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화
118화
역시, 이견의 여지 따윈 없다.
저놈에게 시나리오 인원 선별은 토론의 대상이 아니라 발표의 대상인 것이다.
“불만이 있다면 지금 듣도록 하지.”
저렇게 무시무시한 살기를 줄기차게 뿜어대는데 불만이 있을 턱이 있겠나.
유중혁의 압도적인 무력을 아는 왕들은 감히 반항할 생각조차 못하고 몸을 떨었다.
아, 한 사람만 빼고.
“비, 비켜! 발 치우라고!”
불행하게도, 자칭 여의도의 대통령께서는 패왕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지 못하신 모양이다. 정치인이란 사람이 저렇게 소문에 둔감해서야.
“네놈은 뭔데 갑자기 나타나서······!”
꽈직!
“끄아아아악!”
손이 으깨진 유현호가 비명을 질렀다.
“내 손! 내 손!”
꽈지직!
“끄아아아악! 경호원! 경호원 어디 있나!”
사지가 으스러진 유현호가 꿈틀거리며 도움을 요청했지만, 이곳 어디에도 그를 도울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유중혁의 발이 녀석의 등을 꾸욱 눌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유현호는 끄으윽, 하는 숨소리를 뱉으며 혼절했다.
사방이 고요해지자, 유중혁이 입을 열었다.
“없나 보군. 그럼 명단을 발표하겠다.”
왕들의 얼굴이 긴장으로 물들었다.
역시, 유중혁이 대단하긴 하다.
이렇게 쉽게 권력의 추를 빼앗아 가다니······.
왕들은 순식간에 ‘뽑는’ 입장에서 ‘뽑히는’ 입장으로 전락해버렸다.
나는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육포 하나를 뜯으며 유중혁의 말을 기다렸다.
곁에 있던 미희왕 민지원이 어이없다는 듯 나를 바라보았다.
「어떻게 그렇게 태연해요?」
미안하지만, 나는 그쪽들이랑 처지가 다른 상황이라 이거지.
왜냐하면 이 몸은 무려 저 유중혁이 ‘동료’로 인정한 몸이니까.
맹세는 끝났다느니 어쩌니 하면서 나를 위협하긴 해도, 저놈은 결국 내 필요성을 인정한 셈이다.
유중혁이 입을 열었다.
“첫 번째는 물론 나다.”
······뭐, 당연한 일이겠지.
지가 만든 명단에 자기가 없을 턱이 있나.
유중혁의 등 뒤로, 어느새 녀석의 일행이 도착해 있었다.
이지혜와 이설화.
걱정스러운 눈으로 안을 들여다보는 이현성과 정희원도 보였다. 특히 정희원은 당장이라도 뛰어올 기세라, 나는 눈짓으로 그녀를 말렸다.
유중혁의 말이 이어졌다.
“두 번째는 이지혜.”
당연히 두 번째는 나일 줄 알았는데, 의외로군.
하긴, 나는 본래 동료 명단에 없던 인물이니까 날 먼저 기용하면 다른 동료들이 섭섭해할 수도 있겠지.
저 녀석이 냉정해보여도 은근히 자기 사람은 챙기는 면이 있다.
그 마음 이해한다 인마.
기쁨을 숨기지 못한 이지혜가 나를 보며 입꼬리를 씩 올리고 있었다.
······조금 짜증나는데.
“세 번째는 이설화.”
이설화가 고개를 끄덕이며 앞으로 나왔다.
한 사람의 이름이 이어질 때마다, 왕들의 얼굴이 어두워지고 있었다.
다들 예감하고 있는 것이다.
저 명단이 바로 확정 명단이 될 것이란 사실을.
「남은 인원은 7명이야. 아직 우리에게도 기회는 있어.」
「패왕의 일행은 저 셋뿐이니까, 남은 사람들은 모두 자기 일행이 아닌 다른 사람을 뽑아야 해.」
「그나마 남은 사람들 중엔 우리가 제일 강하니까······.」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훤히 보이는 얼굴들이다.
나? 물론 나는 걱정하지 않는다.
나야 당연히 명단에 있을 테니까.
아마 다음 차례야말로······.
“네 번째는 이현성.”
······뭐?
뒤쪽에 있던 이현성은 갑자기 자신의 이름이 호명되자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저, 저 말씀이십니까······?”
유중혁은 그 말을 무시하고 그 옆의 사람을 바라보았다.
“다섯 번째는 정희원.”
“······나요?”
화들짝 놀란 정희원이 눈을 크게 떴다.
정희원을 뽑은 것은 나로서도 의외였다.
이 자식이 지금 내 일행들까지 막 뽑고 있잖아?
“여섯 번째는 이길영.”
“······어? 네?”
이어서 유중혁은 이길영의 옆에 있던 신유승을 바라보았다.
신유승은 순간 두려운 눈으로 이길영의 뒤에 숨었다.
당황한 이길영은 잠깐 안절부절못하더니 이내 뭔가를 결심한 듯 신유승의 앞을 막아섰다. 유중혁은 알 수 없는 눈길로 그런 두 아이를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이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마침내 유중혁의 눈길이 내게 꽂혔다.
그래, 드디어 내 차례로군.
일부러 마지막에 배치해주셨다 이거지?
과연 주인공, 연출을 아는 놈이다.
“······나머지는, 알아서 결정해라.”
순간 육포가 통째로 넘어가는 바람에 나는 헛기침을 했다.
유중혁은 마지막으로 천막 안을 쓱 둘러 보고, 마지막으로 한심하다는 듯 나를 보더니 더 이상 볼일이 없다는 듯 등을 돌려 나갔다.
뭐야, 그게 다야?
진짜로?
······그럼 나는?
왜 그런 눈빛으로 보는 건데?
뒤늦게 쫓아 나갔을 때, 유중혁은 벌써 저만치 사라진 후였다.
얼마나 그렇게 있었을까.
멀거니 서 있는 나를 향해 정희원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둘이 친한 사이 아니었어요?”
나도 그런 줄 알았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흐뭇하게 웃습니다.]
이지혜도 이상하다는 듯 한마디를 덧붙였다.
“아저씨, 새벽에 우리 사부랑 만난 거 아니었어? 난 아저씨 당연히 명단에 있을 줄 알았는데······.”
“뭔 소리야?”
“새벽에 사부가 아저씨 만나러 간다고 그랬는데?”
“새벽 언제?”
“아마 한두 시쯤? 혹시 자고 있었어?”
나는 곰곰이 시간을 헤아려 보았다.
새벽 한 시에서 두 시 사이.
그때면 명계로 가기 직전이었던 것 같은데.
“그때 나 깨어있었는데, 유중혁은 안 왔어.”
“이상하네, 사부 분명히 갔다 왔는데? 그리고 갔다 와서 약간 화난 거 같았어.”
“화나?”
“사부가 화날 때 짓는 표정 있잖아. 왜, 사람 약간 경멸하는 듯한······.”
나는 그때의 기억을 곰곰이 반추해 보았다.
명계로 가기 직전에 내가 뭘 하고 있었더라?
아, 그래. 기억난다.
그때 나는 유상아랑 술을 마시고 있었다. 디오니소스가 술을 마구 쏟으며 분위기를 이상하게 만들었고, 그리고······ 어······ 음.
[성좌, ‘술과 황홀경의 신’이 장난스러운 표정을 짓습니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흐뭇하게 웃습니다.]
[500코인을 후원받았습니다.]
나는 조금 복잡한 기분으로 그때 있었던 일을 일행들에게 설명했다.
그러자, 일행들은 깜짝 놀란 얼굴이었다.
정희원이 눈을 가늘게 뜬 채 나를 다그쳤다.
“······유상아 씨랑 키스했다고요?”
“아니 그게 아니라······ 제 말을 뭘로 들으신 겁니까?”
“진짜 디오니소스 때문이에요? 술 취한 척 한 게 아니라?”
“디오니소스 때문이고,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정희원이 의심스럽다는 듯한 눈초리로 나를 보았다.
······이 얘기 괜히 꺼냈나?
“흐음······ 아마 유중혁 씨가 그걸 본 게 아닐까요? 그래서 분위기상 빠져줬다거나······.”
“유중혁은 그럴 놈이 아닌데요.”
“게다가 유중혁 씨가 독자 씨 키스 현장을 목격했다고 해도, 기분이 상할 이유는 없을 것 같은데······.”
“키스 안 했다니까요.”
내가 투덜대자, 이지혜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아! 나 알 것 같은데······.”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그것은 전우애라고 말합니다.]
정희원이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전우애?”
이지혜가 대폭소를 했다.
“언니 배후성이 그래요? 그게 전우애래요?”
“이게 뭔 뜻인데?”
“전우애라면, 제가 알 것 같습니다.”
뜻밖에도, 이현성이 손을 들며 말했다.
“생각해 보니 저도 독자 씨가 그러고 있으면 기분이 나쁠 것 같거든요.”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뜻밖의 발언에 콧김을 뿜습니다]
“······네? 현성 아저씨가 왜 기분이 나빠요?”
이지혜는 이제 거의 코피라도 쏟을 듯한 표정이었다.
이현성의 표정은 진지했다. 난 또 무슨 폭탄 발언이 나올까봐 긴장하며 이현성의 말을 들었다.
“우리는 매번 목숨을 걸고 시나리오에 임하고 있습니다. 유중혁 씨도 저도, 매일 아침마다 다음 시나리오를 위해 열심히 자신의 몸을 단련하고 있고요. 오직 전우를 지키겠다는 일념 하나로, 매일매일을 혹독한 훈련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에?”
기대했던 대답이 아닌 듯, 이지혜가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
정희원은 과연 그런 건가, 하는 얼굴로 이현성의 말을 경청하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내 등 뒤를 지킬 전우가 성욕에 눈이 멀어 희희낙락하고 있다면 기분이 나쁠 수밖에 없지요. 배신감도 들고. 제가 본 유중혁 씨는 굉장히 금욕적인 분인 데다, 군인이 아님에도 군인 정신이 굉장히 투철한 분이셨습니다. 그런 유중혁 씨라면, 군기가 문란해질 만한 일에 굉장히 민감하게 반응할 거라 생각합니다. 분명 전우애가 무너지는 기분이겠지요.”
“음······ 뭐 일리가 없는 말은 아니네요.”
정희원이 동의했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자신의 화신에게 실망합니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이현성의 잘못된 전우애에 분개합니다.]
의외로 이현성의 말을 듣다 보니 진짜로 그런 건가 싶었다.
문득 떠오르는 ‘멸살법’의 장면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텍본을 열어 유중혁의 3회차를 조금 살펴보았고, 실제로 증거가 될 만한 부분을 찾을 수 있었다.
「한심한 놈. 여자한테 한눈이나 팔고 있다니.」
「성욕이 강한 놈들은 동료 명단에서 배제한다. 자칫 일을 그르치기 쉬우니까.」
정말 그런 오해를 하고 있다면 억울한 일이었다.
진짜 키스라도 했으면 모를까, 난 뽀뽀도 안 했다고.
젠장, 이제와서 그건 다 오해라고 말할 수도 없고······.
“김독자 씨? 슬슬 나머지 인원을 뽑을까 싶은데요.”
어느새 다가온 민지원이 나를 향해 말을 걸었다.
돌아보니, 다른 왕들도 나를 보고 있었다.
“패왕이 여섯을 데려가기로 했으니, 남은 인원은 넷이군요.”
“이 중에서 넷을 뽑아야 한다는 건데······.”
여의도 세력은 이미 박살 났으니, 이제 남은 왕은 나까지 다섯.
눈치를 보던 미륵왕 차상경이 먼저 입을 열었다.
“험, 어차피 넷밖에 안 남았으니, 남은 인원은······.”
“대장전으로 결정하는 게 어떻습니까?”
의견을 제시한 것은 나였다.
“어차피 말로 계속 다퉈봐야 시간만 허비할 뿐입니다. 다들 자기 세력으로 할당 인원을 채우고 싶은 건 마찬가지일 테니, 대장전으로 승부를 봅시다. 이긴 왕이 나머지 할당을 모두 갖는 걸로 하죠.”
내 말에 왕들이 동시에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잠시 후, 대답이 나왔다.
“좋습니다.”
*
이번에도, 중립의 왕 전일도는 제일 먼저 기권을 선언했다.
“저는 남겠습니다. 누군가는 여기 남아서 사람들을 통솔해야 하기도 하고······.”
현명한 선택이다.
어차피 시나리오에서 선방하지 못할 거라면 이곳에서 권력 기반을 다지는 것도 나쁘지 않으니까. 그리고 아직 사람들은 모르고 있지만, 남겨진 화신들을 위한 시나리오도 분명 존재하고 있다.
강한 자극을 좋아하는 도깨비들이 화신들을 평화롭게 놓아둘 리 없지.
방랑자들의 왕도 간단히 손을 들어 기권의 의사를 표했다.
다른 왕들은 의외라는 듯한 눈치였지만, 경쟁자가 줄어 다행이라 생각하는 듯했다. 민지원이 나를 보며 자신만만한 투로 말했다.
“그때 같은 편법은 통하지 않을 거예요.”
아마 내가 비축한 코인을 써서 ‘왕좌 쟁탈전’에서 승리했다는 걸 알고 있는 모양이다.
······그래, 내가 어지간히 얕보였다 이거지?
우리는 각자 한 번씩 상대를 바꿔가며 싸웠다.
승부가 나기까지는 5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누가 이겼냐고?
물어볼 필요도 없는 얘기다.
“말도 안 돼······ 패왕만 괴물인 줄 알았는데. 대체 어떻게 이렇게 강해진 거죠?”
차상경은 피떡이 되어 너부러졌고, 민지원은 온몸에 멍이든 채 숨을 헐떡거리며 내게 말했다.
그러게, 처음부터 그냥 이렇게 했으면 편했을 것을.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10명은 초기 할당 인원일 뿐이니까, 다들 기다리고 계세요. 두 번째 할당도 금방 시작될 테니까요.”
“······하아, 별수 없죠. 네 자릴 얻으셨는데 누굴 데리고 가실 건가요?”
“하나는 저고, 다른 하나는 저 아입니다.”
내 눈짓에 신유승의 안색이 밝아졌다.
혼자 남겨질까 걱정했던 모양이다.
“그리고 나머지 둘은······ 생각해 둔 사람이 있습니다.”
“전 아닌 거죠?”
“네, 민지원 씨는 아닙니다.”
“칫······ 알겠어요.”
민지원이 먼지를 털고 일어났다. 침울해진 왕들이 하나둘씩 자리를 비웠다. 나는 일행들을 향해 말했다.
“먼저들 가세요. 저는 잠시 할 일이 있어서. 조금 있다가 역 앞에서 만나기로 하죠.”
고개를 끄덕인 일행들마저 천막 밖으로 사라지자, 사람들로 북적이던 내부는 순식간에 휑해졌다.
······.
조금 더 시간이 흐르자, 마침내 천막 안에는 나와 다른 한 사람만이 남게 되었다. 가면을 쓴 여인.
그리고 처음으로, 그녀의 입이 열렸다.
“친구들이 많이 생긴 모양이구나.”
마지막까지도 망설였다.
이 사람과 이야기를 나눠봐야 할지.
하지만, 다음 시나리오에 필요한 사람을 얻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이 사람에게 도움을 청해야만 한다.
나는 가볍게 숨을 몰아쉰 후, 방랑자들의 왕을 향해 입을 열었다.
“오랜만이에요, 엄마.”