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화
108화
정희원은 달렸다.
[심판의 시간]으로 강화된 근육이 그녀의 신체를 한계까지 끌어올렸고, [귀살]의 버프가 강화된 신체 위에 날카로운 예기를 부여했다.
그리고 우리엘의 [지옥염화]는, 그녀의 모든 전투력을 가장 이상적인 형태로 가공했다.
타오르는 심판의 불꽃.
심판을 받아야 할 것은 신유승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 불꽃을 받을 것은 신유승 뿐이었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슬픈 눈으로 전장을 응시합니다.]
정희원의 칼날이 먼저 개전을 선포했다.
[등장인물 ‘정희원’이 성흔 ‘지옥염화 Lv.1’를 발동합니다!]
고작 1레벨의 성흔이었음에도, 지옥염화는 신유승의 에테르 폭풍을 가볍게 불태우며 전진했다.
악마의 힘이 더해진 [야수왕의 숨결]이 쏟아져 나왔지만, 정희원은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힘껏 검을 움켜쥔 정희원은 하늘과 땅을 잇는 하나의 선을 그었다.
콰콰콰콰콰!
해일처럼 밀려오던 [야수왕의 숨결]이, [지옥염화]와 만나는 순간 연기를 내뿜으며 통째로 갈라졌다. 누군가가 중얼거렸다.
“맙소사, 저게 대체······.”
[지옥염화]는 최종 레벨에 도달할 시 한 행성의 바다를 증발시켜 길을 열 수 있는 성흔. 원작에서 ‘메시아’가 등장했을 때도, 그를 예비해 가장 먼저 길을 열었던 게 바로 우리엘이었다.
모든 대악마가 두려워하는 대천사이자, 악마에 가장 가까운 악마의 적.
불길을 달려 쇄도하는 정희원을 향해, 신유승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우리엘인가. 당신이 기다린 건 이거였구나.」
저 무시무시한 대천사의 가호 앞에서도, 재앙은 물러서지 않았다.
「결말을 맺기에 충분하겠어.」
아니, 오히려 홀가분한 표정이었다.
마침내 자신의 의무를 다하게 되었다는 듯이.
신유승의 주먹에 휘감긴 에테르와, 정희원의 칼날에 휘감긴 불꽃이 충돌했다. 신유승의 신형이 휘청했고, 정희원은 빈틈을 놓치지 않고 밀어붙였다. 아무리 좋은 스킬들이 중첩되었다 해도, 결국 오버 스펙은 지속시간이 짧다.
그것을 잘 아는 정희원은 쉴 틈 없이 공격을 가속했다.
화르르르륵!
주변의 대지가 신성한 불길로 물들고 있었다.
지쳤음에도, 신유승은 오랫동안 버텼다.
노련한 배우가 생애 최후의 연기를 펼치듯, 그녀는 자신이 살지 않은 회차를 위해 최선을 다해 죽어갔다.
[다수의 신규 성좌들이 당신의 설계에 흥분합니다.]
독각의 채널에서 넘어온 성좌들이 흥분하고 있었다.
[15000코인을 후원받았습니다.]
언제 나를 싫어했느냐는 듯, 성좌들이 보낸 후원금이 고스란히 차올랐다.
애정도 증오도, 성좌들에겐 모두 한순간의 유흥거리일 뿐.
불행하게도 그 찰나의 이야기가, 인간들에게는 곧 삶이었다.
[한반도의 성좌들이 당신을 안타까운 시선으로 바라봅니다.]
나를 관음하는 무수한 시선들 속에서, 나는 홀로 이 시나리오의 결말을 조금씩 그려갔다.
[성좌, ‘은밀한 모략가’가 당신의 선택에 주목합니다.]
그 사이 정희원의 난도질은 [야수왕의 감수성]을 넝마로 만들었고, [지옥염화]의 불길은 조금씩 신유승을 불태웠다. 정희원의 몸 곳곳에도 상처들이 늘어나고 있었다. 박빙의 승부였지만, 승기는 지쳐 있던 신유승의 편이 아니었다.
모든 방어를 도외시하고 달려간 정희원은, 에테르의 폭풍을 맞아가며 신유승의 배에 검을 꽂아 넣었다.
환하게 타오르는 불길이 신유승의 체내로 파고들었다.
파스스스슷!
신성한 불길이 그녀의 몸에 깃든 대악마의 기운을 모조리 불태웠다. 주변을 잠식하던 검은 아우라가 연기로 승화하고 있었다.
칼이 뽑힌 자리에서 피가 터져 나왔다. 신유승은 마치 무대 위의 소품을 바라보듯 자신의 피를 내려다보며 주저앉았다.
마침내, 결착이었다.
문득 옆을 보자, 쓰러진 킹 매스우드와 헤비메탈콩의 모습이 보였다.
[몬스터 게이트]가 닫히며, 괴수들과의 격전도 이제 막바지로 흘러가고 있었다. 나는 주저앉은 신유승을 향해 다가갔다.
육신의 통제권은 돌아왔으나, 이미 그녀의 몸은 정상이 아니었다. 신유승이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난 이제 죽는 건가.」
보통의 경우라면 비스트 로드는 저 정도 상처로 죽지 않는다.
[야수왕의 생명력]은 유중혁의 [기사회생] 못지않은 회복력을 자랑하니까.
하지만 불행하게도, 그녀가 맞은 것은 [지옥염화]였다.
파스스스스.
그녀의 체내 깊숙한 곳에 박힌 지옥의 불길은, 악을 모두 꺼뜨리는 것으로 모자라 그녀의 생명력을 태우는 중이었다. 우리엘의 성흔은 악인의 모든 것을 태우기 전까지 결코 꺼지지 않는 불꽃.
[전용 스킬, ‘제4의 벽’이 흔들립니다.]
[지나친 몰입으로 인해 ‘전지적 독자 시점’ 2단계가 상시 발동합니다.]
그 불이 체내에 붙었으니, 신유승은 결코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신유승이 나를 보며 힘없이 웃었다.
“이 회차에 오게 되어서 다행이야. 대장의 말을 듣길 잘 했어.”
「괴로워. 이렇게 사라지는 게.」
“이제 마음 놓고 죽을 수 있겠다 싶네. 진짜로 뭔가가 바뀔지도 모르잖아.”
「죽기 싫어······.」
전지(全知)는 곧 저주다.
누군가의 마음을 안다는 것은, 언제나 누군가를 기만한다는 뜻이니까.
그녀는 웃으며 허공을 올려다보았다.
표정이 굳은 중급 도깨비가, 그곳에 있었다.
“나 이제 죽을 건데, 약간의 신파는 괜찮지? 이 정도면 훌륭한 시나리오였잖아.”
[몇몇 성좌들이 고개를 끄덕입니다.]
[일부 성좌들이 불만을 터뜨립니다.]
중급 도깨비는 말이 없었다.
하긴, 놈은 지금 그걸 생각할 계제가 아닐 것이다.
시나리오는 완성되었다.
하지만, 놈의 의도대로 되지는 않았다.
그리고 이제 녀석은, 그 의도의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
뒤를 돌아보자, 어느새 유중혁이 다가와 있었다.
“죽는 건가?”
“······아마도.”
“나에 대한 증오가 부족했던 모양이군.”
이 자식이 진짜 마지막까지······.
유중혁이 검을 뽑았다. 신유승을 죽이려는 것인 줄 알고 놈을 제지하려는 순간, 녀석의 진천패도가 신유승의 머리 곁에 꽂혔다. 그 차가운 칼날이, 죽어가는 신유승의 머리를 받치고 있었다. 신유승이 말했다.
“끝까지 폼잡기는. 나 곧 죽는다고 대장.”
태연한 신유승의 속삭임은, 내 귀에는 다음과 같은 말로 들렸다.
「당신에게 꼭 듣고 싶은 말이 있어.」
「한 번만.」
「꼭 한 번만, 들을 수 있다면 좋겠어.」
결코, 전해질 수 없는 말.
그 말을 전혀 듣지 못하는 유중혁이 무심한 목소리로 말했다.
“물어볼 게 있다.”
“뭔데?”
신유승의 표정에 어리는 기대감에, 나는 비참한 기분이 되고 만다.
왜냐하면 저 기대가, 결코 보답받을 수 없다는 걸 아니까.
“네가 세계선을 넘도록 도와준 악마는 누구냐?”
그녀는 잠시 멍한 얼굴로 유중혁을 보더니, 희게 웃었다.
“······역시 대장은 마지막까지 대장이네.”
「변하지 않아.」
“말해라.”
“‘지평선의 악마’라고 들어봤어?”
「그런 당신을 동경했어.」
“이름은 알고 있다.”
“운이 나쁘면, 대장도 곧 만나게 될 거야. 하지만 절대로 싸우지는 마. 대장이 죽도록 노력해도 그 녀석을 이기는 건 거의 불가능할 테니까······.”
「오랫동안, 정말 오랫동안······.」
그녀의 간절한 진심은 전해져야 할 곳에 도달하지 못하고, 내게서 그쳤다. 나는 말해주고 싶었다. 이 멍청한 유중혁에게, 바로 앞에서 들려오는 이 선명한 목소리를, 조금도 듣지 못하는 유중혁에게.
내가 입을 열려는 순간, 신유승의 손이 나를 붙잡았다.
그리고 유중혁이 말했다.
“기억했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유중혁은 돌아섰다.
유중혁의 속마음이 들려왔다.
「복수해 주마.」
그 어절에 담긴 비감에 나는 몸을 떨었다.
그리고 재앙 신유승을 내려다보았다.
그렇구나. 이 녀석은, 이미 알고 있었구나.
들리지 않아도, 이미 듣고 있었구나.
신유승의 눈에서 뭔가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나는 처음으로 [전지적 독자 시점]이, 전지하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잘 있어, 대장.」
「고생했다.」
「뒤는 맡길게.」
「쉬어라.」
쓰다만 편지처럼 길 잃은 문장들만이 내 안에 남았고, 나는 가만히 그 말들의 짝을 하나씩 찾아 주었다.
닿지 못한 것 같아도, 너희는 분명히 닿았다고.
나는, 이 이야기를 분명히 읽었다고.
이윽고 신유승의 발끝이 부스러져 재로 흩날리기 시작했다.
「예쁘네······.」
어린 신유승이 어느새 곁으로 다가와 내 옷깃을 붙들었다.
사라져가는 미래의 자신을 보는 기분은 어떤 것일까.
아무리 많은 책을 읽어도, 결코 닿을 수 없는 감정이 있다.
재앙 신유승이 그런 나와 어린 신유승을 보며 미소했다.
「······부럽구나.」
재앙 신유승의 하반신이 거의 사라졌다.
소멸의 속도가 점차 가속화되고 있었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눈을 감습니다.]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탄식합니다.]
성좌들이 그녀를 지켜보는 가운데, 나는 천천히 무릎을 꿇고 재앙 신유승의 손을 붙잡았다. 뜻밖의 행동에 놀란 신유승이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마지막 남은 마력으로 [야수왕의 감수성]을 발동했다.
떠날 그녀에게 전할 선물이 있었기 때문이다.
야수왕의 신비한 감각이 맞닿으며, 짧은 순간이었지만 나와 재앙 신유승의 감각이 이어졌다. 같은 야수만이 공유할 수 있는 감수성.
지나가는 바람이, 뭔가를 속삭였다.
성좌들도, 도깨비들도 들을 수 없는 이야기.
죽어가던 재앙 신유승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떴다.
「······진심이야? 정말로?」
다행히, 제대로 전달된 모양이었다.
이미 흉부 위쪽까지 잿더미가 되어버린 그녀는, 이제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어째서······.」
흔들리는 그녀의 눈동자에 조금씩 눈물이 고였다. 그녀는 무언가 내게 말을 전하려 했지만, 서늘하게 불어온 바람이 그것을 막았다. 이어졌던 세계선이, 연결되었던 필름이 다시 끊어지고 있었다.
파스스스.
그녀를 이루던 조각들이 가루가 되어 흩어 없어졌다. 눈도, 코도, 입도. 목소리도. 그녀를 이루던 천 년의 시간이, 새하얀 재로 눈처럼 흩날렸다.
재는 꼬리를 이루며 일제히 하늘로 사라졌다.
먼 여행이라도 하듯, 혹은 춤이라도 추듯.
허공을 떠도는 희미한 흔적들을, 우리는 한참이나 올려다보았다.
그게 현실이라는 게 믿기지 않는지, 어린 신유승이 나를 붙들었다.
“정말로 죽은 거예요?”
나는 마음을 다잡았다.
“바꿀 수 없는 거예요? 정말로?”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 아아. 아······.”
내 소매를 붙잡은 이길영이 내 옷깃에 눈을 닦았다. 유상아가 눈시울을 적셨고, 이유는 모르겠지만 이현성도 울고 있었다. 울지 않는 것은 유중혁. 그리고 사태를 정확히 모르는 이지혜뿐이었다.
“······왜 다들 울고 그래? 나까지 서럽게.”
이마가 차갑다 싶더니, 흐릿해진 하늘에서 진눈깨비가 내리고 있었다.
눈도, 비도 되지 못한 어떤 것.
그 차가운 감각이 사람들을 안심시켰다. 우습게도 인간이 가장 살아 있음을 느끼는 때는, 바로 다른 것의 죽음을 확인했을 때였다.
“아······.”
긴장이 풀린 서울 돔의 사람들이 곳곳에서 주저앉았다.
웃거나, 울거나, 분노하는 사람들.
성좌들이 여기저기서 후원금을 쏴댔다. 제각기 반응들은 달랐지만, 적어도 그들 모두가 동의하는 한 가지는 명백했다.
‘범람의 재앙’ 신유승은 죽었다.
하늘을 올려다보자, 얼이 빠진 중급 도깨비가 그곳에 있었다. 묵묵히 그 광경을 지켜보던 비형이 입을 열었다.
[중급 도깨비. 시나리오 종료하시죠.]
[어떻게, 이런······.]
[하지 않으시면 제가 끝내겠습니다.]
그리고 잠시 후, 메시지가 들려왔다.
[다섯 번째 메인 시나리오가 종료되었습니다.]
[보상 정산이 준비 중입니다.]
마침내 시나리오마저 그녀의 죽음을 선언했다.
미래의 신유승은 죽고, 재앙은 끝났다.
이것이 바로 다섯 번째 시나리오의 결말이었다.
모두가 그렇게 생각했고, 그렇게 믿었다.
.
.
.
정확히는, 나를 제외한 모두가 그렇게 믿어야 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것은 완벽한 연극이어야만 했다.
바꿀 수 없는 것이 바꿀 수 없는 것이라 선언하는 연극.
성좌들을 속이고 시나리오를 속일, 처절한 비극.
이것만이, 41회차의 신유승이 빌어먹을 시나리오에서 탈출할 수 있는 길이었기 때문이다.
순간, 곁에 있던 신유승의 손이 불처럼 뜨거워졌다.
“죽일 거야······.”
소녀의 눈이 허공에 떠 있는 중급 도깨비를 보고 있었다.
“저 도깨비, 내가 죽여 버릴 거야.”
달려가려는 그녀를 제지하려는 찰나, 허공에서 스파크가 튀었다.
파츠츠츠츳!
하늘이 뭉개지며 포탈이 열리고 있었다. 포탈에서 넘어온 것은 하얀 쌍둥이 도깨비였다. 백색 갑주를 입은 두 도깨비를 발견한 주변의 하급 도깨비들이 일제히 물러서는 것이 보였다.
그럴 법도 했다.
저 도깨비들은, 모든 도깨비가 죽을 때까지 만나지 않길 바라는 놈들이니까. 관리국. 그 중에서도 시나리오의 ‘개연성’을 담당하는 [집행부]의 도깨비들. 무시무시한 기세를 풍기는 녀석들은 중급 도깨비에게 다가가, 그대로 놈의 신병을 구속했다.
[······집행부. 이게 무슨 짓입니까?]
순식간에 영체를 제압당한 중급 도깨비를 향해, 집행부의 도깨비가 말했다.
[중급 도깨비 ‘바울’. 너를 스타 스트림 규정 위반으로 긴급 구속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