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화
127화
Episode 26. 신과 마주 보는 자들
왕성 베로니카에 도착한 후, 우리 일행은 하루를 내리 쉬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이 되자마자, 나는 제일 먼저 일어나 일행들에게 계획을 통보한 후 왕성의 입구에 섰다. 이현성이 물었다.
“설마 혼자서 출발하실 생각입니까?”
“혼자는 아니고, 저 둘과 같이 갈 겁니다.”
내가 한수영과 아스카 렌을 가리키자, 이지혜가 툴툴거렸다.
“아저씨가 그렇게 가버리면 우린 어쩌라고?”
“현성 씨랑 너는 베로니카 수성(守城)을 맡아. 시나리오 갱신된 건 확인했지?”
“······시나리오 기간이 끝날 때까지 ‘왕성 베로니카’를 지켜라?”
“그래. 그게 네 임무야.”
“하지만······.”
“하라면 해.”
“······알았어.”
나는 곧장 이현성을 돌아보았다.
“공필두가 있긴 하지만, [무장요새]만으로는 몰려오는 재앙들을 막아내기 힘들 겁니다. 그냥 떠맡기고 가는 거 같아서 죄송합니다만······.”
“사주경계는 제 특기니까 걱정하지 마십시오.”
든든한 호언에 안심이 되긴 하지만, 쉽지 않을 거라는 건 알고 있었다. 얼핏 쉬운 임무를 준 것처럼 보여도 사실 이번 시나리오는 나랑 같이 가는 것보다 남는 쪽이 훨씬 힘들기 때문이다.
“만약 1차 투입자나 ‘뱀’이 나타나면 절대 정면 승부를 벌이지 마세요. 베로니카를 버리더라도 달아나셔야 합니다. 약속하실 수 있습니까?”
“약속하겠습니다.”
이들의 임무는 내가 돌아올 때까지 이 성채를 지키는 것.
나는 이길영과 신유승에게도 신신당부를 했다.
“최대한 많은 곤충과 괴수를 확보해. 너희 임무는 시간을 끄는 거야.”
이길영과 신유승이 고개를 끄덕였다.
“북쪽 숲으로 나가면 이 세계 특유의 괴수종들이 많아. 시간 날 때마다 가서 괴수들을 길들여 놓도록 해.”
“네, 형.”
“알겠어요, 아저씨.”
많은 숫자의 괴수들은 재앙과의 전력 격차를 메우는데 약간이나마 도움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아이들의 숙련치도 상당히 증가하겠지.
나는 그 길로 왕성 베로니카를 떠났다. 뒤쪽에서 우릴 배웅하는 일행들을 보던 한수영이 말했다.
“그래서 어디로 갈 건데?”
“동쪽 기암괴석 지대.”
그 말에 깜짝 놀란 아스카 렌이 말했다.
“그쪽 지대는 이미 일본이 점령했어요.”
“알고 있습니다.”
나는 아스카 렌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은은한 컬이 들어간 단발. 어느 만화가가 공들여 그린 것처럼 선이 굵고 또렷한 얼굴. 단순히 미인이라기보다는 어떤 무사의 절개(節槪) 같은 것이 느껴지는 얼굴이다.
“그래서 당신을 데려온 겁니다.”
“저를 믿으세요?”
“안 믿습니다. 그냥 목숨을 구해준 값을 받고 싶을 뿐이죠.”
“······그렇군요.”
차라리 이렇게 말하는 편이, 저쪽의 호의를 사기 쉬울 것이다. 실제로 아스카 렌은 뭔가를 고민하는 표정이었다. 아마 저 고민이 끝났을 때, 그녀는 본격적으로 내게 정보를 털어놓겠지.
우리는 한동안 평원 인근을 샅샅이 살피며 기암괴석 지대로 이동했다.
예상 소요 일수는 이틀이지만, 빠듯하게 이동한다면 하루 안에도 도착할 수 있는 거리였다.
한수영이 물었다.
“근데 계획이 뭐야?”
“일본은 우리랑 다르게 [절대 왕좌]를 가지고 있어. 즉, 1차 투입자들 중에는 저들 모두를 통솔하는 ‘절대왕’이 있다는 얘기지.”
내 말에 뭔가를 곰곰이 생각하던 한수영이 말했다.
“······설마 왕을 잡겠다는 거야?”
역시 한수영은 이해가 빠르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뭐······ 그러면 해결되긴 하겠네. [절대 왕좌]는 소유주가 죽으면 산하 그룹 전체에게 막대한 영향을 미치니까······.”
“물론 왕을 잡는다고 걔들이 다 죽지는 않겠지만, 시나리오가 끝날 때까지 아무것도 못 하게 될 거야.”
“흐음, 시작부터 보스 잡고 끝내겠다 이거지? 포부는 마음에 드네.”
아스카 렌이 끼어든 것은 그때였다.
“······지금 일본왕이 누구인진 알고 말씀하시는 건가요?”
“여덟 머리의 군주 아닙니까?”
여덟머리의 군주. 약칭은 ‘뱀’.
“어, 어떻게 그걸······?”
깜짝 놀란 아스카 렌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럴 법도 하다. 1차 투입자 중 하나인 그녀는 ‘여덟 머리의 군주’가 어떤 존재인지 알고 있을 테니까.
참고로 ‘여덟 머리의 군주’는 일본왕의 별명이 아니라, 그 배후성의 수식언이다. 왜 별명이 없는가 하면, 별명의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어디서 수식언을 들으신 모양인데, 그자는 결코 당신 생각처럼 쉽지 않을······.”
“진명도 알고 있습니다. 야마타노 오로치 아닙니까.”
내 말에, 일순 하늘이 어두워지며 쿠구구, 하는 소리가 들렸다.
어쩌면, 방금 녀석이 내 말을 들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성좌의 진명에는 그만큼 강력한 힘이 실려 있으니까.
“······오로치? 그거 일본 신화에 나오는 괴물 이름 아냐?”
“맞아. 지금 일본왕이 그놈이야.”
“근데 왜 배후성으로 지칭해? 별명은 없어?”
“의미가 없어. 그놈 화신은 지금 제정신이 아냐. 여섯 개의 시나리오를 거치는 동안 ‘여덟 머리의 군주’랑 말도 안 되는 계약을 해서 영혼을 빼앗겼거든.”
내 말을 들은 아스카 렌은 이제 입을 딱 벌리고 있었다. 타국의 화신이 자국 사정에 관해 자기보다 잘 알고 있으니 놀랄 만도 하겠지.
“그럼 기암괴석 지대에 놈이 있겠네.”
“그래. 근데 지금 당장은 그놈 만나도 못 잡아. 잡으려면 준비가 필요해. 기암괴석 지대로 가는 건 따로 만날 사람이 있어서야.”
“만날 사람? 뭐······ 유중혁?”
“유중혁보다 더 센 사람.”
“······그놈보다 센 사람이 있어?”
“있어.”
“누군데?”
“피스 랜드 출신의 강자.”
내 말에 한수영이 헛웃음을 지었다.
“피스 랜드 출신? 지금 장난쳐?”
그렇게 말하는 것도 이해는 갔다.
이 정보는 100회 이전에는 나오지 않는다.
“너 여기 애들이 얼마나 약한지 몰라?”
대답할 틈도 주지 않고, 한수영이 쏘아붙였다.
뭐가 그렇게 화가 났는지, 한수영은 유독 흥분한 모습이었다.
“여긴 소드 마스터는커녕 삼류 검객도 없어! 게다가 애들이 쓸 수 있는 마법이라곤 고작해야 부뚜막에 불 피우는 것뿐이라고.”
나도 알고 있다.
“무슨 1세대 판타지 소설도 아니고······. 누가 악의적으로 약한 놈들만 모아 놓은 것 같아. 아니, 난 도통 이해가 안 돼. 그 자극 좋아하는 도깨비 놈들이 왜 이런 세계를 무대로 만든 거지? 대체 코인 벌 생각이 있는 거야?”
듣고 있자니, 한수영이 왜 이렇게 흥분했는지 이해가 간다.
이 녀석, 표절 작가긴 해도 잘 나가는 판타지 작가였지.
“진정해. 이 세계관은 도깨비가 만든 거 아니니까.”
“뭐?”
나는 곁을 돌아보았다. 그곳에 얼굴이 새빨개진 채 고개를 숙인 여자가 있었다. 작가 앞에서 작가 욕하는 기분도 아주 새롭구만.
한참을 머뭇거리던 아스카 렌이 고개를 꾸벅 숙이며 말했다.
“죄송해요.”
그제야 한수영도 뭔가를 눈치챈 듯했다.
“잠깐, 설마······?”
아스카 렌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피스 랜드]는 제가 만든 세계관이에요.”
*
아마도, 아스카 렌은 그 말을 꺼내야 하지 않았어야 했는지도 모른다.
처음에는 “그게 진짜냐?”는 둥 경악을 금치 못하던 한수영은, 5분 후에는 “하긴, 내 소설도 현실이 됐는데 그럴 수도 있지”라고 중얼거리더니, 다시 5분 후에는 아스카 렌에게 아예 폭격을 퍼붓기 시작했다.
“왜 그랬어?”
“······.”
“응? 왜 그랬냐고. 대답 좀 해봐 작가 양반. 왜 세계를 이따위로 만들었어?”
한참이나 갈굼을 당하던 렌이 결국 반쯤 울먹거리며 말했다.
“그게······ 일본에는 죄다 이세계물 뿐이거든요. 그래서······.”
“아하, 주류인 이세계물에 저항하려고 이딴 걸 만드셨다?”
“그, 그래도 작가가 되어서 그런 양산형 이야기를 찍어낼 수는 없잖아요.”
“양산혀엉?”
아무래도, 하지 말아야 할 얘길 한 것 같다.
“네 작품은 양산형만도 못해 쪼다야.”
“······네?”
그런 아스카 렌을 한심하다는 듯 노려보던 한수영이 내게 말했다.
“야, 김독자. 그거 아냐? 내가 베로니카에서 며칠 있으면서 알게 된 사실이 있는데, 이 세계에서는 백작이 공작한테 반말을 해. 게다가 기사라는 놈들은 하나같이 기생오라비처럼 생겨서 흐늘흐늘거릴 줄이나 알지······.”
“자, 잠깐만요!”
“닥쳐. 너 때문에 지금 우리가 이 고생을 하고 있는데.”
“······제가 만든 건 맞지만 제가 당신을 여기로 부른 건 아니거든요?”
“이년 봐라? 네가 도깨비들한테 사주해서 네 세계 현실로 만들어 달라 한 거잖아! 시발 만화도 망했겠다! 내 만화 욕한 새끼들 전부 내 세계관에 처넣어서 다 죽여버리자! 뭐 그런 생각으로 기도했더니 갑자기 짠 하고 ‘네 소원을 들어주겠노라’ 메시지 같은 걸 받았겠지. 맞지?”
그렇게 창의적인 추리는 또 처음 들어보는군.
과연 작가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닌 건가.
“아, 아니에요! 애초에 그런 게 가능할 리가 없잖아요!”
“그럼 뭔데?”
이야기를 듣다 보니 나도 궁금해졌다.
‘멸살법’에도 어째서 아스카 렌의 [피스 랜드]가 시나리오로 채택되었는지에 관한 이야기는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이 정황을 알게 된다면 ‘멸살법’의 작가에 관한 힌트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그건······.”
나와 한수영이 동시에 칼을 뽑아 든 것은 그때였다.
히끅 놀란 아스카 렌이 한 발짝을 물러섰다.
내가 말했다.
“진짜 궁금한데, 지금은 듣기 곤란할 것 같네요.”
“네?”
“뛰어요!”
그리고 간발의 차이로, 우리가 서 있던 곳에 날카로운 수리검 몇 개가 박혔다.
그제야 아스카 렌도 창백한 얼굴로 우리를 필사적으로 뒤쫓았다.
한수영이 말했다.
“씨발, 언제 쫓아온 거지?”
“은신에 능한 놈들이야.”
“몇이나 돼?”
“넷.”
저 정도 실력을 가졌는데도 우릴 얕보지 않고 암살하려 한 놈들이다.
전면전으로는 승산이 없다.
아스카 렌이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아무래도 풍영대(風影隊) 같아요. ‘여덟 머리의 군주’의 수하들이에요.”
“역시 열도 애들은 이름도 폼나게 짓네.”
벌써 녀석들이 쫓아올 만한 타이밍은 아니었는데, 아무래도 아까 오로치의 진명을 언급한 게 실책이었던 모양이다.
곧 기암괴석 지대로 들어서자, 운신의 폭은 좀 나아졌다.
아스카 렌의 인도가 빛을 발했기 때문이다.
역시, 세계관을 만든 작가는 다르구만.
그럼에도 거리는 조금씩 좁혀졌고, 어느새 풍영대 놈들은 우리 뒤쪽까지 바짝 따라붙고 있었다.
한수영이 결심한 듯 말했다.
“아, 몰라. 김독자, 먼저 가. 내가 시간 벌 테니까.”
“괜찮겠냐?”
“나 알잖아? 죽은 척 달인인 거.”
“그럼 믿는다.”
나는 아스카 렌을 붙잡고 달렸다.
“렌 씨, 이제 정말 시간이 없습니다. 빨리 찾아야 합니다.”
“무,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어요.”
“귀환자 키리오스.”
“네?”
나는 날아오는 수리검을 비껴내며 말했다.
아무래도 한수영이 몇 명을 놓친 모양이었다.
“키리오스가 있는 곳을 알려주십시오.”
“······저는 그게 누군지 모르는데요?”
아마 이렇게 나올 거라고 예상은 했다.
‘멸살법’에서도 키리오스가 이 시기에 이곳에 있다는 정보만 언급될 뿐이지, 직접 만나는 장면은 나온 적이 없으니까.
“정말 몰라요! 전 그런 인물 만든 적 없다고요!”
“아뇨, 당신은 알고 있습니다. 이 [피스 랜드]의 유일한 ‘강자’를.”
“제 만화에는 그런 사람 안 나와요! 게다가 제 만화에 나오는 인물들은 죄다 약하다고요!”
쐐애액!
결국 수리검이 우리를 앞질러 꽂혔다.
나는 방향을 거세게 틀며 멈춰섰다.
이렇게까진 안 하려고 했는데, 결국 상처를 건드려야 한다.
“당신의 [피스 랜드]는 11화에 조기 종결됐고, 그 여파로 단행본도 못 나왔죠.”
“어, 어떻게 그걸······?”
“정통 판타지를 그리고 싶었던 당신의 마음은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말입니다. 당신 만화, 진짜 ‘정통 판타지’는 아니지 않습니까?”
고오오오.
연기 속에서 두 명의 풍영대가 나타났다.
평소의 나였다면 상대하고도 남을 놈들이었지만, 지금은 한 녀석을 막는 것도 버거웠다.
꽈아아앙!
스치듯 카타나를 비껴냈을 뿐인데, 손목이 부러질 듯 시큰거렸다.
나는 침착하게 백청강기를 발동하며 외쳤다.
“연재 중 딱 한 번이지만, 당신은 독자 반응을 엿보다가 홧김에 어떤 인물을 그려 넣은 적이 있습니다.”
“······무, 무슨 말씀을.”
“그 인물은 [피스 랜드]에 걸맞지 않게 강한 인물이었죠. 당신은 대중에 영합해 그런 인물을 넣었다는 사실에 죄악감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그 죄악감이, 당신의 [피스 랜드]를 망쳤죠.”
“아니에요! 난 그런 적 없어!”
“끝까지 책임을 지세요. 단 한 명의 독자라도 이 세계를 지켜봤다면 말입니다.”
“아, 아아······.”
점점 칼날을 피하는 것이 힘겨워졌다.
아스카 렌은 패닉에 빠졌는지 완전히 얼어있었다.
두 자루의 카타나가 내 상하반신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빌어먹을, 틀렸나?
“······미안해요, 정말 미안해요.”
그리고 목소리가 들려왔다.
“당신 말이, 맞아요. 나는, 분명······.”
다음 순간, 주변의 공기가 뒤바뀌었다.
일순 등골이 서늘해지며 사지가 빳빳이 굳는 기분이었다.
이어서 들려온 목소리.
[누구냐?]
차마 뒤를 돌아보진 못했지만, 성좌에 버금가는 존재가 그곳에 있다는 것은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제4의 벽]이 이토록 요동칠 리 없으니까.
앞을 보자, 나를 향해 칼날을 꽂던 일본인들도 석상처럼 굳어 있었다. 말조차 뱉지 못하는 그들을 향해, 하늘에서 백청(白淸)의 뇌전이 꽂혔다.
스아아아.
그 강력한 재앙들이, 단 두 발의 뇌전에 먼지가 되어 사라졌다.
뇌전의 구름이 사라진 곳에, 작은 인형이 떠 있었다.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왜냐하면 허공에 떠 있는 저 고고한 강자는, 분명한 소인(小人)이었기 때문이다.
······제대로 찾았군.
[다시 묻겠다. 너희는 누구냐?]
“처음 뵙겠습니다, 키리오스.”
[피스 랜드] 출신 키리오스 로드그라임.
그는 바로 멸살법 최강의 귀환자 중 하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