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4화

294화 한수영의 본부에 머무른 지도 이틀이 지났다. 그 사이, 나는 몇 가지 일들을 골몰해야 했다. 하나는 한수영이 말한 ‘유중혁의 죽음’이 정확히 무엇을 뜻하는가를 밝혀내는 것. 둘은 한수영이 그것을 통해 궁극적으로 뭘 얻고자 하는가를 알아내는 것. 어느 쪽이든 알아내기는 쉬운 정보는 아니었다. ······게다가 골치 아픈 문제는 그것만도 아니었다. [정말 멸망했다고? 우리 <에덴>이?] 나는 흉흉한 기세를 내뿜는 가브리엘을 보며 되물었다. “그렇습니다. 3회차의 메타트론한테 아무런 언질도 못 들으셨습니까?” [······서기관이 <에덴>의 멸망을 알고 있었다는 거야?]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돌아가시면 직접 물어보십시오. 무사히 돌아갈 수 있을 때의 이야기겠지만 말입니다.” 그 말에 가브리엘과 요피엘의 줄기가 파들파들 떨기 시작했다. 내게 화를 내려는 건가 싶었는데, 아무래도 자기들끼리 얘기를 나누는 것 같았다. 나는 품속에서 우리엘의 인형을 꺼냈다. [선악의 구속구]에 의해 금제가 걸린 우리엘의 화신체는, 앞으로 닷새 간은 힘을 사용할 수 없다. 「‘제4의 벽’이 당신을 들여다봅니다.」 어쩌면, ‘제4의 벽’의 힘을 빌려서 3회차의 기억을 전해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기억을 보고서 감동한 우리엘이 내 편이 되어줄 거라 생각한다면, 그거야말로 판타지에서나 일어날 법한 일이다. 아마 그 기억을 다 보고난 후, 우리엘은 이렇게 말하겠지. 「■■, 그래서 어쩌라고?」 내가 가진 3회차의 기억은, 끔찍한 1863회차를 겪으며 살아온 우리엘에게 그저 소설 속 이야기처럼 들릴 것이다. “김독자 씨, 같이 사냥 가기로 하셨었죠?” 고개를 들자, 강철 건틀렛을 낀 이현성이 서 있었다. “제가 같이 가도 괜찮습니까?” “예, 뭐······ 주운 탄환에 피아 식별 같은 건 별 의미가 없으니까요.” 그렇게 말하며 머쓱하게 웃는 이현성. 3회차든 1863회차든, 저 이상한 비유는 여전하다. 나는 속으로 이현성이 지금까지 영창을 몇 번이나 다녀왔을지 계산해 보았다. [등장인물 ‘이현성’에 대한 이해도가 상승했습니다.] [등장인물 ‘이현성’이 당신에게 미약한 호의를 드러냅니다.] 이렇게 되고 보니 첫 번째 시나리오 생각도 나고, 기분이 조금 싱숭생숭했다. 나는 이현성의 경계심을 덜어주기 위해 괜히 한마디를 덧붙였다. “너무 경계심 없으신 것 아닙니까? 저는 유중혁의 동료인데요.” “음······ 대장께서도 딱히 언질이 없으셨고, 그리고······ 뭐랄까, 독자 씨는 그리 나쁜 사람이 아닐 거란 예감이 듭니다. 아흔 네 번의 시나리오를 거치는 동안 얻은 직감이랄까요.” 원작 내내, 이현성의 저 직감은 대부분 빗나간다. 나는 이현성이 저런 소리를 할 때마다 이제 곧 유중혁이 뒤통수를 맞아 뒈지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곤 했다. “여, 왔어? 어디 실력 좀 보자고.” 함께 사냥을 나가는 이들은 김남운과 이지혜였다. 큰 회색 후드를 덮은 이지혜가 못마땅하다는 듯 나를 일별했다. “빨리 와. 출발할 거야.” 나는 일행을 따라 본부를 나섰다. 이번 사냥의 목적은 본부 주변에 잔재하는 ‘이름 없는 것들’을 청소하고 아이템들을 수거하는 것이었다. 물론 명목상 그렇다는 것이고, 나는 한수영이 왜 이 사냥을 지시했는지 알고 있었다. ―전방에 두 마리 옵니다. 하나는 촉수종, 하나는 복합종이에요. 허공에서 들려오는 한동훈의 메시지와 함께, 이지혜가 칼을 빼들었다. 발동한 [순살]이 촉수들을 모조리 베어내자, 이어서 달려든 김남운이 [흑염]을 발동해 촉수종의 본체를 불태웠다. 원작을 볼 때도 느꼈지만, 저 둘은 손발이 굉장히 잘 맞는 편이었다. 끔찍한 비명과 함께 괴물이 산화하자, 김남운이 이죽거리며 이지혜에게 다가갔다. “나이스 어택.” 김남운이 짐짓 쿨한 얼굴로 이지혜를 향해 오른손을 들었다. 차가운 눈빛의 이지혜가 김남운을 향해 칼을 내질렀다. 검풍은 김남운의 뺨을 스쳐 [흑염] 속에서 촉수를 재생하던 ‘이름 없는 것들’의 본체를 꿰뚫었다. 이지혜는 다음 사냥감을 향해 움직였다. 김남운이 그 뒤를 쫓았다. “야, 같이 가!” 길영이랑 유승이가 자란다면 저런 콤비가 될까. 돌아간다면 그런 광경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독자 씨?” “아, 네. 저쪽은 제가 맡겠습니다.” 나는 황급히 ‘부러지지 않는 신념’을 뽑아 들고 [바람의 길]을 발동했다. 쐐액거리며 날아드는 촉수들이 내 빈틈을 파고들었다. 일부러 [전인화]를 사용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이름 없는 것들’을 상대하는 것은 조금 까다로웠다. “크큭, 약하잖아?” 양손에 [흑염]을 거머쥔 김남운이 꺼림칙한 미소를 지은 채 ‘이름 없는 것들’을 두들겨 패기 시작했다. “잘 보고 배우라고!” 확실히, 대단한 전투력이었다. 지금의 김남운이라면 ‘심연의 흑염룡’의 힘을 절반 정도는 끌어 쓸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그런 김남운을 조용히 응원해줬다. “잘 하네. 저기 또 온다.” “하하핫, 내게 맡기라고!” 콰아아아아! “와우, 아무리 그래도 저기 쟤는 힘들겠지?” “무슨 소리! 하하하핫! 죽어라!” “이야, 그렇다면 저기 저 녀석도······.” 뒤늦게 뭔가를 눈치 챈 김남운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곁에서 이현성이 입꼬리를 실룩거리고 있었다. 멀리서 괴수를 잡던 이지혜가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찼다. 표정이 일그러진 김남운이 나를 향해 주먹을 치켜드는 순간, 나는 녀석에게 일러주었다. “이지혜는 허세부리는 거 안 좋아해.” 김남운의 얼굴이 놈의 머리카락처럼 희게 변했다. 녀석의 동공은 거의 지진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떨리고 있었다. 사실 제일 가관인 것은 곁에서 눈을 휘둥그레 뜬 이현성이었다. ······이 양반 눈치 없는 건 어느 회차나 마찬가지군. 멀리 떨어진 이지혜와 나를 번갈아 보며 눈알을 굴리던 김남운이 더듬거리며 입을 열었다.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모르는 게 이상한 거지. 머리부터 염색하고 붕대도 풀어. 반장갑을 끼려면 양쪽을 다 끼든가. 사냥 후에 ‘나이스 어택’ 같은 소리도 하지마.” [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당신을 싫어합니다.] “저 뒤에 쟤처럼 하는 게 더 도움이 될 거다.” 얼굴이 시뻘게진 김남운이 내 뒤쪽의 사내를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멍한 얼굴의 유중혁이 있었다. 꼬질꼬질한 코트에 씻지도 않은 모습이었지만 그게 녀석의 잘생김까지 가리진 못했다. “저 녀석은 ‘악’이다. 멋있긴 하지만.” 라고 ‘망상악귀’ 김남운이 말했다. 나는 피식 웃으며 답했다. “너무 나쁜 놈으로 몰고 가진 마. 좋은 구석도 있는 놈이야.” “하, 누가 한 패거리 아니랄까봐. 그러고 보니 넌 어쩌다 유중혁이랑 같이 다니게 된 거냐?” 김남운이 의심스럽다는 눈으로 나를 들여다보자, 이현성이 말했다. “독자 씨가 다른 세계선에서 오셨다는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아마 한수영이 나에 대한 이야기를 한 모양이었다. 깜짝 놀란 김남운이 나를 손가락질하며 물었다. “다른 세계서언? 그건······ 평행우주······?” “비슷해.” 간단한 생물 지식도 없는 김남운이 평행우주를 알고 있다는 사실에 나는 탄복했다. 확실히 이 회차는 내가 기억하는 회차와는 다른 데가 있다. “뭐야, 그래서 지금까지 안 보였던거구나. 그래서? 여긴 왜 온 거냐?” “신났구나. 그런데 안타깝게도 알려줄 수가 없네.” “쳇, 그럼 그 세계에서 난 뭐 하고 있어? 혹시 내가 리더라든가?” “넌 죽었어.” 김남운의 안색이 다시 하얗게 탈색되었다. “농담이야. 넌 거기서 건프라 만들고 있어. 되게 행복해하던데.” “건프라? 오오······.” 어느샌가 다가온 이지혜가 김남운의 뒤통수를 갈겼다. “뭘 헤죽거리고 있어? 아이템 주워.” “어, 어.” 이지혜를 따라 허겁지겁 아이템을 줍는 김남운을 보며, 나는 생각했다. 어쩌면 나는 첫 번째 시나리오에서 녀석을 죽이지 말았어야 했는지도 모른다. 이지혜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아이템을 줍던 김남운은 슬금슬금 눈치를 보더니 내게 귓속말을 했다. “저기. 부탁할 게 하나 있는데.” “뭐.” “나중에 코트 잠깐만 빌려주면 안돼?” ······뭔 소린가 했더니. “너 하는 거 봐서.” 김남운이 투덜거리며 다시 아이템을 줍기 시작했다. 잔소리를 늘어 놓는 이지혜와 껄껄 웃는 이현성. 평화로운 광경이었다. 하지만 그 평화 속에서, 나는 오히려 이곳이 내 세계가 아니라는 것만을 강하게 상기할 뿐이었다. 이곳에는 정희원이 없고. 유상아도, 이길영도 없다. ······그래, 한명오도. 그러니 나는 반드시 돌아가야만 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는 주변의 아이템들을 모두 수거했다. 나는 수거한 아이템들을 살피다가 미소를 지었다. 역시 있었군. 95번 시나리오를 클리어하기 위해서는 열쇠가 되는 ‘다섯 자루의 명검’이 필요하다. 그리고 아마, 한수영은 이 근방에 그 검들 중 하나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검을 뽑아든 순간 나는 흠칫 놀랐다. “저기, 현성 씨.” “예?” “한수영이 이 검을 구해오라고 한 겁니까?” 내 말에 검을 들여다보던 이현성이 대답했다. “아, 맞습니다. 우리가 찾던 검입니다.” 95번 시나리오는 ‘다섯 자루의 명검’이 열쇠가 되는 시나리오였다. 열쇠가 되는 다섯 자루의 검을 통해, 봉인된 ‘묵시룡’을 해방시키는 시나리오. 하지만 이 검은······. 싸한 예감이 머릿속을 스쳐갔다. 하늘을 올려다 보자, 거대한 [묵시룡의 봉인구]가 이쪽을 오시하고 있었다. 새카만 구체 속에 잠들어 있는 ‘멸살법’ 최대 최악의 파멸룡(破滅龍). 본래 유중혁은 저 용을 해방시키며 거대 설화인 ‘묵시룡의 해방자’를 얻고 마지막 시나리오로 진출하게 되어 있었다. 「그 순간, 김독자는 유중혁을 죽일 방법을 깨달았다.」 강하게 쥔 칼자루가 파르르 떨렸다. 「그리고, 한수영이 자신과 정확히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사실도.」 * 김독자는 그날 내내, ‘멸살법’을 읽고 또 읽었다. 이미 읽었던 페이지를 읽고 또 읽으며, 혹시나 자신이 놓친 행간이 없는지를 점검했다. 김독자는 뭔가를 찾는 듯했다. 혹은, 찾지 못하는 것 같기도 했다. 그는 스마트 폰을 내려다 보며 몇 번이나 머리를 감싸쥐었고, 한숨을 내뱉기도 했다. “······시끄러워. 그만 떠들어.” 그리고 가끔은 [제4의 벽]을 욕하기도 했다. 아무튼, 김독자는 노력했다. 그것은 뭔가를 바꾸기 위한 노력이었고, 어쩌면 누구도 알아주지 않을 노력이었다. 이윽고 김독자의 눈빛에 작은 결의가 깃들었다. 하루이틀만에 쌓인 결의가 아니었다. 그것은 오랫동안 하나의 이야기를 빠짐없이 읽어온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결의였다. 그 결의로, 김독자는 계속해서 ‘멸살법’을 읽었다. 읽고, 읽고, 또 읽고. 그렇게 얼마나 더 읽었을까. 별처럼 빛나던 김독자의 눈은 조금씩 흐려졌다. 김독자는 얕은 잠에 빠져들었다. 유중혁은 텅 빈 눈으로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지친 김독자의 등. 규칙적으로 들려오는 코고는 소리. 츠츳, 츳. 아주 작은 스파크와 함께, 유중혁의 눈빛이 되돌아오고 있었다. 텅 비었던 동공에는 사나운 살의가 깃들었고, 그 살의는 정확히 한 사람을 향하고 있었다. 스르릉. 고요한 검명과 함께 유중혁의 등에서 [진천패도]가 뽑혔다. 그는 소리 없는 발걸음으로 김독자를 향해 다가가, 김독자의 목에 검을 겨누었다. 츠츠츳. 「하 하 그런 짓 은곤 란해」 유중혁이 인상을 찌푸렸다. 당장이라도 김독자를 깨울 듯, [제4의 벽]이 불안한 스파크를 튀기고 있었다. 유중혁은 [전음]으로 허상의 ‘벽’을 겨냥해 메시지를 전달했다. ―녀석을 깨울 생각은 마라. 그런 짓을 하면 즉시 목을 날려버릴 거니까. 「흐 음」 [제4의 벽]이 생성하던 스파크의 세기가 급속도로 줄어들었다. 유중혁은 검을 물리지 않았고, [제4의 벽]은 허공에 활자들을 토해내며 유중혁을 마주보았다. 「원하 는 게 뭐 야?」 유중혁은 말이 없었다. 말을 찾는 것 같기도 했고, 혹은 그 말이 무엇인지 모르는 것 같기도 했다. 그때, [제4의 벽]이 기괴한 웃음소리를 냈다. 「아 하 알겠 다」 “······.” 「궁금 한 거 지 ?」 유중혁은 여전히 대답하지 않았지만, [제4의 벽]은 이미 모든 것을 알았다는 듯 웃어댔다. [제4의 벽]의 활자들이 점점 많아지기 시작했다. 허공을 황금빛으로 수놓은 활자들이 이윽고 방을 한가득 덮었다. 유중혁은 자신의 주변을 떠도는 활자들을 잠시 바라보다가, 그중 하나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자, 활자들도 그의 손에 반응하듯 이야기를 시작했다. 「“저는 독자입니다.”」 「실제로 나는 사람들에게 스스로를 이렇게 소개하곤 하는데, 그러면 다음과 같은 오해를 받곤 한다.」 그것은 그가 한 번도 겪지 못한 세계의 이야기. [제4의 벽]이 킥킥거리며 웃었다. 「아주 재 밌을 거 야」 유중혁은 가만히 그 이야기를 들었다. 밤이 깊고, 다시 깊은 밤이 저물어 희미한 새벽이 찾아들 때까지. . . . 이윽고 잠에 들었던 김독자가 깨어났을 때, 유중혁은 언제 그랬냐는 듯 텅 빈 눈으로 벽에 기대어 서 있었다. “······잠들었네, 젠장.” 머리를 헝클어트린 김독자가 비틀대며 일어나 스마트폰과 검을 챙겼다. 창밖을 내다보자, 벌써 도열을 마친 본부의 병력들이 보였다. 95번 시나리오의 클리어를 위해 모인 일행들. 일행들의 중심에서 이쪽을 올려다보는 하얀 코트의 한수영이 보였다. 오늘은, 화신 ‘유중혁’이 죽는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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