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2화

322화 [······나를 데리러 와? 왜?] “네가 필요해.” 김남운은 그게 무슨 헛소리냐는 뉘앙스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막상 말하고 보니 나도 뭔가 기분이 이상했다. 하긴, 나도 내가 이런 말을 할 줄은 몰랐으니까. 나는 1863회차의 김남운을 떠올렸다. 이지혜를 좋아하고, 일행들과 함께 어영부영 어울리던 하얀 머리의 사내. 철이 없고, 주변을 배려할 줄 모르고, 자신의 자아에 깊이 심취해 있던 녀석. 「김남운은 악인이다. 그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나는 그곳에서 김남운의 가능성을 보았지만, 그렇다고 녀석에 대한 선입견이 완전히 뒤집어진 것은 아니었다. 내가 김남운을 기용하기로 결심한 것은, 1863회차에서 한수영과의 대화 때문이었다. ―그렇게 물러 터진 정신으로는 절대로 95번 시나리오까지 갈 수 없을 거야. 나와 한수영과 유중혁은 서로 다르다. 하지만 우리 모두가 한 가지 동의하는 사실이 있다면, 그건 모든 이야기에는 효율을 추구해야만 하는 순간이 있다는 것이다. [성좌, ‘은밀한 모략가’가 당신의 선택에 흥미를 갖습니다.] [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화신 ‘김남운’에게 관심을 갖습니다.] 우리엘의 메시지가 안 보이는 걸 보니, 아마 정희원을 가르치느라 바쁜 모양이었다. 내가 여기 온 걸 알면 정희원은 또 노발대발하겠지. 에덴에 두고 와서 다행이다. 김남운이 입을 열었다. [싫어. 내가 왜 널 도와줘야 해?] 그렇게 말할 줄 알았다. “싫으면 말든가. 가자 유중혁.” 나는 유중혁과 함께 켈베로스를 향해 다가갔다. [뭐야! 어딜 가려고?] “아래층.” [푸하핫, 농담이지? 지금 우리 누렁이가 눈을 부릅뜨고 널 보고 있는데······!] 그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반쯤 졸고 있던 켈베로스가 우리를 향해 이를 드러냈다. 그리고 거의 동시에, 유중혁이 [파천검도]를 발동했다. 꽈아아아앙! 예전이었다면 지하 1층의 켈베로스를 상대하는 것도 버거웠겠지. 하지만 지금이라면 얘기가 다르다. “······좀 살살 하지.” “여기서 낭비할 시간 따윈 없다.” 일격에 고꾸라진 켈베로스가 혀를 빼물고 누워버렸다. 폭음에 놀란 죄수들이 소리를 질러댔고, 곳곳에서 경보가 울려댔다. 보통이라면 지금쯤 심판관들이 달려왔겠지만, 하데스와의 암묵적 약속도 있고 하니 당분간은 안전할 것이다. 우리는 쓰러진 켈베로스를 지나쳐 2층으로 내려갔다. [미친······ 미친놈들아!] 당황한 김남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유중혁이 나를 흘끗 보며 물었다. ―······두고 갈 건가? 저 거신병은 유용하다. ―지켜보기나 해. 우리는 곧장 지하 2층으로 가는 원형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원형 계단의 아래쪽으로 펼쳐진 낭떠러지는 끝이 보이지 않았다. 전설에 따르면 타르타로스의 깊이는 모루를 던졌을 때 아흐레 동안이나 떨어질 정도로 아득했다. [잠깐만, 같이 가!] 김남운이 허겁지겁 우리 뒤를 쫓아왔다. 거신병의 몸집도 어느새 2미터 남짓의 크기로 줄어들어 있었다. 플루토는 사용자의 편의에 맞게 크기 조절이 가능한 거신병이었다. 나는 놀리듯 물었다. “싫다면서 왜 따라오냐?” [그게······ 조금 심심해서 말이지.] 벙긋벙긋 웃는 입이, 도저히 감정을 숨길 수 없는 모양새였다. [근데 뭐하러 가는 길이야? 어디까지 가는 건데? 응?] “거신들 만나러 갈 거야.” [뭐?] 잠시 멍한 표정을 짓던 김남운이 소리쳤다. [크핫······ 으하하하핫! 이야, 지하철 메뚜기남! 그때 알아보긴 했지만, 진짜 미친놈이구나. 거신들이 어떤 존재인지 알아?] 물론 안다. [너 같은 건 그 ■■들 만나면 ■■에 구멍이 뚫려서 당장 ■■······.] [죄수 필터링이 발동하였습니다!] [타르타로스의 올바른 언어 사용 정착을 위해 해당 내용은 필터링되었습니다.] [죄수 ‘김남운’에게 벌점 1점이 부과됩니다.] [이런 시■!] [죄수 ‘김남운’에게 벌점 2점이 부과됩니다.] 김남운의 욕설을 빌리지 않더라도, 나도 거신이 어떤 존재인지는 잘 알고 있었다. 거신(巨神). <올림포스>의 초창기, 금(金)의 시대를 지배했던 종족. 쿠우우우우우우―! 기다렸다는 듯 들려오는 아찔한 포효에, 나도 모르게 발걸음이 멎었다. 저 까마득한 아래에서, 벌써 우리의 존재를 눈치챈 거신들이 반응하고 있었다. 포효에 담긴 ‘격’의 일부만으로도 오싹 소름이 끼쳤다. [미쳤다. 미쳤어······.] 나는 김남운의 말을 무시하고 비유를 불러냈다. 그러자 품속에서 있던 비유가 꾸물거리며 톡 튀어나왔다. [바앗?] “채널 통제 잘하고 있지?” [바앗!] “<명계>의 방송은 모두 오프 더 레코드니까, 정보 발설 금지 서약을 한 성좌들만 입장시켜 줘.” 바아앗, 하고 고개를 끄덕인 비유가 채널 조작을 시작했다. 몇몇 성좌들의 불만이 일었지만, 지금은 이렇게 하는 것이 옳았다. 지금부터의 일은 외부에 적게 노출될 수록 좋으니까. 얼마 지나지 않아 몇몇 성좌들이 메시지를 보내왔다.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투덜거리며 서약에 동의합니다.] [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못마땅한 듯 입맛을 다시며 서약에 동의합니다.] [성좌, ‘은밀한 모략가’가 자기는 이미 서약했다고 말합니다.] 쏟아지는 메시지를 보며 김남운이 감탄사를 내뱉었다. [와, 채널이 이런 거였구나······.] 하긴, ‘배후 선택’을 시작하기도 전에 죽어 나자빠진 김남운은 성좌들의 간접 메시지가 신기하기도 할 것이다. 계단을 내려가는 내내, 김남운은 계속해서 시끄럽게 떠들었다. [그런데 명왕 아저씨가 용케도 여길 내려보내 줬네? 그 아저씨 엄청 꼬장꼬장한데.] “······시끄럽군. 한 번만 더 입을 열면 베어버리겠다.” [······뭐야, 싸움 좀 하나 봐? 한 판 붙어 볼래?] 김남운을 노려보는 유중혁의 눈빛이 복잡했다. 유중혁은 이미 김남운을 알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게, 지난 회차에서 김남운은 유중혁의 일행이었으니까. “유중혁. 여기서 힘 낭비할 시간 없다. 알지?” 검을 집어넣는 유중혁을 보며 김남운이 입맛을 다셨다. 씩씩 흥분한 숨을 몰아쉬는 모양새가, 꼭 어린아이 같았다. 오랫동안 관심을 받지 못해, 혼자가 된 어린아이. 왜 ‘김남운’을 기용했냐는 내 질문에, 1863회차의 한수영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처음부터 ‘나쁜 인간’으로 태어나는 인물은 없어. 전부 작가가 그렇게 설정한 것뿐이야. 나쁜 인간이 될 수밖에 없도록 서사를 준 거라고. 난 그게 맘에 들지 않았어. 나도 한수영의 말에 어느 정도 동의한다. 하지만 이 세계의 김남운은 그 ‘첫 단추’를 너무 잘못 끼웠다. 이 녀석은 지하철에서 사람들을 선동해 최악의 범죄를 꾸몄으니까. [두근두근하구만. 이런 기분은 엄마 아빠가 동시에 날 버린 이후로 처음이야.] “······그건 뭔 기분이냐?” [새로운 모험이 날 기다리는 기분이지.] 분명, 김남운은 만들어졌다. 나는 ‘멸살법’ 작가를 원망해야 하는 걸까. 아니면, 그때 김남운을 제대로 말리지 못한 나를 원망해야 하는 걸까. 스마트폰을 열자, 새로운 메시지가 떠올라 있었다. [현재 ‘4차 수정본’의 업데이트가 진행 중입니다.] ······슬슬 업데이트가 될 줄은 알았다. 그간 그렇게 많은 일들이 있었는데, 조용한 게 이상하다 했다. 나는 내려가는 동안 ‘멸살법’ 파일을 열어 필요한 부분들을 읽었다. 역시 마음이 불안해질 때는 ‘멸살법’을 읽는 게 최고다. 「김독자는 생각했다. 내가 살아가는 3회차는, 이제 원작의 어떤 회차도 닮지 않게 되었다.」 굳이 닮은 부분을 찾으려면 찾을 수는 있을 것이다. ‘멸살법’의 원작에서 <명계>를 찾는 장면은 많았다. 47회차, 211회차, 397회차······ 정말 무수히 많다. 하지만 그 어떤 회차에서도, ‘지금 이 시점’에 <명계>에 온 적은 없었다. 「이용할 수 있는 모든 정보들을 취합해야 한다.」 「거신들을 설득하지 못하면 <기간토마키아>는 이길 수 없다.」 ‘멸살법’의 페이지 곳곳에 <올림포스>의 흔적들이 남아 있었다. 단 한 번의 손짓으로 바다를 갈라버리고. 초월좌들과 성좌들을 짓밟고. 행성마저 무참히 박살 내는 무지막지한 올림포스의 12신좌들. 이곳에서 나가면, 나는 녀석들을 정면으로 상대해야 한다. 수많은 정보들이 머릿속을 스쳐갔고, 이용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들이 머릿속에서 가려졌다. “김독자.” “······왜?” 유중혁은 가만히 나를 들여다보더니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것도 아니다.” 뭐야 이 자식은. 갑자기 뜬금없이. 나는 곧바로 [전지적 독자 시점]을 발동했고, 곧 유중혁의 머릿속이 훤히 들려왔다. 「자신이 없어 보이는군.」 어쩐지 정곡을 찔린 느낌이라 머쓱해졌다. 어쩌면 나는 생각보다 얼굴에 감정이 드러나는 타입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일부러 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명계>에서 얻어야 할 건 두 가지야. 하나는 ‘거신갑(巨神鉀)’, 그리고 다른 하나는 ‘거신들의 맹세’.” “······어느 쪽도 쉽진 않을 거다.” “그렇겠지.” “하지만, 쉽지 않은 쪽이 더 보상이 좋다.” 유중혁의 말을 들으며 나는 피식 웃었다. 크르르르릉······! 얼마 지나지 않아, 명계 2층의 출입구가 나타났다. 2층에도 예상했던 대로 켈베로스가 문을 지키고 있었다. 1층에 있던 녀석보다 덩치가 큰 놈이었다. 유중혁이 검을 뽑아 드는 순간, 김남운이 외쳤다. [잠깐만! 누렁이 때리지 마!] “······비켜라. 시간 없으니까.” 켈베로스를 쓰다듬던 김남운이 우리를 돌아보며 말했다. [심판관들이 쓰는 궤도 엘리베이터가 있는 곳을 알아.] 궤도 엘리베이터. 분명, ‘타르타로스’에는 그런 기물이 있다. 오직 심판관들만이 사용하는 숨겨진 운송 기구. 하지만 ‘멸살법’에도 엘리베이터의 정확한 위치는 설명되지 않는다. 나는 약간의 의구심을 가지고 물었다.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나도 그걸로 몰래 내려 가봤으니까.] “몇 층까지?” [77층.] 나는 깜짝 놀랐다. 77층이면 최저층으로 직행하는 관문이었다. [따라와. 이쪽이니까.] 자신만만하게 걸어가는 김남운을 보며, 나와 유중혁이 서로를 돌아보았다. 의외로 이 녀석이 도움이 될 때도 있군. ······역시 살려둘 걸 그랬나? 아니지, 이번에는 죽어서 도움이 된 것 같으니 역시 죽이길 잘 한 건가. * 궤도 엘리베이터는 정말 빨랐다. 지하 2층, 3층, 4층······ 엘리베이터는 순식간에 하강했고, 도중 우리는 끔찍한 <타르타로스>의 정경을 볼 수 있었다. 서로를 공격하는 죄수들과, 끔찍한 유황불 속의 악마들이 우리를 향해 소리쳤다. “신입이다!” “어이! 뭘 똑바로 쳐다보는 거야? 눈 깔아!” 킬킬 웃는 죄수들 중에는 초월좌들의 모습도 보였다. 나처럼 <올림포스>의 법권 지대에서 범법을 저질렀거나, 12신좌에게 반항하다가 붙잡혀 온 녀석들. 저들 중 일부는 미식협의 식탁에 스테이크가 되어 올라갈 것이다. 끼이이익, 하는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가 정지하고, 우리는 77층에 내렸다. 77층은 죄수가 없는 층이었다. 감히 너비를 잴 수조차 없는, 광활한 공동(空洞)을 연상시키는 공간. 그 공간의 중심에는 큼지막한 문이 있었다. [78층부턴 누렁이들이 없어. 있어도 소용이 없거든.] 겨우 켈베로스 정도로는 거신을 막을 수 없다. 캄페(Campe) 정도 되는 대괴수라면 모를까. 호기롭던 김남운이 머뭇거리며 말했다. [······나도 저 너머로 가본 적은 없어. 전에 손을 살짝 넣어본 적은 있는데, 그때 이 꼴이 됐지.] 나는 거신병의 어깨에 남은 상흔을 바라보았다. 지금은 거의 아물었지만, 팔이 뜯겨져 나갈 정도의 타격을 입었던 모양이었다. 비록 완성체가 아니라곤 해도, 거신병 플루토는 탑승자 없이도 설화급 성좌에 준하는 힘을 낼 수 있는 무시무시한 병기. 그런 병기에 저 정도의 타격을 입히는 존재들이 이 너머에 있는 것이다. 나는 문을 향해 가까이 다가갔다. 높이만 30미터를 훌쩍 넘는 문에는, 사람의 얼굴과 비슷한 문양이 그려져 있었다. 유중혁이 말했다. “들어가려면 제물이 있어야 한다.” 유중혁의 말에 김남운이 흠칫 놀랐다. [뭐야,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우리는 김남운을 무시하고 말했다. “알아. 준비했어.” “너무 강력한 제물을 내주면 ‘태고의 거신’들을 부르게 될 거다.” “어차피 너도 언젠가 만나야 하잖아.” “······지금은 아니다. 지금 만나면 우리는 죽는다.” 오만한 유중혁의 표정에도 긴장이 감돌고 있었다. <타르타로스>의 거신에는 종류가 있다. 하나는 <티타노마키아>를 일으켰던 오래된 <올림포스>의 지배자, ‘태고의 거신’ 티탄(Titans)이었고, 다른 하나는 <기간토마키아>를 일으켰던 거신 기간테스(Gigantes)들이었다. 굳이 급을 나누자면 신화급 성좌와 설화급 성좌 정도의 차이라고 해둘까. 내가 불러야 할 이들은 ‘기간테스’ 쪽이었다. “걱정 마. 성유물 중에서도 상위급의 아이템을 내주지 않는 이상, 티탄급의 거신이 나올 일은······.” 바닥에서 지진이 일어난 것은 그 순간이었다. [<타르타로스>의 구성이 불안전해집니다!] 쩌저저저적! 뭔가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눈치챈 순간, 갑자기 문이 벌컥 열리며 거대한 손이 유중혁을 잡아챘다. “유중혁!” 내가 유중혁을 향해 손을 뻗는 찰나, 문 안쪽에서 두 개의 손이 더 튀어나왔다. 나는 황급히 [전인화]를 사용해서 손을 피했지만, 김남운은 그러지 못했다. [우와아아아악! 살려줘!] 그리고 다음 순간, 열 개가 넘는 손이 한꺼번에 나를 덮었다. 손들이 만들어 낸 폐쇄 공간 속에서 내 몸이 엉망으로 나뒹굴었고,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허공에 거꾸로 매달려 있었다. 대롱대롱 흔들리는 시야 속에서, 나를 잡은 거대한 팔이 보였다. [전용 스킬, ‘제4의 벽’이 강하게 발동합니다!] 츠츠츠츳, 튀는 스파크의 불빛 속에, 숨을 쉬기가 버거울 정도의 ‘격’이 주변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나를 터트려버릴 수 있을 정도의 존재. 거대하고 둔탁한 손가락 같은 것이 내 엉덩이를 팡팡 튕기고 있었다. [귀여운 날파리가 왔구나.] ‘파천검성’을 닮은 거대한 눈동자가 나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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