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화
107화
[책갈피 스킬의 레벨에 비례해 활성화 시간이 결정됩니다.]
[활성화 시간 : 30분]
[등장인물에 대한 이해도가 상당합니다. 해당 인물의 스킬 중 일부를 선택해 가져올 수 있습니다.]
신유승이 나를 향해 달려왔고, 나 역시 그녀를 향해 마주 달려갔다.
누구도 서로를 죽이고 싶지 않았고, 어디에도 진심은 없었다.
이것은 오로지 성좌들의 유희를 위한 싸움.
모든 것은 ‘시나리오’였고, 그러므로 모든 것이 가짜인 무대였다.
그러나 이 전투의 결과로 누군가는 죽을 것이었다.
[「심판의 시간 Lv.5」이 활성화됩니다.]
활성화된 스킬 레벨은 5.
정희원이 열심히 수련을 하기는 한 모양이다.
정희원 본인이 오는 것만은 못하겠지만, 그래도 나쁘지 않았다.
[성좌, ‘하늘의 서기관’이 당황합니다.]
[절대선 계통의 성좌들이 당신의 스킬에 침음합니다.]
당황할 법도 하다. ‘심판자’로서 허락받지 않은 이가 스킬을 사용했으니 놀랄 수밖에.
하지만 그들은 나를 허락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지금 내 눈앞에 있는 존재는 명백한 ‘악인’이니까.
[절대선 계통의 성좌들이 해당 스킬 사용에 동의합니다.]
몸속 깊은 곳에서 뜨거운 오오라가 용솟음쳤다. 세상의 악을 모조리 토벌하고 말겠다는 맹목적인 정의감. 대악마들과 성전을 벌였던 대천사들의 역사가, 머릿속을 파편처럼 스쳐갔다.
―악을 징벌하라.
[심판의 시간]은 본래 성전의 위대한 발키리들이 사용했던 스킬이었다.
고로, 이 스킬의 사용자는 대천사들의 가호를 받는다.
편협한 정의를 위해 다른 모든 것들을 배제하는 광기가 뇌수 깊숙한 곳에서 꿈틀거렸다. 정희원은 매번 이런 기분을 느끼며 나를 위해 다른 존재들을 베었던 것이다. 끔찍한 일이었다.
기이이잉!
신념의 칼날에서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의 마력파가 터져 나왔다. 공진하는 에테르의 칼날이 그대로 신유승을 향해 직선을 내리그었다.
스가각!
놀란 신유승의 어깨에서 피가 터져 나왔다. 유령함대의 포격에도 끄떡없었던 [야수왕의 감수성]이 드디어 찢어졌다. 떨어진 핏방울이 새하얀 털 곳곳에 번졌다.
[심판의 시간].
적이 ‘악인’인 한, 이 스킬의 사용자는 패배하지 않는다.
지금 나의 모든 능력치는 정확히 ‘재앙 신유승’에 대항할 수 있게끔 상승해 있었다. 괜히 [심판의 시간]이 사기라 불리는 게 아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능력치 버프를 제공하는 스킬은, 멸살법 전체를 뒤져봐도 몇 되지 않는다.
“모두 공격해요!”
하지만 내가 강해졌다고 해도, 모든 종류의 스킬 숙련치는 여전히 신유승이 앞선 상태. 그러니 도움이 필요했다.
“일반 공격 패턴일 때는 원거리 공격으로 지원하고, 전체 공격을 시도할 때는 꼭 제 뒤로 빠지세요!”
내 말에, 굳어 있던 일행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원거리 지원이 불가능한 분들은 [몬스터 게이트]에서 넘어오는 괴수들을 처치해주세요. 그쪽도 시급합니다.”
실제로 지금도 신유승의 [몬스터 게이트]에서 넘어오는 괴수들 때문에, 용산구는 거의 궤멸 직전으로 치닫고 있었다.
“모두 싸워라!”
왕들의 선전포고와 함께, 본격적인 전투가 시작되었다.
왕들의 세력이 [몬스터 게이트]에서 넘어오는 괴수들을 막아섰다. 대부분이 7급 이상의 괴수들이라 상당히 버거워 보였지만, 다행히 크게 밀리지는 않는 듯했다.
“저는 저 원숭이를 맡겠습니다.”
두터운 수트를 쾅쾅 두들긴 이현성이 5급 괴수종 헤비메탈콩을 향해 달려갔다.
“저랑 유승이는 킹을 맡겠어요.”
이길영이 그 와중에 신유승을 챙기며 움직였다.
신유승이 조종하는 퀸 미르바드가 포효했고, 이길영이 불러온 몇몇 충왕종들이 함께 킹 매스우드를 향해 달려들었다. 두 어룡의 냉기 숨결이 서로를 향해 쏟아지는 와중에, 이지혜도 앞으로 나섰다.
“아저씨, 지원 사격은 나한테 맡겨.”
“저는 움직임을 차단할게요.”
이지혜는 함포사격으로, 유상아는 [아라크네의 거미줄]로 트랩을 만들어 재앙 신유승의 동선을 견제했다. 물론 그야말로 미미한 수준의 도움일 뿐이었다.
포격은 거의 데미지를 줄 수 없고, 거미줄은 신유승의 에테르에 금방 찢어졌으니까.
하지만 없는 것보단 나았다.
“유중혁. 싸울 수 있겠냐?”
나를 제외하고, 신유승의 움직임을 쫓아가며 동시에 녀석의 공격을 어느 정도 견뎌낼 수 있는 것은 오직 유중혁뿐이다.
“······네놈 걱정이나 해라.”
바닥에 핏물을 뱉은 유중혁이 [진천패도]를 갖추어 든 채 내 곁에 섰다.
이미 [기사회생]을 사용했는지, 녀석의 상태는 아까보다 나아 보였다.
후폭풍이 강한 [기사회생]을 썼으니, 이제 놈에게도 남은 시간이 얼마 안 될 것이다.
“몇 분이냐?”
“30분. 네놈은?”
“나도 그래.”
책갈피의 사용 가능 시간도 30분이 고작이다.
그러니, 반드시 30분 안에 승부를 봐야 한다.
고오오오오.
재앙 신유승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검은색 오오라가 점점 더 짙어지고 있었다. 악인화로 인해 계속해서 육체 능력이 올라가고 있다는 뜻이었다.
유중혁의 표정이 굳어졌다.
“······세계선을 넘기 위해 악마와 손을 잡았던 모양이군.”
유중혁의 추측은 맞았다.
실제로, 지금 그녀의 영혼은 악마에게 저당 잡혀 있으니까.
그리고 그 악마는, 빌어먹을 도깨비들에게 그녀를 넘겼다.
[하하하, 재밌군요. 정말 재밌습니다.]
유쾌해하는 중급 도깨비의 목소리.
[이제야 좀 시나리오 답군요.]
피가 튀고, 살점이 으스러지는 전장. 그토록 막고 싶었던 서울 돔의 멸망이 매초마다 가까워지고 있었다.
[상당수의 성좌들이 박진감 넘치는 전투에 열광합니다.]
“가자.”
그 말과 함께, 유중혁의 신형이 쾌속하게 쏘아져 나갔다.
쿠콰콰콰콰!
움직이기 무섭게, 볼을 부풀린 재앙 신유승이 우리를 향해 숨을 뿜었다.
[야수왕의 숨결].
5급 해수종의 [냉기 숨결]과는 비교도 안 되는 파괴력의 에테르 폭풍이었다.
“피해!”
[주작신보]를 극한까지 발동한 유중혁이 재앙 신유승의 공격을 피했고, 나는 유중혁이 미처 피하지 못한 공격들을 [야수왕의 감수성]을 발동해 대신 막아냈다. 그렇게 하나씩 합을 맞추는 동안, 나는 유중혁의 전투 센스에 순수하게 감탄했다.
재앙도 재앙이지만, 유중혁도 괴물은 괴물이었다.
‘심판의 시간’ 버프도 없이 저 재앙에 대항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저 유중혁뿐이다. 강하고, 냉철하고, 무자비한 회귀자. 지금만큼은 그가 내 편이라는 것에 안도했다.
“제대로 해라, 김독자!”
“하고 있어!”
“빌어먹을······.”
접근해서 일격을 먹이기만 하면 되는데, 그게 쉽지가 않았다.
몇 방의 공격을 성공한 후에 신유승의 패턴은 더욱 난폭해졌다.
폭주 상태에 들어선 신유승은 마력이 고갈되는 것도 개의치 않고 에테르의 폭풍을 날려댔고, 나는 시도 때도 없이 [야수왕의 감수성]을 발동해 그 공격을 막아내는 것만도 버거웠다.
중간중간 유중혁이 일격을 먹이기는 했지만, 데미지는 거의 누적되지 않았다.
얼마나 공방을 주고 받았을까.
정신을 차렸을 때는 벌써 20분이 훌쩍 넘어 있었다.
유중혁의 체력은 급격하게 떨어졌고, 틈틈이 주스처럼 빨아대던 마력 회복 물약도 어느새 바닥을 보였다.
강하다.
[심판의 시간]을 발동하고도 이렇게나 고전할 줄이야.
스킬로 무리하게 도핑된 신체가 거세게 삐그덕거렸다.
[심판의 시간]의 부작용이 조금씩 찾아오고 있었다.
[하하하! 정말 멋진 시나리오입니다. 성좌님들, 그렇지 않습니까?]
멋대로 지껄이는 중급 도깨비의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젖먹던 힘까지 다해 앞으로 나아갔다. [야수왕의 감수성]이 만든 털들이 미친 듯이 펄럭였다.
에테르의 폭풍에 피부가 까맣게 익어갔다.
한 발짝, 두 발짝.
거리는 가까워졌지만, 시간은 우리 편이 아니었다.
이대로라면 30분이 지나기 전에 충분한 데미지를 줄 수 없다.
파츠츠츳!
재앙 신유승의 몸에서 이변이 일어난 것은 그때였다. 그녀의 전신에 전격이 일더니, 검게 물들었던 눈빛이 일시적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나를 공격해.」
재앙 신유승이 자신의 의지로 몸을 통제하고 있었다.
「나를 막아.」
말하지 않았지만, 들리는 목소리.
「당신의 ‘회차’를 지켜.」
일시적으로 약해진 에테르의 폭풍을 뚫고, 나는 유중혁과 함께 달려나갔다.
검을 휘두르자, 신유승의 몸에서 피가 튀었다.
[성좌, ‘하늘의 서기관’이 당신을 바라봅니다.]
우리가 벌이는 최악의 연기를 들키지 않기 위해, 나는 최선을 다했다.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당신을 바라봅니다.]
칼날에 베인 신유승이 비명을 질렀고, 폭풍에 맞은 유중혁이 하늘을 날았다.
“······가라, 김독자.”
그리고 유중혁이 만들어 준 빈틈을, 내가 파고들었다.
푸우욱!
망설임 없이 파고든 ‘신념의 칼날’이, 정확히 신유승의 왼쪽 어깨에 박혔다. 깊게 박힌 칼날에서 마력이 폭주했다. [야수왕의 감수성]이 찢어지며, 신유승의 왼팔이 잘려나갔다.
선혈이 후두둑 떨어졌다.
나는 신유승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멸살법’에 나왔던 문장처럼, 신유승은 웃고 있었다. 나는 그녀가 일부러 내 칼을 맞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수의 성좌가 당신의 전투에서 눈을 떼지 못합니다.]
“빌어먹을······.”
힘없이 웃는 순간, 검을 쥔 손에 힘이 빠졌다.
그러자 신유승이 웃었다.
「거지 같지?」
비명도 분노도 없이, 나를 붙잡은 그녀가 바닥에 나를 내동댕이쳤다.
하지만 아프지 않았다.
아프라고 한 공격이 아니었다.
「그래도 당신은 계속하려는 거지?」
“그래.”
나는 그녀를 향해 검을 휘둘렀고, 신유승은 나를 향해 숨결을 뱉었다.
하나의 질문에 하나의 대답이 오가듯이.
우리는 서로를 향해 미친 듯이 상처를 입혔다.
“네가 그랬던 것처럼.”
슬슬 마력이 떨어진 내 [야수왕의 감수성]이 효력을 잃어가고 있었다. 한계까지 육체를 강화시킨 [심판의 시간]이 잠시나마 버팀목이 되어 주었다. 울컥거리며 피가 흘렀고, 세상이 어지럽게 돌았다. 그래도 나는 멈추지 않았다.
서거걱! 푸슈슛!
확실하게, 데미지는 누적되고 있었다.
[당신을 꺼려하던 일부 성좌들이 당신에게 호기심을 보입니다.]
열광해라.
[전장을 누비는 성좌들이 당신의 패기에 주목합니다.]
그리고 실컷 떠들어라.
[대전장의 성좌들이 당신의 의지에 찬사를 보냅니다.]
언젠가 내가, 네놈들의 혀를 뽑으러 갈 때까지.
그렇게 얼마나 더 공방을 주고받았을까. 나는 녹진해진 육체를 비틀거리며, 몇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책갈피’의 지속시간이 30초 남았습니다.]
터진 장기가 찢어질 듯 아팠고, 부러진 늑골이 끊임없이 폐를 찔렀다.
할 수 있는 최선은 다했다.
하지만, 여전히 재앙은 건재했다.
쿠구구구구.
잠깐이나마 돌아왔던 재앙 신유승의 눈동자가 다시 새카맣게 물들고 있었다. 아무래도, 이번 ‘범람의 재앙’은 원작보다도 더 강한 것 같다. 재앙 신유승이 걱정스러운 눈으로 나를 보았다.
「당신으로는 부족해.」
그녀는 자살할 수 없다. 그런 식으로 그녀가 죽는 것을 중급 도깨비가 허락할 리 없으니까. 그녀 스스로 패널티를 거는 것도 여기까지가 한계였다. 그리고 나 또한, 다른 의미로 한계였다.
「나를 어떻게 막을 거야?」
“걱정마. 이제 올 거야. 너를 막을 사람이.”
처음부터, 내 손으로 신유승을 죽일 생각은 없었다.
유중혁도 지금 상태로는 불가능하다.
하지만, 그녀를 죽일 수 있는 사람은 아직 하나 남았다.
신유승의 입이 떨어지려는 순간, 주변의 바닥이 폭발하며 폭음이 울려 퍼졌다.
쾅! 콰앙! 콰아앙!
멀리서 울려 퍼진 포성. 북쪽에서 하늘색 수감복을 입은 여인들이 나타났다. 괴수들의 길이 갈라지며, 일련의 군대가 이쪽을 향해 진군하고 있었다. 그들의 중심에 서서 군을 통솔하는 가면의 여인.
방랑자들의 왕.
대체 어딜 갔나 싶었더니, 북쪽에서부터 내려오면서 괴수들을 정리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내가 기다린 것은 그들이 아니었다.
나는 군대의 첨단에서 이쪽을 향해 달려오는 한 사람을 마주 보았다.
차분히 머리를 틀어 올린 한 여자가, 이쪽을 향해 말했다.
“미안해요, 내가 너무 늦었죠?”
“조금 늦으셨군요.”
“능청은. 아직 살만한 가 봐요?”
멸악의 심판자.
열흘 만에 본 정희원은, 내가 알던 모습보다 훨씬 절제된 기도를 풍기고 있었다. 가볍게 내 어깨를 두드린 그녀가, 내 옆으로 나섰다.
“이제 나한테 맡기고 잠시 쉬고 있어요.”
곧 붉은 오오라가 용솟음치며, 그녀의 전신에서 [심판의 시간]이 피어올랐다. 내가 훔쳤던 스킬보다도 훨씬 강맹한 기세였다.
정희원은 내가 가진 마지막 카드다.
만약 이게 실패한다면······.
나는 신유승에게 충분히 데미지를 줬을까?
정희원은, 마무리를 잘 해낼 수 있을까?
“뭘 그렇게 걱정해요?”
정희원이 싱긋 웃으며 말했다.
평소와는 다른 자신감이 그녀의 목소리에 묻어 있었다.
단순히 [심판의 시간] 말고도 믿는 것이 있는 눈치.
[성좌, ‘하늘의 서기관’이 침음합니다.]
[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정희원의 배후성을 향해 적의를 드러냅니다.]
그러고 보니, 정희원도 [배후 선택]을 했겠구나.
과연 그녀는 누구를 택했을까?
신유승이 흔들리는 눈으로 정희원을 보았다.
「당신은······.」
“대충 상황은 알겠어. 오는 길에 내 배후성이 열심히 떠들었거든.”
정희원이 슬픈 눈으로 신유승을 마주 보았다.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
말을 마친 정희원이 자신의 칼날을 가볍게 휩쓸었다. 그리고 손이 닿은 곳에서, 천천히 불길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고오오오.
깊은 새벽. 서울의 어둠이 가장 짙게 내려앉은 밤 위로, 정희원의 칼날이 고고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칼날 위에 내려앉은 불꽃은 지금껏 내가 본 그 어떤 불꽃보다도 더 선명하고 눈부셨다.
모든 악을 징벌할 새하얀 성흔의 불꽃.
[지옥염화(地獄炎火)].
나는 그 성흔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언젠가 멸살법에서 그 성흔의 묘사를 본 기억이 있었기 때문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제천대성의 성흔과도 비견될 만큼, 막강한 파괴력을 자랑하는 ‘멸살법’의 최강 성흔 중 하나.
[지옥염화]는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의 성흔이다.
나를 돌아본 정희원이 차게 웃었다.
“내가, 이 빌어먹을 시나리오를 끝내줄게요.”
대천사 우리엘이, 자신의 화신으로 정희원을 선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