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화

132화 tls123. 그것은 바로 ‘멸살법’ 작가의 아이디였다. 아스카 렌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되물었다. “에? tls123······?” 나는 다급히 그녀를 채근했다. “기억나십니까?” “잘 기억이······ 어?” “······왜 그러시죠?” 잠시 눈을 깜빡이던 아스카 렌의 동공이 멍하게 변해 있었다. 그녀의 몸에서 희미한 스파크가 튀어 올랐다. “■■■······ ■■” 응? 나는 깜짝 놀라 물었다. “방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네?” “그러니까, 방금 하신 말씀······.” “무슨 말이세요? 제가 무슨······.”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아스카 렌의 얼굴. 갑자기 불길한 감각이 스쳤다. 나는 곧바로 ‘등장인물 일람’을 가동했다. [전용 스킬, ‘등장인물 일람’을 발동합니다!] + <인물 정보> 이름 : 아스카 렌 나이 : 31세 배후성(背後星) : 이천일류의 달인 전용 특성 : 피스랜드의 창조주 (전설), 만화가 (희귀) 전용 스킬 : [검도 Lv.7], [펜촉을 검으로 Lv.4], [그럴싸한 보법 Lv.5], [상상력 자극 Lv.4]······. 성흔 : [이천일류 Lv.3] 종합 능력치 : [체력Lv.55 (현재 Lv.17)], [근력Lv.55 (현재 Lv.17)], [민첩Lv.49 (현재 Lv.11)], [마력Lv.54 (현재 Lv.16)] 종합 평가 : 현재 종합 평가가 수정 중입니다. + 내가 ‘멸살법’에서 본 대로, 이 여자는 [피스랜드의 창조주]가 틀림없다. 그런데······. ······‘수정 중’이라고? 다음 순간, 나는 눈앞에서 특성창의 내역 하나가 통째로 사라지는 것을 목격했다. 뭉쳤던 모래가 흩어지듯이, 문자는 하나씩 스러졌다. + 전용 특성 : 만화가 (희귀) + 아주 천천히, 등줄기에서 소름이 올라왔다. 왜 갑자기 [피스랜드의 창조주]가 없어진 거지? 그 어떤 대성좌라 해도 이런 이적은 불가능했다. 고개를 갸웃하던 아스카 렌이 물었다. “죄송한데 우리가 무슨 이야길 하고 있었죠?” “······렌 씨의 작품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제 작품이요?” 아스카 렌은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얼굴이었다. [피스 랜드]도, 자신이 만들었던 그 어떤 설정들도 떠올리지 못하는 표정. 「그 순간, 그녀는 그 세계가 완전히 자신의 손을 떠났음을 깨달았다.」 머리가 지끈거리며 아파왔다. 그런 문장이 ‘멸살법’에 있었던가? 모르겠다. 다만, 한 가지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고적한 밤을 울리는 비올라의 선율. 드문드문 들려오는 소인들의 노랫소리. 고양된 감정이 빚어낸 슬프고도 풍요로운 이 분위기가 그것을 확신케 했다. 바로 이 순간이 [피스 랜드]라는 세계의 완결이라는 것을. 이제 이 이야기에는 아무것도 보탤 것이 없었다. 마침내 하나의 이야기가, 한 명의 작가로부터 완전히 독립한 것이었다. 그렇게 생각하자 갑자기 아스카 렌에게서 특성명이 사라진 이유도 이해할 것 같았다. 세계가 완성되는 순간, 작가는 창조주의 직위에서 내려와야만 한다. 나는 문득 궁금해졌다. 그렇다면, 끝이 난 이야기는 어디로 가게 되는 것인가. [당신은 행성 ‘피스 랜드’를 알게 되었습니다.] [‘피스 랜드’에 소속된 모든 존재들이 당신의 시선을 희미하게 느낍니다.] [작은 행성의 작은 성좌가 당신의 존재에 기뻐합니다.] [‘피스 랜드’의 존재들이 당신에 관한 전설을 쓰기 시작합니다.] 우습게도, 물으나 마나 한 일이었다. ······그런가. 작가를 떠난 이야기가 향할 곳이란 애초부터 정해져 있었으니까. 그 후 나는 몇 가지를 그녀에게 더 물어보았고, [거짓 간파]까지 사용했다. 하지만 그녀는 정말로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했다. “미안해요, 정말 모르겠어요. 읽어본 만화 같기는 한데······.” 자신이 그린 이야기를 읽어본 것 같다, 라니. 어쩐지 기분이 울적해지고 만다. 잠시 눈을 감고 뭔가를 헤아리던 아스카 렌이 말을 이었다. “근데 저도 재미있게 읽었던 것 같아요. 틀림없이······ 그랬을 거예요.” 안타깝게도 간신히 닿았던 ‘멸살법’ 작가에 관한 정보는 거기서 그치고 말았다. ‘멸살법’의 작가가 어떤 존재이며 무엇을 원하는지는 여전히 오리무중이었다. 하지만 적어도 한 가지는 어렴풋이 알 것 같기도 했다. 아마도 ‘멸살법’의 작가는, 나만큼이나 기존의 결말에 만족하지 못했던 것이리라. 그래서 이 세계가 끝나기 전, 내게 이 ‘텍본’을 준 것이리라. 그렇다면, 그 기대를 충족 시켜줘야겠지. 나는 풍광을 음미하고 있는 아스카 렌에게서 물러나, 품속에 넣어 두었던 작은 앰플을 꺼냈다. [고대 뱀의 성혈(星血)] 그것은 성좌의 부속과 함께 얻은 아이템이었다. 내가 신호를 보내자, 멀리서 떨어져 있던 이현성이 고개를 끄덕이며 다가왔다. 이현성은 술을 마시지 않은 상태였다. 미안하지만 그에게는 오늘 맡길 일이 있었다. “그럼 부탁합니다.” “맡겨주십시오.” 이현성에게 맡긴 것은 내 경호였다. 왜냐하면 나는 당분간 쓰러질 예정이었으니까. [고대 뱀의 성혈]을 술잔에 타자, 황금빛으로 넘실대던 술이 검붉은 포도주의 빛깔로 화했다. [당신은 ‘고대 뱀의 성혈’로 만든 술을 마셨습니다.] [욕심 많은 뱀의 가호가 당신의 정신력을 시험합니다.] 이것은 3회차의 유중혁도 알지 못하는 히든 피스였다. 오직 성혈을 섞은 오로치의 뱀술로만 행할 수 있는 의식. 이게 없었더라면, ‘불살의 왕’ 같은 좋은 특성을 포기하진 않았을 것이다. [뱀이 당신에게서 용살(龍殺)의 자격을 확인하였습니다.] [새로운 특성, ‘여덟 개의 목숨’이 개화를 준비합니다.] ······됐다. 개화 준비는 끝났으니, 이제 자고 일어나면 새로운 특성이 만들어져 있겠지. 일단 하나는 끝났고, 다른 하나가 문제인데······. 남은 술들을 몽땅 입속에 털어 넣자, 머리가 급격하게 어지러워지며 취기가 밀려왔다. 하지만 바로 잠들어서는 안 된다. 나는 자리에 주저앉아, 바닥에 메시지를 썼다. ‘술과 황홀경의 신이시여.’ 웬일일까. 흥겨운 분위기에도 디오니소스는 응답이 없었다. 페르세포네 쪽도 마찬가지였다. 곤란한 상황이었다. 과업을 완수했는데, 정작 나를 명계에 데려다줄 존재가 없다니······. 역시 유상아를 데려올 걸 그랬나? 올림포스와의 직통 단말이 있으면 바로 신호를 보낼 수 있을 텐데······. ‘부유한 밤의 아버지시여.’ 사위가 깜깜해진 것은 하데스의 수식언을 적던 순간이었다. 오싹한 기운이 전신을 훑었다. 구토감과 함께 시계(視界)가 핑그르 돌았고, 다시 눈을 떴을 때 나는 내가 이미 명계에 왔음을 깨달았다. 이토록 불온하고 기분 나쁜 공기는 오직 명계에서만 느낄 수 있으니까. 주변을 둘러보니, 다행히 또 타르타로스에 떨어지진 않은 모양이다. 누군가가 내 앞에 서 있었다. [너는 지금 명계에 와서는 안 된다.] 상대는 하데스도, 페르세포네도 아니었다. 사신을 닮은 복장을 본 순간 나는 바로 알 수 있었다. “심판관님.” 지난번에 나를 안내했던 심판관은 아니었다. 나는 말을 이었다. “여왕님의 과업을 완수했다는 보고를 드리러 왔습니다.” [알고 있다. 다시 말하지만, 너는 궁전에 들어갈 수 없다.] “······어째서입니까?” [그건 알려줄 수 없다.] 귀찮다는 듯, 심판관이 손사래를 쳤다. [돌아가라. ‘아버지’의 권능을 빌어 소환은 해줬지만, 입장은 불가하다.] “저는 여왕님과 약속이 있습니다. 반드시 들어가야 합니다.” [지금은 안 돼. 돌아가.] 이 녀석 대체 무슨 똥배짱일까. 심판관이 아무리 강해봤자, 페르세포네에 비하면 조족지혈일 뿐이다. 그런데 이렇게 완강하게 나오는 것을 보면······. “······혹시 두 분 다 출타 중이십니까?” 멈칫하던 심판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대체 무슨 일로······.” 하데스와 페르세포네가 동시에 자리를 비울 정도라. 모르긴 몰라도 어디서 큰일이 터졌을 가능성이 높았다. 적어도 올림포스 12신급의 긴급회의가 아니면······ 근데 지금 시점에서 그런 호출을 할 만한 일이 있었던가? “혹시 제게 따로 남기신 말씀은 없으십니까? 제가 찾아올 때를 대비해 두고 가신 거라든가······.” [글쎄, 그런 게 있더라도 내가 왜 네놈에게 전해야 하지?] 심판관마다 성격이 다른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까칠한 놈이 걸릴 줄은 몰랐다. 그래도 말투를 보아하니, 뭔가 있긴 한 것 같은데. 그 치밀한 페르세포네가 그냥 버려두고 갔을 리도 없으니······. 어쩔 수 없나. “만약 저를 도와주신다면, 이걸 한 모금 맛보게 해 드리겠습니다.” 내가 코트의 안주머니에서 꺼낸 것은 예비로 빚어둔 ‘야마타노 오로치’의 뱀술이었다. 뚜껑을 따자, 들큼한 향취와 함께 감미로운 발효주의 냄새가 고루 퍼졌다. [그, 그것은······?] 저 심판관조차 깜짝 놀란 눈치였다. 오랜 세월을 살아온 존재에게 술은 곧 마약과도 같다. 긴 세월의 비극을 잊을 수 있는 유일한 수단. 다른 술도 아니고, 성좌의 부속으로 빚은 뱀술인데 더 말해 무엇하랴. [흐, 으흠. 흠······.] “싫으시면 그냥 가겠습니다.” [자, 잠깐만! 알겠다. 여왕님께서 남기신 것을 주마.] ······역시 먹히는군. 지난번에 봤던 깐깐한 심판관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었다. [흐아아······ 좋구나······.] 한 모금을 마시고 헤롱거리던 심판관은, 만족한 듯 웃더니 품속에서 노란 구슬을 꺼내 주었다. [여기, 대가다.] 영롱한 노란색 구슬. 나는 그것이 내가 간절히 찾아왔던 신유승의 영혼임을 깨달았다. 구슬을 받아 몇 번을 문지르자, 구슬이 희미한 빛을 내며 허공에 붕 떠올랐다. 나는 구슬에 손을 대고 생각을 전했다. ‘미안해, 내가 너무 늦었지?’ 이미 언어를 상당 부분 상실한 듯 구슬은 옅은 비명만을 흘렸다. [아······아.] 말을 잃고, 기억을 잃은 여자. 한평생을 모두 시나리오에 바쳤음에도, 그녀에게 남은 이야기는 끔찍한 고통의 역사뿐이었다. 그러니 보통이라면 이렇게 말할 것이다. 고생은 충분히 했으니, 이제 다 잊고 쉬라고. 하지만 신유승은 쉬어서는 안 된다. 그녀는 아직 이 세계에서 해야 할 일이 남아 있다. [아······저씨······?] 한참이나 말을 고르던 영혼이 부르르 떨렸다. [정말, 정말로······.] ‘그래.’ [어째서······?] ‘아직 이 세계에서 네가 해 줄 일이 남았어.’ 나는 그녀를 동정해 이곳에 온 것이 아니었다. 정말로, 신유승의 도움이 필요했을 뿐이다. 오랜 이야기를 쌓아 높은 영혼의 격을 가진 그녀만이 할 수 있는 일. 신유승이 살짝 두려운 기색으로 답해왔다. [내가······ 뭘 하면 되죠?] 나는 그녀의 영혼에 손을 댄 채, 내 생각의 일부를 보여주었다. 한참이나 말이 없던 신유승이 힘없이 웃었다. [하하, 하······ 잔인한 사람이네, 아저씨는······ 어떤 의미에서는 대장보다도 잔인해······.] ‘미안해.’ [하지만······ 좋아요. 할게. 아니······ 오히려 꼭 하고 싶어요. 바라던 바야. 이번에는 꼭, 나도 이 세계의 ‘결말’을 보고 싶으니까.] ‘기억이 더 사라질지도 몰라. 견딜 수 있겠어?’ 신유승이 고개를 끄덕였다. [두렵지 않아. 아저씨가······ 이야기해줄 거라 믿으니까.] 그 목소리를 마지막으로, 신유승의 영혼은 구슬 속으로 사라졌다. 아마 당분간은 나오지 못하겠지. 다시 우리가 만나는 순간은 그녀가 육체를 가진 이후일 것이다. 곁에서 우리를 보고 있던 심판관이 입을 열었다. [알고 있겠지만, 영혼을 명계에서 데리고 나간다 해서 육체가 부활하는 것은 아니다. 게다가 그 영혼은 이미 오랜 시일이 지나 새로운 육체에 정착하는 것은 불가능하지.] 심판관이 기분 나쁘게 큭큭거렸다. [연이 닿는다면 환생(還生)을 하는 방법도 있겠으나, 그 영혼은 너무나 많은 죄악을 저질렀기에 다시 인간으로 태어나지 못할 것이다. 만약 인간으로 태어나고자 한다면 영혼이 가진 모든 이야기를 버려야 할진대, 그렇게 된다면 그 영혼은 이미 네가 알던 존재가 아니겠지.] “알고 있습니다.” 페르세포네의 말처럼 영혼은 곧 이야기이다. 그러니 지금도 실시간으로 신유승의 영혼은 ‘신유승이 아닌 것’이 되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건 비단 신유승만 그런 건 아닐 터다. 나는 곧바로 내 전속 담당을 호출했다. ‘비형.’ 녀석은 말이 없었다. 나는 비형이 응답해 올 때까지, 구슬을 내려다보며 기다렸다. 오직 높은 격을 가진 존재만이 선택할 수 있는 환생체(還生體)······. 지금까지 이야기에 지배당해왔던 그녀는, 이제 이야기를 지배하는 존재로 거듭날 것이다. 마침내 채널에 비형의 기척이 느껴졌다. 나는 입을 열었다. ‘네 도움이 필요하다.’ ―뭔 도움?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함께 침묵하던 비형에게서, 나와 신유승의 영혼을 번갈아 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놈은 곧 내 말뜻을 눈치챘다. ―서, 설마 너······ 나한테 ‘그거’ 시키려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야, 잘 생각해. 그게 네 생각만큼 쉬운 일이 아니야. 걔, 그냥 이쯤에서 소멸하는 편이 나을 수도······. ‘채널 망하고 싶냐?’ ―제길. 야, 진짜 안돼. 나 그거 한 번도 안 해봤다고! ‘이제부터 해보면 되겠네.’ ―시발. 한참을 망설이던 비형이, 결국 허공에서 황금빛의 ‘알’ 하나를 내려보냈다. 가장 위대한 ‘이야기의 별’에서 내려오는 알. 나는 신유승의 영혼을 그 알 속에 집어 넣었다. 알은 부르르 떨며 선연한 광채를 내뿜더니, 다시 하늘로 올라갔다. 한참이나 말이 없던 비형이 어이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이런 식으로 내 ‘아이’를 받게 될 줄이야······. 나의 적은 시나리오 내부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41회차 미래에서 온 신유승. 그녀는, 이 회차에서 오직 나만을 위한 ‘이야기꾼’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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