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화

133화 비형과의 협상이 끝나자마자, 심판관은 내게 재촉했다. [끝났으면 슬슬 돌아가지.] 왜 이렇게 채근하나 싶었는데, 심판관은 내 술병을 보며 연신 입맛을 다시는 중이었다. 아까 준 술이 부족했던 모양인데······. 잠깐만. 그러고 보니 지금 명계에 하데스와 페르세포네가 없다고 했지? “저, 심판관님. 부탁이 하나 더 있습니다.” [뭔진 모르겠지만, 이번에는 곤란······.] “술 한 병을 다 드리겠습니다.” 내 말에 심판관의 눈이 휘둥그레 떠졌다. “저를 타르타로스에 다시 한번 데려가 주십시오.” * 시간이 없었기 때문에, 나는 타르타로스에 금방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왔다. 잠깐이었다고 생각했는데, 그 사이 심판관은 이미 만취한 상태였다. [그럼 용건은 끝났느냐?] “예.” 하데스와 페르세포네가 자리를 비운 것은, 내게 있어서는 신의 한 수였다. 정말 약간의 정보를 귀띔하고 왔을 뿐이지만 눈치 빠른 김남운이라면 그것만으로도 큰 변화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언젠가 찾아올 <기간토마키아>가 기대되는 순간이다. [여왕께서 남기신 말씀이 있다.] “여왕께서요?” [그래. 직접 읊어주마.] 심판관은 중후한 목소리로 페르세포네의 말을 대행했다. [화신 김독자, 아주 흥미로운 방법으로 과업을 성취하고 있더군요.] “······.” [이제 <스타 스트림>의 많은 성운들이 당신을 주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 중엔 당신을 불길하게 여기는 이들도 상당수 있어요.] 실제로 이번 시나리오는, 성좌들의 관심을 지나치게 끈 데가 있었다. [대비를 하는 게 좋을 겁니다.] 이야기를 듣다 보니 조금 불안해진다. ······혹시 하데스와 페르세포네의 출타도 나 때문인가? 얼마 전부터 다른 대성좌들의 반응도 눈에 띄게 줄었다. 특히 우리엘이라든가, 또······ 우리엘이라든가. 참고로 우리엘 또한 성운 ‘에덴’ 소속이다.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당신에게 섭섭해합니다.] [성좌, ‘은밀한 모략가’가 ‘긴고아의 죄수’를 위로합니다.] 저 녀석들은 아직 있었군. [그럼 잘 가라.]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지금 걱정해 봐야 소용도 없다. 중요한 건 지금껏 차근차근 쌓아온 이야기를 흩트리지 않는 거니까. 성운들이 나를 아니꼽게 생각한다 해도, 페르세포네 말처럼 모두가 그런 것도 아니다. 까마득한 회오리가 한바탕 몰아친 뒤, 시야가 점차 개었다. 다시 눈을 떴을 때, 나는 현세로 돌아와 있었다. “독자 씨.” 묘한 긴장감이 감도는 목소리. 나는 억지로 뺨을 두들겨 정신을 차렸다. 곧, 근심이 깃든 이현성의 얼굴이 보였다. “······무슨 일입니까?” 주변의 인파들이 웅성거리고 있었다. 이지혜를 비롯한 몇몇 일행들도 인파 속에 끼어 있었는데, 그들은 모두 한곳을 중심으로 둥글게 모여 있었다. 허공에는 일그러진 공간의 흔적이 사그라지는중이었다. 포탈(Portal). 나와 다른 일행들이 들어왔던 통로. 왜 저게 열린 거지? 설마 시나리오가 종료된 건가? “한국 측의 2차 투입자가 나타났습니다.” 2차 투입자? 이제와서? “저도 잘은 모르겠습니다만······.” 2차 투입이 너무 늦는 감이 있긴 했다. 보통 1차 투입 후 일주일이 채 지나지 않아 2차 투입이 시작되는데, 이번에는 시나리오가 끝나도록 인원 보충이 없었다. 순식간에 3차까지 투입된 일본과는 무척 비교되는 상황이었다. 나와 이현성은 인파를 헤치고 포탈의 발생지로 다가갔다. “아저씨, 이쪽이야!” 이지혜의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향하자, 그곳에는 포탈에서 나온 것으로 보이는 한 남자가 있었다. 온몸에 화상을 입은 듯, 그의 전신은 숯검댕이 된 상태였다. “으어······.” 남자는 내가 아는 사람이었다. 나는 놀라서 물었다. “정민섭 씨? 이게 대체······.” 정민섭. 그는 내가 <선지자들>과 싸울 때 내 편을 들어 주었던 극소수의 ‘하차자’ 중 하나였다. 왕들의 전쟁이 끝난 후 한동안 얼굴을 보지 못해서 죽었을 거라 생각했는데, 왜 이런 곳에······? 뒤늦게 나타난 의선 이설화가 정민섭의 맥을 짚으며 치료를 시작했다. 하지만, 이미 너무 늦은 상태였다. 마지막 순간, 눈이 마주친 정민섭이 나를 향해 중얼거렸다. “도, 돌아오시면······ 안······됩······.” 그게 정민섭의 마지막 말이었다. * [당신은 ‘피스 랜드’의 평화를 지켜냈습니다.] 큐빅처럼 빛나는 거대한 문자열이 허공에서 빛나고 있었다. 하늘은 여전히 축제 분위기였지만, 일행들의 표정은 그렇지 않았다. 이지혜가 혼란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래?” 아직 시나리오가 완전히 종료된 상황이 아니었으니 추가 인원이 파견되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 추가 인원이, 처음부터 부상을 당한 채로 나타나다니. “혹시 일본에서도 이런 경우가 있었습니까?” 이현성의 질문에 아스카 렌이 고개를 저었다. “혹시 포탈을 건너는 중 뭔가에 습격당했다거나······.” “그럴 가능성은 희박하지 않을까요?” 물론 포탈 안에도 가끔 차원종들이 살고 있는 경우가 있긴 했다. 하지만, 내 기억으로 이 시나리오에서는 아니었다. 이어서 이지혜가 의견을 냈다. “그럼 남은 사람들끼리 싸우고 있는 거 아냐?” 설마 싶긴 하지만, 역시 그쪽이 가장 현실적인 추측으로 보인다. 아스카 렌도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 “한국 쪽에는 [절대 왕좌]가 없다고 하셨죠?” “네.” “그러면 가능성이 없는 이야기는 아니네요.” 이제 일본도 같은 처지가 되긴 했지만, [절대 왕좌]처럼 무소불위의 권력이 보장되지 않는 국가에서는 주도 그룹이 바뀌는 경우가 왕왕 발생한다. 내가 아는 ‘멸살법’에서도 몇 번인가 그런 일이 있었다. 다만 이번에는 조금 의외였다. 아직 시나리오 초반인데다, 소외된 자들이 뭉쳐봤자 결국 소외된 전력에 불과하다. 게다가 서울엔 대비책도 마련해 놓았다. 유상아와 정희원, 거기다가 방랑자들의 왕인 내 어머니까지. 적어도 그들을 압살할 만한 전력이 갖춰지지 않은 이상, 새로운 주도 그룹이 나타나는 것은 불가능했다. 일행들이 눈빛이 불안해졌다. “설마······ 아니겠죠?” 예정된 2차 투입자들은 아무도 오지 않았고, 정민섭만이 빈사 상태로 이곳에 왔다. 게다가 ‘돌아오지 말라’는 메시지까지. 시기상으로 몇 가지 짐작 가는 것들이 있긴 했지만······. “확실한 건 가보지 않고서는 모른다.” 언제 나타난 것일까. 유중혁이 바로 곁에 와 있었다. 나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이 맞습니다. 일단 돌아가서 확인해 보죠.” 시나리오 메시지가 들려온 것은 그때였다. [주요 공헌자를 위한 추가 보상이 도착했습니다.] [주요 공헌자 : 김독자, 유중혁] 마침내 메인 시나리오 추가 보상이 도착한 것이다. [보상 내역을 확인하시겠습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보상 목록> 1. 낭월섭선(浪月摺扇) (SSS급) 2. 청룡검 (SSS급) 3. 마도왕의 팔찌 (SS급) 4. A급 스킬 중 하나 택일 목록은 총 넷. 과연, 시나리오가 난이도가 높아서인지 보상 목록은 상당했다. 먼저 ‘낭월섭선’이나 ‘청룡검’ 같은 보구는 꾸준히 강화 작업을 거치다 보면 언젠가 성유물에 준하는 힘을 보이는 아이템들. 가지고 있어서 손해 볼 것은 없었다. 그리고 마도왕의 팔찌. 이건 마도계 귀환자들의 초·중급 마법을 방어해낼 수 있는 좋은 아이템이었다. 하지만 이번 시나리오에서 ‘초체검’을 얻은 내게 앞의 두 아이템은 그다지 메리트가 없었고, 마도왕의 팔찌는 탐나긴 하지만 당분간 마도계 귀환자를 만날 일이 없는 한 효용 가치가 떨어졌다. 그러니 처음부터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4번을 택하겠다.” 눈앞에 스킬들의 목록이 떠올랐다. 먼젓번의 보상 스킬 목록보다 등급이 올라간 까닭인지, 주로 나타난 것은 무림 계통의 스킬들이었다. 만상귀일신공(萬象歸一神功) 소양검(少陽劍) 태을미리장(太乙迷離掌) ······. 소림의 절예(絶藝)나 공동(崆峒)의 무공도 보였고, 이십사수매화검법(二十四手梅花劍法) 같은 화산의 유명한 무공도 있었다. 하나하나가 탐나는 스킬들이었지만, 선택할 수 있는 게 하나뿐이기에 신중해야 했다. 지난번에도 언급했지만, 스킬의 등급과는 무관하게 입수 난이도가 비정상적으로 높은 것들이 있다. 무림의 무공들은 언젠가 또 입수할 기회가 있겠지만, 이 선택을 놓치면 다시는 못 얻는 스킬들이 있는 것이다. 가령, 이곳 [피스 랜드]에서만 얻을 수 있는 한정판 ‘A급 스킬’ 같은 것. “A급 스킬 소형화(小形化)를 선택하겠다.” 내 선택에 흥미진진한 눈길을 보내던 이지혜가 빽 소리를 질렀다. “아저씨 미쳤어?” “왜.” “아니 왜 그딴 걸 선택해! 안 그래도 작아져서 스트레스 받아 죽겠는데······ 차라리 청룡검 선택해서 날 줘!” 이현성도 의외라는 얼굴이었다. 애들이야 또 자기들끼리 장난친다고 별 관심도 없었고. 반면 소인종들은 묘하게 감동한 얼굴들이었다. 아마 내가 자기들을 기억하기 위해 이 스킬을 선택했다고 믿는 모양이었다. [자자, 보상 수령도 끝나셨으니 이제 돌아갈 시간입니다. 그간 많이 정들었을 텐데, 작별 인사들 하시죠.] 도깨비의 알림과 함께, 허공에서 거대한 포탈이 등장했다. 길레미엄을 위시한 소인종들이 옹기종기 우리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조심히 돌아가십시오!” “감사합니다. 꼭 기억하겠습니다.” 떠나는 우리를 향해, 소인들이 배웅의 노래를 불렀다. 아스카 렌이 눈시울을 붉혔다. 일본인 그룹들도 하나둘 포탈 속으로 사라졌다. 우리 일행은 마지막 차례였다. 소인종들의 노래는 계속되었다. 계속 듣다 보니, 어쩐지 가사를 이해할 것도 같았다. 피스 랜드를 구해낸 영웅 그의 이름 도쿠자도 도게자도 아닌 독자 오오 독자라네 ······제기랄, 뭐 저딴 가사를 붙인 거지? [‘피스 랜드’의 존재들이 당신의 전설을 연호합니다.] [해당 업적은 성좌에 등극한 후 열람할 수 있습니다.] 내성의 종탑 위에는 내게 무공을 가르쳤던 키리오스의 모습도 보였다. 시나리오가 끝나자마자 내게 달려와 온갖 협박을 늘어놓을 줄 알았던 그는 조용히 이쪽을 보기만 할 뿐이었다. “당신에게 고마워하는 것 같아요.” “네?” “그냥, 그런 느낌이 들어요. 잘은 모르겠지만.” 아스카 렌이 웃으며 말했다. 창조주의 자격은 잃었다 해도, 작가 또한 여전히 한 사람의 독자인 것일지도 모른다. “또 살아서 만나요, 한국 여러분.” 꾸벅 고개를 숙인 아스카 렌이 포탈 너머로 사라지고, 우리도 포탈로 진입했다. 시야가 다시금 휘청이더니, 정신을 차렸을 때는 지면에 발이 닿아 있었다. 한 번 겪어본 일이라 그런지 현기증은 심하지 않았다. [메인 시나리오가 종료되었습니다.] 간만에 보는 서울의 광경. 주변을 돌아보니, 나와 함께 온 사람은 유중혁뿐이었다. 같은 포탈로 들어왔어도, 출구는 다른 모양이었다. 그렇다 쳐도 왜 하필 이 녀석이랑 같이······. “김독자, 피해라.” 유중혁의 말과 동시에, 내가 디디고 있던 바닥이 폭발했다. 콰아아아앙! 곳곳에서 날아든 마력탄이 우리가 있던 자리를 엉망으로 헤집고 있었다. “패왕이다!” “당황하지 마! 쏴라!” “놈들은 어차피 같은 편이 아냐! 패왕은 내버려두고 불살의 왕을 노려!” 콰앙! 콰아아앙! 어떤 의미에서는 예상했던 기습이었다. 뿌연 먼지구름 사이로 수십의 인파들이 몰려와 있었다. 언뜻 봐도 상당한 수준의 장비와 배후성을 갖춘 녀석들. 페르세포네가 말한 다른 ‘성운’ 소속의 화신들일까? 아직은 알 수 없었다. “놈은 사람을 못 죽인다! 불살의 패널티가 걸려 있어! 그러니 망설이지 말고 해치워!” “포인트를 모아 다시 살아날 가능성이 있다. 그러니 재생의 때를 놓치지 말고 죽여야 한다!” ······언제 그런 정보까지 빠져나갔지? 설마 ‘불살의 왕’에 대한 정보까지 알고 있을 줄이야. 잠시 후, 먼지 속에서 이들을 이끄는 대장격의 녀석들이 나타났다. “김독자! 천천히 무기를 넣고 이쪽으로 와라!” 나는 순순히 그 말대로 했다. 가까이서 보니, 녀석들의 무장 형태가 확실하게 보였다. 장비들이 죄다 A급을 호가하고 있는데다, 개개인의 종합 능력치도 굉장히 출중하다. 어머니가 이끌던 방랑자 세력에 전혀 밀리지 않을 전력. 대체 어디서 이런 놈들이 나타난 거지? 끝났다는 듯, 대장격으로 보이는 녀석이 이쪽을 향해 웃고 있었다. 나도 그에 맞춰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내 정보들은 어디서 주워 들은 거야?” “그건 알아서 뭐하게?” “하나 잘못된 게 있어서 알려주려고.” “뭐?” [‘신념의 칼날’을 발동합니다!] 스가가각! 순식간에 뽑아 올린 ‘신념의 칼날’이 대장격으로 보이는 사내를 비롯해 주변의 전력들을 일거에 베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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