거야. 유중혁 지금 어디 있어?” “···사부는 지금 없어.” “그래? 이거 곤란한데. 꼭 전해야 할 말이 있거든.” 표정을 일그러뜨린 이지혜는 잠시 나를 노려보더니, 뭔가 배신감에 가득 찬 표정을 했다. 그 참, 이 녀석이 유중혁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아주 잘 알겠다. 게다가 벌써 ‘사부’라니······ 이런 식으로 장군님을 빼앗기는 건 곤란한데. 이지혜가 한쪽 구석에 쪼그려 잠을 청하던 소년을 불렀다. “야, 거기!” “엇? 네, 넵!” “여기 이 사람들 잘 보고 있어! 나 사부한테 좀 갔다 올게.” 소년이 어리둥절한 눈으로 우리를 보았다. “······그 사람들이 누군데요?” “몰라, 사부 친구래!” 이지혜의 말에 플랫폼 주변에 늘어져 있던 사람들이 하나 둘씩 눈을 떴다. 그들은 절반은 신기하다는 듯, 또 절반은 경외심 어린 눈빛으로 우리를 보았다. “······유중혁 씨 친구라고?” 헐레벌떡 뛰어온 소년이 우리 앞에 얼굴을 내밀었다. 대충 이지혜 또래로 보이는 소년이었다. “정말 유중혁 씨 친구분 되시나요?” 말똥말똥. 소년의 해맑은 눈을 보고 있으려니, 도저히 거짓말을 할 수가 없었다. 어디까지나 보통 사람이라면 그랬을 거란 얘기다. “절친한 친굽니다.” 최근 생각하는데, 난 아무래도 ‘보통 사람’은 아닌 것 같다. 적어도 여기에서 만큼은 말이다. * 기절한 정희원을 유상아가 돌보는 동안, 나는 소년에게서 충무로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 녀석은 이지혜와 함께 유중혁을 따르는 소수 추종자들 중 하나였다. “······그래서 저희는 유중혁 씨를 따르고 있습니다. 저, 듣고 계신가요?” “네.” 물론 제대로 안 듣고 있었다. 싸이코패스 유중혁의 영웅담 따위 하나도 재미없었으니까. 그래도 요약하자면 이런 것이다. “3일 전 유중혁이 여기에 나타났고, 괴물 떼로부터 이지혜를 비롯해 당신들 몇 명을 구해줬다. 뭐 그런 이야기 아닙니까?” 자신의 경험담이 폭력적으로 요약 당하자, 소년은 완전히 얼빠진 얼굴이 되었다. “어, 그게 그렇게 간단한 이야기가 되나요······.” 아무래도 단단히 유중혁한테 홀린 표정이었다. 하긴, 갑자기 압도적인 무력을 가진 존재가 나타나 자기들을 구원해줬는데, 그를 추종하지 않는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겠지. 하지만 소년은 모를 것이다. 소년이 살아난 것은 유중혁이 착한 놈이어서가 아니라, 운 좋게 이지혜와 같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저, 몇 가지 궁금한 게 있는데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내가 생각에 잠긴 사이, 공손히 질문을 시작한 것은 이현성이었다. “예. 물어 보세요.” “이곳에서 식량 보급은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그게, 보급이라 말하기는 좀 민망한데······ 저를 비롯한 몇몇은 주로 지혜한테 의존하고 있어요. 지혜가 사냥을 하고, 유중혁 씨한테 부탁해서 조리를 하는 식으로······.” 언제 또 체크리스트를 만들었는지, 주섬주섬 노트를 꺼낸 이현성이 뭔가를 기록하기 시작했다. 누가 군인 아니랄까봐. “그럼 식수는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위층의 ‘건물주 연합’에게 식량이나 코인을 주고 조금씩 바꿔 오고 있어요.” “···건물주 연합?” 나는 자세를 고쳐 앉았다. 이야기가 이제 좀 재미있어지려는 모양인데. 소년은 살짝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원래 충무로 일대를 주름잡던 건물주 아저씨들이 있어요. 그 사람들이 위층을 차지하고 있는데, 우리는 건물주 연합이라 불러요.” 충무로 건물주 연합. ‘멸살법’에도 등장하는 이름이다. “어떤 사람들이죠?” “그게, 뭐라고 말씀 드려야 할지······.” 사실 물어볼 필요도 없는 얘기였다. 아마 내 예상대로라면, 지금 충무로를 휘어잡고 있는 것은 ‘십악(十惡)’ 중 하나일 것이다. “그냥 건물주들이에요.” 한숨을 쉬며 나온 대답은, 어떤 의미에서는 정답이었다. 그들은 건물주들이다. 그저 정해진 세를 받을 뿐인 건물주들. 조용히 있던 이길영이 입을 연 것은 그때였다. “저기, 형.” “응?” “화장실 가고 싶어요.” “급해?” “네.” 조금 뜬금없는 타이밍이었다. 애초에 이길영이 이런 걸로 말을 건 적이 없었기 때문에 더욱 의아했다. 그런데 이길영의 바로 옆에 유상아가 얼굴을 붉히며 서 있었다. “···저기, 저도 같이 다녀와도 될까요?” 순간 약수역에서 비밀스런 생필품을 챙기던 유상아와 정희원의 모습이 떠올랐다. 뭐가 어떻게 된 것인지 알 것 같았다. 이길영 이 자식, 어린애가 눈치도 빠르다. 대화를 엿듣던 소년이 말했다. “화장실은 지하 2층까지 올라가야 하는데, 들어가기가 쉽지 않으실 거예요.” “···무슨 일이 있습니까?” “음. 직접 가보시는 게 좋을 것 같은데··· 마침 저도 올라가 보려고 하니까, 같이 가시겠어요?” “가보죠 한번.” 그 말을 한 것은 나였다. 물론 진짜로 화장실을 가기 위함은 아니고, 올라가서 몇 가지 확인해 봐야 할 게 있었기 때문이다. 최근 유중혁의 행보는 내가 아는 ‘3회차’와는 묘하게 전개가 다르다. 그렇다면, 그 갭을 확실히 알아야 할 필요가 있었다. 나는 여전히 정신을 못 차리는 정희원을 업고 일행들과 함께 지하 3층으로 올라갔다. “오, 아까 그 뉴 페이스들이군. 혹시 ‘방’ 보러 오셨나?” 4호선 에스컬레이터 근처에 서 있던 중년인들이 휘파람을 불며 물었다. 소년이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아, 죄송합니다. 저흰 잠깐 위층에 볼 일이······.” “에잉, 아쉽구만 그래. 조심들 하라고.” 중년인은 미련 없이 손을 흔들어 주었다. 멀어지는 중년인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리던 유상아가 물었다. “저, 그런데······ 아까부터 ‘방’이라는 단어를 쓰는데, 정확히 뭘 말하는 건가요? 제가 아는 그 방은 아닌 것 같은데.” “쉽게 말하면 저겁니다.” 소년이 가리킨 곳에는 정사각형으로 된 타일이 깔려 있었다. 아까 3호선 플랫폼에도 있었던 타일이었다. 역시나 1평이 좀 넘을 법한 크기의 초록빛 타일. 자세히 보니 타일 위쪽의 허공에 뭐라고 적혀 있는 게 보였다. [그린 존 0/1] “시나리오상 명칭은 ‘그린 존’인데, 여기선 ‘방’이라고 불러요.” 타일의 바로 곁에는 두 남자가 서로 드잡이질을 벌이고 있었다. 마치 그 타일을 두고 싸우기라도 하는 것처럼. 이번에는 이현성이 물었다. “저게 대체 뭡니까? 저 사람들은 왜 저걸 두고 싸우는 겁니까?” 소년은 살짝 꺼리는 듯한 표정이었다. 우리에게 그걸 말하면 자신의 생존에 위협이라도 될 것처럼. “지하 2층에 도착하면 모두 알게 되실 거예요.” 고층으로 올라 갈수록 ‘방’을 둘러싼 싸움은 심심찮게 보였다. 방마다 붙어 있는 숫자는 제각각이었는데, 작은 방은 (0/1)에서부터, 큰 방은 (0/7)짜리도 있었다. 아마 뒤의 숫자는 수용 가능 인원을 뜻하는 거겠지. 나는 주변을 꼼꼼히 살피며 물었다. “지하 3층부터 지하 1층까진 모두 ‘건물주 연합’의 영역인가요?” “······예. 소수 세력도 있긴 한데, 거의 건물주 연합이 먹고 있어요.” 충무로의 모든 기반 시설은 지하 2층과 1층에 몰려 있으니, 사실상 하나의 연합이 모든 권력을 독점하고 있는 셈이었다. “유중혁은 아무 조치도 없습니까? 당신들을 구해 줬다면서요?” “그게······.” 내 질문에 소년의 얼굴이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 한참이나 달싹이던 소년의 입술이 간신히 말을 토해냈다. “스스로 일어나라고만······.” 알 만 하다. 내가 아는 유중혁이라면 당연히 그딴 식으로 말했겠지. 아마 유중혁은 자신을 따르라고 말한 적이 없을 것이다. 이들은 유중혁이 보여준 압도적인 무력에 매료되어 멋대로 실낱같은 희망을 꿈꾸고 있는 것이다. 불쌍하게도. 우리는 얼마 지나지 않아 지하 2층에 도착했다. 소년의 얼굴에 긴장이 감돌았다. “여기서부턴 조심하셔야 해요.” 지하 2층은 아래층보다도 훨씬 더 많은 ‘방’들이 있었다. 그러나 아까처럼 호객을 하는 사람은 잘 보이지 않았고, 대신 무서운 눈빛으로 그린 존 위를 지키는 사람들만 보였다. [그린 존 7/7] 우리는 사람들을 그대로 지나쳐 화장실 방향으로 향했다. “어······ 왜 여기서 멈춰 있는 걸까요?” 우리의 걸음이 멈춰선 것은 화장실로 가는 마지막 통로를 앞둔 무렵이었다. 병목이 발생하는 인근 길목에 수십 명의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앞으로 가 보죠.” 나는 그렇게 말하고 사람들을 밀치며 나아갔다. “필두 씨! 부디 다시 받아주세요! 다시는 안 그럴게요!” “제발, 제발요! 오늘 하루만 더 묵게 해주세요. 코인은 빚을 내서라도 가져 오겠습니다!” 대열의 선두는 과잉된 사람들의 열기로 뜨거웠다. “자자, 물러서세요. 물러서요.” 그들의 맞은편에는, ‘건물주 연합’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병장기를 들고 도열해 있었다.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십악’이 여기 있겠군. 소설의 묘사를 통해 ‘십악’을 찾아보려 했지만, 다들 비슷비슷하게 생겨서 그들 중 누가 ‘십악’인지 찾는 게 쉽지 않았다. 건물주가 되면 다들 인상이 비슷해지는 건가? 다리 쪽에서 뭔가가 꼼지락거리더니 고개를 내민 것은 그때였다. 이길영이었다. 뭔가 위험해 보여서 어깨를 붙잡으려는 순간, 누군가가 이길영을 밀쳤다. “앗.” 중심을 잃고 넘어진 이길영이 바닥을 짚었다. [인물 ‘이길영’이 사유지를 침범하였습니다!] 순식간에 분위기가 싸해지며, 앞줄에 있던 ‘건물주 연합’ 중 몇몇이 이길영을 보았다. “넌 뭐냐 꼬맹아?” 그와 거의 동시에, 몰려 있던 인파들이 비명을 지르며 물러났다. “미친!” “뒤, 뒤로 가! 빨리!” 뭔가 못 볼 거라도 본 것처럼, 바짝 몰려 와 있던 사람들이 썰물처럼 빠져 나갔다. 사람들이 사라지자, 그들이 서 있던 자리에 붉게 빛나는 한 줄의 경계선이 보였다. 한 남자가 경계선과 이길영을 번갈아 보며 말했다. “흐음. 길을 잃은 모양이구나. 여기가 어딘지 알고 있니?” “화장실 가는 길 아닌가요?” “화장실? 하하, 한때는 그랬지. 그런데 너 이 새끼······ 부모는 어디 있어?” “······네?” “남의 땅에 함부로 들어오면 안 된다고 배웠어, 안 배웠어?” ‘남의 땅’이라. 이거, 틀림없구만. 남자는 알 수 없는 눈길로 이길영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짜식, 잘 모르나 보네. 그럼 아저씨가 지금부터 가르쳐 줄게.” [등장인물 ‘공필두’의 성흔 「무장 지대 Lv.3」가 발동합니다!] 기이이잉,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바닥 곳곳에서 개틀링 건을 닮은 미니 포탑들이 일제히 일어나고 있었다. [등장인물 ‘공필두’가 사유지 침범으로 500코인을 지불할 것을 요구합니다.] [권고에 따르지 않을 시, 주변의 모든 포탑이 즉각 사격을 실시할 것입니다.] 남자가 말했다. “돈 내놔, 인마.” 총탄 장전을 마친 포탑들이 일제히 이길영을 겨누고 있었다. 당황한 이길영이 주춤주춤 물러서다가 내 옆에 붙었다. 나를 발견한 남자가 웃었다. “아, 보호자가 계셨구만. 그럼 보호자께서 대신 500코인 지불하셔야지?” 대뜸 내밀어진 사내의 손을 보며, 나는 빙긋 웃었다. ······재미있네, 유중혁. 이런 새끼들을 그냥 놔뒀다 이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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