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화

181화 특성창을 볼 수 있다고? 지금껏 이해가지 않았던 몇 가지가 이해되기 시작했다. 그동안 내가 특성창을 볼 수 없었던 이유. 그것은 바로 [제4의 벽] 때문이었다. [제4의 벽]은 다른 존재들에게서 나를 지켜주기도 하지만, 동시에 나 자신에게서 나를 격리시키기도 하는 스킬이었던 것이다. [‘특성창’을 확인합니다.] [아직 시스템 구성이 불안정합니다. 일부 스킬명 및 스킬 레벨 표시가 제한됩니다.] 그리고 처음으로, 특성창이 떠올랐다. + <인물 정보> 이름 : 김독자 나이 : 28세 배후성(背後星) : 없음 수식언(修飾言) : 가장 못생긴 왕 (임시) 전용 특성 : 여덟 개의 목숨 (영웅), 시나리오의······. + 그러나 특성창이 온전히 뜨기도 전에, 갑자기 치지지직― 하는 소리와 함께 화면이 무너지며 긴급한 메시지들이 추가로 떠올랐다. [몇몇 성좌들이 당신의 정신 방벽에 접근합니다.] 순간 아차, 싶었다. 어쩌면 성좌들은, 지금껏 이 기회를 노리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내 정보가, 세계에 모습을 드러낼 날만을. [성운 <베다>의 성좌들이 당신에게 접근합니다.] [성운 <올림포스>의 성좌들이 당신에게 접근합니다.] [성운 <파피루스>의 성좌들이 당신에게 접근합니다.] 내 존재를, 자신들의 의지에 맞게 개량하려 했던 성좌들이 강제로 내 정신을 열어 젖히고 있었다. 그때. [전용 스킬, ‘제4의 벽’이 당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재활성화됩니다!] 츠츠츠츠츳! + 전용 스킬 : [전지적 독자 시점 Lv.?], [책갈피 Lv.?], [등장인물 일람 Lv.?], [제4의 벽 Lv.?], [■■■■ Lv.?], ■■■■■■■■······. . . 종합 평가 : ······■■당신은■■■■■■······? + 떠오르는 모든 정보들이 ‘■’안에 숨겨지고 있었다. 무수한 벽돌들이 차곡차곡 쌓이듯, 강렬한 스파크 속에서 정체를 숨기는 정보들. 츠츠츠츠츳! [성좌, ‘인류의 시조’가 신음을 토합니다.] [성좌, ‘자신의 눈을 찌른 자’가 눈을 감싸쥔 채 물러납니다.] [성좌, ‘전갈의 여신’이 꼬리를 보호하며 뒷걸음질을 칩니다.] . . [당신에게 접근한 일부 성좌들이 타격을 입고 물러납니다!] 츠츠츠츠츳! 믿음직하게 회오리치는 무수한 활자들. 맹렬하게 스파크를 튀기는 [제4의 벽]이, 성좌들로부터 나를 지키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 내게 반항하던 모습은 어디 갔냐는 듯, 녀석은 성좌들을 향해 흉흉한 기운을 발산하는 중이었다. [‘제4의 벽’이 <스타 스트림>을 향해 이를 드러냅니다.] 나는 그런 [제4의 벽]을 망연히 바라보았다. 마지막으로 들려온 것은 잘 아는 성좌의 메시지였다. [성좌, ‘은밀한 모략가’가 당신을 향해 빙긋 웃습니다.] 다른 성좌들과는 확연히 다른 메시지. ······설마, 그 짧은 사이 내 정보를 본 걸까? 설령 봤다 하더라도, 모두 확인하진 못했을 것이다. 특성창을 연 나조차도 모든 정보를 확인하진 못했으니까. 스파크가 조금 잠잠해지고, 벽은 다시 내게 시선을 돌렸다. [‘제4의 벽’이 당신에게 화를 냅니다.] 나는 ‘벽’을 마주보았다. 오랫동안, 나는 이 ‘벽’이 소설과 현실을 가르는 경계라 생각했다. 이 ‘벽’이 있기에 나는 새로운 세계에 적응할 수 있었고, 온갖 끔찍한 상황 앞에서도 비정상적인 판단력을 보일 수 있었다. 그러나 이 ‘벽’이 무엇이냐 물으면, 나는 여전히 확답할 수 없다. 다만 확실한 것은, 이 ‘벽’이 오랫동안 나를 지켜주었다는 것뿐이다. 몇 번이고 위기가 있었지만, 이 ‘벽’이 있었기에 그 위기를 넘겼다. 이 벽이 있었기에, 나는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나는 나를 향해 활자들을 부풀리는 ‘벽’을 향해 손을 가져다대었다. “미안해.” [‘제4의 벽’이 파르르 몸을 떱니다.] 손가락에 감겨드는 문자들의 감촉이 낯설었다. [제4의 벽]은, 이런 느낌이었던가. 벽에 쓰여진 문자들이 내 손 끝에 닥터피쉬처럼 들러 붙었다. 녀석은 나를 핥는 것 같기도 했고, 깨무는 것 같기도 했다. 명료히 나눌 수 없는 느낌이었기에, 오직 닿지 않는 비유만이 가능했다. [제4의 벽]은 비에 젖은 강아지 같았고, 버림 받은 아이 같았으며, 말 안 듣는 사춘기 소년 같았다. [제4의 벽]은······. [제4의 벽]은, 마치 나 같았다. 그리고 벽 위에 문장이 떠올랐다. 「김 독자 는 멍청 이이 다.」 한글을 막 배운 어린 아이가 시험삼아 적어 본 것 같은 문장. 그것은 나에 관한 서술도, 세상에 관한 서술도 아니었다. 그것은 [제4의 벽]의 말이었다. 나는 피식 웃으며 벽을 매만졌다. 「······$#^#$^#$%@#$······」 혼란에 빠진 것처럼 알 수 없는 문자들을 띄우던 [제4의 벽]은, 잠시 후 다시 정연한 문장을 떠올렸다. 「김독자는 생각했다. [제4의 벽]은, 역시 의지를 가지고 있는 존재였구나.」 ······또 시작이다. 「그럼 아까 괄호로 떠올랐던 말도 [제4의 벽]이 쓴 건가? 하지만 그렇다기엔 너무 정연한 말투였는데······ 그럼 그 말들을 쓴 건 누구지? 이것이 정말 ‘벽’이라면, 이 ‘벽’안에는 대체 뭐가 있는······.」 “남의 생각을 읽는 건 그만 둬.” [‘제4의 벽’이 새침하게 고개를 돌립니다.] [‘제4의 벽’이 다시는 자신을 강제로 끄지 말라고 말합니다.] 나는 그런 [제4의 벽]에 손을 댄 채, 말을 이었다. “알겠어. 대신, 부탁할 게 있어.” [‘제4의 벽’이 당신을 바라봅니다.] 나는 짧게 숨을 들이켠 뒤 말했다. “어머니를 돌려줘.” 내 말이 진심인지 아닌지를 가늠하듯 벽이 짧게 진동했다. 그리고 벽 위에 문장이 떠올랐다. 「김독자는 어머니를 증오했다.」 “맞아.” 「김독자는 그동안 어머니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알게 되었다. 어머니가 무엇을 겪었고, 어떤 삶을 살아왔으며, 뭘 숨겨왔는지 알게 되었다. 하지만 알게 되었다고 해서, 그 모든 것을 이해했다는 뜻은 아니었다.」 “······그것도 맞아.” 「때문에, 김독자는 여전히 어머니를 미워한다. 인간의 감정이란 그런 것이니까. 누군가가 나못지 않게 깊은 상처를 감추고 있었다는 걸 안다고 해서, 갑자기 내 상처가 모두 아물어버리는 그런 마법은 존재하지 않으니까.」 “대단한 통찰력이네. 동의해.” 「그렇기에 김독자는 자신을 이해할 수 없었다. 어째서, 자신은 어머니를 구하려고 하는 것일까.」 “설명할 수 없어.” 「······.」 “모든 걸 문장으로 옮길 수는 없으니까.” 나는 가만히 벽을 바라보며, 다시 한 번 말했다. “이젠 나한테 기력이 얼마 안 남았어. 그러니까, 좀 도와주라. 부탁할게.” 한참이나 침묵하던 [제4의 벽]은, 그저 다음과 같은 문장을 띄울 뿐이었다. 「김독자는······.」 한 번 [제4의 벽]으로 들어갔던 존재가 다시 나올 수 있는가? 가능한 일인지 어떤지는 모른다. 그래도, 시도는 해봐야 했다. 꿀럭. 그리고 벽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벽의 입에서 뭔가가 꿀럭거리며 토해져 나왔다. 그것은 무수한 활자들이었다. 활자들은 모여 단어가 되었고, 단어들은 모여서 문장이 되었다. 문장들은 모여 문단이, 다시 문단은 모여서 하나의 이야기가 되었다. 이야기는, 곧 사람이 되었다. 나는 활자들의 토사물 속에 누워 있는 어머니를 안아 들었다. 그리고 [제4의 벽]을 향해 말했다. “고마워.” [제4의 벽]은, 몸을 부르르 떨더니 이내 흩어지기 시작했다. 「졸, 리, 다.」 그리고 조금씩, 주변의 공간이 깨어져 나갔다. [성좌, ‘은밀한 모략가’가 당신을 염탐하던 ‘위대한 옛 존재’들을 물립니다.] 외우주의 어둠이 걷혀 나가고 있었다. 시공간이 부서지며 주변의 정경이 [암흑성] 2층으로 변해갔다. 이어서, 밀려 있던 메시지들이 쏟아졌다. [당신의 암흑성 랭킹이 변경됩니다.] [현재 당신의 암흑성 랭킹은 2위입니다.] . . [메인 시나리오의 숨겨진 목표를 충족하였습니다.] [당신은 ‘암흑성’의 마지막 시나리오에 도전할 자격을 얻었습니다.] * 벌판의 전투가 끝난 뒤 이틀이 지났다. 난데없이 강림한 신격 앞에 모든 필멸자는 전의를 상실했다. 방랑자들의 세력도, <낙원>의 전력들도. 어떤 의미에서, 그들에게 평화를 가져다 준 것은 무엇보다도 강력한 절망이었다. 방랑자들의 지휘부와 <낙원>의 지휘부는 전사자들을 수습하고 사태를 정리해 나갔다. 불필요한 소요가 사라지며 [암흑성]의 2층은 조금씩 안정세를 찾아가고 있었다. 다음 층으로 올라갈 랭커들이 하나 둘씩 정해졌고, 사람들은 그들에게 [암흑성]의 미래를 맡기는 것에 동의했다. 그리고 지금. 그 랭커들 중 대부분은, 작은 관 앞에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이 아저씬 맨날 죽는 게 일이네.” 김독자는 ‘이계의 신격’을 물리치고 돌아오자마자 숨이 끊어졌다. 그만큼 강대한 존재와 맞서 싸웠으니, 당연한 일이라고 일행들은 생각했다. 정희원이 말했다. “내일이면 다시 살아나겠죠? 지난 번에도 사흘 걸렸으니까.” 이제 김독자의 죽음에 꽤 적응해버린 일행들은 그다지 충격 받은 기색은 아니었다. 유상아가 슬며시 입술을 깨물었다. “······근데 꼭 관에 넣어야 했던 건가요?” “그렇다고 죽은 사람을 침대에 가만히 눕혀 두기도 뭐하잖아요······.” 정희원이 변명하듯 말했다. 일행들은 각자 다른 의미를 가지고 김독자의 관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현성은 존경이 담긴 눈빛이었고, 신유승은 죄책감 어린 눈빛이었으며, 유상아는 착잡한 눈빛이었다. 그리고······. “사부는 웬일이래요? 또 히든 피스 찾으러 간 줄 알았는데······.” 이지혜의 말에, 관을 바라보던 사람들이 동시에 한 곳을 쳐다보았다. 쏠린 시선에 유중혁이 인상을 찌푸리며 답했다. “이제 [암흑성]에 남은 히든 피스는 보잘 것 없는 것들뿐이다.” “그렇다고 여기 올 이유는······.” “다음 층으로 넘어가려면 김독자가 꼭 필요해.” “흐음······ 요즘 둘이 너무 친한 거 아니예요? 이틀 전에도 보니까······.” 유중혁의 인상이 한층 험악해지자, 질겁한 이지혜가 입을 다물었다. 정희원이 이지혜를 툭툭 두드리며 핀잔을 주었다. “중혁 씨 그만 놀려. 기껏 둘이 친해져서 보기 좋은데 방해하지 마.” “······에이, 그래도.” “그리고 여기 온 이유라면, 묻지 않아도 알잖아. 누구라도 같을 테니까.” 그 말에, 일행들의 표정이 묘하게 숙연해졌다. 그들은 김독자의 관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정희원이 다시 입을 열었다. “다시 살아난다고 해서, 죽는 게 무섭지 않은 사람은 없을 거야.” 목숨이 여러 개 있다고 해서, 누구나 남을 위해 그 목숨을 쓰는 것은 아니다. 관의 맨 앞에서 표면을 어루만지던 신유승이 말했다. “독자 아저씨가 없었다면 난 지금쯤 죽었을 거예요.” 누군들 안 그럴까. 이현성도, 정희원도, 이길영도, 이지혜도. 모두 한 번씩, 독자에게 구원 받은 적이 있었다. 이지혜가 한숨처럼 말했다. “내가 진짜 오글거려서 이 말은 안 하려고 했는데······ 내 목숨이 두 개였으면, 하나 쯤은 아저씨한테 줬을지도 몰라.” “누난 호감도 점수가 6점밖에 안돼서 형이 안 받을 걸요.” “요 꼬맹이가 진짜······ 어차피 가터벨트 입으면 다 똑같거든?” 이지혜와 이길영이 투닥거리는 것을 보며, 일행들이 미소지었다. 이틀 전까지 혈풍이 부는 전장에서 울고, 좌절했던 사람들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광경. 유일하게 그 풍경 속에 어울리지 못하는 유중혁은, 조금 떨어진 곳에서 그들을 보고 있었다. 김독자가 나타나며, 그의 계획은 많이 바뀌었다. 쉽게 갈 수 있었던 시나리오가 어려워졌고, 단순했던 이야기는 복잡해졌다. 그리고, 죽어야 했던 사람들은 살아났다. 유중혁은 자신의 손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어쩌면 그 ‘죽어야 했던 사람’ 중엔, 유중혁 자신도 포함되었을지 모른다. 유중혁은 그 사실이 몹시 이상하게 생각되었다. 이 풍경이, 회귀자도 아닌 한 사람에 의해 만들어질 수 있다는 것. 이번 회차가 그가 지금껏 살아왔던 어떤 회차보다 더 나은 회차가 될지도 모른다는 것. 그것이, 그의 심경을 몹시 복잡하게 만들었다. “참, 근데 그 ‘운명’이라는 거······ 이제 끝난 거겠지? 독자 아저씨 죽었잖아.” 이지혜의 물음에, 몇몇 일행들이 대답했다. “아. 맞아. 그러고 보니 그러네.” “사랑하는 사람한테 죽을 운명이라고 했으니까, 운명은 성립된 거 아닐까요? 따지고 보면 어머니때문에 죽었으니······.” “그러게. 왜 어머닐 생각 못 했지?” 떠들썩한 목소리들. 멀리서 유상아가 복잡한 얼굴로 유중혁을 바라보고 있었다. 유중혁 또한, 그 시선을 마주 받으며 생각했다. ‘[운명]은 끝나지 않았다.’ 이번에는 척준경이라는 변수가 있었기에 어떻게든 되었다고 쳐도, 성운들은 그렇게 만만하지 않았다. 성운들이 김독자의 부활 특성을 몰랐을 리 없으니, [운명]은 이런 식으로는 절대 끝나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이번 사태로 성운들은 김독자에게 크게 분노했을 테니, 이제 어떤 식으로는 [운명]의 악의적 실현에 관여할 가능성이 높았다. 무엇보다 곧바로 찾아올 다음 시나리오부터가 큰 고비였다. 그러니, 유중혁도 이제는 선택해야 했다. 그는 고요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마치, 그곳에 있는 무언가를 찾아 헤매는 듯이. 그리고 잠시 후, 허공에서 시선이 돌아왔다. [성좌, ‘???’이 자신의 화신을 바라봅니다.] 성좌 ‘???’. 벌써 3회차의 인생을 살면서도, 유중혁은 아직 자신의 배후성이 누구인지조차 알지 못했다. 이 모든 회귀의 원흉이자, 그에게 끔찍한 비극을 안겨준 존재. 속으로 이를 간 유중혁이, 짧게 숨을 들이켜며 입을 열었다. ‘배후성. 물어볼 것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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