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4화
324화
오랜 세월이 지나며, 거신들은 첫 번째 <기간토마키아>의 분노를 잊었다.
반복된 시나리오는 그들의 의지를 앗아갔고, 영광스러웠던 날들을 퇴색시켰다.
이제 60번 시나리오 <기간토마키아>는, 몇 명의 거신이 징집되어 벌어지는 성좌들의 축제일 뿐이었다.
[그만 돌아가거라.]
거신들은 세계에 저항하는 대신, 이 세계로부터 잊히길 택했다.
그들의 절망이 너무나 거대했기에, 나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이럴 때 유상아가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누군가를 설득하는 것은 나보다 그녀가 제격이다.
“신화 시대를 호령한 거신들이라더니······ 별거 아니었네.”
특유의 싸가지 없는 말투.
놀랍게도 김남운이 입을 열고 있었다.
“덩어리들, 너흰 아직 나처럼 죽은 것도 아니잖아.”
거신들이 발하는 무시무시한 ‘격’에도 불구하고, 작은 입이 잘도 나불대고 있었다. 묘하게 고조된 억양으로, 마치 지난 회한이라도 토해내듯 김남운이 소리쳤다.
“살아서, 아직 미래를 바꿀 수 있는 존재들이잖아. 그런데 벌써 포기하는 거야? 인간보다도 위대한 신격들이라며, 어마어마한 정신력과 힘을 가진 존재들이라며? ■발! 그런데 겨우 게임 몇 번 졌다고 징징대기는······!”
츠츠츠츠츳!
거신들의 주변으로 흉악한 기세가 일어났다.
나는 재빨리 김남운의 앞을 막아서며 말을 받았다.
“당신들은 아직 변할 수 있습니다. 이번 <기간토마키아>는, 지금껏 있었던 <기간토마키아>와는 완전히 다를 겁니다.”
[역사는 변하지 않는다.]
“‘번개의 신좌’에게 배신당했던 일을 벌써 잊었습니까? 그를 도와 <티타노마키아>를 승리로 이끌었음에도 <타르타로스>의 나락으로 떨어진 일을, 벌써 잊어버린 겁니까?”
유상아는 곁에 없지만, 나는 유상아가 말했던 방식을 기억하고 있었다.
세계사와 신화에 능통했던 유상아.
나는 그녀가 특유의 말발로 ‘흥무대왕’을 설득했던 때를 떠올리며 말했다.
“<기간토마키아>에서는 또 어땠습니까? 당신들이 이길 수 있는 싸움이었습니다. 인간 영웅들의 도움만 없었더라면, 당신들이 이길 수 있는 싸움이었단 말입니다. 정말 이대로, 영원히 패배한 신화로 기록될 셈입니까?”
[건방진 아이야. 너는 이해하지 못한······!]
“이해합니다. 당신들의 절망, 모두 이해하고 있습니다.”
거짓말이었다. 나는 이들에 대해 알지 못하니까.
그러나 거짓말이 아니기도 했다.
“당신들과 같은 처지였지만, 당신들과는 달리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던 사람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결국 우리가 가진 이야기로 상대방을 이해할 수 있을 뿐이다.
“당신들보다 까마득한 세계에 맞서서, 수백 수천 번이나 절망하면서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던 사람을 알고 있단 말입니다.”
유중혁과 김남운이 나를 바라보았다.
브리아레오스가 물었다.
[······누구의 이야기를 하는 거지?]
“제가 아는 영웅의 이야기입니다. 원하신다면 들려 드릴 수도 있습니다.”
내 말에, 브리아레오스가 웃었다.
뿌리 깊은 불신이 배인 조소였다.
[‘벽’의 뒤에 숨은 존재여.]
······벽의 뒤에 숨은 존재.
순간, 세계가 삐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네가 ‘최후의 벽의 파편’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다. 너는 그 뒤에 숨어서 다른 모든 성좌들의 시선을 피하고 있겠지.]
사실이었다.
[그런 비겁자가 하는 말에 어떤 진정성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가? 너는 우리를 설득할 수 없다.]
우습게도, 나는 그 말에 반박할 수 없었다.
오랫동안 외면하고 있었던 사실을 지적받은 느낌이었다.
[‘제4의 벽’이 분개합니다!]
[‘제4의 벽’이 저런 녀석의 말은 들을 필요가 없다고 말합니다.]
뜻밖에도 나를 도운 것은 성좌들이었다.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거신들의 무력함을 비난합니다!]
[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굳센 폭풍’을 한심하게 생각합니다!]
[성좌, ‘은밀한 모략가’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듭니다.]
갑작스레 쏟아진 간접 메시지에 브리아레오스가 놀라움을 표했다.
[채널에 대단한 후원자들을 데리고 있군······ 시나리오의 망령들이여. 아직도 무슨 여한이 남았는가? 대체 무슨 이야기가 궁금하여 이 작은 아이를 쫓아다니는 것이지?]
허공에서 쏟아지는 간접 메시지들을 보며, 나는 잠시 고민했다.
결정은 길지 않았다.
“벽을 해제하겠습니다.”
[‘심연의 흑염룡’이 깜짝 놀라 당신을 바라봅니다!]
[‘은밀한 모략가’가 고요한 눈으로 당신을 관조합니다.]
“그러면 제 이야기를 들어주시겠습니까?”
「김 독자 그 건 안 된 다」
내 안에서 강렬한 스파크가 튀어 오르며, [제4의 벽]이 말했다.
「그 건 들 어 줄 수 없 어」
‘한 번만. 잠깐이라도 괜찮아.’
「그런 짓을 하 면 네 가 위 험 해진 다」
[제4의 벽]은 완강했다.
[‘제4의 벽’이 희미하게 흔들립니다.]
사실, 나도 자신은 없었다.
만약 이 벽이 완전히 사라진다면, 내 정신이 온전히 버틸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그래도 해야만 했다.
「절 대 로 안 된 다」
‘말 안 들으면 강제로 꺼버릴 거야.’
내 위협에, [제4의 벽]이 더욱 강하게 흔들렸다.
언제나 나를 지켜줬던 [제4의 벽].
녀석과 싸우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결국, 먼저 양보한 쪽은 [제4의 벽]이었다.
「전 부 는 안 돼······.」
‘그럼?’
「일 부 만」
내가 답하려는 순간, 어디선가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쩌저저저저적.
나를 포근하게 감싸고 있던 뭔가에 인위적인 균열이 일고 있었다.
머릿속이 혼탁해졌고, 시종일관 침착하던 마음이 급격하게 불안해졌다.
[‘제4의 벽’의 일부가 개방됩니다.]
미칠 것 같은 기분이 되기 시작했다. 시야가 붉어지고 심장이 빨리 뛰었다. 사위가 어지러웠다.
내가 가진 설화들 중 일부가 목소리를 쏟아내고 있었다.
[설화, ‘영원불멸의 지옥도’가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전용 특성, ‘시나리오의 해석자’가 이야기를 통제합니다.]
1863회차에서, 내가 겪었던 일들이 머릿속을 떠돌고 있었다.
눈을 끔뻑이자 내게서 쏟아지는 활자들이 보였다.
그것은 내가 읽어온 ‘멸살법’의 이야기였다. 황홀하게 펼쳐지는 설화의 향연에, 일순간 나조차 넋을 잃을 지경이었다.
그곳에 유중혁이 있었다.
이제는 없는, 원작의 유중혁이었다.
내가 기억하는 회차들의 일부가 파편이 되어, 헤카톤케이레스 삼형제에게 전해지고 있었다.
나는 토악질을 시작했다.
「내가 녀석을 죽였다.」
「그래서는 안 되는 거였는데.」
「내가, 막을 수도 있었을 텐데.」
그럼에도 나는 끝까지 정신을 놓지 않았다.
내겐 이 이야기를 들려줄 의무가 있었고.
오직 나만이, 이 이야기의 전부를 기억하고 있었다.
「“포기하지 않는다. 백 번이고, 천 번이고. 몇 번이고 회귀해서, 반드시 네놈들을 모두 죽여버릴 것이다.”」
그곳에 <올림포스>와 대적하는 유중혁이 있었다.
거신들의 백 오십 개 눈동자가 일제히 커지고 있었다.
「“하나도 남김없이, 죽일 것이다.”」
유중혁의 회차가 흘러가고 있었다.
유중혁은 싸웠다.
211회차에서, 처음으로 12신좌 하나를 죽였고.
325회차에서 둘을 죽였으며.
438회차에서 넷을 죽였다.
회차의 번호는 순식간에 네 자리를 돌파했다.
「“내가 말했지. 너희는 죽을 거라고.”」
그는 말했고. 검을 휘둘렀고. 말을 실천했다.
개중에는, 거신들이 패배했던 <기간토마키아> 시나리오도 있었다.
12신좌들의 목을 틀어쥔 유중혁이 웃고 있었다.
「“너희는 영원히 살아남지 못한다.”」
터져 나가는 신좌들의 머리를 보며, 거신들의 눈빛이 경악으로 변했다.
싸우고 또 싸우는 유중혁이 그곳에 있었다.
무려 1863번에 달하는 회귀 속에, 성좌들을 학살하는 유중혁.
유중혁이 신좌 하나를 죽일 때마다 거신들의 부르 쥔 주먹이 떨리고 있었다. 거신들의 동공에, 오래전 잃어버린 뭔가가 다시 깨어나고 있었다.
결국, 누군가를 설득할 수 있는 것은 이야기뿐이다.
잊혔던 감수성을 깨우고.
낡아 스러지던 의지를 다시 불태우는 것.
어떤 삶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
그것은, 오직 이야기뿐이다.
[전용 스킬, ‘제4의 벽’이 발동합니다!]
이윽고 설화가 끊겼다.
힘이 빠져 자리에 주저앉으려는 순간, 누군가가 나를 부축했다.
유중혁과 김남운이었다.
거신들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서······.]
거신들이, 나를 향해 묻고 있었다.
[그래서, 다음 이야기는 어떻게 되는 거지?]
[이 다음에는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
그 눈동자에 비치는 열망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알고 싶습니까?”
시나리오를 증오하면서도, 다음 시나리오를 궁금해하는 그 마음을.
[······알고 싶다.]
츠츠츠츠츳!
“그럼 직접 알아 내십시오.”
내 말에, 거신들의 눈빛이 다시 한번 흔들렸다. 더이상 다음 이야기 따윈 궁금하지 않다고 말하던 그 부르튼 입술들이, 일제히 경련하고 있었다. 다음 말은 한참 뒤에 돌아왔다.
[······이길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가?]
무슨 말인지 알았기에, 나는 자신있게 답했다.
“이길 수 있습니다.”
물경 삼백 개의 눈들이 나를 노려보았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눈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삼백 개였던 눈이 사백 개로, 다시 오백 개로. 스르르 걷힌 어둠 속에서, 무수한 기간테스들이 헤카톤케이레스 삼형제를 중심으로 부복해 있었다.
[거신들은 들어라.]
쿵, 하고 내리찍은 발에 신화의 발자국이 남았다.
[우리는······ <기간토마키아>에 참전할 것이다.]
소리를 내며 흔들리는 지축.
<타르타로스> 전체가 거신들의 격으로 들끓기 시작했다.
하나둘, 거신들이 발을 찍기 시작했다.
쿵. 쿵. 쿵. 쿵.
기다렸다는 듯, 박자를 맞춰 진동하는 발소리.
거신들이 일제히 일어서며, 일대의 장관이 펼쳐졌다.
쿵. 쿵. 쿵. 쿵.
파멸을 향해 가는 발걸음. 어둠 속에서 파도처럼 솟아오르는 거신들의 모습을 보며 나는 간신히 한숨을 놓았다.
꽤 힘들었지만, 성공했다.
그때, 허공에서 페르세포네의 진언이 들려왔다.
[서두르는 게 좋을 거예요, 구원의 마왕. 이미 <올림포스>에서는 <기간토마키아>에 참전할 ‘거신’들을 뽑아갔거든요.]
“······거신들을 뽑아가다뇨?”
[모르셨군요. 이미 <기간토마키아>는 시작되었어요.]
“그게 무슨 말입니까? 아직 일주일이나 남았을 텐데요.”
[명계에서는 시간이 다르게 흐른다는 거, 벌써 잊었나요?]
아차 싶었다.
바깥의 시간을 물어보려는 순간, 지나치는 거신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번 <기간토마키아>엔 몇이나 잡혀갔지?]
[올해는 넷이었지.]
······넷이라고?
“그럴 리가 없습니다. 이번 시나리오에 투입될 거신은 다섯일 텐데요.”
그러자 거신들이 나를 보며 대답했다.
[넷이다.]
나는 재빨리 스마트폰을 열어 ‘멸살법’을 확인했다.
「올해의 <기간토마키아>에는 다섯 명의 거신들이 참전했습니다.」
틀림없었다.
‘멸살법’에 따르면, 올해의 참전 거신은 다섯이다.
그런데 넷을 뽑아갔다고?
순간, 뒷덜미가 서늘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돌아보자 유중혁도 얼굴이 심각해져 있었다.
“김독자.”
<스타 스트림>의 모든 거신은 <타르타로스>에 갇혀 있다.
딱 하나.
우리가 아는 그 ‘거신족’을 제외하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