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5화
215화
Episode 41. 진짜 혁명가
순간, 내가 조금 과했나 싶은 생각이 들기도 했다.
비슷한 말을 하려고 한 건 맞지만 이 정도로 도발하려던 건 아니었는데.
성좌들을 의식해 사이다를 주는 연출에 너무 익숙해져 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우스운 노릇이었다. 나는 유중혁도 아니고, 심지어 지금은 코인을 주는 녀석들도 없는데.
“방금 들었어? 구원의 마왕이래!”
장하영이 곁에서 방방 뛰며 말했다.
“그 성좌가 우리 채널에 있나 봐! 지구에 있었던 사람!”
나는 내가 바로 그 ‘구원의 마왕’이라고 말해주려다가, 문득 얼마 전의 기억이 떠올랐다.
―아, 이미 여자친구 있을라나.
······안 되겠다.
대신 나는 아까부터 빛이 번쩍이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성좌, ‘뱀 머리 졸부’가 길길이 날뜁니다.]
자식, 열 좀 받은 모양인데.
하지만 지가 날뛰어 봤자다. 기껏해야 하위 격의 성좌인 ‘뱀 머리 졸부’에겐 마계에 현신할 만한 배짱도, 그것을 감당할만한 개연성도 없으니까.
[성좌, ‘뱀 머리 졸부’가 고작 화신 따위가 자신을 능멸한 것에 격노합니다!]
······고작 화신 따위?
원작에서 이 녀석을 죽인 게 누구였더라?
일단 유중혁은 아니고······.
[성좌, ‘뱀 머리 졸부’가 듣도 보도 못한 성좌가 자신의 뜻에 반대했다는 것에 분개합니다!]
[성좌, ‘뱀 머리 졸부’가 ‘구원의 마왕’을 찾아 두리번거립니다.]
심지어 이 녀석은 내가 그 ‘구원의 마왕’과 동일 인물이라는 것도 모르는 눈치였다. 뭐, 아무려나 상관은 없다.
어쨌거나 놈이 ‘구원의 마왕’을 신경 쓰기만 하면 목적의 절반은 달성되니까.
「김독자는 생각했다. 슬슬 채널에 성좌들을 불러 모아야 한다. 그래야 ‘혁명가 시나리오’ 후에 이어질 ‘마왕 선발전’에서 우세를 점할 수 있다.」
굳이 녀석에게 수식언을 밝힌 것은, 채널에 관해 입소문을 낼 존재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무턱대고 성좌들을 모집하는 건 또 위험했다. 처음부터 너무 강력한 녀석들이 몰려오면 비유도 힘들고 나도 곤란해질 수 있다.
그런데 때마침, 채널에 ‘뱀 머리 졸부’가 나타났다.
[성좌, ‘뱀 머리 졸부’가 인근의 성좌들에게 ‘구원의 마왕’에 대해 수소문 시작합니다.]
[성좌, ‘뱀 머리 졸부’가 ‘구원의 마왕’에 대한 소문을 듣고 깜짝 놀랍니다.]
놈은 이계의 위인급 중에서도 잡스럽고 저급한 녀석이었다.
[성좌, ‘뱀 머리 졸부’가 자기가 ‘구원의 마왕’을 봤다고 주장합니다.]
[성좌, ‘뱀 머리 졸부’가 쏟아지는 성좌들의 비난에 억울함을 호소합니다.]
[성좌, ‘뱀 머리 졸부’가 정말로 ‘구원의 마왕’을 봤다고 주장합니다!]
때문에, 고고한 설화급 성좌들은 놈의 말을 믿지 않는다. 즉, 녀석이 끈이 닿는 것은 고만고만한 하위 격의 성좌들뿐이라는 이야기다.
즉, ‘뱀 머리 졸부’는 그런 하위 격의 성좌들을 모으기에 딱 적합한 녀석이었다.
[성좌. ‘뱀 머리 졸부’가 패거리들을 불러 모읍니다.]
역시나 예상대로였다.
[새로운 성좌들이 #BI-90594 채널에 입장했습니다.]
만약 ‘은밀한 모략가’가 같은 채널에 있었다면 분명 계략에 감탄했니 어쩌니 하는 메시지를 띄워줬을 텐데. 뭔가 조금 그리운 느낌이다.
[새로 입장한 성좌들이 자신의 수식언을 드러냅니다.]
[성좌, ‘손톱을 먹는 쥐’가 떨어진 화신들의 손톱을 찾습니다.]
[성좌, ‘불길에 몸을 던진 개’가 채널의 화신들에게 호기심을 보입니다.]
수식언이 죄다 동물시리즈인 걸 보니, 제 친구들을 불러온 모양이었다.
‘손톱을 먹는 쥐’에 ‘불길에 몸을 던진 개’라니······ 딱히 ‘멸살법’을 떠올리지 않아도 누군지 알 수 있을 것 같은 수식언들이었다. 저런 녀석들도 성좌가 되는구나.
[성좌, ‘뱀 머리 졸부’가 ‘구원의 마왕’에게 경고합니다.]
[성좌, ‘뱀 머리 졸부’가 해당 채널은 성운 십이지(十二支)가 접수한다고 선언합니다.]
······얼씨구?
십이지라면 멸살법에서 지나가듯 본 적이 있다. 성운들 중 하나이긴 하지만, 그다지 결속력은 없는 녀석들이었다. 게다가 구성원 대다수는 하위 격 성좌들. 적대하더라도 딱히 문제는 없을 것이다.
「김독자는 생각했다. 일단 구독좌는 늘었고, 다음은 구색 맞추기인가.」
채널이 커지면 물을 흐리는 미꾸라지도 많아진다.
지금의 나는 격의 활용이 자유롭지 않으니, 채널의 수질 관리를 대신 담당할 성좌가 필요했다.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적당히 점잖고, 저런 녀석들을 깔아뭉갤 수 있는 성좌······ 어디서 그런 녀석을 구하지?
사실 답은 이미 나와 있었다.
“장하영, 뭐해?”
허공을 향해 열심히 뭔가를 입력하던 장하영이 흠칫 놀라며 내 쪽을 보았다.
[‘정체불명의 벽’이 흠칫 놀랍니다.]
그새 하는 짓도 비슷해졌군.
나는 눈을 살짝 가늘게 뜨며 말했다.
“너 다른 성좌들한테 ‘구원의 마왕’ 얘기하면 죽는다.”
“그냥 메시지 들었다고 자랑만 살짝······.”
“너 그러다 천벌 받아. ‘구원의 마왕’ 아주, 정말 무서운 사람이거든.”
내 말을 어떻게 생각한 것인지 장하영은 하늘을 흠칫 올려다보았다. 혹시나 어딘가에서 ‘구원의 마왕’이 자길 보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다행히 비유의 채널에 별다른 기척은 없었다. 장하영이 아직 헛소리를 떠들진 않은 듯했다. 눈치를 보던 장하영이 물었다.
“너 ‘구원의 마왕’에 대해 잘 알아?”
“그냥 조금 알아.”
“친해?”
친하다고 해야 할지 아니라고 해야 할지······.
“네가 헛짓거릴 하면 일러바칠 정도는 돼.”
“······이를 거야?”
“너 하는 거 봐서.”
말 나온 김에 차라리 잘 됐다 싶었다.
어차피 지금부터는, 이 녀석의 힘을 이용해야만 하니까.
*
[성좌, ‘뱀 머리 졸부’가 분통을 풀 곳을 찾습니다.]
[성좌, ‘손톱을 먹는 쥐’가 당신에게 호기심을 보입니다.]
허공에서 연이어 들려오는 간접 메시지. 얼마간 그 메시지를 가만히 듣고 있던 세이스비츠 공작은, 인상을 찌푸린 채 입을 열었다.
“밤이 되면 모든 귀족들을 집결시켜라.”
“예? 하지만······ 아, 알겠습니다!”
공작의 표정에 질겁한 담당관이 재빨리 집무실 밖으로 빠져나간 후, 세이스비츠 공작은 새로운 연초를 꺼내 입에 물었다. 간만에 성좌의 간접 메시지를 들은 까닭인지, 그는 살짝 초조한 기색이었다.
‘대체 어떤 녀석이 채널을 연 것인지는 모른다. 하지만 이 기회를 그냥 보낼 수는 없어.’
비록 정식 채널은 아니다. 하지만 어떤 채널이든 간에, 이 상황을 이용할 수만 있다면 그는 이 ‘73번째 마계’의 가장 유리한 고지에서 선발전을 시작할 수 있게 된다.
‘아직 다른 공작들은 성류방송을 송출할 채널을 얻지 못했겠지.’
뱀이니 쥐니 하는 수식언들이 조금 걸리기는 하지만, 어쨌거나 녀석들도 성좌였다. 자세한 전후 사정은 모르겠지만, 이 상황은 그가 ‘마왕’이 되기 위한 절호조의 기회가 아닐 수 없었다.
상황을 지켜보던 옴브로스 후작이 물었다.
“설마 ‘공장’도 가동할 수 없는 상황에서 ‘혁명가’와 맞설 생각이십니까?”
“······.”
“남은 처형관이 모두 죽으면, 혁명가는 당신을 죽일 힘을 얻게 될 겁니다.”
추종자를 모두 잃은 지배자는 혁명의 이슬이 된다.
그것이 이 ‘혁명가 시나리오’의 예정된 전개였다.
하지만 세이스비츠 공작은 눈썹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물론 그렇겠지. 지금 나타난 놈이 ‘진짜 혁명가’라면 말이야.”
“그게 무슨······.”
“그건 그렇고, 자넨 어느 쪽 편이 될지 정했나?”
“예?”
옴브로스가 놀란 눈을 끔뻑였다.
“저는 길로바트의 후작······.”
가만히 웃는 세이스비츠 공작을 보며, 옴브로스는 ‘편’의 의미를 퍼뜩 깨달았다.
“정했나?”
송골송골 맺힌 식은땀이 옴브로스의 등을 적셨다.
아주 짧은 갈등이 그의 머릿속을 스쳤다.
이 전쟁에서 가장 먼저 ‘채널’을 얻은 공작은 선발전에서 압도적으로 유리하다. 곧 수많은 성좌들이 이 채널에 몰려들겠지. 게다가 세이스비츠는 이미 73번째 마계에서 가장 강력한 설화를 가지고 있다······.
옴브로스의 고민은 길지 않았다.
“마계의 새로운 마왕을 뵙습니다.”
‘악마종’다운 판단이었다.
천천히 자리에 무릎을 꿇는 옴브로스를 보며, 세이스비츠 공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
나는 아일렌과 마르크에게 수거 노예들을 맡긴 뒤, 비유에게 부탁해 잠시 방송 채널을 교란시켰다. 혹시나 있을 문제를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지금부터 하는 얘기는 동물 친구들이 들어서 좋을 게 없으니까.
“장하영, 지금 몇 명이랑 얘기하고 있어?”
장하영은 내 눈치를 살피더니 대답했다.
“세 명 정도?”
“하나는 흑염룡일 거고. 나머지 둘은 누구야?”
“음······. 사실은 다섯 명일지도.”
“다섯 명?”
“정확히 말하면 아홉 명 정도지만······.”
“······아홉 명?”
“답장 텀이 좀 긴 녀석까지 합치면 열다섯 명인가······?”
‘정체불명의 벽’엔 특징적인 몇 가지 기능이 있다.
그리고 그중 하나가, 바로 얼마 전 장하영이 오픈한 일대일 채팅이었다.
<스타 스트림>의 시나리오에 속, 수식언을 가진 이들이라면 누구에게나 메시지를 보낼 수 있는 엄청난 능력.
하지만 그런 능력이 있다고 해서, 다 장하영처럼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 짧은 시간 동안 열다섯 명이랑 얘기했다고?”
“뭐, 그렇게 어렵진 않던데?”
난 한 사람이랑 얘기하는 것도 힘든데.
정말이지 대단한 멀티태스킹 솜씨다.
그 짧은 사이 15명이나 되는 성좌와 초월좌들이 이 녀석과 말을 텄다. 그 자존심 강한 녀석들이······.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싶겠지만, 이게 바로 장하영의 진짜 능력이었다. 바로 이 능력이 있기에 훗날 장하영이 초월좌들의 세력을 꾸릴 수 있었던 것이기도 하고.
내 얼굴을 살피던 장하영이 물었다.
“근데 그건 왜?”
순간 망설여진다.
이 선택은 매우 중요하다.
여기서 내가 만약 그르친 선택을 한다면, 힘들게 얻은 채널이 순식간에 망가질 수도 있다.
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누굴 좀 불렀으면 싶은데 말이야.”
“응? 누구?”
그러나 막상 말하려고 보니 망설임이 커졌다.
순간적으로 내 선택이 옳은 것인지 확신이 들지 않았다.
「김독자는 생각했다. 지금부터 부를 녀석들은 지금의 내 힘으로는 통제할 수 없다.」
여기까지 오는 건 정말 힘들었다.
빌어먹을 시나리오도 시나리오지만, 나를 제일 괴롭힌 것은 사실 성좌들이었다. 걸핏하면 ‘현상금 시나리오’를 거는 녀석들은 약과다. 생각해 보면 내가 마계에 오게 된 것도 놈들이 내건 [운명] 때문이었으니까.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치가 떨리고 잠이 안 온다.
그렇게 각고의 노력 끝에 이 외진 무대까지 와서 새로운 채널을 개설했다.
그런데 이제 와서, 그 녀석들 중 하나를 다시 여기에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