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화

191화 ‘멸살법’에는 그런 문장이 나온다. 「‘이야기의 지평선’에는 악마들이 살아간다. 마왕도, 악마종도 아니지만 ‘악마’라 불리는 존재들. 도깨비들만큼이나 이야기를 갈구하고, 이야기를 갈구하는 만큼이나 도깨비를 증오하는 존재들.」 ······그래, 그 문장. 「만약 당신이 시나리오에서 추방당했다면, 기대할 것은 오직 하나뿐이다. 그것은 바로 ‘지평선의 악마’들의 자비를 바라는 것이다.」 [제4의 벽]이 알아서 떠들어 주니, 내가 나서서 할 말이 없다. 나는 ‘지평선의 악마’를 바라보았다. 늙수그레한 인상. 얼핏 보면 부랑자를 닮은 행색이었지만, 알아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왜냐하면 모든 ‘지평선의 악마’들은 볼에 커다란 혹을 붙이고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일각에서는 이들을 ‘혹부리’라는 약칭으로 부르기도 한다. 츠츠츠츳! 허공에서 옅은 스파크가 튀더니, 혹부리가 한발을 물러났다. “······특이하군. ‘대악마의 눈’으로도 정보를 확인할 수 없다?” 그새 내 정보를 캐내려고 용을 쓴 모양인지, 혹부리의 한쪽 눈에서 노란 빛살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대악마의 눈]. 안나 크로프트도 가지고 있었던 그 눈을, 혹부리도 가지고 있었다. 당연한 일일 것이다. 안나에게 ‘대악마의 눈’의 정보를 알려준 것도 이 녀석일 테니까. 지평선의 악마는 비형 같은 머저리와는 비교할 수도 없이 위험한 녀석들이다. 조금이라도 얕잡히면 잡아먹히는 것은 이쪽이겠지. 나는 일부러 여유를 연기하며 서두를 열었다. “내 정보는 예언자도 못 읽어. 혹부리 답지 않게 정보가 늦네?” 자존심이 상한 듯, 혹부리가 인상을 찌푸렸다. “······내가 올 줄 알고 있었나?” “그래.” “어떻게?” “아마 이걸 가지러 왔겠지.” 나는 품속에 넣어 두었던 도깨비의 알을 꺼내 보였다. 혹부리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이 알에 들어있는 존재가 무엇인지 녀석도 알아본 것이다. “그 영혼은 내 것이다.” 그와 동시에, 악마의 혹이 불길하게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그 영혼은 다른 평행 차원의 내가 이쪽으로 보낸 것이다. 그 영혼의 소유권은 나에게 있어.” 녀석이 한 걸음 다가와서, 나 역시 한 걸음을 물러나며 발뺌했다. “무슨 소린지 모르겠는데?” “······명계에서 돌아왔어야 할 영혼이 어디로 갔나 했더니, 그대가 가로챈 거였군. 아직 늦지 않았으니 영혼을 반납하기 바란다.” “반납? 무슨 헛소리야? <스타 스트림>에도 분실물 취급법이 있던가?” 여전히 같은 거리에서, 혹부리는 깊은 탐욕이 배인 눈동자로 알을 노려보았다. 나도 알을 함께 내려다보았다. 이 알 속에는, 유중혁의 ‘41회차’에서 온 신유승이 들어있다. 그러니 어떤 의미에서 ‘지평선의 악마’의 말은 맞았다. 신유승을 ‘재앙’으로 둔갑시켜 이 차원으로 전송한 놈이, 바로 눈앞의 혹부리였으니까. 혹부리의 미간에 주름이 한층 짙어졌다. “말장난을 하고 싶은 거라면······.” “본인한테 직접 물어보자고. 얘도 자유의지가 있잖아.” 나는 지체하지 않고 알의 표면을 톡톡 두드리며 물었다. “유승아, 쟤가 네 주인이라는데. 어떻게 생각하니?” 파르르, 하고 가파르게 떨리는 알. “으음, 그렇구나. 쟨 아니라고?” “······이봐.” 나는 혹부리를 무시하고 다시 알에게 말을 걸었다. “그럼 넌 누구 거야?” 알은 이번에는 부르르, 하고 떨렸다. 나는 마치 알아듣기라도 한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맞아. ‘영혼’은 누구의 것도 될 수 없지. 누구도 ‘이야기’의 주인이 될 수 없는 것처럼 말이야.” 누구도 ‘이야기’의 주인이 될 수 없다. 그 말을 들은 혹부리의 표정에 날카로운 기색이 스쳐 갔다. [대악마의 눈]이 팽그르르 회전했다. 흥미롭다는 듯, 녀석의 입가에 미소가 깃들었다. “재미있군, 구원의 마왕. 지금 나와 협상해보자는 것인가?” 걸리셨구만. 나는 씩 웃으며 답했다. “맞아.” “······좋다. 이쪽에서도 너의 행적은 꽤나 관심 있게 보던 차였으니까. 하지만 협상을 하고 싶다면 먼저 그 알을 내놔라.” “혹시 협상이 뭔지 모르나? 그건 곤란해. 난 얘가 필요하거든.” “너는 그 알의 가치를 모른다.” “아니, 알아.” 알은 내게서 떠나기 싫다는 듯, 내 손에 찰싹 붙어 있었다. 나는 알을 가볍게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이 알에서 태어날 존재들은 ‘채널’을 만들 수 있으니까.” “······그게 어떤 의미인지 알고 있나?” “관리국의 권한을 벗어난 성류방송을 송출할 수 있다는 뜻이지.” 내 말에 혹부리의 혹이 희미하게 떨렸다. 당황한 녀석의 손끝이 자신의 수염으로 향하고 있었다. 나는 말을 덧붙였다. “즉 이 알은, 무수한 ‘이야기’를 만들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어. 너희가 이 알을 원하는 것도 그 때문이잖아?” 상당히 놀란 듯, 혹부리는 잠시 말이 없었다. 마치 내 의중을 떠보려는 듯한 기색이었다. 하지만 [대악마의 눈]으로도 읽을 수 없는 내 내면을, 그저 들여다본다고 알아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너는 <스타 스트림>에 반역할 셈인가?” “반역? 글쎄. 관리국이 <스타 스트림>의 전부라고 말할 수 있을까?” “어떤 일부는 때로 전체나 다름없지.” “혹부리 답지 않은 말이지만······ 뭐, 좋아. 네가 원하는 게 그런 대답이라면······.” 혹부리의 눈이 카메라 렌즈처럼 돌아가고 있었다. 녀석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았기에, 나는 일부러 밤하늘을 가리키며 혁명가처럼 말해주었다. “나는 빌어먹을 ‘도깨비’들의 세계를 부술 것이다.” 혹부리의 표정이 악마처럼 일그러졌다. 그러나 나는 그 소름끼치는 표정이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알고 있었다. 저것은, 혹부리들의 ‘미소’였다. “마음에 드는군.” 혹부리의 환심을 사는 법은 간단하다. 바로, 도깨비를 욕하면 된다. * 지평선의 악마, 즉 ‘혹부리’들에 관해 가장 널리 알려진 민담은 아마 ‘혹부리 영감’에 관한 이야기일 것이다. 누구나 어릴 적 한 번쯤 들어보았을 설화. 마음씨 착한 혹부리 영감은 도깨비 덕택에 혹을 떼고, 마음씨 나쁜 혹부리 영감은 도깨비 때문에 혹이 하나 더 붙었다는 이야기······. 나는 혹부리의 혹을 들여다보며 물었다. “그래서 그쪽은 착한 쪽이야 나쁜 쪽이야?” “인간들은 늘 그런 걸 궁금해하더군. 내가 선한 쪽이라고 해서 딱히 너희 편을 든다는 보장도 없는데.” “뭐, 혹이 있는 걸 보면 당연히 나쁜 쪽이겠지만.” “그 민담은 세계광포설화다. 늘 정확한 이야기가 계승되진 않지.” “네가 나쁜 쪽이라는 게 점점 더 확실해지네.” 혹부리의 혹이 간질에 걸린 것처럼 떨렸다. ‘멸살법’에 따르면 혹부리들의 ‘혹’은 이야기를 저장하는 창고 역할을 한다. 무수한 설화들이 저 ‘혹’ 안에서 새로운 주인이 찾아오길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시계추처럼 혹을 흔들며 시스템 창을 들여다보던 혹부리가 잠시 후 내게 말을 걸었다. “네가 부탁한 것은 총 두 가지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나는 ‘시나리오’로 돌아가는 것. 그리고 다른 하나는, 새로운 ‘화신체’를 획득하는 것.” “맞아.” 도깨비들의 채널이 닿지 않는 곳에서 활동하는 ‘혹부리’들은, <스타 스트림>의 암상인과 비슷한 역할을 한다. 그들은 대가를 받고 추방자들을 시나리오 속으로 돌려보내는가 하면, 채널에서는 구할 수 없는 독특한 물건들을 구해주기도 한다. 물론, 그 대가는 아주 비싸다. “둘 다 도와줄 수 있다.” “좋아, 그럼 도와줘.” “대가로 알을 내놔라.” “안 된다니까.” “그러면 도와줄 수 없다.” 젠장, 다시 제자리다. 아무래도 도깨비의 알에 단단히 꽂힌 모양인데. 나는 말이 나온 김에 확실히 못을 박기로 했다. “말했지만, 알은 줄 수 없어. 어차피 니들은 이거 다시 가져가도 못 써먹어. 얜 내 말만 듣거든.” “설마······ 네 설화를 먹고 자란 녀석인가?” “맞아.” “도깨비와 설화를 섞다니, 불결한 놈이었군.” “시끄럽고, 알 말고 다른 걸 줄게.” “무엇을 줄 수 있지?” “설화. 애초에 너희들이 받는 것도 그것 뿐이잖아?” <스타 스트림>에서 가치 있는 것은 오직 ‘이야기’뿐. 때문에 혹부리들이 받는 것도 오직 이 ‘이야기’뿐이다. “······아주 자신만만하군. 어떤 설화를 줄 수 있지?” “보여줄게.” 나는 내 설화 목록을 펼쳐 보였다. + <설화 목록> 왕이 없는 세계의 왕 이적에 맞서는 자 이야기꾼을 능멸한 자 재앙의 왕을 사냥한 자 이계의 신격을 살해한 자 구원의 마왕 ······. 나당 연합군 벌레 학살 + 나도 언제 이렇게 많은 설화를 모았나 싶을 정도였다. 물론 전설급 이상의 설화는 여섯 개뿐이었지만, 그래도 그게 어딘가. 겨우 열 번째 시나리오를 돌파하고 이 정도 숫자의 설화를 모은 존재는 아마 세상에 나뿐일 것이다. 실제로 혹부리도 감탄한 기색이었다. “대단한 줄은 알고 있었지만······ 정말 대단하군.” 혹부리는 명품관에 온 손님처럼 설화 하나하나를 들여다보며 감탄을 아끼지 않았다. 특히 ‘전설급’ 설화들을 볼 때 녀석의 눈은 깊은 탐심으로 번들거렸다. 혹의 색깔이 붉어진 것을 보니, 확실히 흥분하긴 한 모양이다. “알을 대체하기엔 무리가 없어 보이는군.” “당연하지.” “하나만 골라야 하나?” “일단은.” 물론 설화의 가치에 따라 다르겠지만, 당연히 이걸 다 주고 거래할 생각은 없었다. 그건 성좌위를 통째로 빼앗기는 것이나 다름없으니까. 그러자 혹부리는 망설이지 않고 설화 하나를 택했다. “이걸 가지겠다. ‘이계의 신격을 살해한 자’.” “······너무 양심이 없는 거 아냐? 내가 가진 유일한 준신화급이라고.” 준신화급 설화의 가치는 감히 코인으로 환산할 수도 없을 정도다. 지평선의 악마와의 거래가 아무리 중요하다고 해도, 힘들게 얻은 준신화급 설화를 내줄 수는 없었다. 더군다나 ‘이계의 신격을 살해한 자’는, 훗날 다른 이계의 신격을 만났을 때도 사용 가치가 있을 테니까. 자기도 과한 요구를 했다는 걸 아는지, 혹부리가 입맛을 다셨다. “그렇다면 이것도 나쁘지 않지. ‘왕이 없는 세계의 왕’.” 나는 고개를 내저었다. “그건 내 탄생 설화야. 줄 수 있을 리가 없잖아?” “그렇군. 그럼 ‘구원의 마왕’은······.” “그걸로 내가 정식 성좌위에 올랐는데, 당신 같으면 주겠어? 자칫하면 격이 강등된다고.” “······아쉬운 대로 이걸로 하지. ‘이적에 맞서는 자’를 다오.” “그건 나중에 쓸 곳이 있어서. 미안.” 어이없다는 듯 나를 바라보던 혹부리가 짜증을 냈다. “대체 무슨 설화를 주겠다는 거냐?” “이거 줄게. 나당 연합군.” 그것은 언젠가 ‘매금지존’을 비롯한 신라의 성좌들을 도와주고 받은 역사급 설화였다. 혹부리의 안색이 무참히 구겨졌다. “그런 건 줘도 안 한다.” ······그런 거라니, 너무하네. 매금지존이 들었다면 눈물을 흘릴 일이다. 신라가 당나라와 손잡고 한민족의 뒤통수를 친 위대한 설화인데. “그럼 이건 어때? ‘벌레 학살’.” “아까보단 낫지만 흔한 설화다.” “둘 다 줄게. 그리고 필요하면 다른 역사급 설화들도······.” “거래할 생각이 없는 것으로 받아들여도 되겠나?” 젠장, 역시 세상엔 비형처럼 호구만 있는 게 아니다. 그 자식은 정산 비율 10대 0도 해줬었는데. 내가 계속 망설이고 있자, 혹부리가 흐릿한 미소를 지었다. “어떻게 아직도 존재를 지탱하고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대는 시간이 충분치 않을 텐데?” 아까보다 몸의 체온이 떨어진 느낌이 들었다. [제4의 벽]이 이야기를 떠드는 간격이 조금씩 멀어지고 있었다. [당신의 본체가 붕괴하고 있습니다.] 혹부리에겐 최대한 티내고 있지 않았지만, 내 존재는 상당히 위태로운 상태였다. 당장 시나리오로 복귀하거나, 최소한 새로운 ‘화신체’를 손에 넣지 않는 한 이 붕괴는 더욱 가속화될 것이다. 「멍청한 김독자는 생각했다. 젠장, 그럼 무슨 설화를 줘야 하지?」 ······나도 답답하니까 이럴 땐 괴롭히지 마라. 「그때, 김독자의 눈에 들어온 설화가 있었다.」 눈에 들어오긴 대체 뭐가······ 어? 나는 순간적으로 멈칫했다. 그러고 보니 이 설화가 있었지. “그럼 이건 어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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