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9화
269화
[바앗! 바아앗! 바바바바밧!]
뺨이 아팠다.
[바아아아아앗!]
조금 많이, 아팠다.
품속에서 뭔가가 격렬하게 꿈틀대는 것이 느껴졌다.
격한 대지의 울림과 동시에 눈을 떴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쳐들자 보이는 것은 눈부신 섬광의 산란. 하늘을 물들인 개연성의 스파크가 마계 곳곳으로 벼락처럼 떨어지고 있었다.
“독자 씨?”
유상아의 목소리와 동시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끊어졌던 전류가 다시 연결된 것처럼, 머릿속에 사고가 흐르기 시작했다.
곳곳에 너부러진 화신체들.
아무리 봐도 ‘신화의 전장’ 무대는 아니었다.
쓰러진 화신체들은 모두 살아있는 인간들.
‘우레를 먹는 새’에 의해 반파되고 있는 [공단]의 정경이 보였다.
“성좌들이 온 겁니까?”
뭔가를 말하려던 유상아가, 피묻은 뺨을 닦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허공에 떠 있는 시스템 메시지. 그리고 만신창이가 된 일행들.
“아직도 승자 발표가 안 된 거군요.”
바깥에서 사달이 났을 거라 예상은 했다.
‘도서관’에서 본 유중혁의 마지막 메시지도 그런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이렇게까지 상황이 심각할 줄은 몰랐다.
“큭······.”
옆구리에 심한 부상을 입은 이현성이 비틀거렸다. 나는 재빨리 이현성의 등에서 내려, ‘도깨비 보따리’로 회복 아이템 몇 가지를 구입했다.
가장 부상이 심한 이현성과 유상아에게 [대환단]을 쪼개어 먹였고, 상처는 없지만 마력이 고갈된 신유승에게는 상급 마력 회복제를 다량 먹였다.
한명오와 파천신군, 장하영에게도 외상약을 주었다.
도합 40만 코인이 넘게 들었지만, 지금 그런 걸 따질 계제가 아니었다.
“아저씨······.”
헐떡거리며 포션을 마신 신유승이 바위에 몸을 기댄 채 나를 올려다보았다. 나는 잠시 신유승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일단 여기서 쉬고 있어. 그런데······.”
먼 곳에서 성좌들이 만들어 내는 굉음이 지축을 흔들고 있었다.
얼핏 느껴지는 ‘격’만으로도 십여 개체를 훌쩍 넘는 숫자.
순간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이만한 성좌들이 몰려왔는데, 일행들이 여기까지 도망칠 수 있었다고?
“유중혁은······.”
일행들 중 누구도 대답은 없었다.
나는 폭음이 연달아 터지는 전장을 돌아보았다.
유중혁을 제외한 모두가 이곳에 있다.
그리고, 누군가가 성좌와 싸우고 있었다.
[‘제4의 벽’이 희미하게 흔들립니다.]
“이 바보 같은 자식이······.”
“아저씨! 안 돼요!”
달려 나가려는 내 허리에 신유승이 매달렸다.
“죽어요 아저씨. 저기 가면 죽는다고요.”
언제나 올곧고 용감했던 아이였다.
그런 아이의 눈에 공포가 깊이 스며 있었다.
버둥거리는 신유승을 떼어 놓자, 아이의 울음이 쏟아졌다. 전장의 포화 속에서, 울음은 먼지처럼 흩어졌다.
아마도 이 아이는 본 것이다.
인간이 결코 넘을 수 없을 거대한 ‘설화’의 공포를.
“유승이를 부탁해.”
나는 그나마 상태가 괜찮은 장하영에게 신유승을 맡긴 뒤, [바람의 길]을 발동했다. 뒤쪽에서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지금은 돌아볼 시간이 없었다.
쿠구구구구!
발걸음을 재촉할수록, 전장의 중심에서 터져 나오는 ‘격’의 압박이 강해졌다. 이제껏 내가 겪어본 적 없는 무시무시한 마력의 폭풍.
저 중심에, 분명 유중혁이 있었다.
「김독자는 생각했다. 방법이 있을까?」
머릿속에서 ‘멸살법’의 페이지들이 넘어간다.
「이건 안 돼.」
쿠구구구구!
「그 방법도, 무리야.」
나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혹시나 이런 상황이 올지 모른다고 예상은 했다. 하지만 시기가 너무 빨랐고, 나는 너무 오래 잠들어 있었다.
이대로면 늦는다.
유중혁은 여전히 멀었고, 바람은 내 편이 아니었다.
‘도깨비 보따리’에서 새로운 스킬을 구입한다 해도, 활용 여부를 장담할 수 없었다.
결국 나는 결단을 내렸다.
“300만 코인을 체력, 근력, 민첩, 마력에 모두 투자한다.”
[당신의 모든 종합 능력치가 비정상적으로 성장합니다!]
[당신이 투자한 코인이 해당 시나리오의 능력치 제약을 넘어섰습니다.]
[충만한 개연성이 해당 시나리오의 능력치 제약을 일부 해제합니다.]
[투자 코인 대비 능력치의 성장이 임의로 조정됩니다.]
엄청난 스파크가 전신에서 튀어 올랐다.
근육이 찢어지는 느낌과, 키가 조금 자라는 듯한 느낌. 거기다 골밀도가 변하는 느낌이 동시에 찾아오며 일순간 끔찍한 통증이 덮쳐왔다.
“커헉······.”
가성비가 좋지 않아 최후의 최후까지 미루고 있었던 일이지만, 지금은 이것 밖에 방법이 없었다.
[당신의 정신이 화신체의 진화를 감당할 수 없습니다.]
[전용 스킬, ‘제4의 벽’이 발동합니다!]
[당신의 화신체가 새로운 단계로 진화하고 있습니다!]
초반 시나리오 이후부터 ‘종합 능력치’는 전투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설화나 성흔, 스킬 등이 전투에 미치는 영향이 훨씬 크기 때문이다.
게다가 100 레벨 이후의 종합 능력치는 구간당 코인 증가폭이 기하급수적으로 커서, 같은 양의 코인을 사용한다면 당연히 스킬을 구매하는 쪽이 이득이었다.
하지만, 지금 같은 상황이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당신의 모든 종합 능력치가 200을 돌파했습니다!]
[당신의 화신체가 더 커다란 ‘격’을 감당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지금 내게 필요한 것은 강력한 스킬이 아니라, 튼튼한 육신이니까.
고오오오오!
[당신의 민첩이 공기의 저항을 완화합니다.]
[당신의 마력이 막혀 있던 혈도를 개방합니다.]
엄청난 양의 코인이 고스란히 나의 화신체로 변모하고 있었다.
[당신의 근력이 폭발적인 변화를 일으킵니다!]
발걸음을 내딛는 폭도, 쓸려가는 전경의 속도도 완연히 달라졌다.
“유중혁!”
물론 이런 돈지랄로도 성좌들을 능가하거나 초월좌들을 넘어서는 것은 무리였다.
하지만 잠시나마, 그들에게 맞설 정도의 육신은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상당수의 성좌들이 당신의 화신체를 부러워합니다.]
엄청난 속도로 황야를 가로지르자, 마침내 전장의 중심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중심에서, 죽어가는 한 사내의 모습이 보였다.
“이 멍청아! 뭐하는 거야!”
눈부신 빛을 발산하는 수르야의 빛 앞에, 유중혁이 죽어가고 있었다. 왼쪽 팔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고, 새카맣게 타버린 전신에서 김이 솟아오르고 있었다. 그럼에도, 유중혁은 [흑천마도]를 움켜쥔 채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천천히 움직인 유중혁의 고개가, 나를 바라봤다.
입술을 뗄 힘도 남아 있지 않은 듯,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제4의 벽’이 크게 흔들립니다.]
양산형 제작자의 말이 떠올랐다.
성좌들 또한 이 거대한 이야기의 일부일 뿐이라고.
그들 역시 너무나 외롭고 고독해서, 이런 짓들을 벌이는 것이라고.
······개소리.
[물러서라!]
‘원시의 창’을 휘두르는 마누가 내 앞을 막아섰다.
[전용 스킬, ‘전인화 Lv.12(+2)’가 활성화되었습니다!]
백청의 전격이 주먹 끝에서 폭발하자, 전장이 푸른 빛으로 물들었다.
[크아아앗!]
당황한 성좌들이 튕겨 나가는 마누를 지탱하며 ‘격’을 일으켰다. 폭포처럼 쏟아진 성좌들의 마력이 해일처럼 내게 밀려들었다.
콰지지지직!
강화된 신체가 광폭한 성좌들의 마력을 견뎌냈다.
주먹의 살갗이 갈라지고, 터진 살점에서 피가 흘러나왔지만 그래도 견딜 만했다. 먼지가 가라앉은 자리에 성좌들이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내가 이 정도의 힘을 가졌을 줄은 몰랐는지, 경악한 기색들이었다.
[막아라!]
달려드는 성좌들을 향해 백청의 강기를 날렸다. 순식간에 등허리와 허벅지에 찰과상이 생겼고, 옆구리에는 긴 자상이 남았다.
“유중혁!”
내 외침은 제대로 닿지 않았다.
무릎을 꿇은 유중혁의 생명은 이제 경각이었다.
한줌의 마력도 느껴지지 않는 상황.
유중혁이 죽는다.
나는 숨을 힘껏 들이마신 뒤, 내가 외칠 수 있는 가장 커다란 진언을 발했다.
[아스모데우스!]
사자후처럼 터진 진언에, 일순간 성좌들이 귀를 막았다. 격을 감당하지 못한 위인급 성좌들이 눈에서 피눈물을 쏟았다. 나는 다시 한 번 외쳤다.
[네놈도 ‘마왕’이라면, 약속을 지켜라!]
상황이 이렇게 됐으니, 큰 기대는 하지 않는다.
약삭 빠른 녀석이라면 지금 내 편을 드는 게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알고 있을 테니까.
하지만 그 ‘아스모데우스’라면······.
츠츠츠츠츠츳!
기다렸다는 듯, 하늘에서 허공에서 섬광이 번뜩였다.
새카만 폭풍이 몰아치며, 무언가가 강림하고 있었다.
[마왕, ‘정욕과 격노의 마신’이 마계에 현신합니다!]
엄청난 개연성이 흘러 들어가며, 어마어마한 존재가 내 눈앞에 화신으로 현현하고 있었다.
츠츠츠츠츠츠!
새카만 아우라를 풍기며 어둠 속에서 작은 여자아이가 고개를 들었다.
초월형을 각성한 유중혁을 단숨에 제압했던 마계의 왕.
훗날, 이 세계 최대 최악의 단체인 ‘종말의 구도자’ 중 하나가 될 존재.
[마, 마왕이다!]
32번째 마계의 왕, 아스모데우스가 날뛰기 시작했다.
[아하하하하하하핫!]
웃음 소리와 함께, 거대한 갈퀴가 마왕의 손끝에서 나타났다. 아스모데우스의 성흔인 ‘핏빛 손아귀’가 공간 전체를 긁으며 성좌들을 찢어대고 있었다.
[크아아아아악!]
[미친 마왕 놈이!]
[이게 대체 무슨 짓이냐!]
놀란 성좌들이 그쪽을 향해 시선을 돌리는 순간, 나는 [바람의 길]을 발동해 유중혁을 낚아 챘다.
[쫓아라!]
뿔난 성좌들이 거리를 좁히며 달려왔지만, 강화된 내 화신체가 녀석들보다 조금 더 빨랐다. 나는 유중혁을 어깨에 들쳐멘 채 온 힘을 다해 달렸다.
“정신차려라, 제발.”
유중혁은 거의 숨을 쉬지 않고 있었다.
평소보다 가벼워진 몸무게.
얼마나 심한 고통을 겪은 것인지, 몸의 골격까지 변한 것 같았다. 점점 희미해지는 녀석의 심장 소리를 들으며, 나는 발악하듯 외쳤다.
“야, 장난치지 마! 기사회생 발동할 수 있잖아! 뭐라도 해보라고!”
그러나 유중혁은 움직이지 않았다.
나는 달리면서 비유를 불러 또 다시 [대환단] 몇 알을 구매했다.
왼손으로 녀석의 육신을 지탱한 채, 오른손으로 유중혁의 입 속에 환단을 흘려 넣었다. 하지만 차도는 보이지 않았다. 지금 놈에게는 그걸 삼킬 힘조차 남아있지 않은 것 같았다.
서서히 멀어지는 숨소리.
유중혁의 발끝이 부스러지며 녀석의 몸이 사라지고 있었다.
나는 [바람의 길]을 이용해 그 부스러기들이 빠져 나가지 않도록 감쌌다.
그러나 녀석의 심장 어귀에서 희미한 빛이 떠오르는 것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나는 그게 무슨 현상인지 잘 알고 있었다.
몇 백 번이나 그 장면을 보았기에, 모를 수가 없었다.
「유중혁은 생각했다.」
“생각하지 마.”
「이번 생은, 여기까지라고.」
“빌어먹을! 생각하지 말라고!”
유중혁의 뺨에서 설화가 떨어져 나오고 있었다. 나는 허겁지겁 그 설화를 수습해 녀석의 뺨에 붙이며, 허공을 향해 외쳤다.
“제기랄! 회귀 시키지 마! 이 자식 좀 가만히 놔두란 말이야!”
[화신 ‘유중혁’의 배후성이 당신을 바라봅니다.]
“아직 살아날 수 있어! 이번 회차 안 끝났어! 이놈 다시 싸울 수 있다고! 내가 살릴 수 있단 말이다!”
유중혁의 배후성은 말이 없었다.
녀석이 하는 일은 언제나 같았다.
죽음 속에서 고통받는 유중혁을 지켜보고.
무참히 망가진 녀석의 영혼을, 다시 과거의 세계선으로 욱여넣는 것.
[성흔, ‘회귀 Lv.3’이 발동합니다!]
잔혹하다.
정말 이렇게 끝나는 건가?
내가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데, 유중혁이 여기서 죽는다고?
한 줄의 메시지가 떠오른 것은 그때였다.
[화신 ‘유중혁’이 자신의 배후성을 바라봅니다.]
“······유중혁?”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넝마가 된 유중혁이, 피칠갑을 한 눈으로 자신의 배후성을 보고 있었다.
츠츠츠츠츳!
사라지던 녀석의 육체가 스파크 속에서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화신 ‘유중혁’이 자신의 배후성에게 저항합니다.]
[화신 ‘유중혁’의 모든 설화가 죽음에 저항합니다.]
그리고 내가 본 어떤 회차에서도 없었던 일이 벌어졌다.
[화신 ‘유중혁’이 회귀를 거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