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8화

218화 쿠궁. 쿠궁. 공장 접합부에 설치된 실린더에서 피스톤들이 격렬하게 움직이자, 집채만한 연마기가 굉음을 내며 돌아갔다. 다 소화되지 못한 설화 파편들이 부실한 겉면을 타고 나사처럼 튀어나왔다. 아직은 이 [공장]이 완제품이 아니라는 증거였다. 공작은 불안하게 쩔그렁대는 [공장]의 외연을 보며,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아직은 탐탁찮은 수준이지만 이 정도면 나쁘지 않다.’ [공장]. 마계의 어지간한 대공급 인사라면, 누구나 이와 비슷한 설화를 가지고 있다. 물론 공장마다 위력은 천차만별이지만, 개중에서도 세이스비츠의 [공장]은 특이한 편이었다. ‘명계에 다녀온 보람이 있었군.’ 무려 사십 미터에 달하는 체고. 거인상(巨人像)을 닮은 이 [공장]은 명계의 거신병(巨身兵)을 모티프로 만든 것이었다. 명계의 심판관 중 하나를 꼬드겨서 간신히 외관만 구경할 수 있었던 병기. 물론, 공작의 [공장]은 거신병에 비하면 턱없이 출력이 떨어지는 복제품에 불과했다. ‘이 정도에서 만족할 수는 없지만······.’ 끼긱, 끼기긱. 공작에게 섭섭함을 표하듯, [공장]이 거친 신음을 토했다. 쿠드드드드! 그라인더의 칼날이 바닥을 통째로 뒤집었다. 일대를 희뿌옇게 뒤덮는 먼지 속에서 공민가의 건물 십여 채가 동시에 무너졌다. 마치 어린아이가 공들여 만든 장난감을 부수듯, 공작은 집요한 움직임으로 그것들을 부숴갔다. [극소수의 성좌들이 통쾌한 파괴 행각에 즐거워합니다!] [몇몇 성좌들이 달아난 공민들을 손가락으로 가리킵니다!] 오랫동안 쌓아온 이야기였다. 무수한 세월에 걸쳐 집적된 세이스비츠 공단의 역사. 그럼에도 공작의 행동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끄아아아악!” 연마기에 터져 나가는 설화들을 주워 담으며, 공작은 무심히 생각했다. ‘더 커다란 이야기로 나아갈 제물일 뿐이다.’ 400년. 어지간한 왕조가 태어나고 몰락하는 시간. 그 시간동안 세이스비츠는 이곳의 독재자였다. 한때는 이 공단의 모든 것을 사랑했었다. 때로는 성군이었고, 때로는 폭군이었다. 온화한 통치로 공민들의 행복지수를 높이려 했던 적도 있었고, 거센 탄압과 폭정을 통해 그들을 학살했던 적도 있었다. 기쁘거나 슬펐고, 가끔은 재미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공작에게 남은 감정은 단 하나뿐이었다. ‘질렸다.’ <올림포스>의 명계에 견학을 다녀온 후, 그 생각은 한층 더 강해졌다. ‘내가 왜 이런 이야기나 먹어치우고 있어야 하지?’ 명계 여왕의 식탁에 올라왔던 호화로운 만찬을, 그는 잊지 못했다. 이계의 소드마스터, 대현자, 9서클의 대마도사······. 곱게 요리된 설화 조각들을 먹어 치우며, 세이스비츠는 진심으로 감탄했다. 세상에, 이런 맛이 있구나. 완전히 혼이 빠진 얼굴로, 입 속에서 터져 나가는 그 맛을 음미했다. ―식성이 꽤나 좋은 편인가 보군요. 정신을 차렸을 때, 세이스비츠는 페르세포네가 눈앞의 요리에 전혀 손을 대지 않았다는 사실을 눈치 챘다. 페르세포네는 그의 접시 위에 게걸스럽게 흩어진 설화들을, 마치 불량 식품이라도 되는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그 순간 느꼈던 모멸감을, 세이스비츠는 잊을 수 없었다. ‘나는 다음 시나리오로 간다.’ 더 커다란 이야기. 더 커다란 자극. 그리고, 더 커다란 힘을 손에 넣을 것이다. ‘마왕이 될 것이다. 그 빌어먹을 놈들과는 비교도 안 되는, 어마어마한 설화들을 먹어치우며 살아갈 것이다.’ 그것을 위해서라면, 이런 하찮은 공단 하나쯤 내버리는 것은 아무렇지도 않다. [······뭐가 ‘혁명’이냐?] 쩌렁저렁 울리는 그의 목소리에, 공단 전체가 옅은 진동으로 떨렸다. [보아라, ‘혁명’ 같은 건 없다! 그딴 건 전부 시나리오의 역할극일 뿐이야!] 마치 모든 공민들을 능욕하는 듯한 말투. [400년 동안 무수히 반복되어 온 하찮은 유희에 불과하단 말이다. 너희들은 그런 허망한 것을 위해 싸우고 있는 것이다!] 자신 역시 줄곧 그 시나리오의 일부였음에도, 세이스비츠는 그렇게 외쳤다. 그래야만, 다음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갈 수 있다.’ 실제로 그것은 어느 정도 성공하는 듯했다. 쏟아지는 수많은 성좌들의 시선 속에서 세이스비츠 공작은 해방감을 느끼고 있었다. 자기 자신을 부정하면서 얻어낸 말초적인 쾌감. 세이스비츠는 간만에 세상의 중심이 된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런데. “진짜로 그렇게 생각해?” 누군가가, 그렇게 반문했다. * 물론, 그것은 나였다. 「너는······.」 ······젠장. 속마음이 너무 잘 들려도 문제다. [등장인물 ‘악마 공작 세이스비츠’의 망상이 폭주합니다.] [전용 스킬, ‘전지적 독자 시점’ 2단계가 강하게 활성화됩니다!] 공작의 안에서 사념들이 마구잡이로 넘쳐 나오고 있었다. 마치 벌거벗은 자아를 보는 것 같았다. 어느 정도냐 하면, ‘전지적 독자 시점’을 쓸 수 없는 녀석들도 그걸 느낄 수 있을 정도다. [성좌, ‘손톱을 먹는 쥐’가 공작의 언행에 손발을 웅크립니다.] [성좌, ‘뱀 머리 졸부’가 자신은 손발이 없으니 괜찮다고 말합니다.] 오죽하면 저 녀석들조차 비웃을 정도일까. 상황을 전혀 모르는 공작이 나를 향해 웃었다. [가짜 혁명가로군.] “누가 가짜래?” 나는 [책갈피]로 [바람의 길]을 전개해 공단을 내달렸다. 콰아아아앙! 등줄기를 아슬아슬하게 훑고 지나가는 거격(鉅擊). 연마기가 지나간 자리에 폭탄이 터진 듯한 크레이터만 남았다. ······이정도면 하위 격의 위인급 성좌 정도는 씹어 먹겠는데? 화신체가 이 몰골인 상태로는,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위력이었다. 저것이 설화 병기의 힘이다. 성좌가 아닌 존재들을 성좌에 준하게 만들어주는 힘. 게다가 세이스비츠 공작은 성좌는 아니라도 저 밑바닥 위인급 성좌들과 견줄 정도의 역사급 설화를 비축한 악마종이었다. 콰아아아아앙! 연마기의 안쪽에서 굴러나온 폭탄들이 시가지를 화마로 휩쓸었다. 집을 잃은 공민들이 뛰쳐 나와 울부짖었다. 고향을 잃고 마계에 와서, 힘겹게 삶을 살아가다 이곳에서 생을 마감하는 존재들. 일터를 잃은 공민들이 검댕이 묻은 얼굴로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그런 공민들을 보며 생각했다. 나 역시 시나리오가 싫은 것은 마찬가지라고. 하지만······ 빌어먹을. 「김독자는 생각했다. 인정하기 싫지만.」 나는 왜 이 ‘시나리오’가 존재하는 것인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공기의 결을 헤집고, [바람의 길]이 길을 뚫었다. 순식간에 몸을 날려 [공장] 머리 부위에 당도한 나는, 다시 한 번 [전인화]를 발동했다. [화신체의 내구도가 위험합니다!] 아까 잠깐 기절하는 바람에 책갈피의 지속 시간을 헛되이 날렸다. 내게 주어진 여유는 20분 정도. 파츠츠츠츳! 오른손에서 들끓는 백청의 전격이, [공장]의 수뇌부에 작렬했다. 반탄감과 함께 공장의 외피가 살짝 우그러들었다. [큭······?] 역시 타격력이 부족했다. 지금의 화신체로는 본래 화력의 사분의 일도 채 낼 수 없다. [제법이구나······.] 더군다나, 지속력도 길지 않다. 그래도 여기서는 맞서 싸워야 한다. 내 손으로 직접 이 녀석을 해치워야만 한다. [성좌의 ‘격’을 발출합니다!] [당신의 화신체가 크게 손상되어 극히 일부의 기운만이 방출됩니다.] 아주 잠깐이지만 격의 일부가 개방되자 [공장]의 작동이 일시적으로 멈췄다. 나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두 주먹에 마력을 집중했다. [이 기운은? 너는, 설마······!] 콰앙! 콰아앙! 콰아앙! [‘골드 드래곤의 망가진 심장’이 발동합니다!] 마력양이 급격하게 줄어들 때마다, 심장 어귀에서 팽팽하게 돌아가는 골드 드래곤의 심장이 마력을 재충전해주었다. 이어진 연타에 그 단단한 공장의 외피도 조금씩 벗겨지기 시작했다. 나사가 튀어 오르고, 소화 되지 않은 설화 파편들이 그 틈새로 흘러나왔다. 「김독자는 생각했다. 화신체만 멀쩡했더라도 해볼만 한 싸움이었을 텐데.」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초조한 마음으로 당신을 지켜봅니다.] 그 시선을 꿋꿋이 받으며, 나는 전인화의 힘이 담긴 주먹으로 [공장]의 갑피를 내리치고 또 내리쳤다. 이렇게 처절하게 싸울 줄 알았으면 키리오스한테 좀 더 열심히 배워둘 걸 그랬다. 뭐, 그래봤자 난 재능이 없으니 무리였겠지만. [화신체의 내구도가 한계에 도달합니다.] [전투를 당장 중지하지 않으면, 화신체의 붕괴가 재시작됩니다.] 숨이 점점 가빠지며, 내리치는 주먹도 느려진다. 그만한 타격에도 [공장]은 여전히 건재한 상태였다. 공작은 마치 기쁜 듯이 말했다. [덕분에 이 공단의 마지막 시나리오가 무척 감미로워지겠구나.] 내가 이길 수 없다는 건 알고 있었다. 애초에 내가 이기기 위해서 싸우는 게 아니니까. 「김독자는 공단의 아래쪽에서 이쪽을 바라보는 공민들을 내려다보았다.」 사람들이 나를 보고 있었다. 누군가는 입을 반쯤 벌린 채, 또 누군가는 두 손을 간절히 모은 채로. 아일렌과 마르크의 모습도 보였다. 각자 생긴 것은 달랐지만 모두가 비슷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혁명가가, 싸우고 있다.」 그저, 그렇게 생각해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혁명은 있다.」 그것이 진짜인지 가짜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일단 문장으로 쓰여진 것. 그리하여 많은 사람들이 믿게 된 것은 반드시 힘을 갖는다. 마치 설화가 현실이 된 것처럼. 츠츠츠츳! [해당 시나리오에 대한 당신의 영향력이 더욱 공고해집니다.] 하지만 다음 순간, [공장]의 거대한 팔이 내 공격을 받아냈다. 투쾅, 하는 충격파와 함께 내 몸이 통째로 튕겨져나왔다. [투지는 훌륭하지만 너는 이길 수 없다. 너는 ‘가짜’니까.] 너부러진 바닥 위에서 몸을 일으키며 나는 말했다. “네 말대로 나는 혁명가가 아냐. 하지만 혁명은 있다.” [그런 건 존재하지 않는다.] “왜 그렇게 생각하지? 당신도 처음에는 ‘혁명가’였으니까?” [······!] “결국 ‘혁명’이 일어나도, 끝없는 지배구조의 순환이 반복될 뿐이니까?” 세이스비츠 공작의 심경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혁명가 시나리오’의 비극에 대해서라면 나도 잘 알고 있으니까. 혁명을 일으킨 혁명가는 무엇이 되는가? “당신이 실패했다고 모두가 실패하는 건 아냐.” 끔찍한 시나리오가 있다. 비극적인 시나리오가 있다. 하지만. “의미 없는 시나리오는 없어.” 아무리 쓰레기 같은 시나리오라도, 그 시나리오를 살아가는 것은 결국 사람들이다. 기뻐하거나, 슬퍼하면서. 맞서 싸우고, 불가능에 투쟁하면서. 누군가는 죽어가지만 또 누군가는 서로를 구원하면서. 그것이 내가 아는 ‘멸살법’의 시나리오다. 그랬기에, 나는 그 긴 ‘멸살법’을 다 읽을 수 있었던 것이다. 삐그덕. 몸의 운신이 점점 힘들어진다. 원작대로 행동했다면 이런 고생은 하지 않았겠지. 「유중혁은 생각했다. 혁명가가 누구인지 모른다면, 놈이 나올 때까지 다 죽여버리면 되겠지.」 결국, 111회차의 유중혁은 그렇게 최악의 선택을 했다. 하지만 나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렇기에 이 빌어먹을 싸움을 계속하고 있는 것이다. 콰아아앙! 다시 한 번 내리친 공작의 일격에, 결국 등허리가 스쳤다. 힘없이 나가 떨어진 나를 향해, 또다시 [공장]의 거대한 손이 다가왔다. [네 이야기는 꽤 구미가 당기는군. 너를 먹겠다.] 이미 ‘명계’에 가서 설화의 맛에 눈을 뜬 녀석이다. 당연히 나를 보고 환장할 수밖에 없겠지. 그런데 거대한 녀석의 손아귀가 나를 감싸 쥐려는 순간, 누군가가 전력을 다해 달려와 내 몸을 안고 나뒹굴었다. 뿌연 흙먼지가 흩날리는 자리에, 익숙한 여인이 서 있었다. “무슨 짓이야?” 공민회 의장, 아일렌이었다. 나는 인상을 찌푸린 채 벽을 짚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비켜.” “당신은 할 만큼 했어요.” 아일렌은 전혀 비킬 기세가 아니었다. 결연한 의지가 떠오른 그녀의 표정을 보는 순간, 가슴 속 한 구석이 서늘해졌다. 잠깐만, 설마 혁명가는······. [하하하! 어디에 숨었느냐. 자칭 혁명가여!] 들려온 공작의 목소리에, 아일렌이 등을 돌렸다. 나는 그녀가 무엇을 하려는지 깨닫고 황급히 뒤를 쫓았다. 그런데 그녀가 [공작]의 앞에 서기 직전, 누군가가 외쳤다. “혁명가는 여기에 있다!”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 그가, 자신을 가리키며 외치고 있었다. [누군가가 ‘혁명가 선언’을 하였습니다!] 공민의회의 소속원일 수도 있었고, 아니면 지금까지 숨어 있던 공민일 수도 있었다. 내가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멸살법’에서조차 언급되지 않았던 그저 지나가는 엑스트라. [무슨······?] “아니, 내가 혁명가다!” 이번에는 여자의 목소리였다. 역시나 모르는 얼굴. 애처롭게 어깨를 떨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다리로 굳건히 바닥을 짚은 채, 여자는 그렇게 외쳤다. 그것을 시작으로, 곳곳에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누군가가 ‘혁명가 선언’을 하였습니다!] [누군가가 ‘혁명가 선언’을 하였습니다!] 아일렌과 마르크. 의회의 공민들 뿐만 아니라, 지금껏 집에 숨어 있던 모든 화신들이 거리로 나와 외치고 있었다. 수수한 병장기를 들고, 저항할 수조차 없는 몸뚱아리로 외치고 있었다. “내가 혁명가다! 나를 죽여라!” 하나밖에 없는 패를 들고 나온 공민들의 모습은 처절했다. 수많은 공민들이 제각기 병기를 들고 밀물처럼 [공장]을 향해 진격하고 있었다. 나는 그 열기에 고무되어 자리에서 비틀거렸다. 「그것은, 유중혁이 살았던 ‘멸살법’에는 나오지 않았던 광경이었다.」 아쉬웠다. 111회차의 유중혁에게도, 이 광경을 보여주고 싶었는데. 녀석도 이 광경을 봤다면, 분명히 다른 선택을 했을 텐데. 그런데 그때. “내가 바로 혁명가 유중혁이다!” 누군가가 외쳤다. “내가 유중혁이다!” “아니다 나다!” ······뭐? 아니 잠깐만. “내가 바로 유중혁이다!” 대체 무슨 생각을 했는지, 이제 사람들은 ‘혁명가’가 아닌 ‘이름’을 외쳐대고 있었다. 공단의 무수한 ‘유중혁’들이 들고 일어나고 있었다. [누군가가 ‘유중혁 선언’을 하였습니다!] 아니 이거······ 잠깐만. [<스타 스트림>의 업적 시스템에 혼란이 발생했습니다.] * 그리고 그 시각. 검은 코트를 입은 한 남자와, 남자의 어깨에 앉은 작은 인형이 [공단]에 도착했다. 남자가 공단의 전체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이곳이 김독자가 있는 곳인가?”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은은한 홍조를 띤 채 고개를 끄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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