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화

114화 마지막으로 본 김남운의 표정이 잔상처럼 남긴 했지만, 애초에 놈을 구해주러 온 것도 아니니까 어쩔 방도가 없었다. 게다가 지옥이 좋다는 놈을 뭐하러 구해줘? 다리가 없는 심판관은 유령처럼 조용히 계단을 올라갔다. 도중에 꽤 격이 높아 보이는 몇몇 상징체(象徵體)들이 나를 흥미로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하데스의 궁에 기거하는 성좌들일까? 잘 모르겠다. 여기에 있다고 죄다 성좌인 것은 아니니까. 내가 흘끔거리는 것을 눈치챘는지, 심판관이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잘 따라오지 않으면 길을 잃을 것이다.] 쇠를 긁는 듯한 목소리에 속이 거북해진다. 그렇지만 올바른 조언이었다. 나는 심판관의 눈치를 살피다 천장을 보며 입을 작게 움직였다. ‘이봐, 듣고 있지?’ 심판관에게는 들리지 않을 정도의, 작은 속삭임. ‘듣고 있는 거 알아.’ 이곳은 지상이 아니라 하데스의 명계다. 나는 궁금했다. 과연 여기서도, 도깨비의 ‘채널’이 제 기능을 하고 있을까? 그러자, 귓가에 희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옛. 보고 있습니다. 채널의 도깨비 통신. 비형의 목소리는 아니었다. ‘새로운 도깨비인가?’ ―예. 하급 도깨비 ‘영기’입니다. 비형 어르신께서 관리국 일로 잠깐 채널을 비우셔서, 대리를 맡고 있습니다. 도깨비 영기. 아마 낮에 시나리오의 보상 정산을 짬처리 당했던 그 초짜 도깨비인 듯했다. 나는 바로 본론을 꺼냈다. ‘너 일 제대로 안 해?’ ―예? ‘히든 시나리오 갱신됐는데, 왜 안 알려줘?’ 이렇게 무시무시한 곳에 왔는데, 히든 시나리오 보상이라도 제대로 받아가야지. ―아, 그, 그건······! 얼 타고 있는 걸 보니 초짜는 맞는 모양이다. 새삼 비형이 일 처리를 얼마나 잘 하는 녀석인지 알겠다. 그냥 지능이 좀 모자란 덜떨어진 도깨비라고만 생각했는데······. 그런데 십 초 정도 침묵을 지키던 도깨비 영기가 갑자기 말을 더듬었다. ―저, 저기······. ‘또 왜.’ ―시나리오 갱신은 어떻게 하는 겁니까? 나는 잠시 할 말을 잊었다. ‘화신한테 그걸 묻는 도깨비가 어딨냐?’ ―그, 그게 비형 어르신께서 잘 모르겠으면 김독자 씨한테 물어보라고. 비형 이 새끼가 지금 나한테 고문관을 맡기고 간 건가? ―자,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다른 도깨비한테 물어보고 오겠습니다. 아, 그리고······. ‘······또 뭐?’ ―죄송하지만, 밀린 ‘간접 메시지’를 좀 띄워도 되겠습니까? 제가 이런 상황에서 띄우는 건 또 처음이라······. 나는 마지 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설마 비형 자식이 그리워지는 날이 올 줄이야······. 그러자, 머릿속으로 폭발적인 메시지가 밀려 들어왔다. [성좌, ‘술과 황홀경의 신’이 당신의 곤경에 즐거워합니다.]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당신의 모험에 흥분합니다.] [성좌, ‘은밀한 모략가’가 당신이 어떻게 탈출할지 몹시 궁금해합니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당신이 전우에게 무사히 돌아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 역시, 성좌 녀석들도 죄다 내 꼴을 지켜보고 있었구만. 한편, 감탄하는 녀석들도 있었다. [성좌, ‘외눈 미륵’이 명계의 궁전에 감탄합니다.] [성좌, ‘대머리 의병장’이 명계의 모습에 큰 충격을 받습니다.] [성좌, ‘대머리 의병장’이 자신의 종교를 의심하기 시작합니다.] ······. 위인급 성좌들에게는 이것도 꽤 진풍경일 것이다. 모든 성좌들이 하데스의 성에 올 수 있는 것은 아니니까. [12000코인을 후원받았습니다.] 단지 하데스의 궁전을 보여준 것만으로도 12000코인이라니. 엄청난 이득이었다. 하긴, 굳이 따지자면 나는 지금 촬영이 금지된 사유지를 불법적으로 송출하고 있는 셈이니까 그 정도는 받아야겠지. 그리고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묵묵히 걸어가던 심판관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도착했다.] 끼이익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자, 거대한 연회장이 갖추어진 홀이 나타났다. 사방이 어두컴컴했기 때문에 내부가 잘 보이지는 않았다. 심판관이 사라지고 문이 닫혔다. 어슴푸레한 홀의 중앙에 작은 불이 켜졌다. 고색창연한 분위기의 타원형 테이블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임금의 수라상이라 해도 그만큼 화려할까 싶을 정도의 크기. 새카만 벨벳이 깔린 테이블 위에 침샘을 자극하는 음식들이 가득 차려져 있었다. 그 테이블의 끝에, 나를 바라보는 한 여인이 있었다. [재미있군요. 이 성에 살아있는 영혼이 온 것은 정말 간만의 일인데. 게다가 불쾌한 방청객들까지 데리고 오다니······. 오늘은 정말 특별한 날이 되겠군요.] 나는 그녀가 누구인지 바로 알아보았다. 이 하데스의 궁전에서, 안주인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존재는 단 하나밖에 없으니까. 나는 꾸벅 고개를 숙이며 입을 열었다. “영광입니다, ‘가장 어두운 봄의 여왕’이시여.” 가장 어두운 봄의 여왕. 그녀는 바로 하데스의 아내인 명계의 여왕 ‘페르세포네’였다. [내 수식언을 알고 있다니, 예의가 바른 화신이군요.] “과찬이십니다.” [더 흥미로운 것은, 내 진언(眞言)을 듣고도 그대의 영혼이 흔들리지 않는다는 것이고요.] 그러고 보니, 성좌의 진언을 직접 듣고 있는데도 별다른 느낌이 없었다. 페르세포네는 최소 설화급 이상의 성좌. 보통이라면 격의 차이 때문에 내 영혼은 그녀의 말을 듣는 순간 커다란 타격을 받거나 소멸했어야 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위인급인 김유신의 진언을 듣는 것만도 버거웠는데······. [전용 스킬, ‘제4의 벽’이 강하게 활성화되어 있습니다.] 스킬 메시지에 ‘강하게’라는 수사가 붙은 것은 처음이었다. 아무래도 만나는 상대가 남다르다 보니, 어쩌면 내 무의식은 이 상황을 더욱 ‘비현실’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앉으세요, 화신 김독자.] 융숭한 대접에 감사하며, 나는 그녀의 맞은편에 조용히 착석했다. 솔직히 생각지도 못한 호의였다. 달콤한 음식들의 향기가 코를 간질였다. 둘러 보았지만, 테이블에 앉아있는 것은 페르세포네뿐이었다. “명왕께서는······?” [왕께선 당신의 갑작스런 방문으로 심기가 불편하세요. 때문에, 오늘의 용건은 저에게 말씀하시는 편이 좋을 것 같군요.] 결국 이렇게 되나. 예상은 했다. 올림포스의 3주신씩이나 되는 존재가, 일개 화신 하나가 찾아왔다고 대뜸 만나줄 리가 없으니까. 게다가 나는 오르페우스처럼 리라를 잘 연주하는 것도 아니다. “저,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한 가지 질문을 드려도 되겠습니까?” [말하세요.] “지금 그 모습은 여왕님의 진체(眞體)이십니까?” [당연히 상징체죠. 제 진체는 한낱 인간인 당신이 견딜 수 있는 충격이 아니에요.] 나는 페르세포네의 ‘상징체’를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그녀는 초라한 노파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지독한 악취미로군. 솔직히,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페르세포네가 옅게 미소했다. [나이 든 여자는 취향이 아닌가 보죠?] “그런 문제가 아닙니다.” 그녀가 할머니의 모습을 하고 있든 할아버지의 모습을 하고 있든, 그런 건 별로 중요한 게 아니었다. 문제는 그녀가 변신한 ‘할머니’가, 내가 ‘첫 번째 시나리오’의 지하철에서 구하지 못했던 바로 그 할머니의 모습이라는 것이었다. [불편하다면 다른 모습으로 바꿔줄 수도 있어요.] 천천히 일그러진 페르세포네의 모습이 유상아의 모습으로 변했다. 그것도 평소의 유상아가 아니었다. 은은한 시스루가 섞인 검정색 차이나 드레스에 가터벨트를 차고, 고혹적인 눈화장을 한 유상아······. 누가 보면 내 머릿속에 들어왔다 나간 줄 알겠다. 시선을 둘 곳이 없어진 내가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그냥 할머니로 해주십시오.” 물론 페르세포네는 내 말을 듣지 않았다. [시간이 없는 것 같은데,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죠.] “그래도 되겠습니까?” [사실 내 아이에게 조금 듣긴했지만, 그래도 당사자 입으로 듣는 것도 그 나름대로의 의미가 있겠죠.] 아이라면 디오니소스를 말하는 거겠지. 고개를 끄덕인 나는 짧게 숨을 들이켠 뒤, 한 번에 말을 쏟아냈다. “저는 한 여자의 영혼을 찾고 싶습니다. 전해 들으셨는지는 모르겠지만, 거래 준비는 되어 있습니다.” [영혼이라······ 간만에 옛날 생각이 나는군요.] 영롱하게 눈꺼풀을 내리깐 그녀는 잠시 뭔가를 생각하는 듯했다. 이윽고, 페르세포네의 긴 손가락이 천천히 움직여 접시 위의 스테이크를 썰기 시작했다. 나는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렸다. 해체는 천천히 진행되었다. 포크가 살점을 단단히 잡았고, 나이프가 천천히 앞뒤로 움직이며 정성껏 고기를 썰어갔다. 힘줄을 피해 살을 바르자, 깨끗한 단면에 붉은 육즙이 먹음직스럽게 배어 있었다. 조심스레 움직인 포크가 고깃덩이를 찔렀다. 페르세포네는 그것을 먹을까 말까 고민하는 얼굴이었다. 마치, 내 이야기 따위는 오래전에 잊어버린 것처럼. 약간 조급해진 내가 입을 열려는 순간, 그녀의 입이 먼저 열렸다. 물론, 스테이크를 먹기 위함은 아니었다. [이 세계에 ‘영혼’이라는 건 존재하지 않아요.] 영혼은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현대물리학자들이 당연하게 동의할 법한 사안이었지만, 문제는 그 발화를 한 존재가 ‘신’이라는 것에 있었다. 그것도 오랫동안 영혼의 논리를 변호해 온 올림포스의 신. 나는 비꼬듯 말했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무덤에서 벌떡 일어날 법한 선언이군요.” [그 아이들도 성좌가 되었으니, 이제 무덤에 있지는 않겠죠.] “저는 말장난을 하러 온 게 아닙니다.” [저도 장난치는 게 아니에요. 화신 김독자. 영혼이라는 건 존재하지 않아요. 그건 자아의 연속성을 바라는 인간들이 만들어 낸 환상일 뿐이니까요.] “그럼 명계의 사람들은 뭡니까? 그들은 영혼이 아닙니까?” 그녀는 대답 대신, 방금 자신이 썰었던 스테이크를 가리켰다. [그들은 이것과 같죠.] 천천히, 페르세포네의 입속으로 스테이크가 빨려 들어갔다. 아주 오랫동안 그 맛을 음미하듯, 그녀는 시간을 들여 고기를 씹었다. 새빨간 육즙이 묻은 그녀의 입술이 매혹적으로 반짝였다. [음, 아주 특상품이네요. 당신도 한 번 들어보지 그래요?] 내 눈앞에도 그녀가 먹은 것과 똑같은 스테이크가 있었다. 나는 그것을 잠시 내려다보다가 말했다. “싫습니다.” [무례를 범할 셈인가요?] “예. 정말 죄송하지만, 무례를 좀 범해야겠습니다.” 분명 먹으면 맛은 있을 것이다. ‘멸살법’에서도 이 음식의 맛을 장장 12페이지나 공들여 묘사하고 있으니까. 하지만 그 긴 묘사의 끝에는, 다음과 같은 문장도 쓰여 있었다. 「그 후, 회차가 끝나는 순간까지 유중혁은 그 음식을 먹은 것을 후회했다.」 명계의 음식을 먹은 자는, 지상으로 되돌아갈 수 없게 된다. 내 속을 읽은 듯 페르세포네가 웃었다. [명계의 삶은 당신이 생각하는 것처럼 끔찍하지 않아요. 일설에 알려진 것들도 대부분 거짓이고요. 명왕의 허락만 있다면, 얼마든지 지상을 외유할 수도 있어요. 당신 세계로 치면 ‘직업 군인’과 비슷한 개념인 거죠.] “군생활은 제 인생에서 가장 끔찍한 기억이었습니다만.” [그래요? 그쪽 나라 수컷들은 툭하면 ‘그냥 군대에 말뚝이나 박아야지’라고 입버릇처럼 말하지 않나요? 그래서 별거 아닌 줄 알았는데, 오해가 있었나 보군요.] 다른 나라의 여신이 한국 남자에 대해 왜 이렇게 잘 알고 있는지 모르겠다. 페르세포네가 말을 이었다. [화신 김독자. 당신은 상상하는 것 이상의 대우를 받을 수 있을 거예요.] “전문 하사가 되길 권하던 행정관도 저한테 비슷한 소릴 했었죠.” [그 사람은 저처럼 스테이크를 권하지는 않았을걸요? 가령, 지금 당신 눈앞에 놓인 그 스테이크. 그걸 먹으면 어떻게 되는지 알아요?] “소의 육즙을 느낄 수 있겠죠.” [당신은 지금 당장 ‘소드 마스터’가 될 수 있어요.] 너무 태연히 나온 말이라, 나는 순간 잘못 들은 거라 생각했다. 소드 마스터. 그것은 이계로 떠난 귀환자들이 각고의 노력 끝에야 도달할 수 있는 드높은 경지였다. [그리고 그 옆의 파스타. 그걸 먹으면 당신은 대륙을 평정할 ‘대마법사’가 될 수 있고요.] ······이 파스타가? [수프? 당연히 ‘SSS급 헌터’가 될 수 있는 수프죠.] 이거······ 수라상이 아니라, 기연상(奇緣床)이었나? 나도 모르게 침이 꿀꺽 넘어갔다. 이 고기를 하나만 먹으면, 나는 지금의 유중혁을 가볍게 능가하는 힘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래도 먹지 않을 건가요?] 천천히 포크를 움직여 스테이크를 한 점 집어 보았다. 그런데 포크의 끝이 고깃덩이 속으로 푹 파고드는 순간, 이상한 장면들이 눈앞을 스쳐갔다. 그것은 홀로 검을 단련하는 한 사내의 기억이었다. 「약해져선 안 돼. 검을 배워야 한다.」 「노력하고, 또 노력해서 더 강해질 거야.」 「드, 드디어 해냈다 해냈다고! 내가 해냈어!」 드문드문 이어지는 몇 가지 장면들. 순간 놀란 나는 포크를 내려놓았다. 지금 내가 찌른 이것은 죽은 소가 아니었다. “설마 이건······?” 페르세포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이 작은 고깃덩어리. 이게 인간이 영혼이라 믿는 전부예요.] 그녀는 다시 한 점의 고기를 맛있게 먹어치웠다. 이걸 먹으면 소드 마스터가 될 수 있다고 말한 페르세포네의 말이 뒤늦게 이해되었다. 나는 말했다. “······이건 소드 마스터였던 남자의 기억이군요.” [기억? 아니에요.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녀는 잠시 단어를 고르더니, 말을 이었다. [이야기.] 입술을 핥으며 나를 보는 그 눈빛에, 순간 소름이 끼쳤다. [모든 성좌들이 가장 좋아하는 음식인, ‘이야기’죠.]
🏠 인덱스 ← 이전 화 다음 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