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6화
416화
Episode 79. 은밀한 모략가
‘성마대전’이 끝난 후 이틀이 지났다.
악몽으로 가득했던 ‘환생자들의 섬’은 이제 보이지 않았고, 성좌들은 슬슬 자신들의 별자리를 찾아 방주를 떠나고 있었다.
―이번 역은 <올림포스>입니다.
선내의 메시지와 함께 자리에서 일어난 이들은 <올림포스>의 성좌들이었다. 대표로 선 디오니소스가 정희원을 바라보며 말했다.
[힘들 텐데 먼저 가서 미안하군.]
“괜찮아요.”
[너무 걱정하지마. 다른 성좌도 아니고 그 녀석이잖아. 분명 살아 있을 거야.]
정희원의 어깨를 툭툭 두드린 디오니소스가 성좌들을 이끌고 암흑차원 너머로 사라졌다. 정희원은 성좌들이 모두 사라질 때까지 묵묵히 기다렸다가 방주의 뱃머리에서 내려왔다. 계단을 내려오자마자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보였다. 한수영이었다.
“디오니소스는?”
“갔어.”
“척준경이랑 <명계>도?”
“그쪽은 아마 조금 있다가 떠날 것 같아.”
“우리엘은?”
한수영은 계속해서 물었고, 정희원은 계속해서 이야기했다. 대개는 소소한 정보들이었다. 하데스와 페르세포네. 우리엘. 척준경의 거처에 관해서. 누가 떠나고 누가 머무르는지. 그리고 누가 그들과 함께하는지······ 어떤 것은 두 사람 모두 알고 있는 정보였다. 그러나 누가 뭘 알고 있는지는 그다지 중요한 사실이 아니었다.
“하영이는 완전히 탈진해서 스승님들이 추궁과혈을 돕고 있어.”
“지혜는?”
“후미에서 부서진 전함 고치고 있어.”
“이현성은?”
누군가는 묻고, 누군가는 대답하는 것. 두 사람은 방주의 복도를 걸으며 그것만을 반복했다. 마치 그것을 하지 않으면 한순간이라도 버틸 수 없을 것처럼.
“애들은?”
“애들은······.”
정희원이 말을 잇기도 전에, 복도 선실의 안쪽에서 아이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역시 당장 어둠의 계약을 해서 형의 복수를······.
―복수는 뭔 복수야. 아저씬 분명 살아 있어. 느낄 수 있다고.
―······나도 알고 있거든? 독자 형이라면 반드시······!
―정신 똑바로 차려. 지금은 건실한 계획을 세워야 할 때야.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정희원과 한수영은 자리에 멈춰서서 아이들의 말을 들었다. 하루 전까지도 이성을 잃고 울부짖던 아이들이었다. 하지만 지금 선실의 창 너머로 보이는 아이들의 모습은······.
“······괜찮은 것 같네.”
그렇게 말하는 정희원을 향해, 한수영은 한 박자를 쉬고 물었다.
“너는?”
정희원은 대답하지 않았다. 천천히 떨어지는 시선. 한수영은 정희원을 바라보는 대신 그녀가 바라보는 방향을 함께 바라보았다. 정희원이 입을 열었다.
“구해달라고 말했어.”
“······.”
“나한테, 구해달라고 했다고.”
꾹 쥔 주먹. 서로를 보고 있지 않아도 공유할 수 있는 감각이 있었다. 어디선가 마른 비가 내리는 것 같았다. 한수영은 묵묵히 그 소리를 들으며 말했다.
“돌아가면 해야 할 일이 많아.”
“······그래, 알아.”
소매로 얼굴을 문지른 정희원이 힘없이 웃어 보였다.
“일단 서울로 가야겠지?”
“그래야지.”
“독자 씨가 사라진 틈을 타서 서울을 노리는 녀석들이 분명 있을 거야. 가면 치안 정리도 해야 할 거고.”
“이수경한텐 누가 말할래?”
“그건······.”
두 사람은 말을 멈춘 채 잠시 허공을 응시했다. 먼저 입을 연 것은 한수영이었다.
“이럴 때 유상아가 있어야 하는데.”
“······상아 씨 보고 싶네.”
그들은 너무 많은 것을 잃어버렸다.
고개를 돌리자 선실의 창밖으로 암흑차원의 정경이 지나가고 있었다. 먼 은하의 너머로 반짝이는 별들이 보였다.
별 하나가 사라졌다고 해서 갑자기 우주가 멸망하지는 않는다.
우주에는 무수한 별들이 있고, 빛은 여전히 존재하니까.
하지만 어떤 행성에 사는 이들에게, 그 별은 그들이 아는 빛의 전부였다.
한수영은 창문에 비치는 정희원의 얼굴을 애써 외면했다. 정희원이 중얼거렸다.
“독자 씨는 대체 어떻게 된 거지?”
한수영은 대답하지 않고 앞장서 걸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복도의 끝방이 나왔다. 조심스레 문을 열고 들어가자, 전신에 붕대를 두른 유중혁이 누워 있었다. 한수영은 뒤적뒤적 품을 뒤져 레몬 사탕 하나를 꺼내며 말했다.
“······이 녀석이 깨어나면 알 수 있겠지.”
*
그것은 한창 ‘멸살법’을 읽던 시절의 일이었다.
여느 때처럼 하루 치 일과를 해치운 것에 만족하며 스크롤을 내리는데, [작가의 말] 칸에 뭔가가 쓰여 있었다.
―독자님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그게 무엇에 관한 질문이었는지는 잊었다. 전개에 관한 것이었을 수도 있고, 작중 떡밥에 관한 것이었을 수도 있다. 그때 내가 뭐라고 대답했더라.
내가 떠올리기도 전에 어린 나의 손가락이 키보드를 눌렀다.
―음. 그런 단순한 반전은 조금······.
―역시 그렇죠?
기억을 들여다보며 새삼 놀랐다. 이런 일도 있었나. ‘멸살법’에 대해서는 그렇게 잘 기억하면서, 왜 이런 기억은 까맣게 잊고 있었던 건지 모르겠다.
맞아. 생각해 보면 ‘멸살법’의 작가는 가끔 내게 말을 걸어왔었지.
그리고 나 역시, 종종 댓글을 쓰며 작가에게 말을 걸기도 했고. 보통은 응원 메시지나 다음 회차에 관한 질문이었지만, 때로는 태클을 걸 때도 있었다.
아마 유중혁의 인생이 600회차를 막 넘긴 시점이었던 것 같다.
소설을 읽은 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가지 않았던 나는, 작가에게 결국 댓글로 따졌다.
―작가님. 오타 아닌가요? 중혁이가 ‘방긋’ 웃다뇨.
tls123이 대답했다.
―600번쯤 회귀하면 누구나 그렇게 되죠.
듣고 보니 그런 것도 같아서 대꾸할 말이 없었다. 그때 처음으로 유중혁의 회귀 횟수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했던 것 같다.
600번의 회귀라. 그런 생을 거듭하는 인물에게, 삶이란 대체 어떤 의미일까.
「김 독 자 정 신차 려」
머릿속이 지끈거리는 느낌과 함께, 의식이 조금씩 돌아오기 시작했다. 전신이 찌뿌드드했고, 화신체 곳곳에서 심각한 통증이 느껴졌다. 간신히 눈을 뜨자 희미한 빛살이 망막을 찔렀다. 그리고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깨어난 모양이군.”
역시 양반은 못 되시는구만.
나는 피식 웃으며 눈을 그쪽으로 돌렸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네놈이 김독자인가?”
눈을 떴을 때, 나는 무수한 유중혁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
내가 제정신을 차리기까지는 그로부터 10여분의 시간이 더 필요했다.
잠깐 다시 기절했던 나는, 곧바로 눈을 뜨는 대신 어떻게든 지금 내게 일어난 일들을 파악하기 위해 애썼다. 우선 상황을 좀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하나, 성마대전은 끝났다.
그건 확실해 보였다.
무엇보다, 지금 내 로그에 남아 있는 메시지가 그 증거였다.
[거대 설화, ‘빛과 어둠의 계절’을 획득하였습니다!]
[당신의 세 번째 거대 설화가 ‘전(轉)’을 완성하였습니다!]
[히든 시나리오 ― ‘단 하나의 설화’의 세 번째 조건이 완수되었습니다!]
[최후의 설화가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스타 스트림> 전체가 당신의 업적에 들썩입니다!]
[<스타 스트림>의 다수 성운들이 당신의 성운을 주목합니다!]
[절대 다수의 성좌들이 당신의 설화를······.]
나는 마침내 ‘단 하나의 설화’의 전(轉)을 완성한 것이다.
어마어마한 설화의 에너지가 내 안에서 요동치고 있었다.
거대 설화, 「빛과 어둠의 계절」.
나도 처음 들어보는 이름의 거대 설화였다. 그도 그럴 게, 더 네임리스 미스트와 묵시룡을 충돌시키는 것 자체가 원작에서는 일어난 적 없는 일이었으니까······ 아마 이것을 계기로 세계선 전체의 격변이 시작될 것이다.
멸망의 흐름이 가속화되었으니, 시나리오 전체의 흐름도 가속화될 수밖에 없겠지.
그리고 둘, 나는 누군가에게 구출되었다.
문제는 여기서부터다. 대체 누가 나를 구했는가?
“기절한 척 해봤자 소용없다.”
참고로 내가 맨 마지막으로 본 것은 나를 구하러 온 유중혁의 모습이었다. 그러니 눈앞에 유중혁의 얼굴이 보이는 것도 어쩌면 당연했다.
문제는······.
“생긴 것만 멍청한 게 아니라 머리도 멍청한 모양이군.”
“과연 듣던 대로다.”
대체 왜 그 ‘유중혁’이 여럿이냐는 것이다.
심지어는······.
나는 멍한 눈으로 침대 위에 올라와 있는 대여섯 마리의 ‘꼬마 유중혁’을 보았다. 분명 유중혁은 유중혁인데, 죄다 가분수의 체형인 데다 키는 키리오스랑 비슷한 수준이었다.
······꿈인가?
역시 꿈을 꾸는 게 틀림없었다. 평소 그놈에게 받은 스트레스가 어마어마하게 쌓여서 이런 끔찍한 망상을 만들어 낸 것이다. 내가 뺨을 철썩철썩 때리자 꼬마 유중혁들이 입을 열었다.
“꿈인줄 아는 모양이군. 멍청하게도.”
“상황을 파악할 시간이 필요한 모양이다.”
“귀찮은 놈이군. 꼭 기다려 줘야 하나?”
나는 그 말을 무시하고 방의 정경을 둘러 보았다.
커다란 원형의 방이었다. 탁자도, 의자도, 소품을 비롯해 심지어는 내가 앉아 있는 침대도 동그랗게 생겼다.
······대체 여기가 어디지?
곰곰이 생각해 보았지만 떠오르는 것은 없었다. 이렇게 특별한 내실이라면 생각날 법도 한데, ‘멸살법’에서도 본 기억이 나질 않았다.
혹시 새로운 시나리오 지역인가 싶어 시나리오 창을 호출했더니, 설상가상으로 이런 메시지까지 떠올랐다.
[현재 <스타 스트림>의 시나리오 시스템이 점검 중입니다.]
결국, 지금 상태로 알아낼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대충 상황 파악이 끝난 모양이다.”
“다시 묻지. 네가 김독자인가?”
부리부리하게 생긴 꼬마 유중혁이 물었다. 자세히 보니 꼬마 유중혁들은 가슴팍에 제각기 다른 숫자표가 붙어 있었는데, 방금 내게 물은 녀석은 [999]라는 숫자가 적혀 있었다.
나는 일단 대답해보기로 했다.
“맞아. 내가 김독자야.”
그러자 유중혁들이 동시에 서로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식들이, 조그맣게 생긴 주제에 하는 짓은 진짜 유중혁이랑 똑같다.
“제대로 데려오긴 한 모양이군.”
심지어 목소리도······.
영문은 알 수 없지만, 이쯤 되니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은 꿈이 아니다. 그리고 나는 알 수 없는 개연성의 변덕으로 인해 꼬마 유중혁들이 모여 사는 환상의 왕국에 오게 된 것이다.
“너희는 누구야?”
나는 일단 물어보기로 했다. 이 녀석들이 정말 유중혁이라면 내 질문에 곧이곧대로 대답해 줄 턱이 없지만. 꼬마 유중혁 중 하나가 중얼거렸다.
“한심하군. 보면 모르는 건가.”
역시나. 기왕 이런 곳에 올 거라면 상냥한 꼬마 유상아들이 사는 세계에 오고 싶었다. 어떻게 도발하면 이 자식들에게 대답을 들을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데, 가슴팍에 [888]이란 숫자가 적힌 유중혁이 뜻밖의 말을 했다.
“네놈 머리로는 백날 생각해도 모를 것 같으니 알려주지. 우리는 ‘위대한 모략’의 일부다.”
······위대한 모략? 설마?
순간 스산한 감각이 뇌리를 스쳐 갔다.
내 침묵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가슴팍에 [777]이라 적힌 유중혁이 비웃듯 말했다.
“네놈의 한심한 지능으로는 이해할 수 없겠지.”
그래, 유중혁이다.
이놈들은 유중혁이 확실하다.
“정신 차렸다면 움직이지. 네놈을 기다리는 존재가 있다.”
“누가 날 기다리는데?”
“가 보면 안다.”
나는 휘청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 녀석을 따라 움직였다. 동그란 문이 열리고, 커다란 복도가 나타났다. 가장 앞선 것은 꼬마 유중혁 [999]였다. 나는 [999]를 따라 움직였다. 그러자 그런 내 뒤를 올망졸망 쫓아오는 꼬마 유중혁들의 무리가 있었다. 내가 물었다.
“여긴 어디야?”
그러자 뒤쪽에서 나를 따라오던 유중혁이 말했다.
“eun gui ei soup.”
“뭔 소리야.”
“‘은가이의 숲’이란 뜻이다. 예언자 주제에 그런 것도 모르는 건가.”
아니 그걸 왜 외국어처럼 말하냐고.
가슴팍에 [666]이라 적힌 꼬마 유중혁은 한심하다는 듯 나를 노려보더니 핏 고개를 돌렸다.
문득 저 숫자가 유중혁의 ‘회귀 회차’를 나타내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중혁의 666회차에 무슨 일이 있었더라.
혹시 심연의 흑염룡과 같이 다녔던 회차인가?
복도에 난 창으로 은빛 숲의 정경이 비쳤다. ‘은가이의 숲’이라.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장소 같기도 했다. 하지만 이건 ‘멸살법’에 등장하는 무대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복도의 맞은편에서 한 무리가 걸어온 것은 그때였다.
【모략께서 데려온 게 그 자인가?】
아니, 그것을 ‘걸어왔다’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
솜털이 비죽 서는 느낌과 함께 나도 모르게 [부러지지 않는 신념]의 손잡이를 쥐었다.
맞은 편에서 ‘이계의 신격’의 무리가 걸어오고 있었다.
성좌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불온한 아우라를 뿜어대는 존재들. 말의 머리를 하고, 몸 곳곳이 기분 나쁜 촉수로 뒤덮인 괴물들이었다. 허공으로 뻗어 나온 촉수들은 잠깐 고개를 갸웃하더니 슬금슬금 내쪽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누가 보아도 호의로 보이지는 않는 움직임.
그런 촉수들을 막아선 것은, 뜻밖에도 꼬마 유중혁 [999]였다.
“우리 쪽 손님이다. 함부로 건드리지 마라, ”
【이야기하는 것 정도는 상관없을 텐데.】
“내가 허락하지 않았다.”
꼬마 유중혁 [999]는 그렇게 말하며 자신의 등에서 미니 버전의 [진천패도]를 뽑아 들었다.
이어서 꼬마 유중혁 [888]도, 꼬마 유중혁 [777]도, 꼬마 유중혁 [666]도. 모두 자신들의 등과 허리춤에서 칼을 뽑아 들었다.
······이 녀석들, 싸울 수도 있는 건가?
아무리 봐도 그냥 피규어처럼 생겼는데.
실제로 저쪽도 나와 똑같은 생각을 한 모양인지, 이쪽을 향해 집요한 적의를 내비치기 시작했다.
【감히······ 너희가 ‘위대한 모략’의 권속이라 하여······.】
촉수들과 꼬마 유중혁들이 충돌하려는 일촉즉발의 순간. 숲의 어디선가 쿵, 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촉수를 꿈틀대던 ‘이계의 신격’들이 모조리 주저앉았다.
일어선 것은 나를 향해 적의를 보이던 말머리뿐이었다.
【■■■······!】
그리고 다시 한번 더 쿵, 하는 소리가 들렸다. 이윽고 말머리마저 바닥에 고개를 처박았다. 이것은 단순한 지진파가 아니었다.
누군가가, 이들을 어마어마한 격으로 겁박하고 있는 것이다.
【우우우······.】
신음을 흘린 이계의 신격들이 일제히 길을 비켰다. 그러자 그 길의 끝에 거대한 홀의 입구가 나타났다. 드넓은 원형의 천장 사이사이로 무수한 나무 덩굴들이 자라난 개방형 홀. 나는 꼬마 유중혁들과 함께 그 홀로 걸어 들어갔다.
실낱같이 들어오는 볕이 홀의 중심에 놓인 오래된 왕좌를 비추고 있었다.
누구도 말해주지 않았지만 알 수 있었다.
저 존재가, 바로 이 숲의 왕이다.
심지어 나는 녀석을 알고 있었다.
옅은 볕의 그늘 속에 드러난 얼굴의 흉터. 나와 똑같은 백색의 코트.
내가 다시는 볼 수 없을 거라 믿었던 존재가 그곳에 앉아 있었다.
【오랜만이군, 김독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