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4화

214화 ······새로운 성좌라고? 벌써? 예상보다 이른 타이밍이었다. 적어도 지금보단 사건이 좀 진행된 후에야 구독좌가 생길 거라고 생각했는데······. [수식언을 밝히지 않은 한 성좌가 화신들을 바라봅니다.] 보아하니 내가 이미 만나 본 성좌는 아닌 듯했다. 조금 아쉬웠다. 혹시 ‘은밀한 모략가’나 ‘심연의 흑염룡’이 아닐까 기대했는데. “바, 방금 메시지 들었나?” “무슨 메시지?” “나한테 간접 메시지가 들렸다고!” 꽤 코인이 넉넉한 녀석인지, 새로 온 성좌는 처음부터 간접 메시지를 뿌려대고 있었다. 곁에 있던 비유가 바앗, 하고 작은 소리를 질렀다. 아마 지금 비유에겐 코인이 마구 들어오고 있을 것이다. 신기하기도 하겠지. 도깨비들이 어떤 식으로 코인을 벌어들이는지 이제 알았을 테니까. 「김독자는 생각했다. 괜찮은 녀석이어야 할 텐데.」 초기 구독좌들의 성향은 채널의 성격을 결정한다. 채널의 주력이 ‘화신 찾기’인지, 아니면 ‘유희 찾기’인지에서부터, 서브 시나리오의 자극성과 난이도까지. 도깨비가 결정할 수 있는 모든 디테일은, 결국 구독좌들의 욕망에 반응해 만들어진다. 사실 내가 제일 걱정되는 것도 그 점이었다. 41회차의 신유승은 이미 도깨비들의 농간으로 무수한 상처를 받아왔다. 앞으로 시나리오를 이어 나가기 위해, 비유는 성좌들의 욕망과 끊임없이 맞서야만 할 것이다. “바앗?” 나는 비유의 머리에 가만히 손을 얹었다. [수식언을 밝히지 않은 성좌가 수식언을 드러냅니다.] [성좌, ‘뱀 머리 졸부’가 이곳의 화신들을 못마땅하게 생각합니다.] 뒤이어 들려온 메시지에 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시작이 안 좋은데. ‘뱀 머리 졸부’라면 ‘멸살법’에서 읽었던 기억이 난다. [성좌, ‘뱀 머리 졸부’가 시나리오의 전개를 지루해합니다.] [성좌, ‘뱀 머리 졸부’가 도깨비의 어리숙한 전개에 불만을 갖습니다.] ‘뱀 머리 졸부’. 자기보다 약하고 코인이 적은 성좌들이 구독하는 채널에 들어가 시나리오를 망쳐 놓는 게 취미인 녀석. [성좌, ‘뱀 머리 졸부’가 자극을 원합니다.] 저놈 때문에 구독이 줄어 쫄딱 망한 채널이 몇 개나 된다는 설명을 ‘멸살법’에서 언뜻 본 기억이 났다. 그냥 지나가듯 언급되던 녀석인데, 설마 여기서 직접 마주칠 줄이야. [성좌, ‘뱀 머리 졸부’가 ‘수거 노예’들의 생존을 원하지 않습니다!] [성좌, ‘뱀 머리 졸부’가 적에게 협력한 이는 모두 죽여야 한다고 말합니다!] [성좌, ‘뱀 머리 졸부’가 누구든 ‘수거 노예’를 죽이는 공민에게 코인을 후원하겠다 선언합니다.] 그 메시지에 공민들이 주변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누군가는 저게 무슨 말인가 싶은 표정이었고, 누군가는 머뭇거리는 얼굴이었다. 좋지 않은 트라우마가 떠올랐는지 패닉에 빠진 이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 중 몇몇은, 슬그머니 눈치를 보다가 허리춤에서 몰래 병장기를 꺼내 들고 있었다. 그것을 눈치챈 장하영이 소리를 질렀다. “잠깐만! 거기 지금 뭐 하는 거야?” 한발 늦은 제지였다. 누군가가 병장기를 빼 들었다는 사실을 깨닫자, 공민들의 행동은 더욱 빨라졌다. 하나, 둘, 셋. 늘어가는 병장기들의 숫자. “이보게, 진심인가? 이건 아니지 않나!” 실성한 노예를 향해 다가가던 공민을 마르크가 붙잡았다. “수거 노예가 되었다고 모두 이지를 잃은 건 아니야. 아직 제정신이 남아 있는 이도 분명 있네!” “이놈들 중 대부분은 공작한테 영혼을 팔아넘긴 녀석들이야!” “모두가 그런 건 아닐세! 자네도 알지 않은가?” “어차피 죽은 거나 마찬가지인 놈들이잖아? 이거 놔!” 코인에 눈이 멀어버린 공민이 마르크를 밀치고 칼을 뽑았다. [성좌, ‘뱀 머리 졸부’가 격화된 갈등에 흥분합니다.] [성좌, ‘뱀 머리 졸부’가 가장 많은 ‘수거 노예’를 죽인 화신에게 3천 코인을 후원하겠다 선언합니다.] 3천 코인. 코인이 귀한 [공단] 안에서는 한동안 사치를 누릴 수 있는 금액이었다. “그, 그냥 죽입시다. 우리라도 살아야지······!” “옳소! 의장, 그냥 다 죽여버리고 돌아갑시다!” 목소리의 균형이 급격하게 기울고 있었다. 병장기를 빼 드는 공민들의 숫자가 늘어났다. 번지는 탐욕에 마르크가 다시금 외쳤다. “한때 같은 공민이었던 사람들이야! 그런 식으로 행동하면 귀족들과 뭐가 다른가!” “비켜 주인장! 당장 안 비키면―” [성좌, ‘뱀 머리 졸부’가 공민들의 분쟁을 즐깁니다.] 다툼에 밀려난 마르크가 엉덩방아를 찧는 순간, 또 다른 메시지가 이어졌다. [성좌, ‘뱀 머리 졸부’가 같은 ‘공민’을 죽인 화신에게는 두당 300코인을 후원하겠다 선언합니다.] 공민들이 순간 망연한 얼굴을 했다. 뒤이어, 서로를 본 공민들이 황급히 거리를 벌리며 물러났다. “읏······.” “자, 잠깐만!” 그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것 같았다. 「맞아, 시나리오는 원래 이런 것이었지.」 언젠가, 이곳의 공민들도 ‘첫 번째 시나리오’를 수행했던 적이 있었다. 서로를 향해 칼을 겨누고, 살아남기 위해 생명체를 살해해야 했던 기억. “으, 으으······.” 병장기를 꺼내든 채 주춤주춤 서로를 바라보는 공민들. 고작 성좌의 몇 마디로, ‘혁명’이라는 이름으로 뭉쳤던 공민들의 유대가 조금씩 희미해지고 있었다. [성좌, ‘뱀 머리 졸부’가 화신들의 반응에 즐거워합니다.] 간만에, 잠시 잊고 있었던 성좌들에 대한 증오가 되살아났다. 예전이었다면, 나 역시 저 공민들과 마찬가지였을지 모른다. 코인 한두 푼에 일희일비하고, 성좌들이 원하는 이야기에 장단을 맞추고, 자신에게 환멸을 느끼면서도 ‘이건 어쩔 수 없는 일’이라며 자위하기 바빴겠지. 「김독자는 생각했다.」 어쩔 수 없는 일······. 「어쩔 수 없는 일은 없다.」 콰앙, 하고 딛은 발걸음에 뒤쪽 바닥이 푹 패였다. 나는 그 추진력을 이용해, 공민들의 틈바구니로 뛰어들었다. 그리고 마르크를 밀쳤던 공민의 멱살을 아주 강하게 틀어쥐었다. “컥, 커헉!” “이 몸뚱이 하나에 300코인.” “크윽······. 혀, 혁명가님?” “······300코인 좋지. 근데 너무 싼 값이라고 생각하지 않아?” 멱살이 잡힌 공민이 반항했지만, 나는 손을 풀어주는 대신 그의 숨통을 더 조여갔다. 이윽고 안색이 새파래진 공민이 병장기를 떨어트리자, 주변의 공민들이 작은 비명을 질렀다. 눈이 반쯤 돌아간 공민이 질식하기 직전이 되었을 무렵, 나는 그를 거칠게 바닥에 내려놓았다. 겁에 질린 눈동자들이 나를 보는 것이 느껴졌다. “한 사람당 300코인이니까······ 여기 있는 사람들 다 죽이면 대충 일만 코인 정도인가?” “으, 으으······.” “거기다 수거 노예들을 죽이면 3천 코인을 더 준다고 했으니, 다 합치면 1만 3천 코인······ 하긴, 그 정도면 무시하기 힘들지.” 1만 3천 코인. 이곳의 공민들 중 대부분은 만져본 적 없는 거금일 것이다. “······근데 너희 그건 모르지? 1만 3천 코인으로는 아무것도 바꿀 수 없어. 고작해야 어정쩡한 스킬 몇 개 사고, 어중간한 장비 몇 개 사면 동나는 코인이라고.” 공민들의 눈동자에 동요가 번졌다. 한 번도 [도깨비 보따리]를 사용해 본 적 없는 그들은 모를 것이다. 1만 3천 코인이라는 금액이, 저 드높은 성좌들에게는 얼마나 푼돈인지. 이 세계에서 그 돈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얼마나 초라한 것인지. 나는 바닥에 쓰러진 공민을 내려다보았다. “그래서, 이 다음엔 어쩌려고 했어?” “예, 예?” “사람들 다 죽이고 얻은 1만 3천 코인으로 뭐 하려고 했냐고.” 공민의 표정 위로 천천히 어떤 감정이 물들어 간다. 공포, 두려움, 그리고······. “저, 저는······.” 마치 나락으로 떨어지는 듯한 목소리로, 공민이 중얼거렸다. “아, 아무것도······.” 황망한 얼굴로 뇌까리는 공민의 얼굴을, 나는 가만히 바라보았다. 사실, 나도 알고 있었다. 이들이 무슨 뚜렷한 목적을 가지고 이런 짓을 저지른 게 아니라는 것을. 어쩌면 공민들 자신도, 스스로가 무엇을 위해 코인을 모으려 했는지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살아남기 위해 성좌들의 장단에 맞추고, 다른 화신들보다 더 많은 코인을 모아야 한다는 강박. 시나리오는, 그렇게 화신들을 이야기의 노예로 만든다. 누구도 입을 열지 않는 무거운 침묵 속에, 이내 자신이 무슨 짓을 하려 고 했는지 깨달은 공민이 끅끅 울음을 터뜨렸다. “혀, 혁명가님. 저는······.” 나는 그의 시선을 외면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무심히 말했다. “채널이 열렸으니 성좌들은 앞으로 얼마든지 들어올 거야.” 나를 보는 공민들의 눈이 제각기 다른 빛으로 떨리고 있었다. “고작 한두 푼 코인에, 자신의 이야기를 팔아 치우지 마. 꼭 팔고 싶다면 제대로 된 값을 받으라고.” 내 말이 공민들에게 얼마나 전달되었을지는 알 수 없었다. 나는 말주변이 그다지 좋은 편은 아니니까. 그럼에도 이것만이 내가 해줄 수 있는 이야기의 전부였다. 침통한 얼굴로 입술을 깨무는 이들. 그리고 뭔가를 결심한 듯 마음을 다잡는 이들. 고개를 떨어트린 공민들이 하나둘 무기를 집어넣기 시작했다. 그들 중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지만, 내겐 그 모습이 하나의 대답이었다. 하지만, 모두가 내 말에 동의한 것은 아니었다. [성좌, ‘뱀 머리 졸부’가 당신을 노려봅니다.] [성좌, ‘뱀 머리 졸부’가 당신에게 강력한 분노를 발출합니다.] [성좌, ‘뱀 머리 졸부’가 ‘현상금 시나리오’를 요청하였습니다!] 현상금 시나리오. 그래, 그런 것도 있었지. 오직 성좌들의 요청으로만 발동하는, 저 망할 시나리오가. “······혁명가님?” 놀란 공민들이 두려운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지금 시점에 ‘현상금 시나리오’가 발동한다면, 목표물이 누구일지는 뻔했다. 그때, 내 머리 위에 앉아 있던 비유가 두둥실 허공으로 떠올랐다. [바앗.] 다른 도깨비였다면 흔쾌히 ‘현상금 시나리오’를 수락했겠지만, 비유가 그런 짓을 할 턱이 없다. 요청을 거부하려는 듯, 비유가 몸을 도톰하게 부풀렸다. [······바앗?] 그런데, 비유의 작은 몸통 위로 희미한 스파크가 흐르기 시작했다. [바, 바앗. 바아아앗······!] 츠츠츠츳! 순간, 나는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깨달았다. [성좌, ‘뱀 머리 졸부’가 ‘현상금 시나리오’를 요청하였습니다!] [성좌, ‘뱀 머리 졸부’가 ‘현상금 시나리오’를 요청하였습니다!] 비유는 지금, 본능과 싸우고 있는 것이다. 「일반적인 오해와 달리, 도깨비들은 일부러 자극적인 장면을 연출하는 것이 아니다.」 채널을 구독하는 성좌의 요구에 응하고 싶은 본능. 「타고난 이야기꾼일수록 그런 본능은 더욱 강력하게 발동한다. 보다 많은 존재가 욕망하는 시나리오를 만들고 싶다는 본능. 모든 도깨비는 그런 본능으로 살아간다.」 아직 아기 도깨비인 비유는, 그런 본능을 이겨내는 것이 더욱 어렵겠지. 나는 손을 뻗어 가볍게 비유를 끌어당겼다. “괜찮아.” 츠츠츠츠츳! “이 채널의 구독좌는 ‘하나’가 아니니까.” [성좌, ‘구원의 마왕’이 ‘현상금 시나리오’의 발동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허공에서 한바탕 몰아치던 스파크가, 내 손끝에서 순식간에 흩어졌다. [‘현상금 시나리오’의 요청이 거부됩니다.] [성좌, ‘뱀 머리 졸부’가 경악합니다.] 나는 허공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뱀 대가리. 네가 원하는 ‘이야기’는 여기에 없다.” 밤하늘에 빛나는 희미한 별자리를 노려보며, 나는 무심한 목소리로 말했다. “바쁘니까 그만 꺼져라.”
🏠 인덱스 ← 이전 화 다음 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