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7화

147화 내 선택에 따라 한반도에서 성운들의 운명이 뒤바뀐다. 얼핏 보면 내가 ‘갑’처럼 보이는 상황이었지만, 사실은 그렇게 마음 편한 ‘갑’의 자리는 아니었다. [성좌들이 신화의 정통성을 두고 신경전을 벌입니다.] 지금은 내가 선택권을 가진 것처럼 보여도, 문제는 선택이 끝난 후다. ‘부활 설화’는 성운들 사이에서도 표절 문제로 민감한 설화. 특히 <에덴>과 <베다>의 경우는 그 대립이 심했는데, 내가 자칫 한쪽을 선택하고 나면 다른 쪽과 완전히 등을 돌리는 일이 발생할 수 있었다. 아직 나는 성좌도 되지 못한 새싹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고 전부 거절하자니, 자칫하면 모두에게 원성을 살 수도 있을 것 같고······. [다수의 성좌들이 당신의 빠른 선택을 원합니다.] 망할. 부활한 뒤 일행들에게 받을 지탄도 두려운데, 자칫하면 성좌들 사이에서도 공공의 적이 될 판이다. 어떻게 해야······. [성좌, ‘가장 어두운 봄의 여왕’이 성좌들의 분란을 중재합니다.] [성좌, ‘가장 어두운 봄의 여왕’이 중요한 것은 화신 본인의 선택임을 강조합니다.] 뜻밖에도 페르세포네가 내 편을 들어 주었다. 근데 이 아줌마가 왜 나를 돕는 거지? [일부 성좌들이 ‘가장 어두운 봄의 여왕’의 개입에 불만을 품습니다.] [몇몇 성좌들이 ‘가장 어두운 봄의 여왕’에게 해결책을 묻습니다.] ······. [성좌, ‘가장 어두운 봄의 여왕’이 화신 ‘김독자’를 ‘연회’에 초청할 것을 권합니다.] ······연회? 그리고 잠시 후. [성운, <에덴>이 ‘가장 어두운 봄의 여왕’의 제안에 동의합니다.] [성운, <베다>가 ‘가장 어두운 봄의 여왕’의 제안에 동의합니다.] ······. [다수의 성좌들이 ‘가장 어두운 봄의 여왕’의 제안에 동의합니다.] 뭔가, 내 의사와는 무관하게 내 존재가 염가에 팔려 나간 느낌이었다. 어쩐지 허무한 기분을 만끽하고 있는데, 갑자기 도깨비 영기가 들이닥쳤다. [허억, 허억. 독자 어르신.] 급하게 온 모양인지, 영기는 허공에서 땀을 삐질삐질 흘리고 있었다. [가보셔야 할 곳이 있습니다.] ‘······어디?’ [아, 아마도 가시는 게 도움이 될 겁니다. 지금 즉시 준비하겠습니다!] 어딜 가자는 건지 대충 감은 왔다. 이 정도로 긴장한 것을 보면 성좌들의 압력이 상당했던 모양이다. 어? 하는 느낌과 함께 몸이 붕 뜨는 느낌이 들더니, 몸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부활은 아니었고, 말하자면 영혼체가 형태를 가지는 것에 가까웠다. 비록 부유령(浮游靈)의 상태이긴 했지만, 임시로 형상이 빚어진 것이었다. [으음. 그게, 중요한 자리니까······.] 나신으로, 심지어는 생식기도 없이 휑하던 영혼체 위에 따스한 질감의 와이셔츠와 정장이 나타나 스르르 감겨들었다. 마치 나를 위해 태어난 듯한 옷감의 감촉. [머나먼 밤하늘에서 오랜 이야기들이 반짝입니다.] [현재 <별자리의 연회>가 개최 중입니다.] [성좌, ‘가장 어두운 봄의 여왕’이 당신을 <별자리의 연회>에 파트너로 초청하였습니다.] <별자리의 연회>. <배후 선택>과 함께, <스타 스트림>의 성좌들을 위해 마련된 이벤트. 오직 성좌들만이 초대받는 연회에, 아직 성좌위에도 오르지 못한 내가 초청된 것이다. 나는 부활까지 남은 시간을 살폈다. [남은 대기 시간 : 23:54:12] 23시간. 잠깐 다녀오는 것 정도라면 시간은 충분했다. 시기는 좀 빠르지만, 분명 한 번은 가야 할 자리였다. “좋아, 가자.” 드디어, 성좌들을 만나러 갈 때가 온 것이다. * [곧 초청하신 분께서 사절을 보내오실 겁니다.] “알겠어.” [서, 성공적인 데뷔를 기원합니다!] 영기는 결의 어린 눈빛으로 주먹을 불끈 쥐더니, 이내 눈앞에서 사라졌다. 문득 주변을 둘러보자, 근처는 온통 새하얀 구름으로 뒤덮여 있었다. 나는 이 길이 <스타 스트림>을 잇는 지류 중 하나인 ‘구름길’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수많은 도깨비들이 이 길을 타고 차원을 이동하는 것이다. [당신은 메인 시나리오 지역에서 임시로 이탈하였습니다.] [지구 시간으로 24시간 안에 시나리오에 복귀해야 합니다.] [제 시간 안에 복귀하지 않을 시, 당신은 시나리오 규정에 따라 처분됩니다.] ‘처분’이라니. 지난 번, 명계에 갈 때도 그랬지만 시스템은 정말 말을 섬뜩하게 한다. [히든 시나리오 ― ‘별자리의 연회’가 시작됩니다!] + <히든 시나리오 ― 별자리의 연회> 분류 : 히든 난이도 : ? 클리어 조건 : 연회에 참가해 성공적으로 데뷔를 마치시오. 제한시간 : 24시간 보상 : 100000코인, 일부 성좌들의 호의 또는 멸시 실패시 : ― + ······하여간 <스타 스트림>은 별의별 곳에 다 히든 시나리오가 숨어 있다. 마음만 독하게 먹으면 생각보다 코인 캘 곳은 많단 말이지. 키이이이잉! 멀리서 네 마리의 말이 날아오는 게 보였다. 광원처럼 새하얀 빛을 내뿜는 준마들. 말들은 ‘황금빛 날개’를 힘껏 퍼덕이며 힘껏 투레질을 했고, 그 뒤쪽에는 마찬가지로 황금빛 외양을 뽐내는 마차가 있었다. 마차의 겉면에는 태양의 심볼이 조각되어 있었다. 나는 한 눈에 그 마차를 알아보았다. 설마 ‘태양 마차’? 그러면 저 마차 안에 있는 존재는······. [야, 타.] 밑도 끝도 없이 들려온 진언(眞言)에 나는 화들짝 놀랐다. 그러나 마차 안의 존재는 별 거 아니라는 투로 말했다. [야야, 괜찮아. 여기서부턴 상징계(象徵界)라서 진언 제약이 약하다고. 쫄지 말고 빨리 들어와. 안 잡아 먹으니까.] 나는 긴장하며 마차의 휘장을 열었다. 정말 이게 태양 마차라면, 이 마차의 주인은 아마 태양의 신 헬리오스일 텐데······ 어? “당신은······?” 나는 의아한 눈으로 마차의 탑승자를 바라보았다. 정확히 말하면, 그 안에 있는 것은 ‘탑승자’가 아니었다. 먹음직스런 적빛 포도주를 한가득 담은 와인 글라스만이 마차의 내부에 둥둥 떠 있었다. 대체 이게 무슨 상황일까 생각하는데 와인 글라스가 입을 열었다. [뭐야, 못 알아 보는 거야?] [성좌, ‘술과 황홀경의 신’이 당신에게 섭섭해합니다.] 나는 깜짝 놀라 물었다. “······디오니소스?” 츠츠츠츠츳! 눈부신 스파크가 튀며, 와인 글라스가 쾌락의 비명을 질렀다. [야, 진명 그렇게 함부로 부르는 거 아냐. 짜릿해서 기분은 좋다만.] “······왜 그런 모습이십니까?” [개연성 때문이지 뭐. 코스트 아끼려면 이런 심볼 형태가 좋거든. 너도 알다시피 위대한 <스타 스트림>께선 꽤나 엄격해서 말이야.] 사실 내 입장에서도 진체가 아닌 편이 낫다. 아무리 내게 [제4의 벽]이 있다고 해도, 성좌의 진체를 보고도 정신이 멀쩡할 거라는 확신은 아직 없으니까. 내가 자리에 앉자마자, 마차가 출발했다. 왜 티탄 신인 헬리오스의 태양 마차를 디오니소스가 몰고 있는 건진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사정이 있는 듯했다.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이지? 반가워, 내가 바로 ‘술과 황홀경의 신’이야. 너네 나라에서는 피로회복제 이름으로 유명하지.] “저도 반갑습니다.” 우리는 어색하게 인사를 나눈 후, 각자 마차의 모서리에 앉았다. 장난스럽던 평소 모습과는 달리, 디오니소스는 별로 말이 없었다. 의외로 낯을 가리는 성격인가? 예상 밖이었다. 하긴, 설화가 다 맞는 것도 아닐 테니까. 그보다 마차가 덜컹거릴 때마다 흔들리는 저 글라스 속의 포도주가 몹시 신경 쓰인다. 갑자기 이쪽으로 쏟는 건 아니겠지? 저 액체도 뭔가의 심볼일 텐데, 디오니소스의 뭘 상징하고 있는 걸까. 그렇게 잠시 쓸데 없는 생각을 하고 있자, 디오니소스가 말했다. [아, 미안. 잠깐 아는 여신이랑 채팅 좀 하느라.] “······많이 바쁘신가 봅니다?” [그런 건 아닌데 요즘 썸타는 애라서 관리해줘야 돼.] 진심인지 농담인지 모르겠다. [근데 너 생각보다 태연하네? 그래도 내가 명색이 성좌인데.] “성좌를 본 게 처음은 아니라서요.” [아, 그러고 보니 그러네. 지난 번에 내가 명계 보내 줬었지?] “그땐 감사했습니다.” [감사는 무슨. 그보다 너 그때 명계에서 무슨 짓 하고 온 거야?] “예?” [그 도도한 여왕님이 이렇게 친절하게 구는 건 처음 봤다고. 무려 성운들에 맞서 화신 하나를 보호하려 하다니······ 응? 혹시? 역시 그거냐? 너 그 아줌마한테······.] 어쩐지 부럽다는 듯한 목소리. 디오니소스는 내가 페르세포네의 과업을 수행한 것까진 알지 못하는 듯했다.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만.” [야야, 시치미떼지마. 그 아줌마 졸라 섹시하지? 바깥 양반만 없었어도 진즉에 내가 어떻게 한 번······.] “······그런 식으로 말해도 됩니까? 명계의 여왕은 당신 어머니 아닙니까?” [음? 하하. 그런 설도 있긴 하지.] “그쪽 설은 가짜였던 겁니까?” [그런 말은 안 했는데.] “······.” [뭘 그런 눈으로 봐? 너 올림포스 몰라? 이 정도 금기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그러고 보니 올림포스는 그런 곳이었다. 아랫도리로 생각하는 신들의 천국. 그래도 이건 좀 심하잖아. [아, 그래. 말 나온 김에 잘 됐다. 아까 내 메시지 받았지? 내 쪽에 붙어. 내가 특별히 ‘바쿠스의 교주’ 설화를 하사할······ 너 표정이 영 별로다?] “아닙니다.” 나는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디오니소스도 올림포스 12신좌의 하나인 만큼 격이 높은 성좌였다. 하지만 겨우 ‘바쿠스의 교주’라······. [아하, 알겠다. 요 녀석봐라. 너 지금 <에덴>이나 <베다>에서 내리는 설화들이랑 비교한 거지?] “딱히 그런 건 아니지만······.” [인마, 그건 네가 뭘 몰라서 그래! 너 ‘부활한 메시아’ 같은 설화 받으면 어떤 꼴이 되는 줄 알아? 평생을 동정으로 살아야 돼! 그리고 죽고 나서도. 응? 떡 한 번 못 쳐보고 창세신의 시종으로 살아야 한다고!] 디오니소스는 흥분하며 소리쳤다. [응? 그에 반해 ‘바쿠스의 교주’가 얼마나 대단한 건지 알아? 너 내 여신도들 알지?] “동성애자를 찢어 죽인 그 여신도들 말입니까?” 디오니소스가 흠칫 놀랐다. [어······ 험. 그, 그래! 걔들이랑 매일매일 광란의 밤을 보낼 수 있다고. 내, 내가 하사하는 포도주도 무한 리필 가능하고 말야! 어디 그 뿐인줄 알아? ‘올림포스 난교 파티’ 혹시 들어봤냐? 너 아프로디테 알지? 네가 원한다면 걔도 초대해서······.] [성좌, ‘사랑과 미의 여신’이 ‘술과 황홀경의 신’을 노려봅니다.] [······걔 얘긴 없던 걸로 하고, 아무튼 어때?] “별로 안 끌리는데요.” 디오니소스의 포도주가 불안하게 출렁였다. [······그러고 보니 <에덴> 소속의 어떤 천사가 네가 남색가라는 얘길 하던데······ ] “누가 퍼뜨린 건진 알 것 같은데, 저 여자 좋아해요. 그보다 슬슬 절 만나러 오신 진짜 목적을 듣고 싶습니다만.” [음? 무슨 소리야? 당연히 널 우리 성운에······.] “정말 그게 전부입니까?” 디오니소스는 잠시 말이 없었다. 한참이나 찰랑이던 와인 글라스가, 허공에서 한 바퀴를 뱅그르 돌았다. [······너 눈치 빠르네.] “그런 소리 많이 듣죠.” [한 잔 할래? 내 포도주 좀 마셔.] “술을 별로 안 좋아 해서.” [뭐······ 그래. 네 말이 맞아. 사실 내 목적은 널 ‘올림포스’에 데려가는 게 아냐.] 역시, 그럴 거라고 생각했다. 여신이니 뭐니 입으론 잘도 지껄였지만, 사실 무엇도 진심은 아니었던 것이다. 아무리 내게 주목하는 성운들이 많다고 해도, 고작 화신 하나를 픽업하기 위해 올림포스의 12주신 중 하나가 왔다는 것부터가 이상했다. 그런데, 이어진 디오니소스의 말은 내 예상을 완전히 깨는 것이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 난 네가 ‘올림포스’에 가입하지 않기를 바란다.] “······예?” [보다 정확히 말하면······.] 끔찍한 폭음이 터진 것은 그때였다. 콰아아앙! 태양 마차가 포격을 맞은 듯 휘청거렸고, 선두의 말들이 비명을 질렀다. 돌아보니 디오니소스의 와인 글라스에서 포도주가 쏟아져 있었다. [우왁, 씨발. 놀라서 오줌 쌌잖아!] 뭐가 오줌인지 차마 물어보기가 두렵다. 나는 쏟아진 포도주에 닿지 않기 위해 혼비백산했다. [젠장, 아무래도 다른 성운들이 널 노리는 모양인데.] 휘장 밖을 보니 무지막지한 존재감을 풍기는 것들이 사방에서 이쪽을 향해 날아오고 있었다. 아직 거리가 멀어서 어느 성운 소속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호의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건 분명했다. [씨벌. 헬리오스 새끼한테 비싸게 주고 빌려온 건데······ 야, 안 되겠다. 여기서부터는 내려줄 테니까 나머지는 뛰어가. 구름길 따라 쭉 가면 금방이야.] 여기서? 허공인데? [내가 막을 테니까 빨리 가! 연회장까지만 가면 어떤 성운도 널 건드릴 수 없어!] 그 말과 함께 휘장이 활짝 열렸다. 까마득한 구름 바닥을 보며, 나는 침을 삼켰다. 나는 영혼이다. 그러니까 떨어져도 죽지 않을 것이다. 뒤쪽에서 디오니소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명심해라. 아무도 믿지마.] 마차에서 뛰어 내리는 순간, 디오니소스가 씩 웃으며 말했다. [그럼 또 보자, 화신 김독자.] 나는 그 길로 마차에서 뛰어내렸다. 츠츠츠츠츳! 콰아아아앙! 등 뒤에서 엄청난 폭음이 울려 퍼지며, 무지막지한 존재감이 전신을 압박해왔다. 지금까지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어마어마한 힘이었다. 최소 진체의 일부가 강림한 모양이었다. 쿠구구구구! 콰르르르르! 스파크가 천둥처럼 내리쳤다. 뒤돌아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분명 성좌와 성좌의 대결이 시작된 것이다. 나는 전력을 다해 구름길을 달렸다. 도중 파편 같은 것이 머리 위를 스쳐갔고, 바닥이 갈라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래도 나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그렇게 얼마나 달렸을까. 마침내 거대한 성채가 보이기 시작하며, 뒤쪽의 소음이 잦아들었다. 나는 성채의 입구에 도달했다. “연회에 참가하러 왔습니다.” 문지기가 나를 아래위로 훑어 보았다. 아마 관리국에서 파견된 하급 도깨비인 듯했다. “뭐야? 화신이 혼자 온다는 얘긴 못 들었는데?” 빌어먹을, 아무래도 태양 마차에서 내린 게 실수였던 것 같다. 아마 그게 프리패스 통행증이었을 텐데. 그때, 성채 안쪽의 문이 열리며 뜻밖의 구원자가 나타났다. [그 친구 들여보내 줘. 내 일행이니까.] 그는 페르세포네가 아니었다. 내가 오래도록 보고 싶었던 성좌가, 그곳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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