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2화

172화 내 말에, 어머니는 잠시 침묵했다. 그 침묵은 나를 조금은 들뜨게 만들었다. 그 ‘어머니’가 내가 자기를 사랑하기를 기대했다는 사실, 그리고 내가 그 마음에 상처를 입힐 수 있다는 생각이 나를 들뜨게 했다. 그러나 이어진 어머니의 말은, 마치 그럴 줄 알았다는 말투였다. “흐음, 역시 그렇구나.” “······.” “그래도 시험해 보고 싶었어. 그걸로 네 운명이 끝날 수도 있으니까. 어차피 남은 목숨은 많았잖니.” “날 위하는 것처럼 말하지 마세요.” “너를 사랑한단다.” 그 말에 전신에 소름이 돋았다. 왜 이제와서 갑자기 그런 말을 하는 걸까. “무슨 의미죠?” “난 너의 엄마잖니.” 미소짓는 어머니를 보며, 심장 한쪽 구석이 아려왔다. 정말로 그런 말이 용납될 수 있다고 믿는 걸까. 당신 때문에 홀로 고통에 몸부림쳤던 십수 년의 시간을, 그 한 마디로 부정할 수 있다고 믿는 걸까. 나는 가만히 어머니를 노려보았다. 어머니가, 나를, 사랑한다. 차마 [거짓 간파]를 사용할 수 없었다. 세상엔 때로 그런 말들이 있다. 그것이 진실이어도, 거짓이어도 너무 아픈 말이. 나는 한숨처럼 말했다. “너무 늦었어요.” “안단다.” “그런데 왜······.” “한 번쯤 말하고 싶었다. 한 번도 해준 적이 없는 것 같아서.” 우리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침묵을 헤아렸다. 오직 고요한 벽걸이 시계의 초침 소리만이, 지금 이 순간이 지나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마치, 아무것도 적히지 않은 페이지가 넘어가듯이. 나는 간신히 첫 문장을 쥐어짜내는 작가처럼 입을 열었다. “······감옥에서의 생활은 어땠어요?” “자주 보러 와줬잖아. 말 안해도······.” “아무 말도 안 해줬잖아요.” “······.” “왜 아무 말도 안 했던 거예요? 그렇게나 많이 보러 갔었는데······.” 처음부터 어머니를 미워했던 것은 아니다. 어머니가 아버지를 죽였을 때도. 그 대가로 감옥에 갔을 때도. 득달같이 달려든 친척들이 가산을 털어가고, 팔다 남은 떨이 상품처럼 친척 집에 떠맡겨졌을 때도. 나는 어머니를 미워하거나, 원망하지 않았다.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뻔뻔할 수 있죠?” 내가 어머니를 원망하게 된 원인은 간단하다. “대체 왜 나한테 침묵한 거예요? 그리고 왜······ 그런 이야기를 쓴 거예요?”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결국 그 책을 팔아서, 인세로 부자가 되었을 테니 좋은 거 아니냐고. 엄마가 받은 인세가 내 생활에 보탬이 되었는지 어떤지는 잘 모르겠다. 친척들은 언제나 나를 없는 사람이나 마찬가지로 취급했으니까. “난 정말 힘들었어요. 학교를 가든, 거리를 가든, 누굴 만나든 세상 모두가 내 이야기를 하는 것만 같았으니까. 이사를 가도, 학교를 옮겨도 마찬가지였어요. 언제나 나는 ‘살인자의 아들’이었으니까.” 당해본 적이 없는 사람은 모른다. 이 세상의 집요함이라는 것을. 기자들이 집 앞을 서성이고, 세상의 모든 시선들이 나를 쫓아다니는 기분을. “그래도 어쩌면, 거기까지도 견딜 수 있었어요.” 어머니가 내게 한 마디라도 해줬더라면, 괜찮았을지도 모른다. 조금만 참으라고, 견딜 수 있다고 말해줬다면. 설령 내 이야기를 돈에 팔았다고 해도, 어머니가 내 편이라는 사실만 알려줬다면. [‘제4의 벽’이 격렬하게 흔들립니다.] [성흔, ‘자기합리화 Lv.2’가 발동합니다!] 나는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나는 오해한 게 없다. 어머니는, 나와 자신의 삶을 팔아 많은 돈을 벌었다. 그런 어머니가 입을 열었다. “나는 알리고 싶었다.” “뭘요?” “진실을.” “······무슨 진실? 엄마가 아버지를 죽였다는 거? ” “그런 이야기가 아니란 걸 알고 있잖니.” “알죠. 아주 잘. 당신과 헤어진 후 나는 수도 없이 내 기억을 다시 읽었으니까.” 다시 읽기. 내가 소설의 등장인물에게 잘 몰입하게 된 것은, 어쩌면 모두 어머니 덕분인지도 모른다. ―독자야. 지금부터 모든 걸 ‘다시 읽을’거란다. ―아버지는, 죽을 만한 잘못을 한 거야. ―이건 정당방위였던 거야. 알겠지? 수백, 수천, 아니 수만 번도 더 다시 읽었던 기억. 아니, 너무 많이 재생해서 그것이 사실이었는지도 알 수 없는 기억. “아버지는 충분히 죽을 만한 사람이었어요. 상습적인 가정 폭력범에 도박 중독자. 그대로 그 사람을 계속 뒀다면, 어차피 우리 가정은 위험해졌겠죠.” 잠시 나를 바라보던 어머니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잘 기억하고 있구나. 그런데 왜 화가 난 거니?” 나는 몇 번이나, 어머니에게 물어보려 했다. 왜 날 데리고 도망가지 않았는지. 왜, 어린 날 혼자 남겨둔 건지. 왜, 출소 후 나를 보러 오지 않은 것인지. 그러나 그 질문들이 내 안에 쌓여갈수록, 나는 스스로 답을 얻어갔다. [‘제4의 벽’의 흔들림이 잦아듭니다.] 그것은 두려움이 만들어 낸 답. 답란을 지워버린 답이었다. 어쩌면 그 답란에 답이 주어졌을 때, 내가 그 답을 납득하지 못할까 두려웠기 때문에. 그 사이 어머니는 몇 번이나 무슨 말을 하려는 듯 입을 열었다 닫았다를 반복하더니 간신히 입을 열었다. “······그걸 말하기에도 너무 늦은 것 같구나.” 그래, 그럴 줄 알았다. [상당수의 성좌들이 당신의 가정사에 5000코인을 후원합니다.] 빌어먹을 신파는 여기까지면 충분하다.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당신의 고구마에 목이 타들어 갑니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이 심판자’가 당신에게 다시 한 번 생각할 것을 권합니다.] [성좌, ‘자신의 눈을 찌른자’가 음험한 미소를 짓습니다.] 애초에 우리 모자에게 그런 건 어울리지 않으니까. “너는 왜 자꾸 원작을 바꾸고 있는 거니?” 어머니는 능청스럽게 화제를 돌렸다. “흐름대로 흘러가도록 내버려뒀다면, 죽을 인물이 죽도록 내버려뒀다면, 시나리오는 이렇게 어려워지지 않았을 거다.” “바꿔야만 했으니까요. 엄마도 알다시피 3회차의 유중혁은 결말까지 갈 수 없으니까.” [다수의 성좌들이 필터링에 답답해합니다.] 역시 원작에 대한 이야기는 성좌들에게 필터링이 되는 모양이었다. “결말?” “그래요. 결말.” “······고작 그런 걸 위해서 이런 고생을 하는 거니? 제정신이 아니구나.” “내게 이 이야기의 결말은 중요해요. 당신이 없는 동안, 나를 지켜준 건 이 세계였으니까.” 어머니도, 아버지도 없는 내가 남은 십수 년을 살아올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이 소설 덕분이었다. “어차피 말해도 이해할 수 없을 거예요.” 『멸망한 세계에서 살아남는 세 가지 방법』. 작가가 무슨 의도로 그런 제목을 지었는지는 모른다. 다만, 내게 그 제목은 비유가 아닌 현실이었다. 왜냐하면 내게 이 세계는 오래전부터 ‘멸망한 세계’나 다름없었으니까. 이 소설을 매일 읽었기에 나는 살아남았다. 그렇기에, 나는 이 이야기를 포기할 수 없다. “이건 이제 소설이 아니야. ‘그리고 모두가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같은 결말은 현실에 없다.” “그건 끝까지 가봐야 알겠죠. 그리고 내가 언제 그런 결말을 원한다고 했어요?” “그만두거라. 이 세계는 미쳤다. 네가 미래를 안다고 해서, 발버둥친다고 해서, 어떻게 할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니야. 너도 알고 있지 않니? 당장 다음 시나리오만해도―” “그만.” 더 이상의 설왕설래는 하나마나였다. “그냥 원하는 걸 말씀하세요. 왜 날 부른 거죠?” “여기에 남아라.” 그래, 그 말을 할 줄 알았다. 어머니라면, 당연히 그럴 것 같았다. “······왜 그런 짓을 하겠다는 거죠?” “또 하나뿐인 아들을 잃을 수는 없거든. 다음 시나리오는, 내가 어떻게든 해주마.” “집어 치우세요.” 고오오오오! 나는 기파를 끌어 올리며 말했다. “솔직히 말하세요. 그냥 내가 방해가 되는 것 뿐이잖아요. 당신 목적이 뭔진 모르겠지만, 뭐 물어보나 마나겠죠.” 처음으로, 어머니의 표정에 낯선 감정이 스쳐갔다. 마치, 슬퍼보이는 얼굴이었다. 슬퍼? 당신이, 무슨 자격으로? “······정말 누굴 닮았는지.” 어머니의 몸에서도 마력 파장이 넘실거리기 시작했다. “이건 내가 싫어하는 방법이지만, 지금은 어쩔 수가 없겠구나.” 쿠구구구구구! [일부 성좌들이 이 막장 집안 싸움을 좋아합니다.] [효(孝)를 중시하는 일부 성좌들이 이 상황을 싫어합니다.] 집안의 가구들이 마력 폭풍에 휩쓸려 날아다니기 시작하자, 뭔가를 눈치 챈 한수영이 곧바로 현관을 박차고 뛰어들었다. “김독자!” 한수영의 뒤로 전우치의 화신인 조영란도 날아왔다. 거실은 순식간에 대치 국면으로 바뀌었다. 조영란이 도술을 준비했고, 어머니는 그저 고요한 눈으로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전우치의 도술은 까다롭지만 알고만 있다면 어떻게든 방비할 수 있다. 문제는 어머니 쪽이다. 나는 어머니의 ‘배후성’이 뭔지, 아직 알지 못한다. 그러니, 승부처는 어머니의 능력이 발현되기 직전인 지금이다. [전용 스킬, ‘책갈피’를 발동합니다!] “4번 책갈피, ‘리카온 이스파랑’을 선택한다.” [전용 스킬, ‘바람의 길 Lv.10(+1)’이 활성화됩니다!] 극한에 도달한 [바람의 길]이 활성화 되며, 거실 전체가 마력의 폭풍 속에 휘말렸다. 쿠구구구구! 혼잡해진 시야 속에서, 나는 응축된 바람을 폭파시켜 거실 전체를 붕괴시켰다. 그리고 곧장 한수영과 함께 끔찍한 집안을 탈출했다. 자욱한 연기가 시야를 가린 사이, 나는 한수영에게 말했다. “바로 끝낼 거야, 준비해.” “알겠어.” 한수영도 손에서 강력한 [흑염]을 만들어 내기 시작했다. 나는 곧장 책갈피를 갈아 끼웠다. “5번 책갈피, ‘키리오스 로드그라임’을 선택한다.” [바람의 길]에 이은 [소형화]와 [전인화]의 콤보. 내가 가진 최대의 기술을 쏟아부어 어머니를 제압하는 것만이, 가장 빠르고 효율적인 길이었다. 그런데 스킬을 사용하려는 순간, 흙먼지를 뚫고 수십 명의 인파가 날아올랐다. 그들은 나를 포위한 채 간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너는 모든 것을 오해하고 있어. 부탁한다. 너는 이곳에 남아야 해.” 어머니의 수하들이었다. 수감복을 입은 수십의 여인들이, 동정 섞인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다. 놀란 한수영이 외쳤다. “뭐야 이것들은!” 놀란 한수영이 그들을 향해 흑염을 쏟아냈으나, 흑염은 전우치의 기문진에 의해 사방팔방으로 흩어졌다. 조영란이 외쳤다. “김독자! 그만둬! 수경 씨는 너를 위해······!” 그들의 입을 막은 것은 어머니였다. 아무 말도 하지 말라는 듯, 조용히 입가에 손가락을 가져다 댄 어머니의 몸 전체에서 웅장한 아우라가 솟아나기 시작했다. 츠츠츠츠츳! 과도한 개연성의 사용으로 인한 스파크. 지금까지 본 적 없는 강렬한 동조율이었다. 어머니는, 명백하게 무리하고 있었다. [화신 ‘이수경’의 배후성이 자신의 수식언을 드러냅니다.] [성좌, ‘시조의 어머니’가 당신을 보며 깊은 슬픔을 느낍니다.] 시조의 어머니? 맙소사. 설마? [성좌, ‘시조의 어머니’가 당신의 힘은 한반도 시나리오에 위협이 된다고 말합니다.] [성좌, ‘시조의 어머니’가 당신이 반항하지 않는다면 목숨을 앗아가지 않을 것이라 조언합니다.] 나는 급한 마음에 [소형화]와 [전인화]를 동시에 사용했다. [오래된 땅의 정기가 당신의 스킬 사용을 봉인합니다.] 그런데 그 순간, 마치 깜깜한 동굴에 들어온 것처럼 시야가 어둑해졌다. 전신에서 힘이 빠져 나가며, 마치 평범한 인간. 혹은 작은 짐승이 되어버린 것 같은 무력감이 나를 사로잡았다. [오래된 땅의 정기가 당신의 격을 봉인합니다.] 나는 이 성흔을 알고 있었다. 오직 한반도에서만 사용 가능한 ‘설화’를 이용한 봉인. “······설마 이런 수를 쓸 줄이야.” 그래······ 생각해 보면 이상한 일이었다. 이곳은 한반도다. 그런데, 아직 내게 접촉하지 않은 성운이 하나 있었다. 가장 먼저 접촉해야 했음에도, 아직까지 다가오지 않은 성운이. “말했잖니, 너를 사랑한다고.” 손에 쥐어진 청동방울을 흔들며, 어머니가 웃었다. 시조의 어머니. 한반도의 성운인 <홍익>의 고위 신격들 중 하나이자, 이 땅에서 가장 잘 알려진 설화의 주인공 중 하나. 내 어머니의 배후성은, 단군왕검의 어머니인 웅녀(熊女)였다. 나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좋아요. 항복하죠.” “뭐? 야! 김독자!” “가만있어. 어차피 지금은 못 이겨.” 전신에 몰아치는 탈력감. 지금 나는 능력치만 높은 일반인이나 다름없는 상태였다. “······배후성은 그렇다 치고, 대체 어떻게 [팔주령]을 손에 넣었죠?” 나는 어머니의 손에 쥐어진 청동 방울을 바라보았다. 단군 신화의 천부삼인(天符三印) 중 하나인 팔주령(八珠鈴). 그것은 설화의 힘을 빌어 상대방의 능력을 봉하는 한반도 최고의 성유물 중 하나였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 시점에 정상적인 방법으로 저 성유물을 얻을 방법은 떠오르지 않는다. 분명 어머니는, 그만한 대가를 치른 것이다. “때가 되면 풀어줄 테니, 잠자코 여기에 있어.” 슈우우우! 그 말을 마지막으로, 어머니와 방랑자들이 기문진 안에서 사라졌다. 한수영과 나는 졸지에 기문진법 속에 갇혔다. 어머니가 어디로 갔을 지는 예상할 수 있었다. 아마, 유중혁과 만나러 갔을 것이다. 그 둘이 만나면 무슨 파국이 벌어질지는 상상하기도 싫었다. “제기랄, 이제 어떡해? 여기서 어떻게 나가지?” 어떻게든 기문진법을 부수려고 발악하던 한수영이 물었다. 성좌의 격에 스킬까지 봉인 당했으니, 당장 뾰족한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어디까지나 자력으로는 그렇다는 뜻이다. 나는 곰곰히 생각하다가 말했다. “방법이 하나 있긴 해.” “뭔데?” “힘으로 기문진법을 깰 수 있는 존재가 있어.” “뭐? 누구?” 그 자를 부른다면, 봉인도 어떻게든 될 것이다. 본래는 내가 감히 부를 수 없는 성좌지만, 지금이라면 또 모르지. 나는 곧장 [간평의]를 꺼냈다. 중요한 때를 대비해 아껴뒀지만, 지금 믿을 건 이것 뿐이다. [‘간평의’의 특수 옵션, ‘별의 메아리’를 발동합니다.] [‘별의 메아리’를 통해 당신은 위인급 성좌의 도움을 청할 수 있습니다.] “성좌를 호명하겠다.” [별들의 흐름 속에 위인급 성좌들이 당신의 목소리를 듣습니다.] 나는 성좌의 수식언을 불렀다. [해당 성좌는 지나치게 격이 높습니다.] [해당 성좌가 천반의 별자리를 5개 요구합니다. 이에 응하시겠습니까?] 마지막 북두성군을 부를 때 하나, 민족의 독립운동가를 부를 때 하나를 사용했기 때문에 간평의의 남은 별자리는 다섯 개 뿐이었다. 그런데 이 성좌는 지금, 간평의의 남은 모든 별자리를 요구하는 것이다. 그럴 법도 하지. 이 자의 힘은 이미 위인급을 넘어섰으니까. [별들의 운항이 시작됩니다.] 깊은 밤하늘의 어둠 속에서, 외따로 떨어진 고독한 별이 반짝였다. 나는 그를 향해 입을 열었다. “고려제일검, 당신의 힘이 필요합니다.”
🏠 인덱스 ← 이전 화 다음 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