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7화
217화
······진짜로?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당신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봅니다.]
진짜로 제천대성이 왔다고?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당신의 옷차림에 눈을 가늘게 뜹니다.]
간만에 느껴지는 그 시선에 나는 묘한 안정감을 느꼈다.
누군가가 바라보는 것으로 심신이 편안해지다니, 정말 이상한 기분이다.
“긴고아의 죄수.”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당신을 바라봅니다.]
제천대성은 아직 긴가민가하는 눈치였다.
내가 김독자인지 아닌지, 정확히 확신하지 못하는 느낌이랄까.
얼굴에 설화를 덮어 썼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잠시 생각하던 나는 확신을 주기로 했다.
“맞습니다. 접니다.”
일순 허공에 침묵이 맴돌았다.
하늘이 텁, 숨을 들이켠 듯한 침묵이었다.
그리고 잠시 후.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당신의 정체에 경악합니다!]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대체 어떻게 살아있었냐고 묻습니다.]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당신이 왜 이런 곳에 있는 것인지 궁금해합니다.]
마치 하늘을 뒤덮듯 내게만 날아오는 메시지.
「제천대성. 절대악도 절대선도 아닌 중립 계통의 성좌. 장난기가 많지만 한편으로는 무심하고, 타고난 반골 기질 때문에 어떤 성좌들과도 쉽사리 엮이지 못하는 존재······.」
내가 ‘멸살법’에서 아는 제천대성은 그런 존재였다.
작품 말미에서 무수한 성좌들과 맞서 싸우며 말도 안 되는 신화급 설화를 쌓게 되는, 명실공히 ‘멸살법’ 최강의 성좌들 중 하나.
그럼에도 최후까지 어떤 인물들과도 깊은 유대를 쌓지 못한 채 고독히 죽어갔던 존재.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들려오는 제천대성의 메시지를 들으며, 나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떴다.
내가 아는 정보들을 신뢰하는 것은 중요하다. 하지만.
“제천대성.”
츠츠츠츳.
“······다시 만나서 기쁩니다.”
꽤 오래도록 제천대성은 말이 없었다.
비록 같은 성좌가 되긴 했어도, 여전히 보이지도 않고 잡을 수도 없는 존재. 그럼에도 그 순간, 나는 제천대성이 내 바로 앞에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한참이나 입술을 달싹거립니다.]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자신의 머리털을 쥐었다 놓기를 반복합니다.]
츠츠츠츳!
그리고 다음 순간, 허공에서 하늘하늘 뭔가가 떨어졌다.
무심결에 붙잡은 그것은.
······무려, [제천대성의 머리털]이었다.
슬그머니 웃음이 나온다.
아마도 이것이 제천대성이 누군가를 신뢰하는 방식일 것이다.
[등장성좌, ‘긴고아의 죄수’에 대한 이해도가 미미하게 상승합니다.]
나는 제천대성을 향해 입을 열었다.
“제가 여기 있는 건 비밀입니다. 아시죠?”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고개를 끄덕입니다.]
생각보다 입이 무거운 성좌니까, 비밀은 잘 지켜줄 것이다.
“그나저나 여긴 어떻게······.”
내 말이 채 이어지기도 전에, 무너진 건물의 한쪽 벽면이 기울어지며 누군가가 난입했다. 부스스 떨어지는 흙먼지와 함께 나타난 것은 장하영이었다.
다행히, 아직 무사했던 모양이다.
“유중혁! 괜찮아?”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의아한 표정을 짓습니다.]
그러고 보니 나는 아직도 유중혁의 이름을 파는 중이었지.
장하영한테도 슬슬 내 진짜 이름을 알려줄 때가 되긴 했는데······.
나는 일단 바깥 상황을 물었다.
“바깥은 어때?”
“······별로 안 좋아.”
사실 들려오는 소리만으로도,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것 같았다.
공단 전체를 뒤흔드는 듯한 지진.
곳곳에서 들려오는 공민들의 비명에, 장하영의 안색이 더욱 굳어졌다.
“공작이 [공단]을 쑥대밭으로 만들면서 널 찾고 있어.”
쑥대밭이 되지 않는 게 이상하다.
현시점에서 공작이 [공장]을 가동했다면, 막을 방법은 없으니까.
그렇다고 이제와 포기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처형관들은 어떻게 됐어?”
“이제 하나 남았어. 워낙 잘 도망가서······.”
투사의 아우라를 덮어쓴 장하영의 뺨에 악마종의 피가 묻어 있었다.
그래도 그 짧은 사이 둘이나 해치웠다니, 괄목할만한 성과다.
“나머지 하나도 부탁해. 그래야 공작을······.”
츠츠츠츳!
말을 잇는데, 얼굴 표면에서 옅은 스파크가 튀었다.
순간적으로 무릎에 힘이 빠졌다.
“야! 너······.”
놀라서 달려온 장하영이 내 어깨를 붙잡았다.
쩌저적, 하고 갈라지는 피부.
[파손된 설화가 붕괴합니다.]
[‘추방자 패널티’가 다시 시작됩니다.]
[화신체의 내구도가 위험한 수준입니다!]
······하여간 이 망할 화신체는 걸핏하면.
이제 개복치란 별명은 유중혁이 아니라 나한테 어울릴지도 모르겠다.
“비유.”
[바앗!]
내가 부르자마자 허공에서 나타난 비유가 손가락을 꿈틀거렸다.
그러자 시나리오 메시지가 떠올랐다.
[새로운 서브 시나리오가 도착했습니다!]
+
<서브 시나리오 ― 설화 수선>
분류 : 서브
난이도 : D
클리어 조건 : 손상된 화신체의 내구도를 일정 이상으로 회복하세요.
제한시간 : 없음
보상 : 없음
실패시 : ―
+
이럴 때를 대비해 미리 비유에게 부탁해 둔 시나리오였다.
본래라면 이렇게 개인적으로 ‘서브 시나리오’를 유용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관리국의 정식 채널이었다면 절대 허락되지 않았겠지.
[서브 시나리오 활동으로 인해 추방자 패널티가 완화됩니다.]
비유가 내준 시나리오 덕분에, 화신체의 고통이 한결 덜어졌다.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당신의 시나리오 사용 방식에 흥미를 갖습니다.]
[800코인을 후원받았습니다.]
보통이었다면 다른 성좌들의 질타를 받았겠지만, 이번 경우는 딱히 보상 내역이 없었기 때문에 시비를 거는 성좌들도 없었다.
어쨌든 지금은 추방자 신세니까, 지속적으로 시나리오를 받아야 한다. 메인 시나리오에 들어갈 때까지는 이렇게 버티는 수밖에 없다.
[서브 시나리오 획득으로 인해 화신체의 붕괴가 지연됩니다.]
간신히 한숨을 돌리자, 허공에서 걱정스런 눈빛으로 나를 내려다보는 비유와 눈이 마주쳤다. 나는 일부러 빙긋 웃어주었다.
―난 괜찮으니까 걱정 마.
조그맣게 고개를 움직인 비유는 다시 허공에서 사라졌다.
공단 전체의 시나리오를 관리해야 하는 만큼, 비유도 지금 정신이 없을 것이다.
내 몸을 감싸던 스파크가 조금 잠잠해지자 장하영이 물었다.
“······좀 괜찮아?”
“버틸 정도는 돼. 아일렌은 어딨어?”
“마르크랑 같이 있어. 공민들 대피시키고 있을 거야.”
현명한 선택이었다.
어차피 [공장]이 가동된 이상, 공민들만의 힘으로 대적하는 것은 무리였다. 어딘가에 숨어있는 ‘진짜 혁명가’가 나타난다면 모르겠지만······.
비척거리며 밖으로 나가자, 미세먼지로 새카맣게 물든 대기가 보였다. 쓰러진 귀족과 공민들의 시체들.
“······이대로 끝나는 거야?”
멀리서 움지럭거리는 [공장]의 그림자를 보며 장하영이 입술을 꾹 깨물었다. 변형된 [공장]은 거인을 닮은 모습이었다. 머리 쪽에 있는 굴뚝에서 매연을 뿜어대는 늙은 거인. 그 거인의 손이 인근의 건물들 사이에서 무언가를 끄집어냈다.
“끄아아아아악!”
죽어가던 귀족이 [공장]의 손에 붙잡힌 채 몸부림쳤다. 자세히 보니, 아까 나와 싸우던 그 후작인 것 같았다.
“공작! 공자아아악!”
고통스럽게 울부짖던 후작은 쩌억 벌어진 공장의 연료 기관 속으로 으깨져 들어갔다.
콰지지직!
톱니가 갈리는 듯한 파쇄음. 만족했다는 듯, 공장의 동력 기관 쪽에서 거센 불길이 타올랐다. 그제야 나는 공작이 어떻게 공장을 가동했는지 알 수 있었다. 장하영이 진력이 난 목소리로 말했다.
“자기 부하들을 동력원으로 쓰고 있었어······ 어떻게 저런 짓을.”
“이제 [공단] 같은 건 신경 쓰지 않겠다는 뜻이겠지.”
“······왜? 자기 공단이잖아?”
나는 그 의문에 대답하는 대신 [라마르크의 기린]을 사용했다.
설화 파편을 임시로 수복하여 화신체를 회복시키기 위해서였다.
「김독자는 생각했다. 저 녀석은 ‘마왕’이 되기로 한 것이다.」
밤하늘에 도전하듯, 고개를 든 [공장]의 울림통에서 커다란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보라, 성좌들이여! 이것이 바로 그대들이 원하는 것이다!]
자신이 만들어 가는 이야기 속에 완전히 심취해버린 공작의 모습.
몇 살을 먹고, 얼마나 많은 세월을 살아가든.
모든 존재는 이야기 앞에서는 그저 어린아이일 뿐일지도 모른다.
공작이 폭주하는 동안, 비유의 채널에도 조금씩 성좌들이 늘어가고 있었다.
[극소수의 성좌들이 ‘세이스비츠’의 행동을 흥미롭게 여깁니다.]
어쩌면, 나도 저런 모습이었을까.
새삼스럽게 돌아보게 된다.
「“성좌들의 관심을 끄는 건 쉽다. 하지만 좋은 시나리오를 만드는 건 어려운 일이다.”」
그러고 보면, 언젠가 ‘멸살법’의 도깨비 왕이 그런 말을 했었다.
그 말이 맞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도 한다.
좋은 시나리오라는 게 대체 뭘까.
아니, 그런 것이 있기는 한 것일까.
“저대로 두면······!”
“조금만 기다려 봐.”
나는 장하영을 만류하며 [공장]의 동태를 살폈다.
쿠구구구!
[공장]을 비롯한 ‘설화병기’들은 기존의 개연성이 용납하지 않을 정도로 비정상적인 힘을 생산한다. 이것은 바꾸어 말하면, 어중간한 시나리오에서 잘못 쓰다간 자멸하기 딱 좋다는 것이다.
츠츠츠츳!
역시나. 마구잡이로 운용되는 [공장]의 관절부에서 스파크가 터져 나왔다.
놀란 장하영을 향해 내가 설명했다.
“아마 [설득력]이 부족해서일 거야. 저렇게 귀족들 몇 갈아 넣는 방식으로는 오래 못 가.”
공장의 연료인 [설득력]은 무수한 설화 파편을 쏟아부어 만든 것이다. 모든 설화 병기는 설득력을 소모해 작동하며, 일시적으로 개연성을 극복한다. 쉽게 말해 저 [공장]은 지금의 내 화신체와 흡사한 상태인 것이다.
그러니, 저런 식으로 움직이다간 곧 후폭풍에 휘말릴 가능성이······.
츠츠츳!
그런데, 내 생각과는 다르게 [공장]의 움직임은 둔해지지 않았다.
[성좌, ‘뱀 머리 졸부’가 흐뭇한 눈으로 ‘세이스비츠’를 바라봅니다.]
[성좌, ‘손톱을 먹는 쥐’가 ‘세이스비츠’의 파괴 행각에 기뻐합니다.]
[극소수의 성좌들이 기꺼이 개연성을 지불합니다.]
······젠장, 그렇구만.
개연성을 지불하는 녀석들이 있었다.
[혁명가는 어디에 숨어 있느냐!]
쿠구구구궁!
다시 한번 거대한 지진이 울려 퍼지고, 공민들이 끔찍한 비명을 질렀다.
잠시 건물에 기대어 있던 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앞으로 걸어 나갔다.
놀란 장하영이 내 팔을 붙잡았다.
“지금 가면 죽어! 저거 보면 모르겠어?”
화신체의 내구도를 가늠해 본다.
「저 녀석을 처치할 만큼의 힘이 남아 있을까?」
모르겠다.
「전인화나 바람의 길을 쓴다면, 녀석을 처치할 수 있을까?」
그것도 모르겠다.
“장하영, 마지막 처형관을 죽여. 나머지는 내가 어떻게든 해줄게.”
내 말에, 장하영이 더듬거리며 물었다.
“왜, 왜 그렇게까지 해? 도망가도 되잖아! 넌 진짜 혁명가도 아니잖아!”
“나는 저런 이야기가 싫어.”
“······뭐?”
“너무 뻔하잖아.”
나는 [공장]을 향해 달려갔다.
거리는 대체로 한산했다.
이 사달이 났는데도, 여전히 대부분의 공민들은 집 안에 틀어박혀 숨을 죽이고 있었다. 그 광경을 보며, 나는 유중혁의 111회차를 떠올렸다.
「공단의 ‘마지막 밤’이 찾아오도록, 혁명가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래, 그러니 이렇게 될 거라 예상은 했다.
「그래도, 조금은 다른 이야기가 되었으면 했는데.」
간간이 벽에 기댄 채 피를 흘리는 공민들이 나를 향해 손을 뻗었다.
“혁, 명가님······.”
혁명이 뭐라고.
이게 다 뭐라고, 이렇게 많은 사람이 죽어야 하는지.
어째서 이런 ‘시나리오’가 존재해야만 하는지.
[성좌, ‘뱀 머리 졸부’가 당신을 노려봅니다.]
[성좌, ‘손톱을 먹는 쥐’가 당신을 향해 고함을 지릅니다.]
[성좌, ‘불길에 몸을 던진 개’가 당신의 파멸을 원합니다.]
성좌들이 나를 향해 메시지를 쏟아붓는다.
그런 메시지를 내게 전송해야만 하는 비유가, 허공에서 이를 바득바득 갈고 있었다.
나는 괜찮다는 듯 손을 흔들어 주었다.
솔직히 아까는 안 괜찮았는데, 이제는 정말로 괜찮다.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당신을 바라봅니다.]
적어도, 이제는 내 편이 하나는 있으니까.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당신이 저 망할 고철덩이를 부숴버리기를 원합니다.]
나는 허공을 향해 날아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