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화
178화
나는 [부러지지 않는 신념]을 꽉 쥐었다.
팽창한 근섬유 하나하나에 강대한 설화의 힘이 깃들었다. 마치 용의 피가 흐르는 것처럼 심장이 뜨겁게 달구어졌다.
[힘이 쌓일 동안 움직여라. 틈을 만들어야 한다.]
유중혁이 먼저 앞으로 나섰다.
“내가 최대한 시간을 끌겠다.”
투콰콰콰콰!
아까보다 훨씬 활발해진 촉수의 움직임에, 지상은 거의 폐허가 되어가고 있었다. 우리는 최대한 놈의 거체를 일행들로부터 떨어트리기 위해 애썼다.
“하아아압!”
웬일로 답지 않은 기합까지 내지른 유중혁이 전방을 향해 마력을 발출했다. 나는 그 틈을 타서 [꿈을 먹는 자]의 배후로 돌아갔다. 최대한 촉수를 거스르지 않고 본체를 타격할 수 있는 장소를 찾기 위해서였다. 지름만 1km가 넘는 거체여서, 어디가 약점인지를 찾는 것도 일이었다.
츠츠츠츠츳!
그동안에도 척준경의 힘은 고스란히 쌓이고 있었다.
일검식과 이검식도 충분히 강했는데, 이제까지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강대한 거력(巨力)이 오른 팔로 모여들고 있었다.
정말 이게 ‘위인급 성좌’의 힘이 맞을까 의심스러울 정도다.
[······젠장, 역시 이 육체로는 이만큼이 한계로군. 개연성의 지원을 받아도 이 정도인가.]
힘의 축적이 거의 끝났는지, 척준경이 투덜거렸다.
[기고만장하지 마라. 이 정도 힘으로도 저 촉수들을 모두 베고 본체에 타격을 줄 수 있을지는 모르니까.]
“그렇겠죠. 상대가 이계의 신격이니까요. 작전은 있으십니까?”
나는 조금 기대하며 물었다. 그토록 자신 있게 호언했으니, 척준경에게 대책이 있을 거라 생각했다.
잠시 생각하던 척준경이 대답했다.
[일단 삼검식을 먹여 보고, 놈이 제풀에 지쳐 돌아가길 바라는 수밖에 없겠지.]
“······절 지켜주신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넌 지켜준다. 내 이름을 걸고 약속했으니까.]
“한반도 최강의 무장이 천운에 기대고 있는 상황인데요?”
기이이이잉!
순간 [부러지지 않는 신념]의 마력이 폭발적으로 샘솟아서, 나는 움찔 놀라고 말았다. 화가 난 건가?
그러나 척준경의 기세는 평온했다.
[나는 ‘지평선의 악마’와 알고 있다.]
지평선의 악마.
그 이름에 나는 혈전을 벌이는 유중혁 쪽을 흘끗 살폈다.
아무래도 녀석은 이쪽 대화를 들을 여유가 없는 듯했다.
척준경이 계속해서 말했다.
[녀석에게 부탁해서 너를 다른 세계로 보내 주마. 9번 시나리오는 구역 이탈 제한이나 시간제한이 없으니, 거기로 피신하면 한동안은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 후는 네가 알아서 해야겠지만.]
“대체 어떤 악마이기에 그런 힘을 가진 겁니까?”
[악마라기보다는······ 신격에 가까운 놈이지. 자세한 건 알 필요 없다. 너는 놈과 만나지 않기를 기도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설마 척준경이 ‘지평선의 악마’와 아는 사이일 줄이야······.
모른 척 듣고 있었지만, 나도 그 이름을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지평선의 악마’는 41회차의 신유승을 이곳으로 보낸 장본인이자, 도깨비들에게 ‘재앙’을 공급한 유통책이니까.
척준경이 대체 어떻게 그 악마와 알고 있을까 생각해 보았는데, 아무래도 척준경이 시나리오에서 유배되었을 때 도움을 준 존재가 그 녀석이 아닐까 싶었다.
“혹시 다른 사람들도 그런 식으로 피신시켜주실 수 있습니까?”
[그렇게 많은 개연성은 허락되지 않는다. 그리고 도깨비 놈들이 그걸 허락할 리도 만무하고.]
“하지만 그렇게 되면······ 이곳에 남은 사람들은 모두 죽습니다.”
내가 이 세계에서 달아나면, 이곳의 사람들은 모두 [꿈을 먹는자]에게 삼켜져 설화를 빨리는 이야기 기계가 되고 말 것이다. 척준경이 혀를 찼다.
[거기까진 내가 알 바 아니지. 다른 놈들 걱정하지 말고 네 목숨이나 잘 챙겨라. 어차피 인생은 혼자다.]
역시 척준경. 배신을 밥 먹듯이 당하며 살아온 인생이라 인생 철학도 몹시 염세적이다.
쿠구구구구!
[빈틈이다! 달려라!]
나는 [전인화]의 속도를 최대치로 발휘하며 공간을 격하고 날았다.
도중에 두어 개의 촉수를 지나쳤지만, 여전히 대여섯 개의 촉수가 촘촘하게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이보다 가까이 접근하는 것은 위험했다.
결착을 지을 장소는 여기였다.
“고려제일검. 제게 생각이 있습니다.”
[생각? 무슨 생각? 헛소리 말고 집중해라!]
“솔직히 삼검식으로 놈을 죽이는 게 무리라는 거. 당신도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휘이익!
스쳐간 촉수에 바로 아래쪽의 지반이 통째로 가라앉았다.
아무리 척준경의 가호가 있다 해도 저런 걸 그대로 맞으면 분명 즉사다.
그런데 촉수가 날 죽이기 전에 척준경의 기세가 날 죽일 판이었다.
내 격을 짓누르는 척준경의 힘에 나는 반발하듯 외쳤다.
“도발하려 던진 말이 아닙니다. 현실적으로 생각해 보자는 겁니다!”
내 말에, 척준경이 일순 기세를 늦추었다.
[······그래서? 네놈에겐 무슨 방법이 있다는 거냐?]
“있습니다. 당신이 도와주기만 한다면, 이계의 신격을 죽일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척준경이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이계의 신격을 죽인다? 지금 네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 지 아는 거냐? 놈은 이계의 신격이다. 빌어먹을 <올림포스>나, <베다>의 얼간이들도 꺼리는 놈이란 말이다.]
“다른 신격이었다면 저도 이렇게 말하지 않았을 겁니다. 하지만 [꿈을 먹는 자]라면······ 가능할지도 모릅니다.”
[······들어나 보지. 그 잘난 방법이 무엇인지.]
“어떻게든 놈의 진체에 상처를 입히고, 그 안에 저를 던져 넣으십시오.”
척준경은 당황한 듯, 일순 말이 없었다.
거대 촉수가 다시 한번 날아오고 있었다.
[그런 짓을 하면 너는 죽는다. 그건 놈에게 통째로 먹히는 짓이다. 아까 저 잘생긴 놈의 이야기를 못 들은 것이냐? 놈에게 먹히게 되면―]
“저는 살아남을 겁니다.”
내가 듣기에도 당찬 확신이었다.
저 이계의 신격에게 먹히고서 생존을 확신하다니, 필멸자는 물론이거니와 어떤 성좌라도, 그런 확신은 할 수 없다. 척준경은 몹시 격앙된 것처럼 기세를 부르르 떨더니, 입을 열었다.
[······뭔가 수가 있는 것이냐?]
“백 퍼센트라고 말씀드릴 수는 없지만요.”
물론 척준경의 도움으로 ‘지평선의 악마’의 도움을 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 혼자 살아남아 봤자, 내게 남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도피는 지금까지 내가 쌓아온 모든 것을 부정하는 일일 뿐이니까.
그러니, 내가 선택할 방법은 이것뿐이다.
[크흐······.]
꼭 침음처럼 들렸던 척준경의 외마디는, 이내 거대한 웃음으로 변했다. 마치 이 평원을 다 메울 듯한 웃음소리였다.
[오래 살고 볼 일이구나. 너 같은 놈의 말을 믿고 저 신격에 대항하는 날이 오다니.]
쿠구구구구!
마침내, [꿈을 먹는 자]의 상반신 소환이 시작되기 시작했다.
번뜩!
세계를 주시하는 첫 번째 눈이 드러났다.
주변을 볼 수 있게 된 [꿈을 먹는 자]의 시선이 지상에 내리꽂히자, 지금껏 받았던 그 어떤 시선보다도 전율적인 감각이 차올랐다.
저것과 싸우면 반드시 죽는다.
내가 무엇을 어떻게 해도, 저것을 이길 수는 없다. 척준경이 말했다.
[멍청한 성좌야.]
“예.”
[나는 네놈이 마음에 든다. 그러니 죽지 마라.]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달렸다. 촉수의 산을 넘고, 하늘 높은 곳까지 치솟아 올랐다.
츠츠츠츠츳!
[전인화]를 발출하는 내 신형이 지나갈 때마다 밤하늘에 시리도록 푸른 빛의 선이 남았다.
[오라, 이계의 신격이여!]
척준경이 내 손으로 검을 쥐었다. 척준경의 모든 설화가 집약된, 삼검식의 마지막 초식이 발현되고 있었다.
[나 척준경이, 네놈을 베겠다!]
에테르 블레이드가 길어지고 있었다.
십 미터 길이였던 칼날이 이십 미터로.
이십 미터였던 칼날이 삼십 미터로.
내 마력의 역량을 초월해버린 그 힘이, 이야기를 넘어 이곳에 강림하고 있었다.
제 삼식, 삼검참해(三劍斬海).
검을 긋는 순간 나는 알았다.
이것은······.
머릿속에서, 바다 앞에 선 척준경의 모습이 떠올랐다. 동이 틀 무렵부터 황혼이 질 때까지, 종일 바다를 바라보던 척준경.
그 바다를 생각하고, 전체를 헤아리고, 그 아득한 수평선이 마침내 하나의 ‘대상’으로 보일 때까지 궁구했던 그 모든 시간들.
하나의 선이 시공간의 균형을 일그러뜨리며 그어졌다. 파도가 갈라지며, 드넓게 퍼진 거해의 파랑이 쪼개지는 듯한 환영이 보였다.
이것은, 바다를 상대하기 위해 만들어진 검이다.
[성좌, ‘해상전신’이 ‘고려제일검’의 힘에 감탄합니다!]
[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인간 성좌의 힘에 순수하게 경탄합니다!]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고려제일검’에게 큰 흥미를 갖습니다!]
공기를 폭발시키며 직진한 검은 어느 순간 소리마저 삼켜버렸다.
나는 전신이 통째로 믹서기에 갈리는 듯한 통증 속에서, 검을 휘둘렀다.
일검, 이검, 삼검.
그렇게 세 번의 검을 휘두르고 나자, 의식의 퓨즈가 통째로 끊어졌다.
정말, 잠깐이었다.
[······려라!]
그리고 척준경이 나를 불렀다.
[정신 차려라! 멍청한 성좌야!]
숨을 컥컥대며 간신히 눈을 떴을 때, 허공 위에 넘실대는 몇 가닥의 촉수 무리가 보였다. 그러나 촉수들은 더이상 내가 기억하던 모습이 아니었다.
열두 개의 촉수 중 무려 일곱 개가, 넝마가 된 채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위인급 성좌 척준경.
그는 단신의 힘만으로 신격의 촉수들 중 절반을 잘라낸 것이다.
그럼에도 척준경은 분하다는 듯 이를 갈았다.
[······힘이 부족해서 깊은 상처는 내지 못했다. 바다를 베는 검으로도 놈을 벨 수는 없었구나.]
“아뇨, 충분합니다. 충분히 성공했어요.”
척준경은 성공했다. 왜냐하면, 잘려나간 촉수들의 너머에, 가로로 그어진 거대한 상흔이 보였기 때문이다. 척준경의 삼검식은, 촉수의 바다를 베어내고 놈의 본체에 상처를 입혔다.
놈의 크기에 비하면 작은 상처였지만, 나 하나가 들어가기엔 충분한 넓이였다.
고통스러운 울음이 [꿈을 먹는 자]에게서 터져 나왔다.
그아아아아아아아!
저곳으로 달려가야 한다.
바로 지금.
놈의 상처가 아물기 전에, 녀석의 상처 속을 비집고 들어가야 한다.
그래야 이 시나리오를 마무리할 수 있다.
[성운 <베다>의 성좌들이 당신의 역경에 조소를 흘립니다.]
그래야만, 저 빌어먹을 성운들에게 한 방을 먹여줄 수 있다.
그런데.
[성운 <파피루스>의 성좌들이 당신의 시나리오를 보며 축배를 듭니다.]
다리가 움직이지 않았다.
아무리 힘을 줘도 꿈쩍도 하지 않는 다리.
아니, 힘이 들어가는지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무슨······.
[성좌, ‘가장 어두운 봄의 여왕’이 애석한 눈으로 당신을 바라봅니다.]
아래를 내려다보고서야, 나는 내가 어떤 상태인지 깨달았다.
무릎 아래로, 다리가 보이지 않았다.
프레셔에 압착된 듯 깨끗하게 사라진 다리. 절단면에서는 끊임없이 피가 흘러나왔다. 아마 삼검식을 쓰며 촉수에 깔려버린 모양이었다.
빌어먹을.
거의 다 와서, 이런 상황이라니.
그 와중에 [전인화] 마저 사용시간이 끝났다.
멀리서 신격의 상처가 조금씩 수복되는 것이 보였다.
무릎을 잃은 상태로는 도저히 도약할 수는 없는 거리였다.
“김독자.”
고개를 돌리자, 온몸이 피투성이가 된 유중혁이 그곳에 있었다.
비틀거리며 다가온 유중혁은 조용히 내 멱살을 붙든 채 일으켜 세우더니, 그대로 자신의 어깨에 나를 들쳐멨다.
유중혁이 신격의 상처를 보며 물었다.
“저기에 던지면 되는 거겠지?”
“······할 수 있겠냐?”
유중혁은 대답하지 않았다.
단지, 행동으로 모든 것을 보여줄 뿐이었다.
유중혁은 허공을 계단처럼 올랐다.
날아드는 촉수들을 밟고, 때로는 [허공답보]로 자신의 마력장을 밟으면서. 유중혁의 몸에서도 조금씩 삐걱대는 소리가 들렸다. 녀석의 육체도 이미 한계였다. 하지만 유중혁은 포기할 기세가 아니었다.
오르고, 또 오르고.
얼마 지나지 않아 까마득한 상공의 바람이 내 볼을 적셨다.
허공의 마력장을 디딘 유중혁이 멈춰 섰다.
고개를 들어 전방을 살피자, 신격의 상처가 보였다.
그러나 시간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유중혁은 망설였다.
놈은 내 멱살을 꽉 쥔 채 머뭇거렸다.
“······또 장례를 치러야 하는 건 아니겠지?”
유중혁답지 않은 질문이어서 나는 피식 웃고 말았다.
“죽어도 다시 살아나 인마.”
“그런 얘기가 아니다.”
유중혁의 표정은 진지했다.
고도의 바람이 나와 유중혁 사이를 날카롭게 베고 지나갔다.
나는 잠시 녀석을 바라보다가 물었다.
“두 번째 시나리오, 기억하냐?”
옥수역의 지하철.
걸리적거리는 것을 죄다 때려 부수며 나타났던 유중혁의 모습.
결과를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냉혈한 회귀자.
그 침착하던 유중혁의 눈빛이 흔들리고 있었다.
그때만 해도 누가 알았을까.
나와 이 녀석이, 동료가 될 거라고.
그동안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이젠 인정해야겠다.
도저히 있을 것 같지 않던 일은 현실이 되었고.
나는 실제로 놈과 함께 시나리오를 헤쳐가고 있었다.
그러니 이제, 나는 말할 수 있다.
마치, 놈을 처음 만났을 때 한강 다리 위에서 그랬듯이.
씩 웃으며, 우리에게 가장 어울리는 방식으로.
“그만 이 손 놓고 꺼져. 이 빌어먹을 새끼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