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화

192화 전설급 설화이면서, 동시에 특별한 기능은 없는 설화. 하지만 이야기의 존재 자체로, ‘혹부리’의 관심을 끌기엔 적합한 설화. “이 설화는······?” “어때, 마음에 들지?” 혹부리는 불신 가득한 눈으로 설화의 면면을 살폈다. 마치 이런 설화가 가능할 리가 없다는 듯 떨리는 눈동자. 혹부리의 긴 손끝이 창에 닿자, 이내 설화의 내용이 재생되기 시작했다. 퍼억! 퍼억! 퍼어억! 내 주먹에 호되게 두드려 맞는 중급 도깨비 바울. 터져 나가는 도깨비의 얼굴이 죽상이 될 때마다, 혹부리의 표정에도 경악이 스쳐 갔다. 설화, ‘이야기꾼을 능멸한 자’. 이 설화를 내주더라도 전설급 이상의 설화가 다섯 개나 남기 때문에, 내 격이 위태로워질 일은 없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혹부리가 좋아할 수밖에 없는 내용이다. 도깨비 욕만 해도 좋아하는 녀석들인데, 녀석들을 두들겨 팬 설화를 좋아하지 않을 리가 없다. “큭, 큭큭······ 크하하하하핫!” 가볍게 시작된 웃음은 이내 폭소로 이어졌다. 나는 녀석이 충분히 즐길 수 있을 때까지 기다렸다. “좋다, 이걸 받도록 하지. 아주 유쾌한 설화로군.” “그럼 거래 성사인가?” “하지만 대가로는 조금 부족해. 네가 준 설화는 희소가치는 있지만 기능 가치는 거의 전무하다.” ······그렇게 나올 줄 알았지. 나는 재빨리 덧붙였다. “그럼 ‘나당 연합군’도 같이 줄게.” “······여전히 부족하다. 만약 이대로 거래를 계속하고 싶다면 거래 내용을 바꿔야 한다.” “바꿔? 어떻게?” “앞서 말했던 것처럼, 네가 부탁한 것은 두 가지다. 하나는 ‘시나리오’로 복귀하는 것, 둘은 새로운 ‘화신체’를 얻는 것.” 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물었다. “이 설화로는 둘 중 하나만 들어줄 수 있다는 얘기인가?” “맞다. 정확히는 두 번째, ‘화신체’를 얻는 일만 도와줄 수 있다.” 화신체를 얻는 일. 물론, 그것도 중요한 일이다. 하지만······. “시나리오 복귀는 왜 안 되는데? 원래 이 정도 받으면 해 줄 수 있잖아?” “뭔가 아는 것처럼 말하는군.” “······좀 들은 게 있어서.” 들었다기보다는 읽었다고 해야 맞겠지만. 언젠가 척준경이 시나리오에서 배제되었을 때, 성운 <홍익>에서 지불한 내역을 나는 기억하고 있었다. 내 눈을 지그시 바라보던 혹부리가 말했다. “흠······ 평소였다면 이 정도 대가로 넘어가 줬을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상황이 좀 특별하다.” “특별해?” “그대가 저지른 짓들 때문에, 한반도 지역의 관리국과 성운들 전부 신경이 곤두서 있다.” 대충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았다. 혹부리가 말을 이었다. “추방자를 시나리오로 돌려보내는 건 생각보다 품이 많이 드는 일이야. <스타 스트림> 전체에서 개연성이 가장 많이 소모되는 일 중 하나니까. 그런데 너도 알다시피, 개연성은 ‘이목’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지금처럼 보는 눈이 많은 상황에서는 지나치게 많은 개연성을 지불해야 한다 이건가.” “그래. 게다가 영문은 모르겠지만 관리국의 지부장 녀석이 나서는 바람에 기존의 거래 창구들이 죄다 틀어 막힌 상태다. 현재로서 지구 시나리오로 곧장 복귀할 수 있는 루트는 거의 막혔다고 보면 된다. 이보다 더 큰 대가를 받더라도 무리야.” 지구로 곧장 복귀할 수 없다니······. 생각보다 상황이 순탄치가 않았다. 혹부리가 나를 보며 물었다. “아쉬운 대로 화신체라도 받겠나? 전설급 설화라면 썩 괜찮은 화신체로 내어줄 수도 있는데. 마침 무림 쪽 차원에서 회수한 화신체들이 몇 개 있어서 말이야.” 무림 쪽 화신체라. 구미가 당기는 제안이다. 하지만 나는 고개를 내저었다. 아무리 좋은 화신체를 받아도, 시나리오로 돌아갈 수 없다면 모두 말짱 헛것이다. 화신체의 내구가 있으니 존재 붕괴는 잠시간 막을 수 있겠지만, 시나리오로 돌아가지 못한다면 여전히 붕괴는 지속된다. 혹부리 자식도 그걸 아니까 지금 이런 제안을 하는 것일 터다. 이번에 받은 화신체가 추방자 패널티에 의해 분해되고 나면, 녀석은 새로운 거래로 내 다른 설화들까지 빼앗아가려 하겠지······. 나는 더 강경하게 밀어붙이기로 했다. “나는 시나리오로 돌아가야 해. 반드시. 화신체를 얻는 것보다 그쪽이 먼저야.” “흠······ 곤란한데.” “지구가 아니라도 괜찮으니까, 다른 시나리오에 참가할 수는 없을까?” 척준경도 그런 식으로 한반도의 시나리오에서 벗어났었다. 나라고 못 하라는 법은 없지. 그러나 혹부리가 고개를 저었다. “물색한 곳이 몇 군데 있기는 한데, 그쪽은 품이 더 든다. 도피성 시나리오 이동은 보다 큰 개연성을 요구하니까.” “······진짜 어떻게 안 되겠어? 이거 탐나지 않느냐고.” 나는 일부러 설화창을 하늘하늘 흔들며 말했다. 그러자 내 주먹에 피떡이 되어 터져 나가는 중급 도깨비 바울도 함께 하늘하늘 흔들렸다. “네 생각보다도 훨씬 희소한 설화야. 세상천지에 어떤 화신이 도깨비를 두드려 패는 설화를 얻겠어?” “크흠······.” “이걸 네 혹에 담아가서, 친구들한테 자랑하는 모습을 상상해 보라고.” 혹부리는 한참이나 고뇌했다. 고뇌하고, 또 고뇌했다. [당신의 존재가 위태롭습니다.] [새로운 화신체를 획득하거나, 시나리오로 복귀하세요.] [곧 당신의 존재가 붕괴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고뇌하던 혹부리가 입을 열었다. “딱 한 군데, 네가 갈만한 곳이 있다.” “어딘데?” 순간, 혹부리의 입가에 섬뜩한 빛이 스쳐 갔다. “마계(魔界)다.” 마치 무시무시한 것을 말하는 듯한 어조였다. 내 표정을 보고 무슨 생각을 했는지, 혹부리가 씩 웃었다. “그렇게 겁먹을 필요는 없다. 마계도 사람 사는 동네니까. 게다가 마침 네 몸에는 충분한 마기가 남아있으니, 지금 그곳으로 간다고 해도 그리 눈에 띄지는 않을 거다.” “마계도 종류가 있잖아. 어디로 보내 줄 건데?” “73번 마계. 통치하는 마왕도 없는 곳이지. 오래전부터 시나리오 낙오자들이 모여드는 곳이기도 하고.” 73번 마계라. 내 기억이 맞다면, 그쪽 마계는 마침 ‘지구 시나리오’와 동선이 겹치는 시나리오 지역 중 하나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뭐······ 나쁘지 않군.” “대신, 이곳으로 보내 주는 경우 우리는 네게 화신체를 공급해줄 수 없다.” “하지만 시나리오로 복귀시켜 주긴 하는 거지?” 시나리오 지역으로 들어간다고 해서 곧장 ‘시나리오’로 복귀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나는 이미 시나리오에 실패한 존재니까. 즉, 시나리오에 진입하기 위해서는 결국 놈들의 도움을 받아야만 한다는 것. 그런데, 혹부리가 고개를 저었다. “그것도 무리다. 우리는 단지 너를 ‘73번 마계’로 이동시켜줄 뿐이다.” “뭔 개소리야?” “대신 너에게 약간의 정보를 줄 것이다. 상당한 운과 노력이 필요하겠지만, 그 정보를 이용하기에 따라서 너는 화신체도 얻고 시나리오로 복귀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왠지 손해 보는 거래 같은데.” “하지만 이게 우리가 제안할 수 있는 전부다.” 나는 잠시 고민하는 척하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으로서는 별다른 선택권이 없었다. “좋아, 그 거래 받아들일게.” 어차피 정했다면, 더이상 시간을 지체할 필요는 없다. 나는 곧장 설화창에서 설화를 꺼내 녀석에게 내밀었다. [설화 ‘이야기꾼을 능멸한 자’를 지불하였습니다.] 혹부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대가는 받았다.” 혹부리는 내게서 받은 설화를 자신의 혀 위에 놓고 꿀꺽 삼켰다. 그러자 녀석의 혹이 파랗게 빛나며 부르르 떨렸다. 만족한 듯 웃음을 지은 혹부리가, 천천히 들숨을 삼켰다. 슈우우우우우! 마치 주변의 모든 것을 빨아들일 기세로 공기를 삼키는 혹부리. 자세히 보니 공기만 삼키는 것이 아니었다. 주변 일대의 시공간 자체가, 혹부리의 들숨에 빨려들고 있었다. 수십 배로 부풀어 오른 혹부리의 배는, 일시지간에 쪼그라들며 엄청난 굉음을 토해냈다. 쿠와아아아아아! 굉음과 함께, 혹부리의 입에서 공간이 쏟아져 나왔다. 모자이크처럼 쏟아진 공간은, 길쭉한 타원형의 통로를 만들었다. 그 통로 너머엔, 이곳과는 다른 세계의 정경이 내비치고 있었다. “빨리 들어가라. 포탈이랑은 다르게 유지 시간이 무척 짧으니까.” 나는 망설이지 않고 통로 안으로 뛰어들었다. [본체가 새로운 시공간으로 전송됩니다.] 뛰어든 순간 주변의 우주가 움지럭거리는 듯했다. 무수한 유성우처럼 지나가는 별들. 나는 <스타 스트림>의 밤하늘을 비행하고 있었다. 무수한 시나리오 지역들이, 이야기의 파편이 되어 내 주변을 쏜살같이 스쳐 갔다. [<스타 스트림>이 당신의 존재를 일별합니다.] 한순간, 어떤 시선이 나를 바라보았다. [<스타 스트림>이 당신의 존재를 묵인합니다.] 그리고 이내, 그 시선은 사라졌다. 츠츠츠츳! 약간의 전류가 내 몸을 사로잡았지만, 그게 전부였다. 아마 필요한 개연성은 혹부리 측에서 지불했겠지. 짧은 우주여행이 끝나자, 이내 강력한 이야기의 중력이 나를 잡아당기는 것이 느껴졌다. [시나리오 인접 지역에 도달했습니다!] 나는 신음과 함께 흙먼지 가득한 바닥을 나뒹굴었다. 충격이 몸에 영향을 미친 것일까, 바닥과 닿은 육체의 표면이 조금씩 갈라지기 시작했다. [당신의 존재가 붕괴하고 있습니다.] [설화가 손상되고 있습니다.] [새로운 화신체가 필요합니다!] 젠장. 허겁지겁 바닥을 짚고 일어났으나, 이미 지옥은 시작되었다. “커흐흑······.” 전신의 갈라진 균열에서 활자들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제일 위험한 것은 심장 쪽이었다. [당신의 탄생 설화가 새어 나오고 있습니다.] 빨리 화신체를 구해 상처를 봉하지 않으면, 나는 이대로 설화 전체가 무너져 죽게 될 것이다. 황급히 사위를 둘러보았다. 혹부리 녀석이 화신체를 구할 수 있는 곳으로 보내 준다고 했으니, 분명 근처에 화신체를 구성할만한 게 있을 터였다. 그러나 주변을 살핀 순간, 내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졌다. “여긴······?” 거대한 쓰레기의 산이 주변에 쌓여 있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혹부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마 지금쯤 그대는 ‘73번째 마계’에 면한 ‘시나리오의 지평선’에 도착했겠지. 시나리오의 지평선. 나도 그 지명을 알고 있었다. 나처럼 ‘시나리오’로부터 배제된, 그리하여 ‘청소부’에 의해 강제로 배출된 시나리오의 폐기물들이 모이는 장소. 끼긱거리며 굴러다니는 설화 파편들을 보며 나는 외쳤다. “아니, 잠깐만! 여긴 쓰레기장이잖아!” ―그곳에서 그럭저럭 쓸 수 있는 화신체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대가 쓸만한 구성품을 구했을 때의 얘기지만. 뭐, 그걸 어떻게 구할지까지는 우리가 알 바가 아니고. “이런 시발······.” 혹부리 놈들은 처음부터 나와 공정한 거래를 할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만약 내가 죽는다면, 설화를 회수하러 다시 이곳에 오면 그만이니까. ―그대에게 지평선의 가호가 있기를 바라지. 나는 망연해진 채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심장 어림에서 후두둑 떨어지는 활자들. 이대로라면 5분도 채 지나지 않아 나는 소멸하고 말 것이다. 「그리고 잠시 후, 김독자의 표정이 변하기 시작했다.」 나는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확실하다. 어디에서도, 혹부리의 시선은 느껴지지 않는다. 「당황으로 젖었던 눈동자는 침착하게 가다듬어졌고, 바보처럼 벌리고 있던 입은 고요히 닫혔다. 이윽고 옷매무새를 가다듬은 김독자는 중얼거렸다.」 “힘들구만.” 「김 독 자 연기 잘못 한 다.」 “······눈치챘냐?” 나는 천천히 고개를 꺾으며 엉거주춤 자리에 섰다. 꽤 귀찮은 연극이었지만, 혹부리의 의심을 피하려면 어쩔 수 없었다. 「처음부터 이곳으로 오는 게 목적이었다는 것을, 결코 들켜서는 안 되었다. 이쪽이 알고 있는 정보를 최대한 숨기면서 원하는 것을 얻어내려면, 이 정도 연기는 해줘야 했으니까.」 [제4의 벽]의 수다를 들으며, 나는 주변의 폐허를 차분히 살폈다. “······제대로 오긴 한 것 같네.” [제4의 벽]의 말대로, 나는 처음부터 이곳에 올 생각이었다. 이것을 위해 성좌들 앞에서 죽음을 연기한 것이기도 했고. 나는 쓰레기 산을 짚으며, 천천히 주변을 탐색하기 시작했다. “큭, 아파······.” 하지만 송곳으로 쑤시는 듯한 심장의 통증 때문에, 제정신을 유지하는 게 쉽지만은 않았다. [당신의 탄생 설화가 붕괴하고 있습니다.] 다른 건 분명 연기였다. 하지만 이 통증마저 거짓은 아니었다. 흐릿해지려는 의식을 필사적으로 붙든 채, 나는 ‘멸살법’을 떠올렸다. 「유중혁의 111회차. 시나리오에서 추방된 유중혁이, 자신의 세력을 꾸리기 위해 도달했던 곳.」 「73번째 마계, ‘시나리오의 지평선’.」 「그 쓰레기장에서, 유중혁은 자신의 새로운 ‘몸’을 얻었다.」 하지만 아무리 훑어 보아도 새로운 화신체의 재료가 될만한 설화는 보이지 않았다. 애초에 ‘시나리오의 지평선’은 망가진 이야기들이 모이는 곳. 이런 곳에서 쓸만한 화신체를 구할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어디까지나, 보통이라면 그랬을 거라는 얘기다. “특성 효과를 발동한다.” [특성 ‘라마르크의 기린’의 효과가 발휘됩니다!] 30만 코인을 주고 구입한 진화계 특성, ‘라마르크의 기린’. 비형이 남긴 아이템 박스에 들어있던 특성이 바로 이것이었다. 드디어, 코인도 돈값을 할 때가 온 것이다. [특전 ‘진화인자(進化因子) 탐색’이 시작됩니다!] [당신이 흡수할 수 있는 설화 파편들을 탐색합니다!] 천천히 눈을 감았다 뜨자, 쓰레기장의 곳곳에서 색다른 것들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설화 파편들이 탐지되었습니다!] 하얀빛으로 반짝이는 설화의 파편들. 적어도 내게, 이곳은 더이상 ‘쓰레기장’이 아니었다. 「동료에게 뒤통수를 맞은 소드마스터의 오른팔」 「끔찍하게 뜯어 먹힌 그랜드 위저드의 전두엽」 「이계의 신격에게 찢겨 죽은 어린 골드 드래곤의 심장」 ‘멸살법’의 설정에 따르면 ‘라마르크의 기린’의 특전은 ‘부서진 설화’들을 흡수하여 육체를 재구성하는 것. “······우선은 이걸로 시작할까.” 나는 먹음직스런 붉은빛을 띤 심장 조각을 향해 천천히 손을 뻗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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