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화

112화 술과 황홀경의 신. 올림포스에 그런 수식언을 사용할만한 녀석은 올림포스의 12신 중 하나인 디오니소스뿐이다. [성좌, ‘술과 황홀경의 신’이 콧노래를 부릅니다.] 노랫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떨어진 술방울들이 어떤 멜로디에 맞춰 춤을 추는 것은 볼 수 있었다. 술방울들은 생명이라도 가진 것처럼 움직여 수많은 음표들을 바닥에 자아냈다. 음표들은 나와 유상아의 사이를 반복해서 움직였다. 그 음표들을 유심히 보던 유상아가 입을 열었다. “강아지 왈츠에요.” “악보도 볼 줄 아십니까?” “조금은요.” 유상아가 고개를 갸웃하며 말을 이었다. “갑자기 쇼팽이라니, 무슨 뜻일까요?” 나라고 알 턱이 없다. 애초에 디오니소스가 쇼팽을 안다는 것도 이상했다. 아니지. 원작에 따르면 후대의 음악 문화에 무척 관심이 많은 성좌였으니, 이상한 일은 아닌가. 음표들은 강아지의 발맞춤처럼 앙증맞은 원을 그리더니, 남은 소주병들을 향해 일제히 화살표를 만들었다. 유상아가 말했다. “······술을 더 마시라는 것 같은데요?” “일단 마셔보죠.” 아무리 봐도 그렇게밖에는 해석이 안 된다. “유상아 씨는 조금만 드세요. 적어도 한 사람은 제정신이어야 하니까요.” 내가 맛이 가면 일행들을 지킬 사람이 필요하다. 급한대로 사이다를 마시고 잠든 이길영과 신유승을 깨울 수도 있겠지만, 오늘만큼은 푹 자게 내버려 두고 싶었다. “독자 씨는 술 잘 못 드세요?” “센 편은 아닙니다.” 나는 유상아와 가볍게 잔을 부딪친 후, 소주 한 잔을 털어 넣었다. 간만에 들어간 알코올에 속이 후끈했다. 하지만 음표는 여전히 멈추지 않았다. “······더 마시라는 것 같아요.” 나는 연거푸 몇 잔을 더 마셨다. 속에서 열이 올라오더니 금세 얼굴이 발갛게 달아오르는 게 느껴졌다. 음표들의 움직임이 더욱 활발해졌다. 아니, 내가 취해서 활발하게 보이는 걸까. 유상아가 미소지었다. “그래도 같이 마시니까 좋네요. 조금 적적했는데.” 그렇게 몇 잔을 더 마셨을까. 알딸딸한 취기가 올라오면서 나도 조금 기분이 좋아졌다. 문득 돌아보니 유상아와의 거리가 부쩍 가까워져 있었다. 분명 아까는 꽤 거리가 떨어져 있었는데······. 착각일까. 호흡 소리가 거칠었다. 내 호흡인지, 유상아의 호흡인지 모르겠다. 유상아의 어깨가 가볍게 내 어깨를 스쳤다. “독자 씨.” “예.” 분명 맨얼굴일 텐데도 잡티 하나 찾아보기 힘든 피부. 살짝 몽롱해진 유상아가 내게로 천천히 몸을 기울이고 있었다. 점점 더 가까워지는 그녀의 얼굴. 한 쌍씩 짝을 지은 4분음표와 8분음표들이 우리 주변을 맴돌며 격렬한 댄스를 췄다. 어깨에 닿은 보드라운 감촉 때문인지, 갑자기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이거 뭔가 이상한데. [전용 스킬, ‘제4의 벽’이 당신의 취기를 누그러뜨립니다.] 메시지와 함께, 갑자기 정신이 확 깨며 머릿속이 맑아졌다. 그래, 이런 일이 현실에서 일어날 리가 없다. 그 철저한 유상아가 이런 흐트러진 모습이라니. 이건, ‘멸살법’이니까 가능한 일인 것이다. 나는 유상아의 어깨를 단단히 붙들며 말했다. “유상아 씨, 정신 바짝 차려요.” “네? 아······ 아?” 갑자기 화들짝 놀란 유상아가 눈을 깜빡였다. 취기에도 변함없던 그녀의 얼굴이 처음으로 발갛게 물들었다. “제, 제가 뭘······.” 역시, 이건 유상아의 의지가 아니었다. 나는 바닥을 맴도는 음표들을 향해, 조금 비참한 기분으로 입을 열었다. “장난은 그만하고, 슬슬 본론으로 들어갔으면 합니다만.” 그 순간, 음표들이 동시에 멈춰섰다. 한밤의 축제가 일시에 멈춰선 듯 불온한 침묵이었다. 마시던 술들이 일제히 엎어졌고, 바닥에 모인 술방울들이 파츠츠츠, 스파크를 튀었다. 이윽고 술방울들은 하나의 문자열을 만들었다. ―흥을 깨는 녀석이군. 나는 바닥에 쓰여진 문자에 조금 놀랐다. 겨우 술방울로 글자 몇 개 쓴 게 뭐 그리 대단한 거냐고 물을지 모르겠지만, ‘멸살법’의 세계에서 성좌들이 ‘의사’를 전한다는 것은 그만큼 대단한 일이었다. 괜히 많은 성좌들이 도깨비의 채널을 이용해 ‘간접 메시지’를 전하는 게 아니다. 애초에 배후성이나 도깨비의 도움 없이 자신의 의사를 지상에 전파하는 것은 성좌들 중에서도 최상급의 존재들이나 가능했고, 또 개연성의 소모도 극심했다. 이 세계의 개연성은 그만큼이나 ‘언어’에 민감하다. 하늘의 ‘그레이트 홀’에서 희미하게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계의 신격도 디오니소스의 존재를 눈치챈 모양이었다. 굳이 화신을 통하지 않고 직접 의사를 전달한 것을 보면, 아마 뒷감당할 자신이 있는 모양인데······ 과연, 올림포스의 12신쯤 되면 다르다 이건가. 나는 일부러 도발하듯 입을 열었다. “그렇게 자신 있으시면 직접 오셔서 이야기하시죠.” 그러자 문자열이 움직였다. ―난 촉수 놈들이 싫어. 곧 죽어도 자기가 진다는 얘긴 안 하는군. ―싸우는 것도 귀찮아. 그리고 내가 직접 내려가면 전부 죽어. 사실 나도 기대는 안 했다. 그리고 정말로 올림포스 12신급의 성좌가 강림하면 서울은 그대로 가루가 되어버릴 것이다. ―우리 어머니도 아버지한테 그렇게 죽었거든. 그 문장을 본 유상아가 내게 속삭였다. “······저게 무슨 뜻이죠?” “아마 자기 탄생 신화를 얘기하는 걸 겁니다.” 내가 알기로, 디오니소스의 부모는 제우스와 테베의 공주 세멜레다. 제우스와 세멜레의 사이를 질투하던 헤라는, 어느 날 세멜레의 유모로 분장하여 세멜레를 다음과 같은 말로 부추긴다. ‘제우스님이 가짜일지도 몰라요. 그러니 올림포스에 계실 때의 진짜 모습을 보여달라고 하세요.’ 그 꾐에 넘어간 세멜레는 제우스에게 정말로 그런 부탁을 하게 되고, 얼마 뒤 제우스의 진체(眞體)에서 나온 광채에 맞아 타죽게 된다. 내 이야기를 듣던 유상아가 고개를 갸웃했다. “어······ 제가 아는 전승이랑은 좀 다른데요? 제가 알기로 저분의 어머니는 테베의 공주가 아니라······.” 유상아의 식견에 나는 조금 놀랐다. 한국사 1급이 아니라 신화사 1급도 가지고 있는 게 아닐까 의심스러울 정도다. 물론 그런 자격증은 없지만. 문자열이 즐겁다는 듯 말을 바꾸었다. ―흐흠. 나에 대해 제법 잘 알고 있는 인간들이구나. 유상아의 말대로, 디오니소스의 탄생 신화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테베의 공주 세멜레가 어머니인 버전. 그리고 다른 하나는, 하데스의 부인인 ‘페르세포네’가 어머니인 버전이었다. 나는 디오니소스에게 물었다. “그러고 보니 궁금하군요. 둘 중 어느 쪽 전승이 진짜입니까?” ―그게 중요한가? “중요합니다. 제겐 후자여야 할 이유가 있거든요.” 사실, 정희원의 제안대로 술판을 벌인 것은 처음부터 디오니소스를 유인하기 위해서였다. 페르세포네의 아들 디오니소스. 만약 이쪽 전승이 맞다면, 디오니소스는 높은 확률로 하데스의 부인인 페르세포네와 접선이 가능할 것이다. ―무례한 인간이로군. 문자열을 만들던 술방울들이 파르르 떨렸다. ―하지만 나는 무례한 인간을 좋아하지. 사실, 전승이 어느 쪽인지는 이미 알고 있었다. ‘멸살법’에서도 디오니소스에 대한 이야기는 잠깐 언급되니까. ―예전에도 너처럼 만용을 부리던 인간이 하나 있었다. 리라를 매우 아름답게 연주하던 녀석이었지. 하지만 그놈도 끝이 좋지 않았어. “저는 다를 겁니다.” ―명계의 입구를 열어줄 수는 있다. ‘부유한 밤의 아버지’는 나를 좋아하지 않지만, 명계의 여신은 내 청을 들어줄 테니까. 하지만 그곳은 매우 위험하고, 네놈이 살아 돌아올 거란 보장은 없다. “괜찮습니다.” ―좋군. 나는 간절한 인간이 좋아. 너무도 순순히 청을 들어줄 분위기여서, 나는 오히려 긴장했다. 디오니소스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성좌니까. ―명심해라. 너에게 주어진 것은 12시간뿐이다. 그 안에 돌아오지 못한다면, 너는 영원히 네가 살던 시나리오로 돌아올 수 없을 것이다. 눈앞에 일렁이는 현기증이 심해졌다. 갑작스런 졸음이 찾아왔다. 나는 무슨 일이 일어나려는지 깨달았다. 젠장, 이래서 술을 먹인 거였군. 나는 다급히 말했다. “유상아 씨, 애들을 깨우세요.” 아마도, 그것이 내 마지막 말이었을 것이다. [새로운 히든 시나리오가 도착했습니다.] 눈을 감는 순간, 술방울이 키득키득 웃는 것 같았다. ―‘부유한 밤의 아버지’가 너를 마음에 들어하길 바라마. * [성좌, ‘술과 황홀경의 신’이 당신의 영혼을 인도합니다.] [당신의 몸이 육신의 구속에서 벗어납니다.] 마약이라도 한 것처럼 머릿속에서 수많은 색감들이 번져나갔다. 이마에서 지끈거리는 통증이 일었고, 곳곳에서 희미한 목소리가 들렸다. [저자는 누구지?] [······흥미롭군.] [화신의 영령이 성좌들의 세계에 발을 들였는가.] [후회하게 될 것이다.] 수런거리는 음성들. 아마 올림포스 녀석들이겠지. [전용 스킬, ‘제4의 벽’이 강하게 활성화됩니다.] 시끄럽게 떠들던 목소리들은 음소거라도 한 듯 일순간에 사라졌다. [당신은 생자(生者)의 영혼으로 명계에 진입하였습니다.] [명계의 심판관들이 당신의 존재를 눈치챘습니다.] 마지막으로 들려온 메시지와 함께, 수많은 기척들이 동시에 내 주변에서 사라졌다. 세상이 빠르게 한 바퀴 돈다 싶더니, 그대로 몸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잠시 후, 어딘가에 도달한 느낌이 들었다. 좀처럼 움직이기가 힘들었지만, 눈을 떴을 때 보일 정경은 대강 짐작이 갔다. 명계를 이루는 끈적한 공기. 손끝에 감기는 새카만 모래들. 아마 나는 하데스가 다스리는 명계의 강가에 가 있을 것이다. 하데스의 궁전으로 가는 아케론 강이 있을 것이고, 저승의 뱃사공 카론이 날 기다리고 있겠지. 그리고······. “야! 일어나! 여기서 뭐하는 거야!” 둔탁한 뭔가가 머리를 때린다 싶더니, 새카만 석유 같은 것이 내 몸 위로 쏟아졌다. 나는 숨을 쿨럭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누군가가 내 몸을 더듬더니, 멱살을 잡고 그대로 나를 들어 올렸다. “뭐야, 신참인가? 처음 보는 얼굴인데.” 나 역시,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험악한 인상에, 온몸에 근육이 우락부락한 사내. 주변 사람들이 대롱대롱 매달린 나를 구경하며 이죽거렸다. “허우대는 멀쩡해 보이는데? 몸 좀 뒤져봐. 뭔가 갖고 왔을 수도 있잖아.” “야야, 함부로 건드리지 마. 여기 떨어진 거 보면 저놈도 어지간한 놈일 거라고. 얼마 전에 온 그 미친놈 잊었어?” “아 그놈은 좀 특별하게 미친놈이었고. 그런 놈이 흔하겠어?” 나는 멋대로 지껄이는 사내들을 내버려 두고 주변 정경을 살폈다. 뜨거운 열기가 느껴지는 드넓은 장소. 망령들이 들끓는 걸로 봐서, 일단 명계는 맞는 것 같았다. 명계의 금속으로 빚은 철골들이 곳곳에 세워져 있었고, 금속을 제련하기 위한 화로들도 보였다. 마치 커다란 공장 같은 분위기였다. 이승에서 죽도록 일만 하다 죽은 망령들이, 이젠 죽어서도 명계의 노예가 되어 무언가를 만들고 있었다. 얼핏 봐서는 거대한 로봇 같이 생겼는데······. 뭘 하는 곳이지 여긴? “어이, 지금 내 말 무시하는 거냐?” 나는 정말로 놈의 말을 무시한 채 천천히 녀석의 팔을 꺾었다. “뭐, 뭐야! 이놈 무슨 힘이······!” 이런 잔챙이들이나 상대할 여유가 없었다. 나는 일단 도착한 히든 시나리오부터 확인하기로 했다. + <히든 시나리오 ― 명계 산책> 분류 : 히든 난이도 : A+ 클리어 조건 : 심판관들의 눈을 피해, 무사히 지상으로 돌아갈 방법을 찾으시오. 제한시간 : 12시간 보상 : 10000코인 실패시 : 당신은 강제로 명계의 주민이 될 것입니다. + ······시나리오는 제대로 왔다. 디오니소스가 말한 시간도 정확하고. 그럼 난 왜 여기에 있는 걸까. 분명 아케론 강가에 떨어졌어야 하는데. “이, 이 자식! 감히 우릴 뭘로 보고······!” 사내의 커다란 주먹이 나를 향하려는 순간, 뒤쪽에서 날 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거기, 무슨 일이야? 뭐 재밌는 일 생겼어?” “으, 으아아앗!” “하하, 나도 끼워줘. 응? 여기서 맨날 건담만 만졌더니 심심해 죽겠다고.” “도망쳐! 모두 도망가!” 나를 포위했던 사내들이 모두 꽁무니를 빼기 시작했다. 마치 포식자라도 만난 초식동물들처럼 재빠른 움직임. 나는 목소리가 들려온 쪽을 바라보았다. 호리호리한 체형에, 앞머리를 길러 얼굴을 가린 청년. 덩그러니 선 나를 발견한 청년이, 나를 향해 다가왔다. 그는 나를 유심히 들여다 보더니, 깜짝 놀라 중얼거렸다. “······당신이 왜 여기 있어?” 나는 순간 녀석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이 자식은 또 뭔데 날 아는 척 하지? “뭐야, 나 못 알아보겠어? 진짜 잊어버린 거야?” 청년이 자신의 앞머리를 살짝 들어 올린 후에야, 나는 놈을 알아보았다. ······빌어먹을. 그러고 보니 명계란 결국 죽은 사람이 오는 곳이었다.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당연히, 내가 죽인 놈도 이곳으로 왔을 것이란 사실을. “아아, 그렇게 경계하지 마. 어차피 우리 둘 다 이미 뒈진 목숨이잖아?” 호기심 어린 녀석의 눈이 불쑥 가까워졌다. 비열하고 잔인한 눈빛. 잠깐 봤을 뿐이었지만, 결코 잊을 수 없는 인상이었다. 비릿한 미소를 지은 녀석이 말을 이었다. “그래, 아저씬 대체 누구한테 죽은 거야? 입 좀 털어봐. 응?” 첫 번째 시나리오에서 죽었던 망상악귀 김남운이, 하데스의 명계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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