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1화

171화 “김독자 개자식······ 또 나를 잊었어.” 허허로운 평원 위에, 고고히 서 있는 작은 성채가 있었다. 사실, 성채라기보다 작은 전원주택에 가까운 크기였지만, 그럼에도 분명 [성채]라 불리기에 부족함이 없는 무장을 갖춘 수성탑. 말할 필요도 없이, 공필두의 [무장성채]였다. 두두두두두두! 공필두는 성채로 다가오는 괴수들을 향해 포탄을 내갈겼다. 암흑성에 들어온 후 몇 주간, 공필두는 지옥 같은 괴수 지대에서 삶을 연명하고 있었다. 시도 때도 없이 몰려오는 괴수들. 그나마도 김독자가 전에 지원해줬던 코인이 없었더라면 진즉에 마력이 고갈되어 말라 죽었을 판이었다. [성좌, ‘디펜스 마스터’가 디펜스 게임에 흥분합니다.] 이 변태 같은 성좌를 배후성으로 두지만 않았더라도, 상황이 이렇게까지 되진 않았을 것이다. “시바아아아알!” 괴수들을 마구잡이로 학살한 결과 암흑성 랭킹은 부쩍 올라갔지만, 문제는 이제 정신력도 마력도 한계치에 달했다는 것이었다. “여기까진가······.” 괴수의 발톱에 부서지는 무장성채의 외벽을 보며, 공필두가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그때, 멀리서 금빛의 참격이 날아왔다. 쿠구구구구! 벌판을 통째로 갈라버리는 강력한 에테르의 폭풍. 설마 김독자인가 싶어 눈을 부릅 떴는데, 그곳에 있는 남자는 예상 밖의 존재였다. “······유중혁?” 그 폭풍 속을 뚫고 날아오는 거대한 용. 그 위에, 공필두가 아는 사람들이 올라타 있었다. 공필두의 몸에서 힘이 빠지고, 성채가 무너져 내렸다. 섬광처럼 달려간 유중혁이 쓰러지는 공필두를 들쳐 업었다. ‘초월좌의 힘을 너무 남용했다. 당분간은 힘을 보존해야해.’ 유중혁은 황금빛 참격을 날린 오른팔을 휘휘 돌리며 생각했다. 칼을 쥐었던 손등이 붉게 부어 있었다. 츠츠츠츳. 배후성을 이용한 힘이 아님에도, 초월좌의 힘은 개연성의 영향을 받는다. 그 제한이 조금씩 해제됨에 따라서 상황은 나아지겠지만, 9번 시나리오에서 허락된 개연성은 초월좌의 힘을 충분히 활용하기엔 부족했다. ‘이걸로 공필두까지 회수했다. 이설화는 서쪽 벌판에서 착실하게 랭킹을 올리고 있을 테고······.’ 착실하게 진행되는 계획. 지금껏 있었던 어떤 시나리오보다도 상황은 순조로웠다. ‘이제 남은 건 김독자뿐인가.’ 그 생각을 하며 유중혁은 북쪽 벌판을 바라보았다. ‘<스타 스트림>의 운명은 그렇게 허술하지 않아. 어떻게 할 거냐, 김독자.’ * “걱정마. 빠져나갈 방법은 있어.” “······저 여자 하나만 문제가 아냐. 만만찮은 놈들이 잔뜩 있다고. 게다가 기문진법까지 쓰는 놈들인데 어떻게 상대하려고?” “기문진법이라고 부술 방법이 없는 건 아냐.” 나와 한수영은 전우치의 화신, 조영란을 따라 기문진법 속을 걷는 중이었다. 걷지도 않고 둥둥 떠서 날아가는 걸 보니, 확실히 전우치의 화신이 맞기는 맞는 모양이다. 전우치. 홍길동과 함께 한국의 위인급 중에서도 톱 클래스에 들어가는 힘을 지닌 성좌······. 눈치를 살피던 한수영이 다시 말을 걸었다. “근데 방랑자들의 왕은 환생자한테 죽은 거 아니었어?” “그렇게 쉽게 죽을 사람은 아니지.” “······그러고 보니 너 그 왕이랑 아는 사이라고 했었지. 정확히 말해. 대체 뭔 관계야?” 추궁이라도 하는 듯한 그 말투에 가벼운 한숨이 나왔다. “세상에서 제일 복잡한 인연이지.” “어째 느낌이 구질구질한데. 옛 여친?” “내 어머니야.” “뭐? 진짜? 어······ 미안.” 한수영이 평소 답지 않게 당황하며 말을 더듬었다. 우리 대화를 들었는지, 조영란이 뒤를 돌아보며 표정을 굳혔다. “내가 밟은 지면을 정확히 따라와라. 다른 곳을 밟으면 바로 길을 잃게 될 테니까.” 역시 그런 식의 진법일거라 생각은 했다. 모든 기문진법이 그렇듯 이 진법도 정확한 생문을 짚으며 나아가지 않으면 곧바로 길을 잃게 된다. 나는 살짝 불만스런 어조로 물었다. “그냥 진법을 해제하고 가면 안 됩니까?” “곤란하다. 네가 무슨 짓을 할지 모르니까.” “우습네요. 날 죽인 건 그쪽인데, 두려워하는 것도 그쪽이라니.” “네게 부활 능력이 있다는 건 알고 있어.” “그렇다고 다짜고짜 죽여도 됩니까?” “그건 미안하게 생각한다. 그리고 너를 죽이려고 움직인 건 아니었어. 저 여자에게 한 공격이었는데, 저 여자가 널 방패로 삼았지.” ······뭐? 돌아보니, 한수영이 휘파람을 불며 딴청을 부리고 있었다. 헤실헤실 웃고 있는 한수영을 보며 머리통을 한 대 갈겨줄까 하다가 참았다. 이쪽 추궁은 나중에 해도 되니까. 내가 목숨이 여덟 개만 아니었더라도 진짜······ 아니, 이제 여섯 개인가. 나는 조영란 쪽을 돌아보며 물었다. “왜 내 어머니를 돕는 겁니까?” 내 갑작스런 물음에 조영란이 잠깐 멈칫했다. “솔직히 당신 정도 되는 화신이 왜 다른 누군가를 따르는지 모르겠군요. ‘조선제일술사’급의 성좌라면 성흔을 계승하기에 따라서 지금 당장 왕의 자리를 노릴 수도 있을 텐데.” “······내 성좌를 어떻게 알았지?” “한국에서 기문진법을 가진 성좌라면 뻔하죠.” 전우치는 설화급은 아니지만, 힘을 발출해도 개연성의 코스트 소모가 적은 만큼 초반 시나리오에 유리한 점이 많았다. 게다가 동급의 다른 성좌들에 비해 쌓아온 유명세와 설화가 압도적이라 시나리오의 진척도에 따라서 설화급으로 격상할 수도 있고. 비슷한 이유로 유중혁도 초반 시나리오 클리어에 전우치를 동료로 영입한 경우가 왕왕 있었다. 조영란이 대답했다. “나는 왕의 그릇은 아니야.” “혹시 어머니한테 무슨 약점이라도 잡힌 겁니까?” 조영란은 무슨 말을 하려다가 도로 입을 다물었다. “솔직히 말해봐요. 내가 도와줄 수도 있으니까.” “······.” “당신은 그 사람한테 속고 있습니다.” 전우치는 같은 편으로 만들 수만 있다면 커다란 전력이 된다. 물론, 크게 기대는 하지 않았다. “그녀가 내 딸을 구해주었다.” 역시나. “그렇군요. 구명에 대한 보은이라······ 그런 일을 겪으면 충성할 만도 하겠네요.” 내 말에 조영란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비꼬는 말투군?” “맞아요. 저는 그 ‘구명’이 굉장히 의도적인 거라 생각하니까요.” “······의도적?” “우리 어머니, 뭔가 이상하지 않아요?” “어떤 점이?” “뭔가 지나치게 이 세계에 잘 적응한다거나, 현시점에선 알 수 없는 정보들을 다수 알고 있다거나 하는 것 말이죠.” 내가 무슨 얘길 할지 알았는지, 한수영이 어이없다는 눈으로 나를 보았다. 조영란이 답했다.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지?” “이렇게 말하면 어떨까요. 우리 어머니는, 당신이 무슨 성좌를 얻게 될지 알고 있었다고.” “······.” “아마 그 사람은 처음부터 당신을 이용하려는 목적으로 당신 딸을 구해줬을 거예요. 그 사람은 그런 사람이라고요.” 조영란······ 정확한 기억은 아니지만, 아마 이런 이름의 여자가 전우치의 화신이 되었던 적도 있었던 것 같다. 딸을 잃고, 전우치의 화신이 되어 세상에 대한 복수를 결심하는 등장인물. 내가 언제 어머니한테 그 이야기를 해준 건진 모르겠지만, 어머니가 내 이야길 듣고 그 정보를 기억하고 있었다면 이 여인을 이용할 생각을 했다고 해도 과장된 생각은 아니었다. 그런데 조영란의 입에서 뜻밖의 말이 나왔다. “너는 그 사람에 대해 오해하고 있어.” “오해?”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조영란의 시선. 불쾌한 동정이 섞인, 내가 제일 싫어하는 종류의 눈빛이었다. “수경 씨는 네가 아는 것처럼 나쁜 사람은 아니야.” 괜한 반발감이 치솟았기 때문일까. 나는 퉁명스럽게 답했다. “나보다 그 사람을 잘 아는 사람은 없어.” “원래 자식이 부모 속을 제일 모르는 법이지. 그리고 다 왔다.” 문득 앞을 보니, 현관문 같은 것이 나타나 있었다. 조영란이 한수영을 향해 말했다. “그쪽 여자는 못 들어간다. 나와 같이 있지.” “칫, 어머님께서 낯가림이 심하신가 보네. 잘 다녀와라.”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현관문에 손을 가져다 댔다. 이 문 뒤에, 아마 이번 시나리오의 가장 강대한 적이 있겠지. 조영란이 말했다. “거기 있는 벨을 누르면 된다.” 딩동. 어쩐지, 예스런 벨소리가 익숙한 기억을 자극했다. 아주 오래전에 들어본 적이 있는 듯한, 그런 벨소리였다. 문 안쪽에서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와.” 문을 열고 들어가자, 익숙한 가정집의 현관이 나타났다. 가지런히 놓여 있는 몇 켤례의 신발. 개중에는 아이의 것으로 보이는 작은 신발도 있었다. 기시감은 더욱 심해진다. 익숙한 집의 인테리어. 너무 화려하거나 고풍스럽지 않은, 그렇다고 감각이 없는 사람이 꾸민 것도 아닌 소소한 장식들. 거실로 들어가자 익숙한 모양의 방이 나타난다. 잊고 있었던 벽걸이 시계와 텔레비전. 앉아보지 않아도 감촉을 알 것 같은 소파. 테이블의 위치도 낯이 익었다. [‘제 4의 벽’이 흔들립니다.] 정말이지······ 지독한 악취미가 아닐 수 없다. 거실의 소파에 어머니가 단아한 옷을 입고 앉아 있었다. “오래 걸렸구나. 오랜만에 집에 온 기분은 어떠니?” “차라리 계속 죽어있는 게 나을 뻔했네요.” “건강해보여 다행이구나.” “누구 덕분에 이제 막 죽었다 살아났거든요.” 아마 어머니는, 기선을 잡기 위해 이 장소를 택했을 것이다. 지금부터 있을 대화는, 아마 남은 두 개의 시나리오를 결정지을 승부처가 될 테니까. “니르바나가 당신을 죽였다던데, 어떻게 살아 있었던 거죠?” “그런 녀석 속이는 것쯤은 일도 아니지. 잊었니? 나도 미래 정보는 많이 가지고 있단다.” 예상은 했다. 하지만 니르바나를 속일 정도라니, 내 어머니지만 이 사람의 역량이 어느 정도인지, 나로서도 잘 짐작이 가질 않았다. 어쩌면 지금의 내게 가장 위협적인 존재는 유중혁이나 성좌들이 아니라, 바로 이 사람일지도 모른다. “살아있으면서 내 장례식에도 안 오셨군요.” “어밀 두고 먼저 떠난 불효자 장례식을 뭐하러 가겠니.” “그것도 모자라서 부하들을 시켜서 절 한 번 더 죽이셨고요.” “불효자의 불효가 괘씸해서 한 번 더 죽여줬지. 이번에도 장례식이 필요하니? 보니까 좋은 동료들을 많이 뒀더구나. 네가 다시 살아날 줄도 모르고 다들 눈물을 펑펑 흘리던데······.” 말하는 모양새를 보니, 역시 이 사람은 내 어머니가 맞다. 나는 짧게 심호흡을 했다. 어머니와 말할 때는 절대 방심할 수가 없다. 그리고 지금부터가, 진짜일 것이다. “왜 날 죽인 거죠?” 어머니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화신 김독자는, 가장 사랑하는 사람에 의해 죽게 될 것이다.” “······그건 또 어떻게 알았어요?” “유상아 씨가 말해줬단다. 제발 너를 구해달라고 하더구나.” 유상아가 어머니를 찾아왔었던 모양이다. “그러고 보니 이번에는 다른 아가씨랑 같이 왔더구나. 그새 취향이 바뀐 거니? 솔직히 엄마는 유상아 씨 쪽이 더 마음에 든다.” “쓸데없는 신경 끄시죠. 그보다 그 얘길 들으니 더 이해가 안 되는데요. 왜 살려달란 말을 들었는데 날 죽였습니까?” “어쨌든 내 덕분에 예언은 실행된 것 같은데. 아니니?” “예?” 갑자기 머릿속이 복잡해진다. 아니, 그러니까 지금······. 어머니가 웃으며 말했다. “예언에서 말했잖니.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그래서 내가 널 죽였단다.” 내가 누구보다 증오하는 사람이 그런 말을 하다니, 우스운 일이다. 그럼에도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잘 표현할 수 없는 기분에 마음이 심란해졌다. 나는 분명 어머니를 증오한다. 어머니로 인해 내 삶은 망가졌고, 엉망이 되었으니까. 그럼에도······ 이 복잡한 기분은. “그렇군요. 절 죽이면, 제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되실 거라 생각하신 모양이죠? 운명이 그러니까?” “네가 좋아하는 소설에도 자주 나오는 전개지 않니?” “그렇다면 완전히 실패하셨네요.” 분명 운명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죽는다고 했다. 그렇다면, 내 지난 번 죽음으로 내 운명은 실현되었어야 했다. “운명 메시지가 아직도 뜨고 있거든요.” 사실이었다. 조금 전부터, 내 귀에는 지긋지긋한 메시지가 다시 들려오고 있었다. [어떤 거대한 운명이 당신의 확실한 죽음을 바라고 있습니다.] 심지어 수식언도 추가되었다. ‘확실한 죽음’이라고. 꿈에서 나타난 ‘오이디푸스 왕’의 말이 옳았다. 이 설화는. ‘여덟 개의 목숨’으로는 피해갈 수 없다는 얘기다. “적어도 당신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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