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화
129화
베로니카의 높은 흉벽. 그 고지대의 풍광 아래로, 평원을 메운 거인들이 보였다. 한때는 인간이었으나 지금은 재앙이 된 존재들. 공필두는 성채의 모든 포탑을 가동하며 포효했다.
“빌어먹을 놈들. 여긴 내 땅이다!”
평원지대를 박살 내며 달려오는 일본인들의 숫자는 물경 오십에 달했다.
모르긴 몰라도 저 정도 병력이면 [피스 랜드]의 재앙 절반 이상이 모인 규모일 것이다.
두두두두두!
“꺼져라―!”
포를 갈겨대는 공필두는 약간 맛이 간 상태였다.
그가 왜 그런 상태가 됐는지는 모른다.
다만, 이지혜는 이렇게 생각했다.
아마 김독자에게 ‘그린 존’을 파괴당했던 후유증이 아직까지 남은 게 아닐까, 하고.
밀려오는 재앙의 대군을 보며, 이지혜가 손끝을 파르르 떨었다.
“젠장, 호수 같은 거라도 있었으면······.”
“할 수 있는 데까진 해보자.”
망루 쪽에서 걸어온 이현성이 이지혜의 곁에 섰다. 뒤를 돌아보니 이복순도 몸을 풀며 나오는 중이었다. 이지혜가 눈을 반짝였다.
“할머니, 혹시 배후성 힘 또 빌릴 수 있어요?”
“흘흘, 자꾸 조상님들 공덕을 바라면 쓰나?”
“아 뭐래 진짜. 군인 아저씨, 희원 언니랑 다른 일행들은 아직이래요?”
이현성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 투입자 소식이 없어. 들어오기 전 독자 씨 말로는 그 사람들도 보너스 시나리오 하고 있을 거라던데······.”
“젠장. 그럼 꼴랑 우리끼리 막아야 되는 거네.”
상공에 어둑한 그림자가 몰려든 것은 그때였다.
하늘을 까맣게 메운 작은 벌레떼들을 발견한 이지혜가 기겁을 했다.
“우왁?”
자세히 보니 군데군데 비행종들도 섞여 있었다.
이길영과 신유승의 괴수 대군이 수성 준비를 마친 것이다.
말벌을 닮은 충왕종에 탑승한 이길영이 손나팔을 불었다.
부우우우―!
흉벽 코앞까지 다가온 재앙들이 마침내 성을 무너뜨리기 시작했다.
이현성이 긴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온다.”
본격적인 수성전이 시작되었다.
두두두두두!
한쪽에서는 공필두의 포화가, 그리고 다른 한쪽에서는 소인들의 함성이 이어졌다.
“싸워라!”
“베로니카를 지켜!”
성곽 곳곳에서 폭음이 울려 퍼졌고, 흉벽은 재앙들의 발길질에 조금씩 부서져 내렸다. 이제 인간들은 정말 ‘재앙’이라 부르기에 적합해 보였다.
‘만약 나도, 재앙을 선택했다면 저렇게 됐을까.’
이지혜는 김독자의 말을 떠올리며 입술을 깨물었다.
답은 알 수 없었다.
일행들은 생각보다 잘 버텼다.
공필두의 무장요새가 있었고, 이현성의 ‘태산 부수기’가 재앙들에게 꾸준한 유효타를 먹였으며, 군집한 벌레와 괴수의 무리가 시간을 벌어주었다.
이대로라면, 잘만 하면 지킬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지혜는 그렇게 생각했다.
평원의 지평선에서 새카만 먹구름이 몰려오기 전까지는.
“······저건 또 뭐야?”
이지혜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재앙의 왕이 시나리오 버프 효과를 받습니다.]
[성좌, ‘여덟 머리의 군주’의 개연성 제약이 일부 해제됩니다.]
“미친, 저런 걸 어떻게 막아······.”
거대한 요새 크기의 뭔가가 이쪽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시뻘겋게 자라난 여덟 개의 머리와 꼬리.
‘아저씨! 빨리 좀 와!’
이지혜는 속으로 절규하며 장도를 빼 들었다.
*
키리오스의 영역에서 벗어난 우리는 기암괴석 지대를 지나 곧장 평원지대로 향했다.
“‘여덟 머리의 군주’는 이미 출발한 것 같아요. 이 근처에서는 그의 부름이 느껴지지 않아요.”
“렌 씨는 괜찮으십니까?”
“저는 배후성의 가호로 어느 정도 저항할 수 있어요. 하지만 약한 배후성을 가진 화신들은 벌써 평원지대로 몰려간 것 같네요······.”
[절대 왕좌]라고 해도, 떨어진 거리에 따라서 명령의 강도에 차이가 있는 모양이었다. 하긴, [절대]라는 수식어가 붙었다곤 해도 <스타 스트림>에 진정 [절대]라 부를 수 있는 것은 없다.
가는 길 곳곳에서 우리는 소인종의 시체를 발견했다. 아스카 렌이 씁쓸한 얼굴로 말했다.
“······일본인 모두가 ‘재앙’을 선택한 건 아니에요.”
“알고 있습니다.”
원작을 읽은 나였기에, 분명하게 말할 수 있었다.
‘소인’이 된 일본인이 아스카 렌을 제외하고는 보이지 않는 것은, 이미 다들 죽었거나 세계의 어딘가로 숨어버렸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 ‘재앙’을 택한 일본인들도 나쁘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냥 평범한 거죠.”
실제로 원작에서는 한국 측의 1차 투입자들 또한 상당수 ‘재앙’을 선택했었다. 그리고 아마도, 그것이 평범한 인간들의 선택일 것이다. 한수영도 거들었다.
“까놓고 말해서 ‘소인’을 선택했다고 정의로운 것도 아냐. 김독자 너도 ‘소인’을 지키려고 선택한 건 아니잖아.”
과연, 한수영답게 날카로운 지적이었다.
[작은 행성의 작은 성좌가 상처받은 눈으로 당신을 바라봅니다.]
소인의 편이든, 재앙의 편이든.
결국 이곳의 싸움은 구경거리가 된다.
사람들이 더욱더 역할에 몰입하는 것은 그 사실을 잊기 위해서인지도 모른다.
자신의 삶을 팔아 돈을 벌고.
그리고 다시 그 돈으로 다른 이야기들을 사고.
어쩌면 인간은 줄곧 그런 식으로 살아왔다.
쿠구구구구!
떠나온 기암괴석 지대에서 거대한 기운이 솟아나고 있었다. 꽤 거리가 멀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가공할 기세가 여기까지 느껴졌다.
“키리오스가 눈치챈 모양이군요. 서두르죠.”
기껏 무공을 가르쳐 달라고 해놓고 도망쳤으니, 붙잡히면 호된 꼴을 당할 것이다.
우리는 평원지대를 가로질러 베로니카 왕성 방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달리는 와중에도, 아스카 렌은 종종 기암괴석 지대를 돌아보았다.
한수영이 렌을 보며 물었다.
“아쉬워?”
“네? 아니에요.”
“하긴, 기분 이상하지? 직접 만든 캐릭터 실물로 본 건 처음일 거 아냐.”
“······네.”
“게다가 미남이었고.”
굳이 말하지 않았지만, 키리오스는 잘 생겼다.
‘멸살법’에서는 잘생긴 미남형을 묘사할 때는 흔히 ‘유중혁 뺨치게’라는 수사를 사용하는데, 그 수사가 딱 어울리는 인물이라고나 할까.
키가 좀 많이 작고, 성격이 좀 꼰대 같기는 하지만······.
자기가 만든 인물이 숨을 쉬고 말을 하며 돌아다니는 것을 보는 건 어떤 기분일까? ‘멸살법’ 작가가 어딘가에 살아있다면, 유중혁을 볼 때 비슷한 기분이지 않을까?
“참, 독자 씨. 그러고 보니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요.”
“네.”
“어떻게 키리오스의 환심을 사셨어요?”
“환심이라뇨?”
“보니까 키리오스가 독자 씨를 좋아하는 것 같더라고요.”
“······예?”
“키리오스는 누군가를 좋아하면 그렇게 틱틱대거든요.”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귀를 기울입니다.]
그러고 보니, 재능 없다고 구박당하는 것치고, 키리오스는 내게 꽤 잘 대해주는 편이었지. 매번 큰놈, 큰놈 그러면서 욕하던 것 치고는······.
“독자 씨.”
렌의 목소리에 돌아보니, 두 여자의 표정이 굳어져 있었다. 시선을 따라간 곳에서 시커먼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성채 베로니카가 있는 방향이었다. 우리는 너나 할 것 없이 서로를 마주 본 후 그쪽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성채 베로니카의 흉벽이 드러났다.
늘어져 있는 괴수종들의 시체와, 터지거나 짓밟힌 소인종들의 시신.
뒤통수가 으깨진 인간들의 모습도 보였다.
아마 이현성의 솜씨가 아닐까 싶었다.
내성으로 들어갈수록 소인종들의 시체는 점점 더 늘어났고 일본인들의 시체는 점점 줄어들었다.
······설마, 너무 늦은 건 아니겠지.
그리고 잠시 후, 우리는 박살 난 별궁의 뒤쪽에서 끔찍한 광경을 목격했다.
두두두두두!
공필두의 포성.
다행히 일행들은 무사했다. 이현성은 심하게 다친 듯했고, 이지혜와 아이들도 녹초가 되어 있었지만 생명에는 지장이 없어 보였다. 하지만 위태로운 것은 매한가지였다. 그리고 그들이 싸우는 것은······.
“······미친.”
드센 한수영도 질렸는지 내 쪽으로 두어 걸음을 물러섰다.
“아아! 이즈미······.”
그렇게 중얼거리던 아스카 렌은 고통스러운 듯 관자놀이를 쥐더니 신음을 토하며 자리에 엎드렸다.
고오오오오.
스무 명의 일본인들이 하나의 존재를 중심으로 뭉쳐 있었다.
두 동공이 까맣게 변한 남자의 몸 위로, 상공 전체를 뒤덮는 거대한 괴물의 그림자가 일렁이고 있었다.
핏빛 계곡을 연상시키는 머리와 꼬리.
재앙의 왕이 유선형의 동체를 드리운 채 똬리를 틀고 있었다.
문득 머리 하나가 주변을 굽어 보더니, 가까이에 있던 소인종들을 향해 목을 숙였다. 겁에 질린 소인종들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는 순간. 뱀의 입이 그들을 향해 웃었다.
콰지지직!
마치 장난이라도 치듯 주둥이가 스친 자리에, 으깨진 소인종들의 하반신만이 남았다.
“사, 살려줘! 살려주세요!”
으저저적! 꽈드드득!
뭉개진 소인종의 살점들이 붉은 뱀의 입속으로 고스란히 빨려 들어갔다.
그러나, 아무도 그것을 제지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일행들을 비롯한 모든 소인종들은 굳어버린 마네킹처럼 그 광경을 지켜볼 뿐이었다.
뒤늦게야 깨닫는다.
일행들이 아직 무사했던 것은 그들이 열심히 싸웠기 때문이 아니었다.
포성은 이어지고 있었으나, 공필두의 얼굴을 채우고 있는 것은 살의가 아니라 체념이었다.
이현성도, 이지혜도, 다른 모든 일행들도.
이들이 아직 살아있을 수 있었던 것은, 이들이 설화급 성좌의 ‘한 끼 식사’였기 때문이다.
먹잇감을 고르는 뱀의 머리가 벌어질 때마다 너덧 명의 소인종들이 육편이 되어 사라졌다.
[작은 행성의 작은 성좌가 고통에 몸부림칩니다.]
[작은 행성의 작은 성좌가 비명을 지릅니다.]
한수영이 중얼거렸다.
“씨발······ 대체 뭐야.”
일본삼대악귀 중 하나인 슈텐도지의 아버지이자, 치수(治水) 신화의 괴물.
저 괴물이 바로, ‘여덟 머리의 군주’인 야마타노 오로치였다.
아마 저 녀석에 대적하면, 나는 이빨만 스쳐도 찢겨 죽게 될 것이다.
“싸, 싸워선 안 돼요. 절대로 이길 수 없어요.”
아스카 렌의 중얼거림에, 넋이 나가 있던 한수영도 나를 붙잡았다.
“김독자. 설마 저런 거랑 싸울 거 아니지? 도망가자. 응?”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거대한 머리가 다시 한번 소인종의 무리를 휩쓸었다.
어항에 갇힌 물고기를 꺼내먹듯 자연스러운 움직임이었다.
“아직 안 늦었어. 지금이라면 애들 구할 수 있어. 쟤들 빨리 데리고······.”
콰드드득!
“야! 지금 쟤들 다 죽게 생겼다고!”
나는 한수영을 뿌리치며 말했다.
“조금 더 기다려.”
지금 나서면 저 녀석은 절대로 토벌할 수 없다.
조금 더 기다려야······.
뱀의 주둥이가 마침내 이지혜 쪽을 향했다.
젠장.
나는 반사적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그쪽을 향해 달렸다. 하지만 뱀의 머리가 그보다 빠르게 이지혜를 향해 움직이고 있었다.
그런데, 그 순간.
뭔가가 나보다 빠르게 움직였다.
콰아아아앙!
폭음과 함께, 뱀 머리 하나가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며 땅에 처박혔다.
먼지구름이 걷히자 뱀의 머리를 짓밟고 선 사내의 모습이 보였다.
특유의 냉막하고 오연한 눈빛이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김독자.”
그래, 왜 이렇게 늦나 싶었지.
나는 씩 웃으며 말했다.
“늦었네, 유중혁.”
나와 똑같이 소인종이 되었음에도, 유중혁에게서는 강력한 패기가 느껴졌다. 녀석은 보랏빛 광택이 도는 장도 하나를 쥐고 있었다.
역시 그 칼을 구해왔군.
우리는 말 없이 서로를 힐끗 본 후 동시에 재앙을 향해 돌아섰다.
[성좌, ‘여덟 머리의 군주’가 당신에게 살의를 드러냅니다.]
식사 시간을 방해받은 야마타노 오로치가, 자신의 몸피를 부쩍 키우기 시작했다.
쿠구구구구!
“비켜라 김독자. 이 녀석은 내가 잡는다.”
“아니, 이번에는 곤란해.”
나는 유중혁의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전용 스킬, ‘책갈피’를 발동합니다.]
강력한 백청의 기운이 심장에 들끓는 것을 느끼며, 나는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이번에는 내가 잡아야 하거든.”
이번 시나리오에서, 나는 지금껏 지켜온 불살(不殺)의 원칙을 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