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9화

279화 Episode 53. 구원의 마왕 작은 아가 천사 둘이 얼굴을 붉히는 사진이 붙어 있는 문. 문의 문패에 적힌 [우리엘☆]이란 글씨를 보며, 가브리엘이 입술을 실룩였다. [야.] 방문을 두들겨 봐도 대답이 없다. 그럼 다시 한 번. [야, 우리엘!] 더욱 힘껏 문을 두들기자, 문 너머에서 앓는 소리가 났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꺼지라고 말합니다.] 쩌렁쩌렁 울려 퍼지는 간접 메시지에, 가브리엘이 미간을 찌푸렸다. [누군 좋아서 온 줄 알아? 나도 임무 때문에 온 거야.] 말하는 것만으로도 짜증나 죽겠다는 듯, 가브리엘이 씩씩거렸다. 메타트론의 명령으로 불합리한 임무를 맡은 지도 벌써 이틀 째. 대충 하는 척 하면서 농땡이나 칠 계획이었는데, 메타트론이 먼저 선수를 쳤다. ─가브리엘은 우리엘에게 인수 인계부터 받아 주십시오. 그리고 요피엘은 가브리엘이 게으르게 굴지 않도록 감시해주기 바랍니다. ─맡겨 주십시오. 하필이면 저 꼬장꼬장한 요피엘과 한 팀이라니. 차라리 우리엘과 한 팀이 되는 게 나을 판국이었다. [구원의 마왕 관찰 기록 있지? 그거 받으러 온 거야. 빨랑 문 열어!] 방문 너머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설마 네가 내 후임이냐고 묻습니다.] [그래 ■탱아.] 다시 한 번, 벼락같은 간접 메시지가 울려 퍼졌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라고 말합니다.] [욕할거면 나와서 직접 할래?]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후임은 너뿐이냐고 묻습니다.] [나랑 요피엘.] 방문 너머로 깊은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잠시 후, 미세하게 열린 문틈 사이로 가녀리고 긴 손끝이 불쑥 튀어 나왔다. 자세히 보니, 하얀 손가락 끝에 뭔가가 쥐어져 있었다. 그 물건이 뭔지 깨달은 가브리엘이 혀를 찼다. [······USB? 요즘 누가 이런걸 써? 인간들이나 쓰는 거잖아?]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잔말 말고 가져가라고 경고합니다.] 가브리엘이 USB를 받자, 우리엘이 한 마디를 덧붙였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붉은 코스모스에겐 비밀이라고 말합니다.] [요피엘한테? 왜?] 우리엘은 방문을 쾅 닫을 뿐 어떤 대답도 하지 않았다. 대신 들려온 것은 간헐적으로 훌쩍거리는 소리 뿐. 뭐라고 한 마디 쏘아 붙여주려던 가브리엘이 샐쭉 입술을 내밀었다. 평소 사이가 좋진 않았지만, 그 ‘악마 사냥꾼’ 우리엘이 저런 꼴이 된 걸 보니 그래도 괜히 신경이 쓰인다. [야, 청승 떨지마. 근신 금방 풀릴 텐데 뭐. 겨우 3년······.]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꺼지라고 외칩니다!] [미친■이 위로를 해줘도 지■이네.] 잠시 후, 파일을 받아온 가브리엘은 자신의 방에서 USB를 열어 보았다. 그리고. [······대체 뭔 임무를 한 거야?] 그렇게 중얼거리면서도, 가브리엘은 화면에서 나오는 영상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 [성좌, ‘물병자리에 핀 백합’이 당신에게 호기심을 갖습니다.] [성좌, ‘물병자리에 핀 백합’이 당신의 모습을 보는 것을 좋아합니다.] 정희원은 허공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인상을 찌푸렸다. 우리엘이 사라지니까, 이번에는 더 이상한 성좌가 들러붙었다. 신경 쓰이는 것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정희원은 멀리서 휘적휘적 돌아다니는 김독자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왜 나한테 아무 말도 안하지?” “무슨 말이요?” 핫 하고 돌아보니 또 이지혜가 곁에 바싹 붙어 있었다. “아무것도 아냐.” “왜요, 뭔데요?” “아무것도 아니라니까.” “언니 <김독자 컴퍼니> 가입하시려고요?” 노점상에서 산 음료수를 들이켜던 정희원이 콜록거리며 숨을 토했다. “무, 무슨. 아냐! 이름도 이상하고. 어디 가서 그런 곳 들어갔다고 말하기 쪽팔리거든?” “전 기대되는데. 회사 이름이 좀 구리긴 한데 뭔가 직장 생활 체험하는 느낌이라 두근거려요. 혹시 월급도 주려나?” “직장 생활이 뭔지 알게 되면 너도 생각이 좀 달라질 거다.” 이지혜가 입술을 내밀었다. “아무튼 뭐, 저도 가입하려고 기회 보고 있어요. 어차피 사부도 거기 있고 하니.” “······유중혁 씨가 벌써 가입했어?” “독자 아저씨가 그랬잖아요. 여긴 유중혁과 나의 성운이다!” 물론 그딴 말을 한 적은 없었지만, 정희원은 반사적으로 허공을 올려다보았다. 그러나 기다렸던 간접 메시지는 들려오지 않았다. 괜히 뭔가 허전한 느낌이 들었다. [성좌, ‘물병자리에 핀 백합’이 화신 ‘이지혜’의 유머를 싫어합니다.] 정희원은 고개를 휘휘 저으며 분주히 광장을 쏘다니는 김독자를 바라보았다. 며칠 전부터 얼굴 보기가 힘들 정도로 바삐 움직이는데, 대체 뭘 그렇게 열심히 하는 건지 모르겠다. 괜히 섭섭한 마음에 주변을 서성이던 정희원의 시야에 유상아의 모습이 잡힌 것은 그때였다. 벤치에 앉아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는 유상아를 향해, 정희원이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상아 씨! 혹시 독자 씨 성운 가입 했어요?” 정희원을 발견한 유상아가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이 아가씨는 며칠 전부터 무슨 생각을 하길래 이렇게 혼이 빠진 건지······. “저는 조금 사정이······.” “참, 그러네. 상아 씨는 조금 힘들겠네요.” 유상아는 <올림포스> 성운의 화신. 성운 전체의 지원을 받는 특별한 경우다 보니, 김독자의 성운에 가입하기는 어려움이 있을 터였다. 후원은 후원대로 다 받아 놓고 이제와서 다른 성운을 선택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 지는 뻔한 일이니까. “대신 동맹 제의를 맺었어요. 저를 통해 몇몇 성좌들이 독자 씨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기로······. “······<올림포스> 성좌들은 전부 독자 씨 싫어하는 거 아니었어요?” “모두 그런 건 아니에요. 희원 씨는 성운 가입 하셨나요?” “저는 생각 좀 해보려고요.” 정희원은 입맛을 다시며 광장 쪽을 돌아보았다. “사실 가입이 확실치는 않아요. 제 배후성 문제도 있고······.” 괜히 자존심이 상한 정희원이 둘러대자, 유상아가 온화한 미소를 지었다. “희원 씨가 성운에 가입해준다면 독자 씨에게도 큰 힘이 될 거예요.” “저도 가능하다면 돕고 싶죠.”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런 복잡한 상황에 놓인 것은 그녀 하나만은 아닌 듯했다. 멀찍이 떨어진 광장 한가운데에서, 둔한 대형견처럼 앉은 이현성이 보였다. 그 옆에는 아기고양이처럼 쪼그려 앉은 신유승과 이길영이 있었는데, 셋의 시선은 김독자를 향해 있었다. 정확히는, 김독자가 움직일 때마다 졸졸 쫓아 다니는 중이었다. 뭘 기다리는 건지는 뻔해보였다. 그걸 끝까지 외면하는 김독자도 어지간히 독하다 싶었다. “······저쪽에도 아직 아무 말 없었나 보네요.” 이지혜의 말에, 정희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때가 되면 말하겠지. 은근히 외골수 기질이 있는 사람이니까.” 뭐, 아무렴 어떤가 싶었다. 모처럼 일행들에게 찾아온 평화였고, 김독자에게도 여러 가지 생각할 시간이 필요할 테니까. 이렇게 아무 일 없이 기다리는 것뿐이라면, 언제까지라도 할 수 있다. [성좌, ‘물병자리에 핀 백합’이 당신의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봅니다.] [성좌, ‘붉은 코스모스의 지휘관’이 ‘구원의 마왕’을 경계합니다.] ······이상한 천사들이 있으니 당분간 심심하지도 않을 거고. 안일하게도, 정희원은 그렇게 마음을 놓아버렸다. 그리고 그 일은, 갑자기 시작되었다. * “진짜? 연락할 방법이 전혀 없는 거야 아줌마?” “마계로 통하는 채널들이 막히고 있어. 강력한 결계라도 생긴 것처럼······.” 이수경의 말에, 한수영의 표정이 조금씩 암담해졌다. 심지어 아까부터 도깨비를 호출하고 있는데도, 반응해오는 도깨비는 아무도 없었다. 한수영은 멍한 얼굴로 [길흉화복]을 점쳤던 물그릇을 내려다보았다. 凶凶凶凶凶凶凶凶凶凶······. 대체 몇 개나 흉(凶)이 떠올라 있는 것인지, 셀 수조차 없었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려는 건데······?” 대흉일 때 김독자는 무려 <베다>의 <로카팔라>중 하나와 대적해야 했다. 그런데 이렇게 많은 흉이라니······ 대흉도 아니고 범흉(氾凶)이라 불러야 할 지경이었다. 츠츠츠츳. 물그릇의 수면이 떨리며 희미한 스파크가 튀기 시작했다. [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흠칫 고개를 듭니다.] “염룡아?” [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73번째 마계를 바라봅니다.] “너 혹시 뭔가 알아?” [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위협적인 울음을 토합니다.] 붕대를 둘둘 감은 팔이 지끈거리며, 흑염룡과 동조를 이루었던 육신에 스파크가 튀었다. “읏, 인마!” 흑염룡의 감정이 그대로 전해져 왔다. 지금껏 어떤 적수를 만났을 때도, 흑염룡이 이렇게나 날뛰었던 적은 없었다. [성좌, ‘양다리 전문가’가 파랗게 질린 입술을 깨뭅니다.] [성좌, ‘구암신의’가 자신의 침을 떨어트립니다.] [성좌, ‘헌천홍도경문위무대왕’이 조용히 검을 내려 놓습니다.] [성좌, ‘조선제일술사’가 자신의 기척을 지웁니다.] 한반도의 성좌들이 빛을 꺼뜨리고 있었다. 마치, 포식자 앞에서 몸을 숨기는 피식자들처럼. 붕대를 감은 팔이 계속해서 따끔거렸다. 이수경의 만류를 뿌리친 한수영이 기어코 붕대를 풀어내자, 그곳에 박힌 흑염룡의 문신이 빛나고 있었다. 츠츠츠츳 터지는 스파크와 함께, 한수영의 오른팔이 허공에 새카만 글씨를 썼다. ―별들의 재앙이 온다. “별들의 재앙? 그게 뭔데?” 저 오만한 ‘심연의 흑염룡’이 직접 자신의 의사를 타진해야 할 정도로 급박한 상황. 무슨 일이 있어도 그녀를 마계에 보내지 않으려는 ‘심연의 흑염룡’의 의지가 느껴졌다. “야, 쫄게 만들지 마. 너 또 괜히 그러는 거지?” ‘심연의 흑염룡’에게 속아 넘어갔던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흑염룡이 뭔 소리를 하는 건진 모르겠지만, 무려 <올림포스>의 한반도 침공까지 예견했던 김독자다. 그러니 어쩌면 이번 상황도 알고 있을 것이다. 설령 뭐가 온다 한들······. 그리고 희미한 스파크와 함께, 한수영의 손이 붓처럼 허공을 수놓았다. ―73번째 마계는 멸망할 것이다. * 가장 먼저 그것을 눈치챈 것은 파천검성이었다. 공단의 흉벽 꼭대기에서 몸을 뉘이고 있던 그녀는, 입에 물고 있던 곰방대를 툭 떨어트렸다. “······그 녀석 말이 맞았군.” 작은 중얼거림과 함께, 파천검성의 등 뒤에서 파천신검(破天神劍)이 눈부신 광휘를 내뿜으며 뽑혀 나왔다. 파천검성이라는 이름을 얻은 이후, 그녀가 이 검을 제대로 쥔 것은 열 번도 채 되지 않았다. 그녀를 무림의 재해라 불리게 만든 검. 손바닥에 감기는 검의 감촉을 느끼며, 파천검성은 문득 우스운 기분이 들었다. 재해(災害). 무엇을, 재해라 부를 수 있는가. 인간에게 있어 재해란 고작해야 국지적 규모의 자연 현상을 이를 따름이었다. 산사태나 해일, 지진 같은 것. 인간의 힘으로는 대항할 수조차 없는 거대한 현상. 하지만 초월좌들에게, 그것은 조작 가능한 물리 현상에 지나지 않았다. 인간의 규격을 한참이나 넘어선 존재. 칼질 한 번으로 산사태와 해일을 일으킬 수 있으며, 역으로 그것을 잠재울 수도 있는 자들. 그러니 파천검성과 같은 초월좌들에게, 재해란 말은 평범한 인간들의 기준치와는 완연히 다른 무엇이어야 했다. 어쩌면 파천검성은, 지금 그 대답을 마주하고 있었다. 츠츠츠츠츳! 작은 스파크가 튄다 싶더니, 어느새 키리오스가 곁에 와 있었다. 키리오스의 몸에는 벌써 [전인화]의 아우라가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중이었다. 파천검성도 천천히 마력을 끌어 올렸다. 두 초월좌는 아득한 허공의 끝을 함께 바라보았다. 키리오스가 물었다. “역시 그놈인가?” 아직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지만, 그곳에서 분명한 존재감을 가지고 다가오는 무엇. 파천검성이 무거운 목소리로 말을 받았다. “틀림없다. <제1 무림>을 집어삼키려 했던 그 녀석이다.” 새카맣게 물들어가는 대기권. 빛조차 삼켜버리는 우주의 건너편에서, 흐트러진 개연성을 집어 삼키며 뭔가가 다가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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